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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파리어콜린스] 코카투!

원작 배경 + 오메가버스 + 새 수인au

18.02.23 추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 코카투 시리즈 전편 무료로 전환합니다. 유료구매 하신 분들에 대한 환불 절차는 블로그 내에 따로 공지하겠습니다. 온라인 판 유료 구매를 하신 분이 계시다면 아래 공지사항을 읽고 꼭 환불 신청해주세요. 번거롭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제목: 코카투! (본편)

발행 시기: 2017년 11월.

커플링: 파리어콜린스 (덩케르크)

성향: 2차 BL, 전연령가   

줄거리: 잘 사귀고 있던 애인 콜린스 소위가 사실 코카투 수인이었다! 코카투 수인을 애인으로 둔 파리어 대위의 고군분투기.

키워드: 코카투 콜린스/근데 새로 안 변함/파랑꾼, 파불출/달콤한 연애물로 시작하여 잠시 진지해졌다가 다시 상승하는 해피엔딩. (U자 곡선 분위기 전개)



* 19금 번외편 <산란기>를 새로 업데이트 했습니다. 아래 링크에서 열람 가능합니다 :) 




 

* 여러 사정으로 인해 실물 책의 향후 재판 계획은 없습니다. 따라서 예정보다 일찍 온라인 유료 발행을 시작합니다. 유료 발행분의 가격은 이전 통판 때 안내드린 대로 실물 책의 통판 가격과 동일합니다. (단, 책과 다르게 전연령가 본편과 19금 외전으로 나눠서 판매합니다.) 

* 12월의 덩케르크 재상영 관람 이후에 개인적으로 캐릭터 해석이 다소 바뀔 것 같아, 이전 글들을 예정보다 빨리 아카이빙하기로 했습니다. 이른 유료발행도 아카이빙의 필요성에 따른 결정이니, 부디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T_T 


* 본문에서 (*주n)으로 표시된 부분은 포스트 가장 마지막에 미주 처리 하였습니다.


 







표지: 윈터 님 (@winter_dsn)
표지: 윈터 님 (@winter_dsn)




“대위님, 저, 사실…… 새입니다!”


처음 콜린스의 고백을 들었을 때 파리어가 보인 반응은 달달달 떨던 소위의 긴장이 무색해질 정도로 매우 담담했다. 썸 타기만 육 개월, 도 아니면 모라는 심정으로 멋없이 들이댄 것이 딱 삼 개월 전. 안면을 트는 김에 몸도 같이 트는, 조금 남다른 윙 메이트 관계로 진전한지 도합 일 년. 매일 있는 훈련 시간은 물론 숙소까지 같이 쓰는 사이의 애인이 사실 그 보기 드물다는 새 수인이었다는 소식이 파리어에게는 그리 충격적인 것 같지 않았다. 놀라기는커녕 그동안 콜린스를 보면서 느꼈던 경이들의 많은 부분이 비로소 납득되는 기분이었다고 할까.

‘그래서 이놈이 비행을 잘하는구만.’

수인이라고 해서 자유자재로 몸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콜린스가 새 수인이라고 해서 갑자기 날개가 뿅 솟아나서 펄럭펄럭 날아갈 수 있을 리 없건만, 어쩐지 뇌의 논리적 사고를 담당하는 부분이 약간 마비된 듯한 파리어 대위는 자기 추론의 문제점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오히려 괜시리 연하의 애인을 향해 뿌듯한 자랑스러움이 벅차올랐는지, 칭찬하듯 어깨를 탁탁 쳐주는 것이었다.

“어쩐지 잘 날더라.”

“예?”

영문도 모르고 뜬금없이 칭찬세례를 받게 된 소위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젊은 소위는 전신을 진동벨처럼 덜덜덜 떨던 것도 멈추고 멍한 얼굴로 대위를 쳐다봤다.

“갓 계급장 달고 들어온 놈이 벌새처럼 잘도 날아다닌다 했지. 스핏파이어가 이착륙이나 강하조종이 은근히 까다로운 기종인데, 어쩐지 빨리 익힌다 했어. 역시 천성은 못 이기나보군, 소위.”

“예에?”

점점 어딘가 핀트가 어긋나고 있음을 느낀 콜린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말꼬리를 올렸다. 평상시에도 커다란 두 눈이 더 똥그랗게 커지는 것을 보면서, 파리어의 가슴 속에는 뿌듯함과 더불어 사랑스럽다는 감정이 스멀스멀 차올랐다. 일주일 스물 네 시간을 시커멓고 말 안 듣는 사내새끼들 틈에서 부대끼다가, 이렇게 콜린스와 단둘이 서서 그의 하얗고 마쉬멜로우 같은 얼굴이 기분에 따라 요리조리 부풀고 우물거리는 것을 보고 있으면 절로 마음의 평화가 찾아오는 것이었다. (물론 콜린스도 어엿한 사내지만, 사시사철 향긋한 여름 복숭아 냄새를 발산하는 ‘파리어의 오메가’라는 점에서 다른 알파 사내새끼들과는 엄연히 구분되는 존재였다.) 평소 후임들이 알아서 눈치를 볼만큼 무뚝뚝하던 포티스 원의 표정이 물에 불은 만두피처럼 절로 풀어졌다. 그는 흐물흐물하게 녹은 눈빛으로 연하의 애인을 올려다보면서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그럼 날개로 날 때도 그렇게 잘 뜨고 잘 내려오나?”

모처럼 받게 된 파리어의 관심이 싫다는 뜻은 결코 아니지만, 잭 콜린스는 본디 할 말은 해야 하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대체 어디서부터 꼬이기 시작한 건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대위의 착각을 정정해주기 위해 떨떠름한 기분으로 입을 뗐다.

“저, 파리어…… 수인이라고 진짜 동물로 변신하는 게 아니란 건 알고 계시지요?”

“음, 소위는 날 뭘로 보고 그런 말을 하나? 나도 똑같이 미들스쿨 나오고 기초교육 받은 사람이야. 당연히 수인은 동물로 변하지 않지. 설마 고양이 수인이면 진짜로 고양이 발톱이 나고 뱀 수인이면 정말로 허리가 요롱이겠나? 만약 맹수 수인이라고 해서 시도 때도 없이 짐승으로 변하면 당장 우리 기지에만 동물원 우리를 몇 개나 설치해야 하겠어?”

새삼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이 무심하게 대답하는 것으로 보아, 다행히 파리어의 상식 체계에 이상이 생긴 것 같진 않았다. 일단 한 시름 걱정을 놓긴 했지만, 콜린스는 여전히 헷갈린다는 어조로 운을 띄웠다.

“네, 그렇죠. 그러니까 전 날개도 없고 스핏파이어에 탑승하지 않으면 날지도 못합니다. 대위님, 제 수인 형질과 제 조종 능력은 전혀, 네버,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그는 마치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처럼 침착하고 차분하게 당연한 사실(이라고 믿었던 사실)을 설명해주었다. 그러자 가만히 콜린스의 말을 경청하던 파리어가 유감이라는 듯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음, 네 머리색을 닮은 날개라면 정말 멋지게 날아갈 텐데.”

“아뇨아뇨, 그러니까 전 못 난다니까요. 저도 대위님처럼 두 다리로 걸어 다녀요. 이렇게. 뚜벅뚜벅.”

그러면서 콜린스는 제자리 행군을 할 때처럼 양 다리를 번갈아 걸으며 시범을 보였다. 따로 구령이 없어도 각 맞춰 절도 있게 걷는 폼이 완벽한 FM이었다.

‘이러다가 신병훈련소에서 훈련병들 제식 모델로 쓰겠다면서 촬영 제의라도 들어오면 어떡하지? 아무렴 편대 제일가는 파일럿이 차출되면 팀이 제대로 돌아갈 수가 없지. 포상휴가 따위로 콜린스를 꼬여내도 절대 못 가게 막아야지.’

최근 갓 시작한 연애에 제대로 맛이 들린 대위는 이리저리 과보호 섞인 망상의 나래를 펼쳤다. 다시 한 번 선임의 상상이 구름 위로 둥실둥실 떠오르려는 것을 콜린스가 뜯어말리고 나서야, 그는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렇담 새와 닮은 점이 하나도 없으면서 왜 새 수인이라고 부르지?”

“전혀 없는 건 아니고 소소한 형질들은 남아있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시야각이 좀 더 넓다거나, 청각이 예민하다거나, 날씨 변화를 더 민감하게 느끼는 것처럼요. 그리고……”

그러니까 시력이 좋아서 비행 잘 하는 건 맞단 거잖아? 파리어는 자신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기분이 좋아졌다.

그런데 잘 설명을 이어나가던 콜린스는 어느 순간에 당도하자 갑자기 말수가 줄어들더니 항상 크고 널찍하게 휘젓던 팔 동작의 폭도 어쩐지 소심하게 좁아든 듯했다. 콜린스의 표정이 사뭇 어두워지는 것을 따라서 파리어도 덩달아 같이 심각해졌다.

“무슨 일인데 그래?”

파리어의 재촉에도 콜린스는 쉽사리 속마음을 털어놓지 못하고 아랫입술만 깨물기를 반복했다. 다행히 새의 부리처럼 뾰족하지 않고 평평한 사람 치아지만, 그래도 여린 살갗이라 계속 잘근잘근 씹다가는 피가 비칠지도 몰랐다. 걱정이 된 파리어는 재빨리 검지를 들어 콜린스의 아랫입술 자리에 대신 갖다 댔다. 졸지에 어린애 같은 습관을 들켜버린 콜린스가 당황해서 어물쩡 댔지만, 파리어는 손가락을 치우지 않고 차근차근 달래며 끈질기게 밀어붙였다.

“왜? 말 못할 일이야? 누가 네 형질 갖고 뭐라고 그래? 괴롭힌 거야?”

“아, 대위님, 진짜! 제가 어디 가서 맞고 다닐 짬바로 보이십니까?”

그리고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콜린스가 투정부리는 연인답게 주먹 쥔 손으로 대위의 명치 부근을 콩콩 쳤다.

“크흠!”

방심한 사이 슈투카 못지않은 돌주먹에 두드려 맞은 파리어의 허파가 반사적으로 격하게 기침을 내뱉었다. 그럼에도 혹사당한 허파의 주인은 아무렇지 않은 척 매무새를 가다듬으며 후임 달래기를 계속했다. 한결 부들부들해진 그 말투에 다정함이 물씬 녹아있었다.

“아니지 아니지, 우리 팀 에이스가 얼마나 야무진 불주먹인지 내가 잘 알지. 부대 모의훈련도 일등, PT 시험 일등도 넌데 내가 왜 소위를 얕보겠어? 그냥 네가 할 말이 있어 보이는데 어려워하니까 그랬어. 네가 걱정하면 보는 나도 걱정 되잖아.”

특히 마지막 말을 덧붙이면서 길게 마주치는 시선에는 진심으로 걱정과 염려가 담겨 있었다. 덕분에 콜린스의 볼까지 덩달아 붉게 달아올랐다. 평소 무뚝뚝하고 과묵하기로 유명한 대위님이 자기를 위해서 이렇게까지 달래주는 것을 직접 체감하니까 확실히 기분이 으쓱하긴 했다. 훨훨 하늘이라도 날아갈 것 같달까? 누군가에게 돌봄 받는 것이 이렇게나 짜릿한 일이었다니! 대위님이 여기서 조금만 더 살살 꼬드기면 일급 군사기밀까지 털어놔버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콜린스는 잔뜩 긴장했던 어깨에서 조금씩 힘을 풀어냈다. 고된 훈련과 임무 탓에 굳은살이 단단히 배긴 파리어의 손바닥이 키 큰 소위의 부들부들한 뺨을 다정스레 쓸어내렸다. 그 거친 엄지손가락이 콧잔등을 살살 쓰다듬어줄 때 즈음에는 이미 콜린스의 불편하던 마음도 눈 녹듯 사라져 있었다.

이처럼 보기 드문 파리어 대위의 애교에 드디어 꽁꽁 닫혔던 마음이 살짝 열렸던, 콜린스가 은근한 목소리로 떠보듯 질문을 던졌다.

“그럼 대위님은…… 제가 새 수인이어도 아무렇지도 않으십니까?”

후임은 말하면서도 아직 손톱만큼의 염려가 남았는지, 커다란 덩치를 안 어울리게 배배 꼬아대면서 물었다. (물론 파리어는 이보다 더 인간미 넘칠 수 없는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팀 막내는 이토록 치열하고 음울한 전장 속에서도 어쩜 이렇게 인간으로서의 정이 흘러넘치는 면모를 잃지 않고 지닐 수 있는지? 신이여 포티스 투를 보호하소서! God Save Fortis Two!)

“아니, 자네가 새 수인이라고 해서 대체 뭐가 문제가 된단 말이야?”

파리어는 진심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격하게 되물었다.

“하지만 저는 안 그래도 오메가인데다가 수인이기까지…… 물론 제 형질이 부끄럽다거나 하는 뜻은 결코 아니지만요! 전 제가 오메가라는 사실에 한 점 부끄럼도 없습니다! 활주로에 꽂힌 RAF 깃발에 대고 맹세할 수 있습니다. 저는 자랑스러운 우리 공군에 복무할 수 있어서 영광이고, 지금보다 더 많은 오메가들이 스핏파이어의 콕핏과 관제탑과 활주로의 표시등 자리에 서게 될 때 우리 영 공군의 미래가 더욱 밝아질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으며, 그 이상이 현실이 될 때 더 많은 나치 놈들의 뚝배기를 깨부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리고 또……”

“그래, 그래. 나도 소위 의견에 전적으로 동감일세. 그러니까 숨기거나 걱정할 게 뭐가 있단 말이야?”

파리어가 경청의 의미로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침착하게 전우(겸 애인)를 진정시키는 모습에서 과연 베테랑 조종사다운 연륜이 묻어나왔다. 그처럼 침착한 파리어의 태도를 따라서, 콜린스도 흥분했던 호흡을 다시금 가라앉히고 홀로 마음에 품고 있던 걱정을 겨우 털어놓았다. 그것은 파리어와 처음으로 마음(과 몸)을 교류하기 시작한 이후부터 내내 그의 심려 한 구석을 차지하고 괴롭혀온 오래된 의구심이었다.

