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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39년의 크리스마스: 작가 노트

2차 대전 시기 영국인의 크리스마스 준비, 군내 동성애에 관한 묵인 외.




이 글은 파리어콜린스 크리스마스 기념 연성이었던 <39년의 크리스마스>에 대한 후기 겸 작가 노트입니다. 소설을 쓰는 과정에서 참고한 칼럼이나 문헌 자료 중 개인적으로 흥미있던 부분을 발췌하여 정리해봅니다. 본 소설에는 전쟁이 시작된 후 장병들이 크리스마스를 준비하는 장면, 물품 배급제가 시행된 상황, 군내 동성애자를 동료들이 묵인해주는 내용 등이 등장합니다. 위 장면들에 관해 1) 아이디어를 얻은 부분 및 참고한 인터뷰 사례, 2) 실제 역사와 각색된 내용의 차이를 위주로 적어보고자 합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정작 소설을 쓰는 과정보다 쓰기 위해 글을 읽는 과정에서 더 큰 재미를 느꼈던 것 같습니다. 제게 큰 즐거움을 줬던 이야기들이 이 후기를 읽는 여러분께도 같은 역사적 상상력의 시간을 선사할 수 있기를 바라며, 부족한 솜씨로나마 작가 노트를 작성해봅니다. 



1.  2차 대전 시기 영국인들의 크리스마스 준비


2차 대전 시기 영국의 민간인 및 군인들이 어떻게 크리스마스를 준비했는지에 관한 내용은 대영제국 전쟁 기념관(Imperial War Museum) 웹사이트의 칼럼 "How Britain Celebrated Christmas During The Second World War"을 참고했습니다. (by Amanda Mason) 해당 웹사이트에서는 이밖에도 1, 2차 대전과 관련된 영국의 다양한 역사 칼럼들을 읽어볼 수 있습니다. 사진 자료가 풍부하고 짤막짤막한 기사들이 많아서직직접 박물관에 방문하지 않더라도 박물관에서 다루는 전시 내용을 쉽게 둘러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1. 전쟁이 발발하고 식량 배급제가 실시된 상황에서 많은 영국인들에게 이전처럼 손쉽게 크리스마스 장식품을 손에 넣기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다른 여러 방법을 통해서 축제 장식(festive ingredients)을 마련해야 했습니다. 가족과 친구들 사이에 나눌 크리스마스 선물은 주로 집에서 직접 손으로 제작한 실용성이 강한 물건들로 대체됐고, 아이들에게 주는 장난감도 재활용품을 사용한 간단한 수제 장난감으로 바뀌었습니다. 예를 들어, 한 열한 살 소년은 크리스마스 기간 동안 Women's Land Army에 입대하기 위해 떠난 누이에게 나무, 바늘, 천 조각, 클립 등을 사용해서 직접 만든 수제 파종기(seed drill) 장난감을 선물했습니다. 


한 어린이가 누이에게 주기 위해 재활용품으로 직접 만든 장난감. 연도 미상. EPH 1439.
한 어린이가 누이에게 주기 위해 재활용품으로 직접 만든 장난감. 연도 미상. EPH 1439.


상품의 진열대가 점차 허전해가면서 사람들이 직접 크리스마스 선물을 만드는 현상은 입대한 장병들 사이에서도 똑같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1943년, 해군 전투함 소속이었던 J Lynch는 고향에 있는 가족들을 위해서 군함 내에 남아도는 잡동사니들로 직접 인형의 집을 만들어 보냈습니다. Lynch가 제작한 인형의 집은 크기에 맞는 가구까지 다양하게 갖추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군대의 장교 및 사병들이 크리스마스를 앞두고서 각자 입대 전후에 익힌 기술을 이용해서 가족들에게 수제 선물을 만들어 보내는 경우는 드물지 않았습니다. 


해군 소속 J Lynch가 잡동사니를 이용해 직접 인형의 집 선물을 만들고 있다. 1943년. A 19527.
해군 소속 J Lynch가 잡동사니를 이용해 직접 인형의 집 선물을 만들고 있다. 1943년. A 19527.

