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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에릭찰푸린] PINK TRIANGLE 1

18.01 맥벤더 교류전 무료배포본

*진짜 재미없음 주의, 무근본주의, 머머리찰스 주의




0. 행크의 반란



어느 날 세상에 포켓몬이 나타났다.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찰스는 몹시 반가워하며 다음과 같이 감탄했다.

“멋져! 굉장해! 뮤테이션이 영장류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니, 대단히 고무적인 발견이야. 이것으로 유전 진화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도 바뀔 것이 분명해. 돌연변이는 생물계 어디에서나 나타나는 자연적 현상이라는 걸 다들 알게 될 테지!”

뉴스 특보를 장식한 기이한 생김새의 신종 동식물들을 보고 찰스는 그렇게 평가했다. 볼 주머니에 전기를 담고 다니는 대형 설치류, 등 위에 커다란 씨앗을 지고 다니는 고양이 눈의 괴생물체, 꼬리에 불이 달린 새끼 공룡. 다른 교사들과 학생들이 그 낯선 외양을 보고 저마다 호불호를 달리 할 때도 찰스만큼은 포켓몬의 등장에 전적으로 환호했다.

“우리도 한 마리 키우면 어떨까? 학생들의 인성 교육에 좋을 것 같지 않아? 마침 우리 학교에는 마당에 호수에 숲까지, 저 친구들이 맘껏 뛰어 놀 공간도 충분하다고.”

찰스가 교장실 창문 너머로 펼쳐진 드넓은 사유지를 가리키며 호기롭게 말했다. 교장의 반짝이는 두 눈이 그 동글동글한 머리통 안에서 무언가 또 쓸 데 없는 회로가 돌아가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었다. 의형제인 레이븐이 누구보다도 먼저 그 속내를 알아채고는 찰스를 향해 눈을 흘겼다.

“쟤네를 데려오면? 입양한 다음에 그 뒤치다꺼리는 누가 할 건데? 먹이주기는? 산책은? 화장실은? 하나의 생명을 거둘 땐 그만큼의 책임이 따라오는 법이야, 찰스.”

레이븐이 어른스럽게 타일렀다. 그러나 한창 발랄할 나이 마흔에 접어든 교장의 귀에는 전혀 가 닿지 않을 설교요 훈계였다. 그 어렵다는 재혼―무려 이십 년만이었다―에도 성공한 사내에게 세상 두려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최근 다시 시작된 첫사랑과의 연애 덕분에 봄날 아지랑이처럼 붕붕 뜬 기분을 여과 없이 드러내며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 내 능력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거 아니야, 레이븐? 지난 번 카이로 사건 이후로 학교를 재건하느라 비용이 좀 깨지긴 했지만, 아직 작은 뮤턴트 식구 하나 거둘 쯤은 된단다. 그리고 우리한텐 행크가 있지 않니?”

“뭐?”

“직접 화분에 물주는 교수 봤어? 교수가 기르는 동식물의 뒤치다꺼리는 원래 조교 몫이란다. 맥코이 박사가 다 알아서 해줄 거야.”

찰스는 상쾌한 미소를 날리며 호언장담했다.


그러나 그의 철없는 소망은 뜻대로 이뤄지지 못했는데, 무엇보다도 교장의 파렴치한 계획을 전해들은 맥코이 박사가 분개하며 가장 먼저 일어나 학교 곳곳에 성토문을 붙인 것이었다.


<교장은 보아라. 지난 이십 년 간 고락을 함께하며 턱없는 요구에도 부응해준 동료를 교장은 대체 어떻게 보고 있는 것인가? 화려한 언변에 넘어가 무보수 열정노동으로 일했던 지난 이십 년의 세월이 원통하고 원통하다. 미래가 밝던 새싹 연구자를 정교수 자리라는 미끼로 꾀어내어 개인 비서처럼 부려먹고, 주치의 역할을 떠맡긴 것으로도 모자라 이젠 애완동물 뒤치다꺼리까지 떠넘기려 하는가? 연애질에 눈이 멀어 염치까지 잃어버린 것인가? 교장은 보아라. 아직 양심이 남아있다면, 인간으로써 이토록 파렴치한 구상은 떠올릴 수 없는 노릇이다. 당신 제자들과 당신 남편도 이런 파렴치한 갑질을 알고 있는가? 순진하게 한 인간을 믿었던 젊은 날을 후회하며, 나, 행크 맥코이 박사는 오늘 이 자리에서 성토한다. 무임금 장시간 노동 착취로 후배 학자를 학대하고 억압하는 악덕 교장은 사퇴하라―! 사퇴하라―!>