“……하지만, 새 수인이라니 역시 드물잖습니까? 게다가, 게다가 비록 반절뿐인 형질이긴 하지만 제 안에도 새 수인으로서의 어쩔 수 없는 본능이 흐르고 있단 말입니다! 그 본능을 인정하고 수용하기에 우리 사회는 아직도 너무 배타적이고 우리 새 수인들이 겪는 어려움에 대해 일말의 관용이나 공감조차 보이지 않고 있어요……”

“그래그래. 사회는 항상 느리게 변하고, 그래서 우리를 괴롭게 하지.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콜린스. 저들이 늦된 거라고.”

수인이 아닌 파리어로서는 콜린스가 말하는 새 수인들의 고통이 정확히 무엇인지 짐작도 가지 않았지만, 어쨌든 무조건적인 지지와 공감 의사를 보이며 일단 연인의 어깨를 토닥였다. 사실 그토록 다정하고 진심 어린 위로가 파리어의 공감 수치가 특별히 뛰어나거나 타인에게 연민을 쉽게 느끼는 체질이기 때문에 발휘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에드워드 파리어는 여느 알파들처럼 마음에 품은 오메가 앞에 서면 어떻게든 잘 보이고 싶은 욕구가 이성보다 먼저 치솟는 평범한 DNA의 소유자였고, 맘에 드는 오메가의 마음을 얻으려면 쓸데없이 자존심을 내세우기보다 상대의 입장에 서서 마음을 먼저 챙겨주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영리한 알파였을 뿐이다.

따라서 그는 세상에 알파와 오메가가 생긴 이래, 인류의 오랜 역사에서 단 한 번도 실패를 기록한 적이 없는 최고의 구애 방법─즉 ‘무조건 들어주고 맞장구치기’ 방법으로 콜린스를 다독였다. 결과는 두말할 것 없이 성공이었다. 병아리처럼 노랗게 삐친 머리를 바닥 쪽으로 푹 수그린 채로 실없이 발장난치는 척만 하던 콜린스가, 마침내 좀처럼 열리지 않던 입을 열었다.

“제 본능이 대위님한테 피해를 줄지도 몰라요.”

“피해라니?”

파리어는 콜린스의 존재가 삶의 기쁨을 선사하면 선사했지, 자신의 생활에 피해를 준다고는 손톱만치도 느껴본 적이 없었기에 진심으로 의아해 했다. 그 짙은 눈썹이 일그러지는 것을 본 콜린스가 평소 초조할 때의 버릇대로 혀를 살짝 날름거렸다.

“사실 대위님과 같은 방을 쓰게 되어서 정말 기쁘지만, 그동안 하고 싶어 죽겠는데 참고 있는 것들이 좀 많았습니다, 제가. 그게 정말, 정말…… 많았거든요……?”

콜린스의 고백을 듣는 순간, 파리어는 덜컥 심장이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이렇게 예쁘고 야무지고 똑부러진 녀석이 자기와 같은 방을 쓰느라 참고 있는 것이 많았다니? 게다가 그 스트레스가 연병장 흙바닥에서 원산폭격을 굴러도 뾰루지 한 번 안 나던 피부결이 거칠어질 정도였다니?(아니다)

본디 콜린스는 키도 크고 발도 크고 손도 솥뚜껑만하고 얼굴 잘 생긴 것이야 말할 것도 없고, 어쨌든 여러모로 특별한 존재였다. 그렇게 특별한 콜린스가 남들과 좀 다를 수도 있지! 요렇게 특별한 놈이 새 수인일 수도 있지! 아니, 콜린스라는 경이로운 존재한테 그 정도의 특별함은 있는 쪽이 더 자연스러운 이치 아닐까?

그 순간 파리어의 심장 깊은곳에서는 어떤 의분이 솟아올랐다. 그는 두터운 비행 장갑을 낀 오른손으로 콜린스의 처진 어깨를 격려하듯 툭툭 쳐주었다. 그리고 담대하고 힘찬 음성으로 연인을 다독였다.

“콜린스, 괜찮아. 다 말해. 내가 다 들어줄게.”

조종간을 잡은 이후로 ‘절제, 침착, 냉정’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아 온 에이스 파일럿의 판단력도 좋아하는 사람의 웃는 얼굴을 보고 싶다는 인간의 근원적인 욕구 앞에서는 바람 앞의 새털구름처럼 하늘하늘 날아가 버렸다. 시무룩하던 콜린스의 표정도 그 결의에 찬 표정 앞에선 자연히 풀어져 버렸다. 처진 입매가 방긋 올라가고 순한 눈매가 복숭아 꽃피듯 화사하게 휘어진다. 그 찰나의 짧은 표정 변화를 직접 목격하게 된 파리어의 마음도 덩달아 들썩였다. 이 상태에서 딱 한 마디만 더 들으면, 딱 한 번만 더 웃어준다면, 그 품안에 세상을 안겨 달래도 들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달뜬 파리어의 가슴에다가 어린 장교는 덧니가 살짝 드러나는, 가장 자신 있는 미소를 날리면서 결정적 쐐기를 박았다.

“저 대위님이랑 방에 둥지 틀고 싶습니다!”

“그래, 그렇게 하자!”

둥지를 튼다는 것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 감도 잡히지 않았으나, 파리어는 순간의 기분에 취해 흔쾌히 승낙했다. 아니, ‘승낙’은 너무 권위적이고 수직적인 표현이다. 파리어는 반려와 진실한 사랑을 맺을 줄 아는 ‘교양을 갖춘’ 알파답게 동등한 위치에서 합의를 통하여 존중과 배려의 결정을 내렸다. 다소 감정이 격앙된 자기평가였으나, 뒤이은 콜린스의 반응은 그런 자화자찬의 부끄러움도 잊게 만들었다.

“대위님, 역시 대위님이랑 만나길 정말 잘했어요. 당신은 제 인생 최고의 선택이에요. 저 그럼 진짜 우리 거실에다 솜이불도 깔고 욕조에 깃털 채워놓고 아침저녁마다 찢을 휴지랑 뽁뽁이 쟁여놔도 괜찮은 거죠?”

“물론이지.”

문장 뒷부분에 딸린 중요한 조건 몇 가지는 파리어의 기억 속에서 한 귀로 들어가서 한 귀로 흘러나갔다. 말의 내용보다 중요한 것은 그 말을 전하는 콜린스의 감동받은 어조였다. 그 어조 하나만으로도 그날 파리어의 하루는 완성된 셈이었다. 이 이상 완벽할 수 없었다. 콜린스는 어느 새 파리어의 무스탕 외투 안에 큰 덩치를 꾸깃꾸깃 구겨 넣고서 해사하게 미래 계획을 구상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 그건 나중에…… 더 자신이 생기면 말할게요.”

콜린스가 상기된 얼굴로 덧붙였다. 수인 커밍아웃도 한 참에 더 밝힐 것이 무엇이 더 남아있단 건지는 잘 모르겠으나, 파리어는 굳이 설명을 요구하지 않은 채 알아서 이해하고 알아서 납득했다. 그저 헤헤 웃는 콜린스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 한 가득 흐뭇함이 차올랐다. 그는 만면에 다른 전우들이 본다면 경기를 일으킬 만치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어깨에 기댄 콜린스의 정수리를 (조금 힘겹게) 쓰다듬었다.

“그래서 넌 무슨 종이라고?”

“코카투요!”

콜린스가 바람에 헝클어진 노란 머리터럭을 깃털처럼 휘날리며 힘차게 대답했다.




***



코카투. 커-캐-투? 커캩-투? [k]를 연사 소총처럼 쏴서 발음해야 하는 이 낯선 단어는 파리어가 서른 다섯 평생 영국 땅에 살면서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아무래도 외래종일 것이 분명했다. 에드워드 파리어는 본래 조류 관찰 같은 지루한 취미와는 전혀 연이 없는 인물인 데다, 하물며 토종도 아니고 어디 원시림에 살 것 같은 이상한 별칭을 가진 외국 조류에 관심을 갖게 될 날이 오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평범하게 비행 잘 하는 오메가인 줄 알았던 애인이 사실 코카투 수인이라는 고백을 듣게 된 이상, 일부러라도 관심을 가져보는 것이 예의고 정성이었다. 어떻게 생겼을지, 울음소리는 어떨지 감도 잡히지 않았기 때문에 파리어는 우선 정보를 찾기 위한 가장 기초적 방법으로 백과사전부터 펼쳐들었다. 브리태니커 사전의 c 항목에 수록된 코카투에 관한 설명은 다음과 같았다.  


「코카투는 관앵무상과의 유일한 과인 관앵무과에 속하는 21종을 두루 가리킨다.」


모르는 단어가 세 가지나 나와서 금방 덮어버렸지만, 일단 앵무새 비스무리한 놈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콜린스 녀석이 그렇게 말주변이 뛰어나군.’

파리어는 자연스럽게 앵무새라는 단어에서 평소 남친의 청산유수 같던 화술의 정당성을 유추해냈다. 다음으로, 좀 더 쉬운 설명을 듣고 싶어서 찾아본 조류 도감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와 있었다.

「코카투: 머리 위에 꼿꼿하게 뻗은 깃털 다발이 있으며 칙칙한 색의 깃털을 지닌 나뭇가지에 앉는 새.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사람의 말소리를 흉내낼 수 있다. 주로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볼 수 있다.」


‘머리 위에 꼿꼿하게 뻗은 깃털 다발’─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콜린스의 가마가 항상 어수선하게 붕붕 떠 있던 것으로 보아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칙칙한 색의 깃털’─이 부분은 전혀 사실이 아니었다. 활주로 끝에서 봐도 눈에 띄는 화사한 금발이 자랑인 녀석한테 ‘칙칙하다’니? 이 조류 도감의 저자는 코카투는 잘 알지 몰라도, 코카투 수인의 아름다운 빛깔과 외모에 관해서는 지식이 모자란 사람이 분명했다. 파리어는 도감 저자의 권위와 전문성에 대해 심대한 의문을 제기하며 책장을 덮었다.

그래도 호주가 원산지라는 사실 하나는 건졌으니 처음 사전보단 수확이 나은 셈이었다. 열여덟 살이 되기 전까지는 스코틀랜드 바깥으로 나와 본 적이 없다던 녀석이 대체 어쩌다가 외래 조류의 형질을 갖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콜린스가 그렇다면 그런 것일 테지. 파리어는 콜린스 가문의 혈통을 의심하는 불경스런 짓을 시도하는 대신, 알아서 자기만의 논리로 납득했다.


그러나 여전히 정보는 부족했다. 코카투 수인을 애인으로 둔 사람에게 정말 필요한 정보는 따로 있었다.

‘예를 들어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어떤 환경에서 편안함을 느끼는지, 아니면 어떤 스타일의 (성)관계를 추구하는지 같은……’

보다 실용적인 정보를 찾아서 애완조 가이드북을 뒤진 끝에, 그는 마침내 쓸 만하고 흥미로운 사실 몇 가지를 건질 수 있었다.


「코카투는 대형 앵무 중에서 대표적으로 인기가 많은 과입니다. 귀여운 외모와 순한 성격이 특징적이고 애교도 많아서 사랑받는 종이지요.」


콜린스 본인은 극구 부정하는 중이지만, 그에게 ‘내 거대 복숭아’라는 애칭을 붙여준 파리어의 결정은 선견지명이었던 셈이다! 커다랗지만 귀엽고 순한 외모, 애교가 많은 성격─이보다 더 그의 거대 복숭아를 설명하기에 적합한 어휘들이 또 있을까? 파리어는 가이드북 저자의 의견에 매우 만족스러워하며 공감했다. 이어지는 코카투의 습성에 관한 구체적인 정보들도 파리어의 입맛에 딱 들어맞는 내용들이었다. 사진과 함께 실린 짤막한 설명을 차례차례 읽어나갈수록, 하도 인상을 자주 쓰느라 주름이 졌던 그의 이마도 점차 탱탱함을 회복해갔다.


「하지만 대형 앵무답게 부리 힘이 아주 세서 집의 가구를 훼손하거나 파괴할 수도 있으니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이를 방지하려면 동거 초기부터 집안의 물건을 물어뜯지 않도록 다른 적절한 장난감을 제공해주는 것이 좋습니다. 고집도 피우고 이유 없이 울기도 하는 등 자기 주관이 뚜렷한 새지만, 강아지만큼이나 충직하고 믿음직스런 친구랍니다. 또한 사람의 관심을 많이 필요로 하는 종이기 때문에 주인과의 소통이 부족할 시에는 외로움을 탑니다. 심할 경우 자해를 하기도 하므로 특별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요긴한 정보가 수두룩하게 담긴 단락이었다. 함께 실린 사진 속 귀엽고 예쁜 외양과 다르게, 힘이 세다는 대목에서는 콜린스가 일명 ‘RAF 불주먹 소위 사건’이라는 별칭을 얻게 된 과거의 모 사건이 떠올랐고, 사람처럼 자기 주관이 뚜렷하다는 설명에서는 궁금한 것이 생기면 일단 물음표 살인마로 변신해서 작전 중에도 따박따박 질문 퍼붓기를 일삼는 그의 습성이 떠올랐다. 강아지만큼 충직하고 믿음직스럽다는 부분은 또 어떤가? 자고로 개라고 하면 인류 최초의 친구, 최고의 파트너가 아닌가? 어렸을 때부터 견공이라면 일단 종류 불문 설명 불가능한 친밀감부터 느끼고 보는 파리어에게는 이보다 더 호감 가는 칭찬이 또 없었다.

그렇게 만면에 흐뭇한 미소를 띠고서 한 문장 한 문장 읽어 내려가던 중, 파리어의 눈길이 어느 한 대목에 이르러 멈춰 섰다.


「…주인과의 소통이 부족할 시에는 외로움을 탑니다. 심할 경우 자해를 하기도 하므로……」


자해라는 단어에 일단 한 번 시선이 닿고 나자, 쉽게 주의를 돌리기 어려웠다. 동시에 파리어의 뇌리 속에서는 그동안 혹 콜린스와의 관계에 소홀한 적은 없었던가 하는 질문이 주마등처럼 지나가기 시작했다. 타고난 성격이 무뚝뚝하다는 이유로 애정 표현에 서툴지는 않았나? 자기 앞에서는 은근히 수줍음을 타고 소심해지는 콜린스인데, 녀석이 하려던 말을 막아버린 적은? 팔다리도 쭉쭉 뻗고 튼튼한 체질이라고 해서 함께 하는 식사 시간이나 산책을 거른 적은? 그렇게 무관심하게 혼자 내버려둔 사이에 사실 다른 알파들의 불쾌한 언사나 행동에 상심했던 건 아닐까? 그러고 보니 며칠 전 합동 훈련 때 콜린스가 답지 않게 어떤 알파 후임 하나를 갈궜던 것 같은데, 설마 그 새끼가 콜린스를……?