단, 위에서 소개한 두 사진 자료는 전쟁이 본격화 된 40년 6월 이후의 사례임을 감안해야 합니다. 40년 6월 다이나모 작전-영국 본토 항공전-대공습-41년 북아프리카 전투가 연이어 이어지면서 당시 최강대국이었던 영국도 어김없이 물자 부족이라는 어려움을 맞닥뜨렸고, 그에 따라 크리스마스 사치품에 대한 정부의 제한 및 배급제가 실시된 것입니다. 아직 프랑스 본토에서의 대대적 패배를 겪기 전인 1939년의 크리스마스(즉 소설의 배경이 되는 시간대)에 이 정도까지 물자 부족이 심각했다는 사례는 (칼럼에서) 언급되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플라스틱 합성 수지, 고무, 유리 등은 군수 물자 생산에 필수적인 재료인만큼 전쟁 발발 이전부터 미리 정부에 의해 자원의 시장 분배가 제어되었으리라 판단하고 소설을 전개했습니다. 전쟁 초기까지 정권을 잡았던 체임벌린 내각은 흔히 전쟁의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으로 판단했으며 소극적으로 대응했다고 오해되지만, 군사적 충돌보다는 경제적 유인책을 선호했던 체임벌린 내각 또한 1939년 이전부터 이미 재무장 정책을 시행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독일의 경우처럼 민간 생산의 대부분을 군수 생산으로 전환시키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하는 대신, 민간의 기술인력과 자본을 군수 인력 및 군수 자본으로 유인하는 간접적 방법을 사용했을 뿐입니다. 이처럼 2차 대전은 인류가 경험한 최초의 총력전(total war)이었습니다. (※여기서 총력적이란 전투에 직접 참여하는 군인뿐만 아니라 후방의 민간 경제와 민간 노동력을 포함해서 국가의 생산력 일체가 전쟁 수행에 투입되고 전쟁 수행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현대의 전쟁 수행 형태를 의미합니다.) 


2. 전쟁이 본격화되는 다이나모 작전-영국 본토 항공전을 기점으로, 39년의 크리스마스와 40년의 크리스마스는 그 풍경 및 분위기가 상당히 달라집니다. 가령, 1940년에 민간인들은 크리스마스 선물 포장에 기존의 알록달록한 전용 포장지를 사용하는 대신, 질 낮은 폐지나 낡아서 쓰지 않는 스타킹을 잘라서 사용해야 했습니다. (※나일론이 점차 귀해지면서 스타킹 사용 자제령이 내려지고, 영국의 많은 여군들이 훗날 뒤늦게 참전한 미군이 가져오는 보급품 중 스타킹을 특히 반겼다는 사실은 이 시기를 다루는 매체에서 여러 번에 걸쳐서 등장, 언급되는 내용입니다.) 

또한, 1941년에는 영 군수성(the Ministry of Supply)이 종이 부족을 이유로 "어떤 소매상에서도 식료품을 제외한 상품의 포장에 대해 종이 포장지를 사용하지 말 것"을 당부하는 내용의 칙령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소설 본문에서는 그 시기를 다소 각색해서 군의 장교들 사이에서 군수성이 새해(39년)부터는 종이 포장지 사용에 제한을 걸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는 식으로 언급했습니다. 


다 쓴 스타킹을 잘라 포장한 크리스마스 선물들. 1940년.
다 쓴 스타킹을 잘라 포장한 크리스마스 선물들. 1940년.


3. 이처럼 선물 포장지에까지 배급 제한이 내려지는 상황 속에서, 크리스마스 장식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종이 고리의 재료 또한 고급 색지에서 오래된 서류나 기한이 지난 신문지로 바뀌었습니다. 아래 사진 속 어린 학생들은 낡은 폐지를 물감으로 칠해서 직접 종이 고리 장식을 만들고 있습니다. 소설 중반부 중, 장병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고리 장식을 만들기 위해 공작 시간을 가졌다는 묘사는 여기에서 아이디어를 차용했습니다. 그렇지만, 군대에서는 군사 기밀 보호법에 걸릴 수도 있으니 서류를 쓰지는 않았겠지요? 아마 기한이 지난 신문지나 잡지 종이를 쓰지 않았을까 상상해봅니다. 



캠브리지셔 지역 학교의 어린 학생들이  폐지를 이용해서 직접 크리스마스 장식을 만들고 있다. 1944년. D23619.
캠브리지셔 지역 학교의 어린 학생들이 폐지를 이용해서 직접 크리스마스 장식을 만들고 있다. 1944년. D23619.




2. 2차 대전 시기 영국군의 동성애와 관련해서: 묵인 혹은 처벌?


2차 대전 시기, 영국군 장병들의 동성애에 관한 시각 및 반응은 주로 Stephen Bourne의 저서 Fighting Proud의 내용을 참고했습니다. (서지사항: Stephen Bourne, Fighting Proud, London, 2017.)


0. 영국의 역사학자 겸 작가인 Bourne은 본 책에서 게이를 포함한 성소수자에 대한 탄압이 심해진 것은 전쟁 전이나 전쟁 기간 동안이 아닌 종전 이후부터였다고 주장합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영국에서 남성 간의 동성애 행위를 금지하는 법은 19세기 중후반에 처음 제정되어서 1967년에 Sexual Offences Act of 1967에 의해 공식적으로 폐기되기 전까지 장장 한 세기 가까이 존속되었으나, 실제로 전쟁 같은 국가 전체의 위기 상황에서 위 법이 조항 그대로 적용되는 경우는 드물었다고 합니다. 동성애 금지법 존재하던 때에도 게이와 레즈비언은 여러 지역사회 내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으며, 각자 속한 환경 및 상황에 따라서 암묵적으로 수용되었습니다. 법조문의 존재와 그 조문의 실제 집행은 별개로 진행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동성애 또한 이성애와 마찬가지로 자연스러운 현상인 만큼, 인류사가 존재하는 이상 아마 다른 모든 지역에서도 이 같은 규제와 현실 사이의 괴리는 동일하게 관찰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즉, 1967년에 동성애 불법화가 공식적으로 해제되기 전까지, 법 자체만을 두고 따지자면 군과 민간을 막론하고 남성 간의 동성애 행위는 수감 및 체포 대상이 될 수 있는 불법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2차 대전 이전에도, 전쟁 시기에도 각 지역사회 및 소속 집단의 분위기에 따라 관대하게 묵인되는 경우가 잦았다는 것이 Bourne의 주장입니다. (p.16)


1.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서 그는 실제로 육해공 삼군에서 복무했던 동성애자 영국군들의 여러 사례를 소개합니다.  가령, 9장 'Rum, Bum and Concertina'에는 "게이든 스트레이트든 영 해군들은 콘서트 파티에서 여장을 하고 직접 공연을 하며 동료들에게 여흥거리 제공해주는 것을 즐겼다. 사기 진작에 좋았기 때문이다."라는 회고가 나옵니다. (※ 이 같은 '사기 진작을 위한 남성 병사들의 여장 공연' 사례는 미군의 종군 기록에서도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소설 본편에 미주로 달았던 종군기자 어니 파일(Ernie Pyle)의 증언담도 이에 해당됩니다. 이 경우, 육군이었음에도 영국으로 가는 수송함 내에서 사기 진작을 위해서 군인들끼리 서로 여흥 삼아 여장을 하고 댄스 파티나 벌레스크 공연을 흉내내며 즐겼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p.67)