작은 의문으로 시작된 걱정은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걷잡을 수 없이 크기를 키워갔다. 한 번 팽창하기 시작한 불안에 파리어의 머릿속이 완전히 잠식되기 직전 바로 그때, 그 결정적 순간, 그의 귓가에 꽂히는 쾌활한 스코틀랜드 억양이 이상의 허황된 망상이 이어지는 것을 끊어냈다.


“대위님, 같이 식사 가시죠! 오늘 비프 커리 스튜랍니다!”

참으로 적절한 때의 난입이었다. 오랜만에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맛을 지닌 메뉴가 나온다는 소식이 기뻤는지, 콜린스는 간만에 그 나잇대 다운 들뜬 기색으로 저녁 메뉴를 알렸다. 그는 아무도 없는 휴게실에서 혼자 조류도감을 뒤적이던 중인 대위 곁으로 빠르게 걸어왔다. 그리고 재빠르게 주위에 보는 눈이 없는 것을 확인한 다음, 키를 낮춰 슬며시 팔짱을 껴왔다. 다정한 몸짓이었다.

“늦게 가면 분명 국물만 남을 테니까 빨리 달려가요, 우리. 요즘 날씨 너무 쌀쌀해져서 고기로 대위님 몸보신하셔야 됩니다. 냉동 스튜 건더기도 일단 고기는 고기니까요?”

“조국의 짬밥이 다 그렇지 뭐.”

파리어는 습관적으로 입에 밴 냉소를 내뱉으면서도, 몸만큼은 순순히 콜린스를 따라 일어섰다. 오랫동안 바닥 위에 철퍼덕 앉아 있던 터라서 다리가 저릴 만도 했으나, 사랑하는 짝의 체온이 살갑게 옆구리에 달라붙어 오니, 오려던 쥐도 절로 달아났다. 그는 익숙한 손짓으로 한 쪽 팔을 콜린스의 허리에 둘렀다. 이젠 고 탄탄하게 잘 빠진 골반 위가 아니면 어디 팔도 쉽게 못 걸치는 몸이 되어버렸다. 콜린스란 존재는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대위의 삶에 쑥 치고 들어와서 그렇게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되어버린 것이다.

문득 멀쩡하던 콧잔등이 부쩍 쌀쌀해진 날씨만큼이나 시리게 울렸다. 파리어는 실외에 있느라 차가워진 콜린스의 손을 자기의 두툼한 무스탕 안쪽으로 쑥 끌어당겼다.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지 편하게 말해라. 알고 있지?”

뜬금없는 얘기에도 콜린스는 토를 달지 않고 그저 씩 웃을 뿐이었다.

“네에.”

일부러 말꼬리를 길게 늘이며 대답하는 짓이 방금 전 책에서 읽은 사랑스럽다던 코카투의 애교와 꼭 닮아 있었다. 덕분에 파리어는 한결 부드러워진 눈빛으로 콜린스의 이어지는 수다를 경청했다.

“왜, 그 B팀에 버르장머리를 집에 놓고 온 알파 한 마리 있잖습니까. 분위기 흐리는 놈이요. 제가 오늘 낮 훈련에서 그 녀석 뚝배기에 싹수를 새로 심어주고 왔는데요, 고 자식 배짱도 없어가지고 겨우 원산폭격 한 번에……”  

대위는 이름만 겨우 아는 같은 알파 후임의 고된 훈련기를 기꺼운 마음으로 들어주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콜린스가 알아서 잘 처리했겠지. 아무렴 우리 부대 군기 담당인데. 모르긴 몰라도 우리 복숭아가 보기에 혼 낼만 하니까 혼냈을 거다.’

장교식당까지 가는 오 분 남짓 되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콜린스의 훈훈한 미소는 걱정으로 꽁꽁 얼어붙었던 파리어의 심장도 눈 녹이듯 녹여버렸다.

취사병 앞에 일등으로 도착해서 배식판에 고기 건더기가 듬뿍 들어간 커리를 받을 때 즈음에는, 부정적이던 생각의 흐름도 어느 새 ‘어떻게 하면 코카투 수인인 콜린스의 마음에 맞는 둥지를 만들어 줄 수 있을까’, ‘콜린스의 입질에 대비해 어떤 장난감을 준비해주는 것이 좋을까(콜린스는 입질을 하지 않는다)’ 같은 보다 실용적이고 적극적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는 콜린스가 고민 끝에 어렵사리 자기 정체성을 고백해준 만큼, 할 수 있는 한 그에게 편한 생활환경을 마련해줄 작정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파리어 자신이 본인의 성격을 돌아보건대, 그는 대체로 타인의 이익에 별 관심을 두지 않는 재수 없고 까다로운 성정의 소유자였다. 그렇지만 이번만큼은 꼭 제대로 해주고 싶었다. 그만큼 놓치고 싶지 않고 곁에 붙잡아두고픈 인연이니까.

자꾸 보고 싶고, 곁에 두고 싶고, 따라가고 싶고. 나를 낮춰서라도 계속 함께 있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 사랑이란 것이 그랬다.  



***



단 하나, 오직 단 하나, 파리어 대위가 미처 고려하지 못한 점이 있다면, 기본적으로 콜린스는 타인의 도움 없이도 자기 공간을 알아서 잘 꾸려가는 인물이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행동력이 매우 뛰어난 군인이라는 점도. 마지막 난관이나 마찬가지였던 파리어의 허락을 얻어낸 직후, 콜린스는 곧바로 자기 욕구를 충실히 현실로 이행하기 시작했다.


가시적인 변화는 침대 재배치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호주의 드넓은 초원, 울창한 나무 위에 걸터앉아서 사방을 둘러보는 습성이 있다는 조상의 형질을 본받았다는 말이 영 헛소리는 아니었는지, 콜린스 또한 본능적으로 높은 자리를 탐내는 듯 했다. 그동안 숨기느라 제대로 표출을 못했을 뿐, 일단 파리어의 ‘뭐든 다 해도 돼’라는 마법의 한 마디를 얻어내자마자, 그는 가장 먼저 침대 자리를 바꾸고 싶다는 부탁을 해왔다.


전 군에 공통으로 보급되는 철제 침대는 원래 두 층으로 쌓아서 사용하는 구조이다. 사병들이 쓰는 4인실에는 그런 이층침대 두 개를 한 방에 넣어서 사용했고, 장교들이 사용하는 2인실에는 그래도 고급인력이니까 잠이라도 편하게 자라는 뜻인지 두 개를 분리해서 멀찍이 떨어뜨려 놓았다. 그런즉 필연적으로 한 명은 평범하게 바닥에 놓인 아래쪽 침대를 쓰고, 다른 하나는 아래가 뻥 뚫린 반쪽짜리 이층침대에서 자게 되는 구조였다. 그리고 그동안 위쪽 침대를 차지한 쪽은 파리어였다.

그렇게 결정된 데에 별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처음 방 배정을 받은 날 먼저 도착한 파리어가 무심코 위쪽 침대의 난간에 걸터앉아 쉬고 있었고, 차마 하늘같은 선임이 좌정해 계신 자리를 넘볼 수 없었던 막내가 알아서 남은 일층으로 기어들어갔을 뿐이다(당시만 해도 갓 임관한 아기 장교였던 소위는 자기 손아귀에 저 험악한 인상의 알파 대위를 교묘하게 쥐락펴락 할 수 있는 힘이 숨어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렇게 콜린스가 알아서 눈치껏 일층을 차지하니, 파리어도 별 생각 없이 그대로 이층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 일 년을 이어진 것이다.  

파리어가 처음 이층에 누웠을 때는 생각보다 천장이 너무 가까워서 답답한 느낌이 없지 않았지만, 그것도 적응하고 나니 괜찮아졌다. 무엇보다 같은 방을 쓰는 막내 소위한테 간질간질한 마음을 품게 된 이후로는, 이층에 누워서 자는 척하다가 불이 꺼지면 몰래 저 아래쪽의 콜린스를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던 것이다. 전국 각지에 퍼진 RAF 기지 중에서도 가장 우악스럽고 소탈하기로 명성 높은 F기지에서 매일 같이, 정말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정복 차림으로 비행기를 모는 녀석이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한밤의 침대 위에서가 유일했다. 때로는 편하게 지내는 정도를 넘어서 제 고향집 안방처럼 아주 느긋하게 퍼질러 자는 당나라 군기를 보여주기도 했지만, 그마저 어린 애인한테 홀딱 빠진 선임 알파의 눈에는 아직 쑥쑥 성장 중인 대형 복숭아의 당연한 권리로 여겨졌다. 게다가 뒤척이면서 자느라 잠옷이 밀려 올라가기라도 하면, 고 사이로 훤하게 내비치는 하얗고 몰랑몰랑한 배를 구경하는 것이 대위에게는 그보다 더 염통이 근질거리는 관음거리도 없었다.


사정이 이러하니 콜린스가 대위님의 이층 침대를 자기 자리와 바꾸자고 요구했을 때, 파리어가 살짝 실망한 것은 어느 정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활주로에 말뚝 박은 지 수년 만에 기적처럼 만난 귀하디귀한 일상의 활력소였는데, 이제 그 구경을 못 하게 된다니? 하지만 모처럼 반짝이는 눈빛으로 기대를 숨길 생각도 않고 떠보는 콜린스를, 파리어가 매몰차게 거절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전 사실 어릴 때부터 이층 침대가 아니면 잠을 잘 못 잤지 말입니다……”


콜린스가 과거를 추억하듯 아련하게 말끝을 늘이며 덧붙였다. 그럼 지난 일 년 동안 일층 침대에서 만세 자세로 헤갈치고 자던 모습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런 의문이 잠시 뇌리를 스쳤으나 파리어는 토 달지 않고 얌전히 자리를 바꿔주었다.


그래도 침구 정리까지 대신 마쳐주고 나니 그의 가슴에도 꽤 뿌듯함이 몰려왔다. 무엇보다, 새 보금자리가 마련되자마자 눈에 띄게 기뻐하며 새 침대를 시험해보는 콜린스의 표정이 몹시 행복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황새 같은 다리로 성큼성큼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더니 매트리스 위에 ‘으쌰’ 주저앉았다. 미처 프레임 안에 수납되지 못한 기다란 종아리는 공중에서 대롱대롱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파리어가 손수 옮겨다준 베개며 이불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는 손바닥으로 팡팡 두드리면서 호탕하게 외쳤다.


“후, 이제야 시야가 탁 트이는 기분이네요! 역시 높은 곳이 가장 편합니다!”

널따란 어깨를 큼지막하게 뒤로 쭉쭉 펴면서 웃는 걸 보니 마음에 들긴 든 모양이었다. 파리어는 자상한 미소를 지으면서 물었다.

“그렇게 이층이 좋은가?”

“그럼요. 시야 확보가 잘 되지 않습니까. 여기 앉으니까 사각지대까지 속속들이 확인할 수 있어서 속이 시원하네요, 하하.”

열 평 남짓한 방에서 사각지대 시야를 확보해서 대체 어떤 이득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 옷장이나 부엌 천정 위에 올라가서 주인을 내려다보며 으스대는 집고양이의 심리와 비슷한 것 같았다. 원래 쓰던 일층 침대와 비교해서 달라진 것은 위치뿐인데, 그 변화만으로도 좋아죽겠다는 듯이 침대보를 살살 쓰다듬는 모습이 몹시 해맑았다.


‘하긴, 그동안 바닥에서만 지내다가 드디어 자기 횃대를 갖게 된 셈인가.’


파리어는 도감에서 보았던, 커다란 앵무새가 높은 나뭇가지 사이를 도도도 타고 오르며 노는 사진을 떠올리며 납득했다.


그렇게 방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난 다음, 콜린스는 본격적으로 자기만의 둥지를 틀기 시작했다. 둥지라고 해서 정말로 새처럼 흙더미나 나뭇가지를 주워서 마구잡이로 늘어놓는 것은 아니었다. 그 자신의 주장대로 콜린스는 어디까지나 우연하게도 코카투 선조의 형질을 아주 일부만 물려받은 엄연한 인간이었고, 따라서 만물의 영장답게 도구와 문명의 혜택을 사용하는 일반적인 방법을 택했다. 야생의 새들이 짚더미와 진흙, 침 따위를 사용해서 집을 지을 때, 콜린스는 온갖 종류의 담요와 베개, 솜이불, 목 베개, 빈백, 바디필로우, 그물코 이불보 등을 사용해서 둥지를 꾸몄다.


파리어가 침구를 옮겨다 준 다음 날 저녁부터 그는 어디서 공수해왔는지 알 수 없을 어마무지한 양의 모든 푹신푹신한 것을 둘러메고 오더니 제 취향껏 이층침대를 치장하기 시작했다. 낑낑거리며 사다리를 오르락내리락 하기를 대 여섯 번, 각양각색의 베개 위치를 이리 바꿨다 저리 바꾸는 고심 끝에 기초 공사가 끝났다. 본래 싸구려 매트리스와 베개 하나, 얇은 이불 하나가 전부였던 군용 침대가 눈 깜짝할 사이에 시골 외할머니 댁 침실보다 더 푹신하고 보드라운 요새로 뒤바뀌어 있었다. 이불과 베개, 솜뭉치와 아기자기한 조각보로 무장한 구름 요새가. 대공사를 끝낸 날 저녁, 콜린스는 깃털로 속을 채운 베개 더미 위에 늘어지게 쓰러지면서 길게 기지개를 폈다.


“아으으~ 이제 좀 잘만하네.”


다시 한 번 밝혀두는 바지만, 콜린스 소위는 일 년에 두 번 있는 야외 훈련에서도 흙바닥 간이 참호에 드러누워 군장에 머리를 대자마자 그대로 곯아떨어진 전적이 있다. 심지어 지나가다 그 광경을 목격한 대대장이 ‘진정한 군인에게 잠자리는 아무런 제약이 되지 않음을 몸소 보여주다니, 사병들의 모범이 되는 훌륭한 장교’라면서 포상 외박까지 수여했더랬다.