2. 같은 챕터(해군 편)에서 많은 인터뷰이들은 해군이 공군이나 육군에 비해서 호모섹슈얼적인 행위에 융통성 있게 대처한 편이었다고 회고합니다.(p.68) 그러나 Bourne는 해군 외에 육군이나 공군, 심지어 민간 사회에서도 1차 대전이나 2차 대전 같은 국가적 위기 상황이 동성애자와 이성애자 사이에 있어서 일종의 '평등화장치(leveller)'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전쟁이 계급을 초월해서 국가 구성원에게 동일한 경험을 제공하고 그로 인해 일종의 동지 의식을 만들듯, 게이-헤테로 사이에서도 같은 기능을 했다는 설명입니다. 한국 근현대사에 비유하자면, 일제 식민시기를 거치면서도 끈질기게 남아 있던 반상 문화가 6.25 전쟁이라는 대대적인 전쟁을 겪으면서 비로소 해체되고, 사회 각 구성원들이 동등한 위치에서 시작하게 된 경험에 비교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전쟁이 게이-헤테로 간의 leveller 기능을 하는 동시에, 군에서 복무한 수천의 동성애자들이 또 다른 동성애자들을 만나면서 "전시 수요에 따라 확장된 전우애 의식 및 서브컬쳐 공간을 통해서 자신들의 집단 정체성을 공고히 하게 되었"습니다.(p.1) 전쟁 경험이 영국 동성애자들 사이의 정체성 및 공동체 의식 확충에 촉진제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해군이나 육군에 비해 비교적 보수적이었던 공군(RAF) 내에서도 게이-스트레이트 문화 간의 혼합 및 사기 진작이라는 명목 하의 퀴어적 엔터테인먼트 사례들이 소수지만 존재했으리라고 자연스럽게 추론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소설 본문에서는 이러한 가정에 착안하여 남성들로만 구성된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장병들이 댄스 파티를 즐기는 상황과 파리어와 콜린스 두 사람의 춤을 묵인해주는 장면을 연출했습니다. 


3. 전시 중(특히 2차 대전) 군내에서 동성애자에 대한 관용이 드물지 않았다는 내용은 다음의 사례들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6장 'Kiss Me Goodnight, Sergeant Major'에서 Bourne는 전시 영 육군에 분명히 동성애 금지 규정이 있었으나, 장교-사병-민간인 간의 명백한 행위가 아닌 한-즉 같은 지위 내에서의 관계일 경우 융통성 있게 눈 감아주는 분위기였다고 설명합니다. 일명 'turning a blind eye'라는 관용적 태도가 존재했는데, 이는 당장 한 명이라도 더 전투 인력이 필요한 상황에서 동성애 관계를 이유로 장병 하나를 영창에 보내느니 묵인하는 편이 더 합리적이라는 생각의 발로였습니다. (적어도 현장의 지휘관들은 그렇게 판단했습니다.) (p.44) 

"새로 군에 들어올 병사가 게이인지 아닌지는 대부분의 군 지휘관들에게 큰 문제로 여겨지지 않았다. 전시 동안에는 훗날(50년대를 이름) 목격하게 될 급진적인 반동성애 정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영국 전역이 나치에 의해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는 상황에서, 군 당국은 입대하는 사람이 게이인지 아닌지에 관해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p.55)

"전쟁 수행 기간 내내 전투력을 최대화해야 한다는 (최우선적인)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군의 고위 간부들은 비공식적으로 게이 남성을 금지하는 법을 없앴다. 육군의 경우, 병사가 동성애 관계를 가지다가 발견되었다고 해서 가혹한 처벌을 받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대신 해당 병사들은 지휘관에게 따로 불려가 훈계를 받거나, 서로 다른 분대로 이송되는 정도가 전부였다. 더들리는 고위 간부나 그의 이성애자 전우들 어느 쪽도 게이 병사의 입대에 관해서 특별히 염려하지 않았다고 회상한다: '그때는 종전 후에 맞닥뜨렸던 마녀사냥 같은 반동성애 정서는 없었습니다.' "(p.55)

오히려 2차 대전 종전 직후에 일명 '영국의 전통을 복구한다'는 미명 하에 전시 동안 탈보수화 되었던 각종 성적 규제들이 재강화 되었다고 저자는 설명합니다. 다시 여성은 집으로, 유색 인종은 식민지로, 동성애자는 지하로 돌아가라는 사회적 압력이 등장했다는 것입니다. Bourne을 비롯해서 그가 인용하는 많은 영국의 사회학, 역사학 연구자들이 이 같은 전후 보수화 경향이 종전 이후의 가혹한 동성애자 차별의 근본적인 원인-심리적 원인이었다고 지적합니다. (Introduction 참조) 



4. 이처럼 전시 동안 영국군 내에서 동성애에 관한 관용적 태도가 존재했음을 알려주는 사례가 다수 존재합니다. 여기 그중에서 인상적인 사례 두어 가지를 뽑아서 간략하게 소개합니다. (pp.44~47.)