그처럼 무딘 줄로만 알았던 콜린스가 부들부들한 이불 하나에 사르르 풀려서 나른하게 뒹굴 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까 파리어의 마음도 괜히 싱숭생숭해졌다. 어쩐지 그동안 알지 못했던 콜린스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한 것만 같아서 생경한 한편, 어깨가 절로 으쓱했다. 모범장교 그 자체인 콜린스의 이토록 풀어진 면모를 아는 사람은 전 부대에서 오직 자신 한 명뿐일 테니까.  


딱 그 선에서 멈췄더라면 좋았을 텐데. 기초 공사를 마친 콜린스는 사방이 쿠션으로 둘러싸인 둥지만으로는 부족했는지, 불만스러운 얼굴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는 습관처럼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한참을 고민하다가, 마침내 결심을 내린 듯 파리어에게 질문을 던졌다.


“저, 두루마리 휴지 좀 더 받아와도 괜찮겠습니까?”


그렇게 묻는 콜린스의 무릎 위에는 이미 며칠 전에 파리어가 공수 해다가 안겨준 플라스틱 비닐 포장재─일명 뽁뽁이가 한 가득이었다. 탁월한 미적 감각을 십분 발휘하여 동글동글한 공기 주머니를 직선, 대각선, 격자무늬, 물결무늬 등등 예술적으로 터뜨리고 놀던 것이 바로 오 분 전 일이었다. 양반다리 한 무릎 위에 커다란 직사각형 뽁뽁이 비닐을 널따랗게 펼쳐놓고서, 두 엄지손가락으로 능숙하게 공기주머니를 터뜨리면서 즐거워 하다가 뜬금없이 저러는 것이다. 파리어는 한 시간 째 뾱뾱 뾱뾱 공기주머니 터지는 소리를 듣느라 피로해진 귀를 주무르면서  힘겨이 고개를 돌렸다.


“으음…… 뽁뽁이는 이제 질렸나, 소위?”


“파리어도 참. 둘만 있을 땐 편하게 부르시라니까요? 그리고 뽁뽁이에는 뽁뽁이의 매력이, 휴지에는 휴지의 매력이 따로 있는 겁니다. 이건 터뜨리긴 재밌는데 너무 작고 빨리 끝난다고 해야 할까, 조금 아쉽습니다. 길게 찢는 맛이 부족한 거죠. 이렇게, 쭈─욱.”


콜린스가 시범을 보이듯 옆에 놓여있던 고급 티슈 한쪽 끝을 잡고 가늘고 기다랗게 찢어냈다. 그러자 부지불식간에 그 파렴치한 사치행위를 목격하게 된 파리어 대위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부릅 떠졌다. 아무리 RAF가 육해공 삼군 중에 가장 재정지원이 튼실하다지만 미제 크리넥스 티슈는 장교들한테도 주당 공급 개수 제한이 걸린 귀한 생필품이었다.


애첩의 교태에 홀딱 넘어가서 금사 비단 수천 벌을 찢었다던 중국 황제의 심정이 이러했을까? 파리어는 망설이던 것도 잊고서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문고리를 잡았다. 그리고 아직 이불을 두르고 베개 위에 비스듬히 드러누워 지루한 기색으로 뽁뽁이를 터뜨리고 있는 콜린스를 향해 엄중히 경고를 날렸다.


“보급창 다녀 올 테니까 조금만 참아.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엄한 티슈 찢지 말고.”
“충성~”


그런 파리어를 향해 콜린스는 다른 상관들이 봤다면 경을 칠만큼 설렁설렁 풀어진 경례를 던지며 배웅했다.
이스트엔드의 서민 동네에서 평생을 나고 자란 파리어의 눈에 콜린스가 저지른 참혹한 사치는 아무래도 상당한 충격으로 비친 모양이었다. 그는 보급병을 갈구러 나간 지 단 십 분 만에 양팔 가득 두루마리 휴지를 안고 돌아왔다.


“담당병이 안 된다는 거 사정해서 가불해온 거니까 아껴 써라.”


직권남용을 저지르고 돌아온 장교가 콜린스 옆자리에 소중하게 휴지 더미를 쌓아주며 사정했다. 앞으로 한 달은 내리 사용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휴지 더미를 확인하자, 콜린스의 낯빛도 화사하게 활짝 폈다. 그는 망설임 없이 곧바로 두루마리 휴지 찢기 작업에 착수했다. 칙, 칙, 경쾌하게 휴지 찢는 소리가 방 안에 퍼졌다.


그렇게 한참을 손장난 삼매경에 빠져 있을 때였다. 콜린스가 문득 고개를 살짝 들고 질문을 던졌다.


“대위님, 오메가들이 알파 볼 때 뭐부터 보는지 아십니까?”

“뭐부터 보는데?”

“얼굴, 능력, 돈이요. 그런 의미에서 전 성공한 케이스라고 할 수 있는 거죠. 대위님은 잘생겼어, 힘 좋아, 계급도 대위님이야, 내 부탁 잘 들어줘, 말 그대로 완─벽인 거죠.”

콜린스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대답했다. 세 시간 째 펄프 찢는 소리에 내리 노출되느라 바짝 곤두섰던 연상 애인의 신경은 그 말 한 마디에 스르르 풀어져버렸다. 원래부터 말주변이 좋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이번은 정말로 여파가 컸다. 묵직하게 들어오는 직구였다고 할까? 그는 관대한 마음으로 콜린스의 이층침대에서 싸락눈처럼 떨어지는 휴지 파편을 받아 주웠다. 몸소 허리를 굽혀가며 바닥에 떨어진 휴지들을 줍는 내내, 대위의 표정 위로 뿌듯한 기색이 역력하게 비치고 있었다. 그는 한결 자상해진 목소리로 부드럽게 중얼거렸다.

“고맙다. 살면서 들어본 칭찬 중 최고였네, 소위. 휴지쯤이야 얼마든지 갖다 줄 테니 내킬 때까지 맘껏 찢어.”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콜린스의 즐거운 휴지 찢기 시간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삼주 치 분량의 두루마리 휴지를 일주일 만에 거덜 내는 행태에 결국 보급담당 장교로부터 직접 항의가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포티스 팀 306호 물자 사용이 해도 해도 너무합니다. 아무리 두루마리 휴지라지만 이렇게 낭비하다니요? 야외 훈련 한두 번 해본 분들도 아니면서 휴지의 중요성을 모르십니까? 포티스 팀에서 휴지 다섯 칸 씩 쓸 동안 참호 안의 보병들은 적국의 삐라로 볼 일을 닦고 있습니다!”

보급담당 장교의 격앙된 진정 성명은 포티스 팀 리더를 통해 두 사람에게도 전달되었고, 결국 두루마리 휴지라는 첫 번째 대체재는 회수되고 말았다.

그러나 즐거움을 추구하려는 본능은 사람이나 새나 매한가지였고, 새 중에서도 특히 활발한 성격이라는 코카투의 형질을 물려받은 콜린스는 이제 막 피워보려던 건강한 본능을 제대로 발산하기도 전에 억압당한 상황에 무척 힘들어했다. 이층침대의 안락한 이불 요새에 들어앉아서 두루마리 휴지를 찢을 때마다 함께 흥얼거리던 콧노래도 사라지고, 부쩍 말수가 적어졌다. 그 꼴을 차마 견딜 수 없었던 파리어가 먼저 제 2의 대체재를 고안해냈다.


“휴지만큼 보들보들하진 않지만 이걸로는 안 될까 콜린스?”

어느 날, 파리어가 장교 휴게실에서 집어온 신문뭉치를 건네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게 뭐에요? 가디언 지? 전 타블로이드를 주로 봐서 이렇게 길고 빽빽한 신문은 잘 못 읽는데요……”

안 그래도 며칠 전부터 종이를 찢을 수 없어 풀 죽어 있던 콜린스가 한층 더 의기소침한 태도로 말꼬리를 흐렸다. 파리어는 자꾸 고개를 아래로 숙이는 콜린스와 시선을 맞추려고 애쓰면서 들고 온 신문뭉치를 크게 펼쳐 보였다.

“그게 아니야. 병영 도서관이나 휴게실에 타블로이드는 잘 안 들어오지만 4대 정간지는 매일 들어오잖아. RAF 잡지도 가져와볼까 했지만 그건 찢을 때 소리가 별로 상쾌하지 않더라고. 그리고 한 번 펼쳐 봐봐. 이렇게. 보이지? 가디언 지는 판형이 커서 장당 면적 효율이 높아. 첫 면 한 쪽만 가지고서도 세 시간이나 찢을 수 있어.”

차근차근 설명해주는 내내 파리어의 눈빛은 매우 진지하게 빛나고 있었다. 훈련 혹은 작전 때나 볼 수 있는 눈빛이었다. 그런 파리어가 손에 쥐어준 신문뭉치를 들고서 콜린스는 한참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겨우 다시 고개를 들어 희미하게 웃어보이는 것이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대위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나 들을 법한 간만의 경직된 칭호였지만, 그의 초승달처럼 흐드러지게 휘어지는 눈매는 분명한 애정과 고마움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후로 F기지 사람들은 휴대하기 용이한 타블로이드지가 아니라 큰 판형의 가디언 지를 들고 다니는 콜린스 소위를 종종 마주칠 수 있었다. 세 군대 중에서 평균 학력이 가장 높다는 공군이지만, 대다수는 장교 사병 가릴 것 없이 내용도 재미있고 훈련 중에도 주머니에 쓱 넣어 가지고 다닐 수 있는 타블로이드 지를 선호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 가운데 기지 내에서, 장교식당에서, 활주로에서, 행거에서 스핏파이어 정비가 끝나기를 기다릴 때조차, 한쪽 겨드랑이에 커다란 일간지를 들고 다니는 콜린스의 모습은 자연스레 여러 사람의 시선을 끌었다. 한 입사 동기는 식후 야외에서 간이 의자를 펼쳐놓고 느긋하게 신문을 읽고 있는 그를 신기한 눈으로 구경하며 말했다.

“난 훈련도 정신없어 죽겠는데 넌 이럴 때까지 그런 눈 아프고 골 아픈 걸 읽냐?”

“훌륭한 조종사라면 적기 꽁무니만 잘 맞출 게 아니라 세상 돌아가는 일에도 환해야지.”

느긋하고 여상한 콜린스의 태도에 동기는 어이없다는 듯 혀를 내둘렀다.



훈련 사이의 짤막한 휴식 시간에까지 가디언 지 첫 면을 꼼꼼하게 독서하고 있는 콜린스를 보고서, 한 상관은 의외라는 듯 한쪽 눈썹을 끌어올리며 물었다.

“소위, 자네 좌편향이었나?”(*주1)

“부부는 부창부수죠. 전 파리어 대위님 따라갑니다. 대위님이 오른쪽으로 가시면 저도 우회전, 왼쪽으로 가시면 저도 좌회전.”

콜린스가 상단의 멋들어진 필체를 주의 깊게 살펴보며 대답했다.

“자네 좌빨이었군!”

상관은 그렇게 말하며 혀를 쯧쯧 찼다. 그러나 그는 젊은 소위의 손에 들린 신문의 제목만 봤지, 정작 그 소위의 시선이 활자가 아닌 고운 종이 결에 고정되어있다는 사실은 미처 눈치 채지 못했다. 수구 꼴통 상관이 뒤에서 요즘 장교들의 ‘못돼먹은’ 정치성향을 욕하거나 말거나, 콜린스는 개의치 않고 신문지의 아름다운 결을 연구했다. 압축된 연미색 펄프는 하도 결이 섬세하고 가늘어서 엄지와 검지로 끝을 살짝 잡고 쪽쪽 잡아당기기만 해도 흠 하나 없이 경쾌하게 찢어질 것 같았다. 원 투 티, 원 투 티, 박자를 세어가며 일정한 간격으로 펄프지를 찢을 공상에 푹 빠져서, 콜린스는 벌써부터 들뜨는 기분이었다.

‘밤에 돌아가면 마름모 격자무늬로 찢어봐야지……!’

사랑하는 대위님이 구해다 준 대형 신문지를 내려다보며 콜린스는 뿌듯하게 다짐했다. 그리고 그 옆에 조용히 프라모델을 조립하거나 개 도감을 탐독하는 대위님까지 함께한다면, 그보다 더 평온하고 만족스러운 저녁 또한 없을 터였다. 내키는 대로 마음껏 찢을 수 있는 신문지와 푹신푹신한 이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경쾌한 리듬, 집중할 때면 한층 고요해지는 파리어의 숨소리. 남들과는 약간 다르지만 두 사람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아늑하고 평안한 저녁 일상이었다.





이처럼 콜린스가 용기를 내서 자신의 수인 형질을 고백한 이후로 두 사람은 조금씩 서로의 생활패턴을 맞춰가면서 평화로운 신혼기를 즐기고 있었다. 특히 파리어 입장에서는 이제 콜린스의 모든 비밀을 정복했나 싶을 때마다 새로이 발견되는 연인의 특별한 면모들이 끊이지 않는 즐거움을 가져다주었다.


욕실에 딸린 작은 욕조 안에 어디서 구해왔는지 모를 흰 깃털들을 잔뜩 풀어놓고 그 안에서 거품 목욕 대신 깃털 목욕을 즐기고 있는 콜린스를 발견했을 때는 놀라움을 넘어서서 경이로웠다. 샤워 꼭지를 잠가놓고, 오로지 순백의 부드러운 깃털 사이에 누워서 느긋하게 피로를 풀고 있는 풍경은 한 폭의 고요한 정경을 닮아 있었다. 지그시 눈을 감고 피로한 세상사로부터 잠시간의 도피를 즐기는 청년의 모습은, 그와 일 년 남짓 스물 네 시간을 붙어 지낸 파리어로서도 처음 마주치는 광경이었다. 그는 어디서 공수해왔는지 모를 라디오까지 틀어 놓고서, 전파에서 흐르는 음악을 따라 부드러운 테너로 유유자적 가사를 읊조리고 있었다.


“With a kiss you can strip me defenseless, with a touch I completely lose control─”


파리어가 욕실 문턱에 서서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줄도 모르고서 콜린스는 한참을 그렇게 공상의 시간에 빠져 있었다. 그러다가 오랫동안 한 자세를 유지한 몸이 뻐근해졌는지, 길게 기지개를 폈다. 어깨와 고개가 시원하게 뒤로 젖혀지면서 깃털 더미 사이로 긴 목덜미가 존재를 드러냈다. 깃털 사이에 파묻혔던 상아빛 살결은 마치 처음부터 한 색이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배경 속으로 녹아들었다. 화사한 금발과 욕조 끝자락 밖으로 슬쩍 빠져나온 긴 다리가 아니었다면 다른 색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망각할 듯싶었다. 그 오묘한 착시를 충분히 음미한 뒤에야 파리어는 헛기침을 하며 자기 존재를 알렸다.

“크흠, 라디오는 또 어디서 구해 왔어?”

문가에서 들려오는 파리어의 목소리에 비로소 콜린스가 눈을 떴다. 그러더니 자세를 바로하기는커녕, 불경하게도 더더욱 깃털 안으로 파고들면서 나른하게 웃었다. 양손으로 욕조를 짚고 아예 드러눕듯 기대자, 미처 담기지 못한 깃털이 욕조 밖으로 거품처럼 넘쳐흘렀다.

“만리 타역 하늘 위에서 목숨 걸고 조국을 지키고 있는데 이 정도 사치는 부려도 괜찮지 않습니까? 라고 보급창에 졸라봤죠, 뭐.”

콜린스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흐르는 스윙 리듬에 맞춰서 X자로 꼬고 있던 다리를 흥겹게 흔들거렸다. 산호색 입술로 선율을 흥얼거리는 것도 빼놓지 않았다. 가사는 이제 보다 더 또렷해져서, 마치 들으라는 듯이 선명하게 파리어의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I~ get weak, when I look at you~ weak, when you touch I get~ weak! from this love─”


음악은 최근에서야 댄스홀을 중심으로 유행하기 시작한 이른바 신식 스타일이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넘어온 이 솔직하고 경쾌한 새로운 장르는 대서양을 건넌 이래 빠르게 유럽의 댄스홀로 침투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2박자 계열 왈츠가 아직까지도 여왕처럼 군림하고 있던 런던 무도장의 주요 레퍼토리 자리까지 빼앗기에 이르렀다(*주2). 지나치게 빠르게 움직이는 경박한 리듬, 솔직하다 못해 적나라하고 야살스러운 가사 앞에서 파리어 연배의 사람들은 다소 당황스러워 하곤 했다. 듣고 있으면 덩달아 어깨가 들썩이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추기에는 조금 멋쩍다고 해야 할까? 그런 곡을 콜린스는 매우 익숙한 듯이 박자 하나 놓치지 않고 신나게 따라 부르고 있었다. 파리어는 연인과의 열 댓 살 넘는 나이차를 이런 방식으로 인식하게 될 줄은 전혀 몰랐었다. 그는 당혹스런 기색을 숨기며 짐짓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물었다.

“이런 음악을 좋아했나?”

“그럼요. 듣고 있으면 신나잖아요? 가사도 얼마나 중독성 있는데요. 들어보세요! 당신을 보고 있으면 자꾸만 약해져요, 당신이 날 만지면, 당신 눈을 바라보고 있으면, 한 마디도 못할 만큼 약해져요. 당신의 키스 한 번이 날 발가벗겨버리고─”

“그만, 그만. 알아들었으니까 이제 그만 들려줘도 괜찮아.”

그러나 콜린스는 파리어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목청껏 노래를 따라 불렀다. 심지어 파리어가 어색해하는 티를 보이자, 되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직접 안무를 시연하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당신 손길에 난 정신도 잃어요, 내게 남은 건 당신 기억 뿐~”

벌떡 일어난 상아빛 장신 군데군데에 미처 떨어지지 못한 깃털가닥이 붙는 바람에, 흥겹게 춤을 추는 콜린스의 꼴은 꼭 극장에서 노래 부르는 여가수의 치장을 연상시켰다. 8비트로 딱딱 떨어지는 리듬에 맞춰 발을 구르고 허리를 흔들 때마다 살짝 살집이 붙은 골반이 따라서 통통 튀겼다. 파병된 미군들이 추곤 하던 그 정신없고 빠른 스텝에 맞춰서 욕조 안에서 어깨며 목, 손짓, 발짓 전부를 까딱이는 광경은 흥겨운 동시에 아름다웠다. 파리어는 갓 자란 청년의 자유로이 휘청대는 몸짓에서 여름 한철 나뭇가지 가득 잎을 피우는 신록을 본 것 같았다. 초록색 잎 대신 하얀 깃털을 잔뜩 달고 있는 나무를.

“네가 이런 거 좋아하는 줄은 몰랐네.”

“이런 거? 춤이요, 아니면 노래?”

“둘 다. 음악 잘 안 듣는 줄 알았어. 젊은 장교들이랑 시내 나갈 때도 펍이나 유원지만 갔지, 댄스홀은 잘 안 따라갔잖아.”

그러자 콜린스는 한쪽 눈썹을 찡긋하며 파리어의 굳건하던 믿음에 한 줄기 균열을 냈다.

“아직 저에 관해 모르는 게 많으십니다, 대위님은. 알아가고 배워가야 할 점이 아주 아주 많으세요.”

그는 욕조에 발을 담근 채로 파리어를 향해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그리고 그 당돌한 태도에 대위가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리며 다가가자, 긴 팔을 뻗어 냉큼 그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이런 시절일수록 더 춤추고 노래해야죠. 음악은 언제나 모든 걸 견디게 해주잖아요.”



온화하게 속삭이는 콜린스의 말소리 뒤로 스윙의 생동감 넘치는 선율이 메아리처럼 맴돌았다. 잔잔한 그 품에 안겨, 대위는 무언의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렇게 해서 타고난 특이한 기벽 때문에 고충을 겪던 콜린스 소위는 그를 극진히 아끼는 선임의 인내와 배려 덕분에 병영이라는 제한된 환경에서도 나름의 타협을 통해 자기만의 둥지를 꾸려갈 수 있었다. 기벽이라고 이름 붙이긴 했으나, 기실 찬찬히 들여다보면 콜린스의 ‘둥지 틀기’ 행위가 그렇게 못 견딜만한 것도 아니었다. 푹신푹신한 것들로 무장한 높은 둥지에 앉아서 새가 망을 보듯 도란도란 아래층의 파리어를 구경하기. 라디오의 주파수를 맞춰놓고 흐르는 리듬에 맞춰 종이를 찢기. 유독 훈련이 고됐던 날에는 작은 욕조에 깃털을 잔뜩 풀어놓고 그 속에서 쉬어 보기. 그리고 때때로 스윙의 볼륨을 높이고 주저하는 파리어를 끌어당겨 같이 춤추기.

어느 속담에서도 말하지 않았나? ‘한 영국인의 집은 그만의 성채이니, 그의 앞뜰은 해자가 되고 그의 정문은 도개교라.’(*주3) 방 곳곳을 점령한 이불 요새를 해자로, 깃털 욕조를 도개교로 생각하면 콜린스의 둥지도 이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직접 두 손으로 집 꾸미기를 좋아하는 영국인의 기질이 조금 다른 방식으로 표출될 뿐이라 여기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다 찢은 신문 종이를 발처럼 늘어뜨려 문가에 전시해놓는 습관도 이젠 단지 색다른 장식으로만 여겨졌다.

익숙한 공간에서 익숙한 사람을 더 익숙하게 알아가는 것. 긴장과 들뜬 설렘이 공존하던 연애의 첫 시기가 지나가고 둘의 관계도 보다 평탄한 시점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간혹 ‘가까이서 볼수록 더 좋아 보이고 편해 보이는 사람이야말로 쉽게 빠져나오기 어려우므로 위험하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으나, 삼십 평생을 지나친 고독과 무감각한 시큰둥함 속에서 살아온 파리어에게는 그 마저 질투 섞인 참견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다만 꼭 지금만 같은 시간들이 지속되기를, 그는 진심으로 바랐다.




***




일상에 균열이 생긴 것은 바람이 쌀쌀해지기 시작한 시월 초입, 한로 무렵이었다.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진다는 추분도 어느덧 지나가고, 이제는 다섯 시 경이면 벌써 황혼이 찾아들기 시작해서 시계 바늘이 여섯 시를 넘어가면 활주로의 끝없는 지평선이 검푸른 저녁 어둠 속으로 완전히 물들기에 이르렀다. 해가 완전히 넘어가기 직전 마지막으로 한 번 존재를 드러내는 잔광이 아니었더라면, 정비병들은 활주로에 빼곡하게 늘어선 다양한 기체의 종류를 구분하지도 못할 터였다.

고작 한 달 전까지만 해도 긴 여름 태양이 밤 아홉 시까지 하늘을 밝혀주던 자리를, 이제는 활주로 바닥에 깔린 표시등과 도항사들의 형광 막대에서 나오는 여린 빛이 대신 차지했다. 늦은 오후까지 훈련을 하다 귀환하는 조종사들은 자연광보다 절반 수준으로 약해진 그 빛에 의지해서 검푸른 대기 속에서 기체를 착륙시켜야 했다. 자연의 항해박명이 변경되면서, 낮 비행의 종료와 야간 비행의 시작점을 가르는 군의 기준선에도 변동이 생겼다. 이제는 18시 30분으로 야간 정찰 일정이 앞당겨질 계획이었고, 겨울이 지나가기 전까지 앞으로의 여섯 달 동안은 그 체제가 유지될 것이었다.

콜린스 또한 변경된 시간표에 따라 어제보다 일찍 야간 정찰을 시작하러 자신의 기체 쪽으로 향했다. 활주로에서는 정비병 여럿이 이륙 직전의 직전까지 안전 확보를 위해 각 기체에 매달려 마지막 점검을 하는 중이었다. 먼저 이륙 준비를 마친 동료들의 기체에서 프로펠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거대한 바람소리가 고막을 진동하는 그 사이를 건너가면서, 콜린스는 매 정찰 때마다 그러하듯이 심호흡을 깊이 들이마셨다.

“긴장 풀어. 오늘도 잘 부탁한다.”

옆으로 지나가던 파리어가 어깨를 툭툭 치며 익숙하게 턱짓을 했다. 오랫동안 조종간을 잡느라 거칠어진 손바닥이 콜린스의 단정한 정복 어깨 위를 짧게 쓸고 지나갔다. 스치듯 말 듯 짧은 접촉이었지만 콜린스는 그 손이 전하는 위로를 놓치지 않았다. 그 증거로 그는 반대쪽 손을 올려 아직 자신의 어깨를 놓지 않고 있던 윙 메이트의 차가운 손을 꽉 마주잡았다. 그 밖의 대답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가 실전에 투입 된지도 어느덧 일 년이 지났지만, 조종석 위로 올라타기 직전의 무거운 긴장감은 아직까지도 쉽게 익숙해지지 않는 불청객이었다. 구명조끼와 방한모, 보안경, 그리고 헬멧까지 착용하고 나자 목-어깨-등으로 이어지는 상체 근육이 뻐근하게 당겨왔다. 긴장을 덜어낼 겸 그는 자신만이 들을 수 있도록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전투기를 모는 조종사라면 누구나 그런 자기만의 부적 하나씩은 가지고 있었다. 상공 만 미터가 넘는 대기권 상층부에서 평균 5기압의 중력을 견뎌가며 기체를 모는 일은 신체에 막대한 부담을 주는 행위였고, 특히 전략 운용의 특성상 급강하와 급선회가 잦은 전투기 안에서는 그 부담이 극대화되기 십상이었다. 신체에 가해지는 압박이 때로 심장을 뚫고 머리까지 올라가 뇌까지 찢어버릴 것 같은 극심한 고통을 두어 번 겪고 나면, 아무리 합리적이던 사람이라도 누구나 자연스럽게 우연이니 징크스의 존재를 믿게 되어 있었다. 개중 어느 사람은 평소 등한시하던 기도를 빌면서 자비를 구하기도 했고, 좀 더 대담하거나 불경한 이는 오히려 무모한 허풍을 떨기도 했다.

포티스 팀의 경우로 말하자면, 파리어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자기 기체에 기대서서 묵묵히 지평선을 바라보는 것이 그 방법이었고, 콜린스에게는 휘파람을 부는 것이 그랬다. 평소 군기 바짝 든 그가 새처럼 입술을 얇게 누르고 병사들이나 부를 법한 유행가를 흉내 내는 때는 그때가 유일했다.

그렇게 가호 아닌 가호를 비는 사이, 어느 새 탑승 시간이 다 되었다. 콜린스는 의식적으로 입을 다물고 그만 콕핏 위로 향했다. 한쪽 다리를 먼저 집어넣고 마저 올라타려던 순간이었다. 팀원 중 마지막으로 등장한 리더가 평소보다 진지한 목소리로 사기를 불어넣었다.

“오늘 제대로 하자고. 당분간 야간 정찰은 못 띄울 테니까 말이야.”

“무슨 일 있는 겁니까?”

“내일 저녁부터 이 지역 일대에 야간 공습이 있을 거라는 첩보가 들어왔어. 당분간 정찰은 정지, 비상관제 상태로 돌린다.”

리더의 통보를 들은 콜린스가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기관관제가 아니라 말입니까?”

“훈련장, 행거, 보급창, 사령본부, 활주로까지 전부 소등 들어갈 거다. 제리놈들은 눈만 밝아. 재무부에서 우리한테 쏟아 부은 돈이 얼만데 자존심은 상해도 기지는 숨겨야 하지 않겠나(*주4). 라이터 불 하나까지 안 보이게 소등하라는 지시다.”

리더의 설명을 들은 콜린스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리더는 부쩍 차갑게 굳은 막내의 표정을 알아차리고, 부러 평소보다 고조된 어조로 힘을 실어 말했다.

“그러니까 오늘 제대로 조지고 오자고. 당분간 날뛸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해.”

그렇게 말하며 리더는 평소와 다름없는 묵직한 발걸음으로 선두를 이끌었다. 그 뒤를 따라 파리어와 콜린스가 각각 포티스 1호기, 포티스 2호기에 탑승했다.