첫번 째로, 노동계급 출신 취사병 Lens의 일화입니다. 부대의 다른 장교와 사병들이 게이였던 Lens의 정체성을 수용해주고, 그를 남친과 만나게 해주는 깜짝 이벤트를 준비해줬다는 회고입니다. 가장 감동적인 일화이며, 소설 속에서 동료들이 파리어콜린스의 관계를 암묵적으로 묵인해준다는 설정도 이 일화에서 영감을 얻었습니다. 


"모든 장교들이 내가 게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 사실을 수용해주었습니다. 나는 내 침대 곁에 윌리엄(남친)의 사진을 놓고 잤으며 그에게 편지를 썼고, 윌리엄도 마찬가지로 매일 답장을 보내왔습니다. 물론 야전에서는 우편 배달 날짜가 불규칙했기 때문에 어떤 날은 하루 만에 밀린 편지 여섯 통을 받기도 하고, 그후 일주일 동안은 아무런 편지를 못 받기도 했지요. 하루는 취사실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장교의 당번병 한 명이 뒤에서 나타나더니 두 손으로 내 눈을 가리는 겁니다. 그리고 말했죠. '눈 뜨지마,  깜짝 선물이 있어.' 제가 물었죠. '무슨 깜짝 선물?' 그런데 당번병을 따라서 출입구로 가보니, 거기에 윌이 서있는 겁니다. 엄청나게 기뻤죠. 동료들은 그날 남은 하루 동안 우리 둘이서 시간을 보내도록 배려해줬습니다. 이런 일화야말로 그들이(=전시의 동료들이) 우리(게이)들에게 얼마나 호의적이었는지를 보여주는 겁니다. 이성애자들이 우리 게이들에게 어떤 편견도 가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겁니다." (Jeremy Seabrook, A Lasting Relationship: Homosexuals and Society, 1976에서 재인용.)


두번 째 사례는 이탈리아와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소총 여단으로 복무했던 패션 디자이너 Neil 'Bunny' Roger의 유쾌한 일화입니다. 어릴 때부터 소위 '여성적인' 취향을 거리낌 없이 드러냈던 그는 전쟁 동안에는 터프하고 거침 없는 소총 여단의 장교로 활약했습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패션과 아름다움에 대한 집착을 잃어버리지는 않았지요. 

"1944년에 보병 장교로 복무하는 동안, 그는 로마로 진격하기 위해 감행된 그 유명한 몬테 카시노 전투에서 기관총 사수로 활약한 것에 대해 공로 훈장을 받았다. 버니는 전장에서 엄청난 남성적 용기를 보여주었지만, (한편으로는) 폭격으로 완전히 파괴된 몬테 카시노의 한 수도원에서 오래된 친구를 우연히 마주쳤을 때 참 여전하게도 실크 쉬폰 스카프를 매고서 <보그>지 여러 권을 주머니에 (전리품으로) 수집하고 있는 참이었다. 그의 친구가 대체 지금 뭘 하고 있느냐고 묻자, 버니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친구를 쳐다보더니 대답했다. '쇼핑 중이야.'"


세 번째 사례는 알제리의 수도 알제에서 복무했던 Bruce Copp의 회고입니다. 그는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복무한 특공대원들이 소위 가장 거칠고 남성적인 군인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중 꽤 많은 수가 동성애 관계를 나눴다고 증언합니다. 

"그 특공대원들은 육군에서도 가장 터프한 남자들이었지만, 알다시피 우리는 모두 두 명이 같이 사용하는 소영 텐트에서 잠을 잤죠. 뭐, 모든 텐트가 들썩이기 십상인데다 대만원이었으니, 그 안(텐트 안)에서 벌어지는 소리란 소리는 전부 들을 수 있었습니다." 