짧은 시동 준비가 끝나고 세 대의 스핏파이어 기가 지상을 박차고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하늘 위로 올라간 기체는 긴 여행을 시작하는 철새 무리처럼 완벽한 균형의 삼각 편대를 맞춰 저 멀리 해안선 쪽으로 멀어져 갔다.
철근이 내는 진동과 귀에 꽂은 무전기 너머로 들려오는 팀원들의 지시를 들으며, 콜린스는 땅에서는 온갖 수를 써도 가라앉지 않던 펄떡거림이 비로소 진정되는 것을 느꼈다. 한낮의 강렬한 태양이 지나가고 차분한 달빛이 내리쬐는 온화한 구름 사이를 가르고 지나가자, 그때서야 사지가 제 자리를 찾은 듯 활력을 얻었다.

‘결국 파일럿이라는 족속들은 하늘에서 살아야 하는 놈들인 거야. 저항을 가르고 날아갈 때 심장이 꽉 조이는 느낌, 그 미친 압박감에 익숙해지는 바람에, 이제 땅 위에서는 좀처럼 가슴이 편하질 못해.’

콜린스는 언젠가 리더였는지 파리어였는지, 둘 중 한 사람이 술자리에서 지나가듯 중얼거렸던 말을 떠올렸다. 그 비과학적인 주장의 진실 여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오늘의 야간비행이 내일부터 시작될 등화관제 전에 주어진 마지막 자유시간과도 같다는 사실만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여느 보병들이 그러하듯, 파일럿인 콜린스에게도 언제 끝날지 모르는 암흑의 시간을 오직 침묵 하나로 견뎌야 하는 등화관제는 총탄이 빗발치는 하늘의 전장보다도 더 버티기 힘든 무명의 적이었다.






1940년 시월 중순의 어느 오전. F기지와 인근 민가에 대한 공습경보가 발령되었다. F 지역은 비행장이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백 여 가구 정도가 거주하던 시골 소도시였기 때문에 주요 공격 지점에서 아슬아슬하게 빗겨나 있었다(
*주5). 마찬가지로 F기지 역시 전투기 열 댓 대, 폭격기 둘, 조종사 스무 명, 공병과 정비병 및 정보장교를 포함한 기타 인원 백여 명으로 구성된 비교적 조촐한 규모의 기지였다. 따라서 F기지가 이번 공습 대상에 포함된 것은 순전한 운의 탓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다행히 이번 공습은 통신병들의 도청 덕분에 미리 예견되어 있던 공격이었다. 그리고 상대측에서도 아군의 계획이 도청당할 가능성에 대해서 어느 정도 감수하고 있을 터였다. 바로 이 지점에 장기전의 아이러니가 놓여 있다. 그토록 서로의 패를 훤히 알고 있는 상황에서도 양측은 어쨌든 공격과 방어를 감행해야 한다. 일종의 기 싸움인 것이다. 적도 아군도 이 공습의 본질이 본격전이 아닌 간헐적인 기선 제압일 뿐이라는 사실을 잘 인지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관대하게 물러서거나 무시할 수 있었다면 애초에 전쟁은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F기지 사람들은 평소 훈련한 대로 절차를 따라 차분하게 공습 대비를 시작했다.

해가 지기 시작하는 저녁 6시. 활주로 및 행거의 모든 조명을 소등하라는 기관관제 명령이 먼저 발효되었다. 저녁 7시. 황혼이 마지막으로 자취를 감추기 직전, A팀과 B팀에게 이번 공습의 일차 방어를 맡으라는 지시가 하달되었다. 두 팀의 대원들은 이제 거의 희미해진 저녁놀을 등불 삼아 스핏파이어에 올라탔다. 적측이 활주로나 행거에 직접적으로 폭격하는 무모한 짓을 저지르지 않는 한, 그들은 공중에 떠서 상황을 주시하는 대치 상태를 지속할 예정이었다.

파리어와 콜린스가 속한 포티스 팀은 이번 방어 작전에서 일단 제외되었으며 각자 위치에서 대기 상태를 유지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두 사람은 평소 수백 번씩 훈련했던 대로 경보 발령 시의 절차를 따라 행동했다. 지시된 대기 장소는 각자의 방이었다. 말인즉 적군도 어디까지나 사기 진작용으로 실시하는 시위성 공습이라는 뜻이었다. 한 달 전 남부 대도시에서 이뤄졌다던 대규모 공습과는 성격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파리어는 그 사실이 의미하는 바를 상기하고는 약간이나마 걱정을 덜어냈다.

저녁 8시. 방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방공 절차에 따라 창문 전체에 암막 커튼을 치고 모든 방의 전등을 소등했다. 촛불이나 성냥불도 예외는 아니었다. 오직 조도를 낮춘 비상등만이 허용되었고, 비상등의 그 약한 빛을 등대 삼아 둘은 나란히 마주 보고 앉았다.

“대위님, 지금 시각이?”

“20시 13분.”

대위가 손목에 찬 전자시계의 숫자를 흘끗 보며 대답했다. 여느 때와 같은 긴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오직 사실 확인만을 묻는 짧은 한 마디 한 마디가 부쩍 긴장된 분위기를 암시하고 있었다. 직각 등받이가 있는 의자에 앉아서 허리를 꼿꼿이 펴고 정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모습에서부터 감출 수 없는 긴장이 느껴졌다.

언제 어느 때라도 뛰어나갈 수 있도록 바른 자세를 유지하는 것은 조종석 위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때와 지금 상황에 다른 점이 있다면 이곳 지상에서는 기다림의 끝을 알리는 출격 신호도, 대기를 가르고 높이 치솟는 아찔한 감각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오직 어둠 속의 무한한 기다림만이 놓여 있었다. 앞으로 열 시간. 언제 근처 지역에 떨어질지 모르는 총탄에 대한 불안한 기대와 함께 버텨내야 할 시간의 총량이었다.

참호처럼 어둡고 네모난 방에서 지루한 시간을 견뎌내다 보면 병사들은 나름의 방법을 강구해내기 마련이다. 파리어의 경우, 빈 담배를 물고 이로 질근질근 씹는 것이 그 방법이었다. 행여 암막커튼의 틈 사이로 빛이 새어나가서는 안 되니, 불을 붙이는 건 금물이었다.

‘불 없이 피우는 담배라니, 난민 처지도 이보다는 낫겠군.’

파리어는 피어오르는 짜증을 삭이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그렇게 잇새로 스며드는 쓴 연초 향을 음미하고 있을 때였다. 문득 맞은편을 쳐다 본 그는 여느 때처럼 신문지 한 장을 잘게 찢고 있는 콜린스의 모습을 발견했다. 평소 앞뒤 꽉 막힌 상관한테 한 소리라도 듣고 오는 날이면 꼭 저렇게 가늘고 기다랗게, 균일한 너비로 신문지를 찢곤 하는 것이 콜린스의 스트레스 해소법이었다.

이런 상황에서조차 변하지 않는 콜린스의 특이한 습관을 확인하고 나자, 파리어는 한결 마음이 누그러지는 기분이었다. 그는 알싸하고 독한 담뱃잎이 폐부를 찌르는 와중에도, 콜린스가 하는 짓을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종이 찢는 건 정말 습관인가 보네. 캄캄한 데도 어쩜 그렇게 곱고 이쁘게 잘 찢냐, 넌.”

파리어가 분위기를 완화해보려는 듯 정답게 물었다.

“아…… 예, 뭐. 습관이죠.”

콜린스는 자기를 부르는 파리어의 목소리에 잠깐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가, 곧 다시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무릎 위에 펼쳐 놓은 누런 펄프를 잘게 찢어내는 데 정신을 집중했다. 신문지는 어느 새 둘째 장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윗부분을 온전하게 남겨놓고 아랫부분만 찢어서 술처럼 만드는 그의 독특한 공예에는 은근히 미적인 구석이 있었다. 파리어는 멀리서 들려오기 시작한 적기의 엔진소리도 잊고서 콜린스가 하는 양을 구경했다.

‘고놈 손가락 한 번 참 예쁘다.’

구르고 구른 조종사답지 않게 곧고 기다란 손가락이 바스락 바스락 반복적으로 움직이는 모습이 실로 비단 찢던 황제의 애첩과 똑같았다.  



파리어가 이상한 점을 발견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한참 콜린스의 손 놀이를 관찰하고 있는데, 그 움직임과 모양새가 평소 침대 위에 쿠션을 깔아놓고 종이를 찢던 때와 어딘가 다르다는 느낌이 문득 머리를 스쳤다. 원래대로라면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규칙적으로 찢어졌어야 할 신문지가 지금은 울퉁불퉁한 길을 내며 갈라지고 있었다. 지그재그 모양으로 절단된 신문지 끝자락 위를 콜린스의 희멀건 손끝이 지나갈 때마다, 얇은 섬유질의 펄프가 아슬아슬한 불균형을 이루며 파절되었다. 그 결과 갈가리 찢어진 신문지는 우아한 직선미를 자랑하는 기하학적 발이라기보다는, 너절한 종이 꾸러미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길가에 나뒹구는 조잡한 폐지 더미와 다를 바 없었다.

그 기이한 변화를 깨닫고서, 파리어는 콜린스를 바라보느라 무의식적으로 앞으로 굽혔던 허리를 바짝 세웠다. 그는 눈앞에 마주앉은 후임의 안색을 다시 한 번 주의 깊게 들여다봤다. 각 잡힌 짙푸른 정복을 입고서 군인답게 꼿꼿이 앉아있는 자세는 평소와 한 점 다를 바 없었다. 혹시 모를 비상사태를 대비해서 긴장을 놓지 않고,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의연한 자세와 표정도 모범적이리만치 완벽했다. 오직 그의 두 손 안에서 불규칙적으로 찢기고 있는 종잇장만이 불길한 떨림을 암시했다.

좀처럼 균일하게 유지되지 못하는 간격. 일 밀리미터도 채 안 되게 좁게 찢어졌다가, 바로 다음 순간 손가락 한 마디 너비로 갑자기 넓어지는 일관적이지 못한 변화. 파리어는 종이에 집중했던 시선을 거두어 콜린스에게로 직접 돌렸다.

“너. 괜찮은 거냐?”

파리어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물었다. 비행 중에 명령을 전달할 때나 사용하는 무겁고 진지한 음색이었다. 그에 대해 콜린스는 담담한 중저음의 테너로 받아쳤다.

“예, 문제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두 손은 대답하는 주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파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불안한 떨림은 이제 신문지를 지나 그 신문지를 집고 있던 희멀건 손가락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그 전이를 분명히 목격한 파리어는 다시 한 번 추궁하듯 물었다.

“콜린스. 정말 괜찮냐고.”

“예, 괜찮습니다. 대위님이야말로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공습 한 두 번 겪어본 것도 아니시면서요.”

콜린스가 옅은 미소를 보내며 대답했다. 마치 혹한기 훈련을 나갈 때마다 추위에 떠는 파리어를 놀리면서 농담하던 때를 복기해 보려는 듯, 안쓰러운 시도였다. 그러나 웃음과 농담이라는 가면으로 아무렇지 않은 척 하려고 해도, 눈가 근육이 파르르 떨리는 것마저 감출 수는 없었다. 그런 근육 떨림은 정신력이나 의지로 막는다고 해서 숨길 수 있는 성질의 반응이 아니었으니.

그때서야 파리어는 깨달았다. 잘 견딜 거라고 생각했던 콜린스는 전혀 잘 견디고 있지 못했다. 너무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은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는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낮게 욕설을 읊조렸다.  

“젠장.”

그 욕설은 어디까지나, 불안에 질려 떨고 있는 연인을 바로 눈앞에 두고도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할 만큼 아둔하고 무심했던 자기 자신을 향한 분노였다. 그러나 콜린스는 파리어의 작은 욕설이 자기를 향한 것이라고 착각했는지, 안 그래도 긴장해 있던 허리를 더욱 꼿꼿하게 세우면서 굳게 말하는 것이었다.

“저 정말 괜찮습니다, 대위님. 혹시 이 소리 때문에 신경 쓰이신다면 그만 하겠습니다. 제대로 처신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에 어찌나 군기가 바짝 들어 있었던지, 안쓰러울 정도였다. 당장 그런 게 아니라고, 그렇게 움츠리지 말라고 정정해줘야 했다. 그러나 끝까지 자기의 불안과 초조를 숨기려고만 하는 콜린스의 반응 앞에서 파리어는 그만 버럭 화를 내고 말았다.

“아니, 너 안 괜찮아. 안 괜찮은데 왜 거짓말을 해?”

침착한 어조로 콜린스를 진정시키고 극도의 불안에서 꺼내주려던 계획은 마음보다도 먼저 입 밖으로 튀어 나간 억센 말 앞에서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직접적으로 내면 깊은 곳의 두려움을 지적당하자, 콜린스도 반사적으로 날카로운 반응을 보였다.

“괜찮습니다.”

“안 괜찮아!”

“괜찮다니까요.”

콜린스가 고집스레 주장했다. 그는 시선마저 파리어 어깨 너머 벽에 고정한 채로 꿈쩍하지 않았다. 일부러 파리어와 눈이 마주치는 것을 피하려는 것처럼도 보였다. 그러나 그 순간에마저 양 손은 더욱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간헐적으로나마 신문지를 찢어보려던 손가락은 이제 겨우 그 끝을 붙들고 있는 것이 한계였다. 애가 탄 파리어가 계급과 나이까지 동원해서 콜린스를 압박해 봤지만, 이 어린 녀석은 경애하는 윙 메이트 앞에서 약한 면모를 들켰다는 사실에 내심 충격을 받았는지, 도리어 더 무표정의 가면 뒤로 숨어 들어갈 뿐이었다. 그 닫힌 문이 돌처럼 단단하기 그지없었다.

“됐다. 그만하자. 몰아붙여서 미안하다.”

무한히 돌고 도는 실랑이에 지쳐버린 파리어가 먼저 백기를 던졌다. 안 그래도 불안과 초조로 제정신이 아닌 사람한테 무작정 몰아붙여봤자 문제가 해결 될 리 만무했다. 그는 그저 콜린스의 변화를 조금 더 일찍 눈치 채지 못했던 자신의 둔함,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한테 걱정스런 마음 하나 어른스럽게 표현하지 못하는 미성숙함이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대위님, 저는……, 전 그저……”

파리어의 표정이 어두워짐에 따라 콜린스가 의자에 붙이고 있던 엉덩이를 들썩이며 무언가 말하려 했다. 그러나 종국에는 그도 이 되풀이 되는 엇갈림과 오해의 무효용성을 깨달았는지, 몇 번 달싹이던 입술도 그만 꾹 닫히고 말았다. 콜린스는 윗입술이 얇은 편이라서 그렇게 입을 일자로 다물고 있을 때면 반작용으로 아랫입술을 세게 깨무는 버릇이 들어 있었다. 도톰한 아랫입술이 이번에도 어김없이 피가 비칠락 말락 아슬아슬하게 잇새에 짓눌리고 있었다. 그 장면을 그저 지켜보고 견디면서, 파리어는 차라리 적기 격추에 실패하고 차디찬 심해 속으로 떨어져도 이보다는 맘이 덜 시리겠다고, 서글피 생각했다.

손목시계의 시침이 21시를 지나고 첫 번째 포격음이 들려왔다. 명중은 빗나간 듯 했다. 폭음이 들려오는 방향은 활주로나 행거, 어느 쪽도 아니었다. 아마도 민가의 버려둔 헛간 어딘가. 이어서 두 번째, 세 번째 폭음이 뒤따랐다. 유성우 같은 불꽃이 튀어 오른 지점은 이번에도 먼 곳 어딘 가였다. 잊을 만하면 시계 초침처럼 규칙적으로 펑, 펑, 터뜨리고 가는 굉음만이 공습의 진행을 알리고 있었다.

간혹 멀리서 비치는 화염 불길이 방 안을 짧게 비추고는 눈 깜짝할 새에 다시 사그라졌다. 그 순간의 불빛이 지난 몇 주 간 콜린스가 애써 둥지를 틀어 놓은 이층침대 위로 비쳤을 때, 비로소 파리어는 하늘의 격전지 어느 곳에서도 느껴보지 못했던 참담함을 느꼈다. 어느 곳보다 친숙해야 할 공간―우리의 방이 고작 하룻밤 몇 시간 사이에 낯설고 음침한 방공호로 뒤바뀌어 버렸다. 그 스산하고 불편한 감각은 긴 밤을 견뎌야 하는 사람들의 뼛속으로 너나 할 것 없이 깊숙이 스며들었다.




***




경보 발령 이틀째의 날이 밝았다. 밤새 하늘을 뒤흔들어놓았던 폭격기의 소란은 동이 트기 시작하는 새벽 4시를 기점으로 일시중단 되었고, 그렇게 기지에도 잠시간의 휴전 상태가 찾아들었다. 암묵적인 소강이라고 해도 소강은 소강이었다. 밤새 무덤처럼 잠들어 있던 기지는 흐릿한 여명에 기대어 다시 소생하기 시작했다. 두 번째 야간 공습이 시작될 때까지는 열 두 시간이 넘게 남아 있었지만, 지난 열 두 시간 동안 한 숨도 눈을 붙이지 못하고 극도의 긴장 상태에서 밤을 지새운 병사들에게는 그마저도 부족했다. 각자 재량껏 눈을 붙이는 사이사이, 한 쪽에서는 밤새 있었던 폭격의 피해를 측정하고 보수하는 절차가 이루어졌다.


그 고요한 소란 사이를 에드워드 파리어 대위는 묵직하고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헤치고 지나갔다. 길을 가다 마주친 사람들도 부쩍 가라앉은 대위의 표정을 보고서는 굳이 말을 걸지 않았다. 어차피 조종사들의 일은 조종팀 내부에서 이뤄지는 영역인 데다, 포티스 팀에게 따로 명령이 하달되면 어련히 알아서 하겠거니 짐작할 뿐이었다. 다만 언제 내려올지 모르는 대타 출격 명령에 대비해서 쉬지 않고, 이 이른 시간에 보급창으로 향하는 파리어의 행동에 의아해 할 뿐이었다.


지난 밤, 지루한 공습의 기다림보다도 더 아픈 일을 겪었던 그는, 새벽 동이 트자마자 전략을 변경할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총 삼일 간 이어질 예정인 공습 기간 내내, 콜린스가 그토록 힘겨운 모습으로 홀로 초조를 견디는 상황을 그저 바라만 보는 것은 그에게도 고문 같았다. 웅크린 채 견뎌내는 것만이 할 수 있는 최대의 방어인 공습 시기 동안에는, 하늘에서 전투기를 몰고 적을 쫓아낼 때만큼 적극적으로 어떤 행동을 취하기란 어려웠다. 맹공의 독수리라고 해도 지상에 발이 묶인 이상 일단 인내하고 견디며 그 시간을 살아남는 것이 최선이었으니.


그러나 발이 묶였다고 해서 무기력하게 상황에 휩쓸리거나 떠밀려 가는 것은 파리어의 성정과 거리가 먼 일이었다. 그는 하늘에서나 땅에서나, 단 한 줄기 틈이나 희망이라도 보인다면 그를 놓치지 않고 돌파해낼 여력이 있는 사내였고, 끝까지 버티는 쪽이 살아남는 이 밤의 전쟁에서는 그런 집요한 희망이야말로 가장 필요한 무기였다. 동시에 암흑이 주는 공포 속에서 콜린스와 그 자신으로 하여금 제정신을 붙들고 있도록 막아줄 최선의 방패였다. 바로 그 유일한 지지대를 찾아, 그는 통신병이 작업하고 있을 작업장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잭슨 상병, 안에 있나?”


파리어는 대답을 듣지 않고 먼저 문을 열어 젖혔다. 안에서 한창 전신을 점검하던 중인 통신병은 어안이 벙벙한 와중에도 득달같이 일어나 경례를 붙였다.


“안녕하십니까, 파리어 대위님! 무슨 일이십니까!”

“남는 라디오 하나 있나?”

“퇴짜 맞고 돌아온 물건이 한 대 있긴 합니다. 그런데 어차피 기지 주파수는 통신기지 쪽 제외하고 전부 차단하라는 명령이 내려와서, 별 소용없으실 텐데요.”

“아예 지역 밖에서 끌어오는 방법은? 군부대에서 사용하는 주파수 말고 민간용으로. 그러면 더 먼 데서 끌어올 수 있잖아.”

“예, 그렇습니다만, 그렇게 하면 신호가 약해져서 잘 안 들리실 겁니다. 잡음도 섞일 테고……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십니까?”


통신병도 아닌 사람이 공습 대비로 정신없는 와중에 라디오를 한 대 구해달라니, 누가 봐도 뜬금없는 부탁이었다. 잭슨 상병으로서는 의도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실전에서 구를 만큼 구른 베테랑 병사라고 해도 부대의 핵심 전력이나 다름없는 조종사, 그것도 장교가 상대가 되면 몸을 사리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 면에서 있는 용기 없는 용기까지 짜내서 파리어에게 목적을 물은 상병의 태도는 참으로 모범적인 군인의 현신다웠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문제는 그 헌신적인 용기마저 무대포로 깔아뭉개는 파리어 대위의 암석 같은 카리스마와 불도저 같은 옹고집에 있었지만.


“쉘 쇼크로 고생하는 사병들 정신건강 증진용이다. 수리서 사유란에는 대충 그렇게 적어 둬. 자네 실력 잘 아니까 부탁하는 거야. 뭐 이미 잘 알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새겨 두라고.”


그렇게 말하며 적나라한 설득과 회유를 제시해 오니 상병도 결국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지급 사유란에 적을 변명까지 알아서 읊어주는 것은, 혹 뒷일이 안 좋게 흘러가도 본인이 책임지겠다는 뜻이었다. 결론적으로 고위 장교로부터의 칭찬에 고무된 잭슨 상병은 흔쾌히 창고에서 남는 라디오를 꺼내왔고, 건네주기 전에 직접 다시 한 번 손을 봐주는 세심한 서비스까지 베풀었다.


“도움이 되어서 영광입니다, 대위님!”


“음, 자네의 용감한 선택이 사병들의 심신 안정에 큰 도움이 될 걸세. 자랑스럽게 여겨도 좋아. 그럼 계속 수고하고.”


“충!성!”


문 밖을 나서는 파리어의 등 뒤로 상병의 감격한 듯 우렁찬 경례 소리가 들려왔다. 방금 늘어놓은 지급 요청 사유 중에서 도움을 받는 대상이 사실 사병들이 아니라 한 명의 장교라는 점에서 사소하게 다르기는 하지만, 큰 틀에서는 맞는 말이니 문제랄 것도 없다.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한결 가볍고 든든해진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숙소에서는 뒤늦게 눈을 붙인 콜린스가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길고 힘겨운 밤을 지새운 그의 연인이. 벌써부터 가슴이 뛰었다.  




***





콜린스가 눈을 떴을 때 해는 벌써 중천을 한참 지나 서쪽으로 방향을 트는 중이었다. 처음 눈을 붙였을 때와 별로 달라지지 않은 태양의 고도에 처음에는 겨우 십 분도 못 자고 깨버린 건가 싶었다. 그러나 반쯤 열린 창틈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은 새벽의 찬바람이 아니라 오후 어스름의 탁한 바람에 가까웠고, 결정적으로 푸른 기보다 노란 기가 두드러지는 하늘색이 지금 시기가 여명이 아닌 황혼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세상에!”


기겁하며 일어난 콜린스는 우선 시계부터 확인했다. 다행히 아직 시침은 17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날이 지날수록 빠른 속도로 짧아지는 해 그림자와 양지에서 빗겨나 있는 숙소 위치 때문에 실제보다 더욱 어둡게 보인 것이다. 아무리 얼이 빠졌기로 거니 설마 관제 신호 시작마저 놓치는 멍청한 실수를 저질렀나 싶어 가슴이 철렁했다. 입대 후 시간에 관한 한 단 한 번도 실수한 적이 없었기에, 젊은 소위는 더더욱 참담한 자괴감을 느끼며 고개를 수그렸다.


그는 피로라는 돌덩이에 짓눌리는 듯한 전신을 간신히 움직여, 방금 전까지 몸을 눕혔던 간이 의자에 다시 바로 앉았다. 그러나 바른 자세는 오래 가지 못했고, 그는 곧 두 팔로 머리를 감싸 안으며 웅크린 태아의 자세로 주저앉았다. 간밤의 폭격, 끝나지 않는 기다림, 그 속에서 처음으로 마주한 겁먹은 자신의 모습. 암울한 자기 고백이 어지러이 머릿속을 휘저었다.


진창 속으로 끌려 들어가던 콜린스의 의식을 두드린 것은 파리어의 비음 섞인 인사였다.


“제대로 잤어?”


언제 돌아왔는지, 그는 거실의 유일한 책상 앞에 앉아 네모난 기계를 이리저리 만져보고 있는 중이었다. 눈을 마주치지 않고서 말로만 안부를 확인하는 그런 태도가 오히려 콜린스는 감사했다. 적어도 이 위치에서는 눈가 떨림이 멈추지 않는 처량한 꼴을 보여줄 필요는 없었으니까.


“너무 푹 자서 하마터면 공습 시간까지 놓친 줄 알았습니다. 제리놈들 폭격기로 엄한 데 빗 맞추는 거 구경하는 것만큼 재밌는 구경거리도 없는데, 놓치면 얼마나 아깝겠습니까.”


“농담할 기력이 남아있는 걸 보니 둘째 날 캠핑도 잘 버티겠군 그래.”


“아무렴요.”


애써 받아치는 콜린스의 미약한 웃음소리를 끝으로, 대화는 거기에서 그쳤다. 그 후 비상관제 신호가 내려오기까지의 남은 시간을, 젊은 소위는 노을을 등진 채 묵묵히 기계 수리에 집중하는 파리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기다렸다.


20:00시. 시계의 세 바늘이 하나로 합쳐짐과 동시에 고막을 찢는 경보 사이렌이 울렸다. 비상관제의 첫 번째 알림이었다. 모든 것이 어젯밤과 똑같았다. 암막커튼을 치고, 등화관제 된 어두운 방 안에 앉아 무한한 대기를 시작했다. 밤 여덟 시가 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공습경보 신호는 이제 하루의 일상이나 마찬가지였다. 인간의 신경줄을 갉아먹는 그 소음이 어느 새 정시를 알리는 빅벤의 종소리나 BBC 라디오의 저녁 뉴스 오프닝처럼 자연스럽게 기지 일과에 녹아들어간 것이다(
*주6). 폭격이 사람을 피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대신 폭격에 생체리듬을 맞추기 시작했다.


콜린스는 마지막으로 커튼 줄을 단단히 동여매기 전, 살짝 바깥을 내다보았다. 등화관제 된 기지에는 가로등 불빛 하나 남아 있지 않아서 물체의 그림자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 낮 시간 동안 그토록 익숙하게 돌아다녔던 건물들도 무거운 암흑에 묻혀 보이지 않았고, 양초를 켜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은 것은 방 안도 마찬가지였기에, 창문에 아무리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본들 빛이 없으니 유리 위에 얼굴이 비치는 일도 없었다. 집안 곳곳에 맺혔던 파리어와의 추억마저 그 어둠 속에 먹혀버릴 것만 같았다.


콜린스는 어제와 똑같은 의자에 똑같은 자세로 자리를 잡았다. 직각 등받이가 달린 간이 의자는 구조상 앉으면 자연스럽게 허리로 힘이 쏠리고 자세가 꼿꼿하게 펴지는 특성이 있었다. 따라서 비상시에 언제든 튀어나갈 수 있도록 바른 자세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전신의 긴장을 풀 수 없게 되니 수 시간 동안 그 위에 앉아있다 보면 결국 신체가 경직되기 십상이었다.

바로 그런 경직을 약간이나마 풀기 위해 병사들은 각자 불붙이지 않은 담배니 사탕이니 껌 따위를 동원하는 것인데, 콜린스는 이번에는 일부러 그의 위안거리였던 신문지를 준비하지 않았다. 어제 대기 시간에 파리어 앞에서 추태를 보였던 일을 스스로 견딜 수가 없어서, 차라리 손에 아무것도 쥔 것 없이 긴긴 공습의 밤을 지새우는 쪽을 택한 것이었다. 혹시 자기도 모르는 새에 종이 비슷한 것을 찾아 손을 휘두를까봐 일부러 두루마리 휴지나 티슈도 안 보이는 서랍 속에 치워버렸다.


그는 떨리는 손을 억지로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았다. 그리고 주의를 분산시켜보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아직까지 자리를 서성이는 중인 파리어를 불렀다.  


“대위님, 착석 안 하십니까?”


“금방 간다.”