Copp의 친구였던 Ronald Benge는 편지에서 자신이 속한 부대인 웨스트 켄트, 일명 Buffs라 불린 부대가 적어도 다섯 열 이상의 동성애자들한테 점령당했다고 썼는좋은 데, 이는 평균보다 높은 비율이었다. Benge는 다음과 같이 편지에 썼다: '모두 훌륭한 병사들이고 전우들에게 헌신적이야. 괜찮은 녀석이거나 아니거나-그 점이 중요했지, 편견은 사라졌어. (좋은 전우기만 하다면) 게이들도 기탄없이 받아들여졌어.'" 


또한, Copp가 최전선에서 병에 걸리자 그는 야전병원으로 후송되었는데, 그곳에서 그는 '놀랍도록 완벽하게 게이인' 남자 간호병과 친한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는 게이 중에서도 가장 게이 같은 사람이었다. 전적으로 게이였고, 아마 사회에 있었을 때는 드랙퀸이었을 것이 분명했다. 기억하기로 우리는 그를 '파니(Fanny)' 아니면 '글래디스(Gladys)' 같은 이름으로 불렀다. 그는 부상당하거나 병에 걸린 병사 오십 명을 책임졌다. (중략) 그는 우리 모두를 돌봐주고, 간호해주고, 식사를 가져다 주고 그 밖에도 정말 많은 관심과 보살핌을 베풀어줬다. 정말로 훌륭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모두가 그 간호사를 아끼고 좋아했다. 그가 게이였는데도 말이다. 그는 자신이 호모섹슈얼이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는데, 그럼에도 병원에 있던 모든 병사들은 그를 포용해줬다. 왜냐하면 그만큼 훌륭한 간호사였으니까. 나는 앞으로도 결코 파니를 잊지 못할 것이다." 

(Bruce Copp의 자서전 Out of Firing Line... Into the Foyer (2015)에서 재인용.)



3. 나가며 


이처럼, Stephen Bourne이 소개하는 2차 대전 시기 영국군 내 동성애에 관한 시각과 태도에는 기존의 '엄격한 처벌' 이미지 외에도 '관용'과 '묵인'이라는 동인 또한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전시 동성애자들의 구체적인 경험담을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책 Fighting Proud는 해당 주제에 관심 있는 분이라면 분명 흥미있는 책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다만 책 전체적인 구성과 관련해서 한계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대표적으로, 저는 개인적으로 책을 재밌게 읽어내려가면서도 한편 다음과 같은 의문들이 떠올랐습니다. '양차 대전기 게이들의 삶을 재조명하고 그들의 영웅적 행위를 밝힌다는 목표에 치중했으나, 그 게이 수용 문화 저변에 깔린 미소지니를 인식하지 못한 것은 아닌가?' '여성 동성애자 군인의 경험은 배제되거나 극소수로 언급되고 있진 않은가?' '저자가 미처 자각하지 못한 제국주의적 시각이 깔려있진 않은가?' '이 책에서 말하는 gay lenient는 결국 남성 군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닌지?' 이 같은 질문들에 대해서는 추후 기회가 된다면 좀 더 생각해보고 정리해보고 싶습니다. 


어쨌든 확실한 점 하나는, 책을 읽어내려가면서 새로운 시각과 새로운 사례를 알 수 있었고, 생각할 수 있었고, 동시에 그 시대를 살아간 개인들의 삶을 상상하며 직접 소설에 적용해볼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처럼 사료를 참조해서 당대의 생활상을 추적하고 그것을 토대 삼아 역사를 이야기로 바꿔가는 과정이야말로 역사 소설 쓰기의 가장 즐거운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그래서 아직까지도 제가 7월 말의 덩케르크 해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나봅니다.  부족한 점이 많은 글이지만, 이 글을 읽고 계신 여러분께서도 소설 본편과 작가노트를 통해서  제가 느꼈던 그 같은 역사소설 쓰기-읽기의 재미를 잠시나마 느끼셨다면, 글쓴이로서 그보다 더 즐겁고 감사한 일 또한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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