대위는 대답과 동시에 자리에 착석했다. 평소의 그답게 침착하고 꺼릴 것 없는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콜린스라게 한 점은 바로 파리어가 앉은 위치였다. 그는 지난밤처럼 콜린스의 맞은편에 앉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옆쪽에 의자를 옮겨다가 나란히 앉아버렸다. 그리고 아까 전부터 애지중지 품고 있던 작고 네모난 기계를 꺼내서 옆쪽 바닥에 내려놓는 것이었다.


“대위님! 여기에 앉으시면 어떡합니까!”


당황한 콜린스가 작고 빠른 목소리로 타박했지만, 대위는 오히려 눈썹을 들썩이며 되물었다.


“방공 절차에 나란히 앉으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던가, 소위? 런던에서는 시민들이 방공 대피를 할 때면 지하철 대합실이나 댄스홀에 서로 팔짱을 끼고 앉아서 기다린다던데? 옆 사람과 체온을 나누고, 평소처럼 떠들고 이야기하고, 사기를 북돋는 노래를 부르면서 적들한테 보란 듯이 엿 먹이는 태도가 더 용기 있고 가상한 태도 아닌가?”


짐짓 근엄한 표정을 지으면서 궤변을 늘어놓는 파리어 앞에서, 콜린스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는 체념한 표정으로 자기 옆에 바싹 어깨를 붙여 오는 상관을 내버려두었다. 지하철 역의 런던 시민들처럼 팔짱을 끼려고 들지 않은 것만 해도 어디냐고 위안 아닌 위안을 하면서.


그러나 더더욱 콜린스를 경악케 하는 일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첫 번째 폭음이 들려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파리어가 바닥에 쭈그리고 앉더니 그 작고 네모난 기계의 버튼을 이리저리 돌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대위님! 진짜 뭐 하시는 거예요!”


당황한 나머지 콜린스는 군대식 경어를 붙이는 것도 잊고서 사적일 때나 사용하는 어조로 불쑥 외쳤다.


“쉿, 조용히.”


그러나 파리어는 들은 척도 않고서 한 주먹거리밖에 안 되는 네모상자를 툭툭 치거나 잡을 듯이 두드리질 않나, 얼떨떨한 짓을 계속했다. 결국 작전을 바꿔서 수를 놓는 여인처럼 세심한 손길로 살살 안테나를 조정하고 나서야 기계는 비로소 순순히 주인이 원하던 반응을 내놓았다.


수십 킬로미터 밖, 버려진 헛간 위로 떨어지는 포탄 소리. 작은 구체로 집약된 포탄의 질량이 목조 지붕을 뚫고 내려가면서 내는 폭발음. 불붙은 목재가 타들어가는 소리. 먼 거리에서, 그러나 선명하게 들려오는 그 괴로운 소음 사이로, 낡은 라디오의 지직 거리는 잡음이 한 땀의 바늘처럼 날카롭게 공기를 꿰뚫었다.


원하던 바를 성공시킨 파리어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콜린스를 돌아보았다.


“들어봐.”


기지에서도 한참 떨어진 다른 도시에서 주파수를 잡은 것인지, 라디오에서 나오는 소리에는 잡음이 심하게 섞여 있었다. 낮게 울리는 베이스와 드럼의 리듬, 트럼본의 구성진 울림이 거의 분간이 되지 않고 한데 뭉뚱그러져 있었다. 그러나 그 뒤섞인 잡음의 베일 뒤로부터, 한 익숙한 선율이 천천히 혼돈으로부터 나와 그 형태를 드러내려 하고 있었다. 허스키한 여가수의 음색이 전달하는 익숙한 가사가.



I … wea… wh…n I look … you
Weak … you tou… me




중간 중간 잡음에 가려 들리지 않는 선율은, 그새 자기를 잃어버린 옛 친구를 타박하기라도 하듯, 집요하게 이어지며 듣는 이의 고막을 두드렸다. ‘어떻게 날 잊어버릴 수 있어?’ 가사는 이제 그를 전달하는 가수의 목소리를 넘어서서 겁에 질린 친구에게 직접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파리어가 옆에서 그 투정을 거들었다.


“I get weak when I look at you, weak! when you touch me~”


잊으려고 해도 잊을 수 없는 익숙한 선율이었다. 제대로 전파를 잡지 못하는 라디오가 부르는 노래의 선율을 따라서, 파리어가 대신 제대로 들려주고 싶었는지 어색한 음조와 박자로 서투르게 노래를 따라 불렀다. 섹시한 여가수의 희미한 목소리 위로 대위의 고저 없이 흔들리는 목소리가 겹쳤다. 박자도 음정도 어딘가 빗나간 어설픈 모방이었다. 그 어색한 조화를 듣고 있던 콜린스는, 끝내 부들부들 떨리는 양 손으로 얼굴을 푹 감쌌다. 그리고 잠시 후, 물기 어린 목소리로 겨우 말을 이었다.


“그래도 전시 상황인데 I get weak라니…… 뭡니까, 이게. 사기 떨어지게. 대위님 선곡 센스가 영 별로시네요.”  


“그럼 가사를 바꿔볼까?”


그러더니 파리어는 즉석에서 콜린스의 애창곡을 맘대로 개사했다.


“I get strong when you look at me, I get strong when I’m next to you―”


스윙이라고는 단 한 곡도 불러본 적 없는 사람이 열심히 그 리듬과 선율을 따라해 보려는 모습이 퍽 우스웠다. 그리고 귀여웠다. 콜린스는 발개진 눈가를 들키지 않도록 고개를 옆으로 숙이면서 생각했다.  


‘서른 넘은 아저씨들 중에서 이 노래 부를 줄 아는 사람도 아마 우리 대위님밖에 없을 걸.’


그리고 뿌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저러는 것까지 귀여워 보이면 이젠 정말 돌아갈 길이 없는 거라던데. 강을 건너도 완전히 건너버린 거지.’  


초조와 불안이 불러온 후유증 때문인지, 아니면 예상치 못한 파리어의 선물에 감격한 탓인지 목 한 구석이 메인 듯 꽉 조였다. 어느 쪽이 되었든, 자랑스럽고 용감한 포티스 팀의 조종사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태도였다. 콜린스는 금방이라도 가슴 밖으로 튀어나갈 것처럼 뛰는 심장을 억지로 가라앉히며 크게 쉼 호흡을 했다.


“그거 그렇게 부르는 거 아니에요. 대위님 지금 음정도 박자도 다 틀리게 부르고 계시다고요.”


“그럼 자네가 직접 가르쳐줘야겠군.”


“잘 듣고 따라하세요. 이번에 확실히 익혀서 다음 외박 때 사람들 앞에서 본때를 보여줄 테니까.”


“그거 좋지. 다음 부대 무도회 때는 우리 포티스 팀이 일등상을 차지하는 거야.”


빛 하나 들지 않는 어두운 방 틈새로 연한 달빛만이 존재를 비추고, 멀리서는 허허벌판 위로 헛되이 떨어진 총탄의 폭발음이 들려왔다. 그 사이로 라디오 잡음을 넘어 콜린스의 억양 강한 테너가 새로 개사된 스윙의 리듬을 타고 둥둥 흘렀다. 그의 부드럽고 곧은 미성은 미약한 떨림으로 시작하였으나, 점차 예전의 흥을 되찾으며 빠른 리듬을 따라 그루브 위에 올라타기에 이르렀다. 경직된 자세로 바닥에 딱 붙이고 있던 발도 어느 새 박자를 따라 스텝을 밟듯 타닥타닥 바닥을 두드리고 있었다.



당신을 바라보면 난 강해져요. 당신이 내게 기댈 때도 난 강해져요.
당신의 손을 잡을 때면, 그 눈동자 깊이 들여다 볼 때면
나는, 나는
이 사랑 때문에 강해져요.




“그렇게 당신은 파도처럼 날 위로, 위로 끌어올려요. 이젠 알겠어요, 당신 때문에 계속 싸워나갈 힘이 생긴다는 걸―”


콜린스가 미처 끝내지 못한 마지막 음절은 파리어가 서투른 노래로 대신 받았다. 그의 울림이 큰 저음은 방공호의 숨 막히는 침묵 속을 포근하게 감돌다가 서서히 잦아들었다. 그러나 잔향만은 끝까지 남아서 습한 어둠을 다정한 따스함으로 포옹했다.


라디오에서 그리고 바로 옆자리에서 반복되는 마지막 가사를 들으면서, 콜린스는 공습이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편하게 눈을 감았다.


“좋네요.”


“음악은 항상 무언가를 견디게 해주잖아.”


“응?”


콜린스가 어리둥절하게 되물었다. 파리어가 그런 그의 어깨를 가까이 끌어당기면서 작게 상기시켜주었다.


“네가 해준 말이야.”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멈춰있다고 생각할 때조차 삶은 계속해서 생동하고 있었다. 밤을 가르고 스쳐가는 폭격기의 살의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노래를 부르고 춤을 이어가는 것. 그것이 이 얼굴 없는 재난에 저항하는 그들 나름의 방식이었다.



“파리어.”

“응?”

“나, 이제 좀 살 것 같아요.”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아.


조금 작지만 단단한 대위의 품에 안겨, 그는 삼키지도 떨쳐내지도 못한 채 그저 붙들고만 있던 호흡을 마침내 뱉어냈다. 긴 밤은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끝> 







외전 <산란기> (미성년자 구독불가)로 이어집니다. 아래 포스트에서 열람 가능합니다 :) 








† 밝힘: 본편 <코카투!>에 삽입된 가사는 팝가수 벨린다 칼라일(Belinda Carlisle)의 1987년 곡 “I Get Weak”에서 따왔습니다.



* 주석 모음


주1) 영국의 문화인류학자 케이트 폭스의 설명에 따르면, 영국에서 발간되는 신문은 크게 두 종류로 나뉜다. 비교적 가볍고 대중적으로 시사 이슈를 접할 수 있는 타블로이드와 보다 엄격한 시각으로 이슈를 다루는 4대 유력지가 그것이다. 이 4대 유력지에는 〈타임〉, 〈데일리 텔레그래프〉, 〈인디펜던트〉, 그리고 〈가디언〉이 포함된다. 폭스는 이중에서 〈타임〉과 〈데일리 텔레그래프〉를 중도 우파 성향의 언론으로, 〈인디펜던트〉와 〈가디언〉을 중도 좌파 성향의 언론으로 비유한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극단으로 치우치는 것을 싫어하는 영국 문화답게, 〈타임〉이나 〈가디언〉이라고 해서 타 유럽 국가(예: 프랑스)의 언론처럼 완전 우파나 완전 좌파를 지향하는 것은 아니다.
Kate Fox, Watching the English, Boston, 2008, pp.222~225.

주2) 영국 대중문화에서 스윙 재즈가 본격적으로 도입된 것은 1936년, Ken Johnson이 동료와 함께 자신만의 스윙밴드 The Emperors of Jazz를 결성한 것이 시초였다. 이 그룹을 통해서 Ken Johnson은 영국의 재즈에 처음으로 미국 할렘 스타일의 스윙을 가미했으며, 곧 그는 영국 최고의 흑인 스윙 밴드로 부상하기에 이른다. 1936년부터 1941년까지 Ken의 밴드는 런던의 유명 나이트클럽에서 공연을 이어가며 귀족, 상류층, 저명한 비즈니스맨 그룹을 중심으로 인기를 얻었다. 특히 전쟁 발발 즈음해서는 The Emperors of Jazz의 후계격인 밴드 Snakehips로 변신, 그의 스윙재즈는 BBC 라디오 실황공연 등을 통해 대히트를 치게 되는데, 1940년대부터는 일반 서민 대중들도 LP나 라디오 방송 등을 통해서 Snakehips의 스윙재즈를 널리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본고에서는 이 같은 스윙 재즈 성황 후반기의 시대상을 채택, 콜린스를 비롯하여 군 복무 중이던 장병들도 라디오나 펍의 LP를 통해서 신식 댄스곡인 스윙 재즈를 비교적 가까이 접할 수 있었으리라 가정하고 이야기를 전개한다.
Stephen Bourne, ‘Snakeships Swings into the Blitz’, Fighting Proud, London, 2017, pp.147-148.

주3) Kate Fox, Watching the English, pp.111~113.

주4) 전쟁 발발 전, 영국 체임벌린 내각의 재무장정책은 육군 육성이 아닌 공군과 해군 전력 확충에 치중되어 있었다. 이는 섬나라라는 영국의 지형적 특성에서 유래하는데, 영국 측은 만약 두 번째 세계대전이 발발할 경우 자신들의 주요 전투가 대륙으로의 공격이 아닌 독일로부터의 방어전 위주로 전개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같은 비용이라면 (가능성이 희박한) 대륙 진격에 투입될 육군 규모를 확충하는 대신, 바다나 하늘을 통해 침략해 올 독일군을 막는 쪽에 예산을 투입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따라서 체임벌린 내각 시기 재무장정책의 재정 중 높은 비율이 본토 방어전을 맡을 공군과 해군에 투입되었으며, 특히 이 시기 동안 RAF의 무기와 인력은 눈에 띌 만큼 빠른 속도로 확충되었다.
Richard Overy, The Origins of the Second World War (3rd edition), London, 2008, pp.50~51.

주5) 2차 대전기 영국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한 Hector Bolitho는 영국 대중들의 공중전에 대한 인식 변화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전쟁 발발 전까지 RAF의 존재를 뚜렷이 인식하지 못했다. 비행장은 교외 풍경을 흉측스럽게 만들고, 비행기들은 시끄러운 불청객일 뿐이었다. 이 모든 것이 지난여름(1940년의 영국 전투를 가리킴)에 바뀌었다.”
Stephen Bourne, ‘Hector Bolitho: The Writer’, Fighting Proud, p.110

주6) 앞서 언급한 Bolitho는 런던 대공습 동안의 체험을 직접 기록한 저서 War in the Strand(1942)에서 일상화된 공습 경보 풍경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런던 최악의 밤들을 지나왔다. 밤 9시면 들리기 시작하는 공습경보 사이렌을 일상적으로 여기게 되었다. 이제 사이렌은 하나의 습관이다. 그 소리는 정시를 알리는 빅벤의 종소리만큼이나 도시(런던)의 일과 속으로 자연스럽게 녹아 들어갔다.”
Stephen Bourne, Fighting Proud, p.109




†참고문헌
- Kate Fox, Watching the English, Boston, 2008
- Richard Overy, The Origins of the Second World War (3rd edition), London, 2008
- Stephen Bourne, Fighting Proud, London,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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