대략 위와 같은 내용이 전지 위에 깨알 같은 글씨로 프린트 되어 나붙자, 찰스도 그만 고집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본관 대문에 대자보가 붙은 지 반나절도 안 돼서 교내 어디를 가든 실망과 경멸의 눈초리가 그 뒤를 따라붙었기 때문이다. 어린 학생들은 비록 ‘학대’나 ‘착취’ 같은 단어의 의미는 아직 이해할 수 없었지만, 몹시 분노한 행크 선생님의 행동을 보고서 이번만큼은 교장 선생님이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고야 말았다는 진실을 어렴풋이 간파했다. 그날 수업에 들어갔던 찰스는 아직 열댓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 뮤턴트 동지들로부터 엄한 꾸지람을 들었다.

“행크 선생님 괴롭히지 마요, 교장 선생님.”
“친구를 괴롭히면 머리털이 안 나요.”
“……!”

순진무구한 눈빛으로 경고를 하는 아이들의 공격 앞에서 찰스는 몹시 상처받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찰스가 그 파렴치한 계획을 포기하게 된 결정타는 에릭이 던진 호된 질타였다. 찰스는 아이들의 공격을 피해 에릭한테 (가짜) 눈물을 흘리며 달려갔다가 도리어 혐오와 경멸의 눈빛을 받고 말았다.

“찰스, 너만은 다를 거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부르주아지 미국인은 어쩔 수 없는 건가……. 사피엔의 지저분한 악덕에 물들었을 줄은……”

“잠깐만 잠깐만, 이게 그렇게까지 난리들 칠 일이야? 나한테도 해명할 기회를 좀 ㅈ―”

그러나 에릭은 찰스의 간절한 애원을 매몰차게 외면했다. 고개를 늘어트리는 회색빛 두 눈엔 씁쓸한 환멸과 실망이 감돌고 있었다. 그는 신랄한 목소리로 찰스를 비난했다.

“변명하지 마, 부르주아지. 나나 레이븐이 자본가들의 혹독한 착취 구조 아래서 고통 받고 있을 동안, 사실 너도 그 억압에 동참하고 있었다니. 더 이상 아무도 믿을 수 없을 것 같군.”

“에, 에릭……?”

예상 외로 냉랭한 에릭의 반응에 찰스는 뒤통수를 후드려 맞는 기분이었다. 찰스는 손을 뻗어 애달프게 에릭의 옷깃을 붙잡으려 했다. 그러나 도통 속을 알 수 없는 연인은 찰스의 손에 붙잡힌 옷깃을 매몰차게 빼내며 쏘아 붙였다.

“말 걸지 마, 악덕 고용주.”
“……!!”

한때 공산국가 폴란드에서 철공소 노동자로 근무한 경력이 있던 남자가 말했다. 그것이 마지막 일격이었다. 행크의 분노나 제자들의 항의 앞에서도 뻔뻔하던 찰스의 낯빛은 결국 애인의 환멸어린 눈초리 앞에서 무너지고 말았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에릭의 바짓가랑이에 매달렸다.

“으아아 내가 잘못했어 에릭 제발 용서해줘 두 번 다시 행크를 부려먹지 않을게―! 심부름 떠맡기지도 않을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날 떠날 수는 없어어――!!!!”

“……한 번만 더 믿어보도록 하지. 하지만 난 사피엔만큼이나 악덕 자본가를 증오해.”

에릭이 던지는 냉엄한 선언 앞에서 찰스는 열렬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는 눈물을 채 거두지도 못한 몰골로 에릭의 허리께를 간신히 붙잡았다.

“물론이지, 물론이야. 포켓몬 따위는 두 번 다시 입에 올리지 않을게. 그리고 앞으로 우리 학교의 모든 커리큘럼에는 사회주의 경제교육을 넣도록 하겠어.”

그렇게 문턱 너머까지 갔던 찰스 교장 탄핵 위기는 일단락되었고, 애완 포켓몬을 들이겠다던 교장의 장대한 꿈도 모두의―특히 행크의 반대 앞에서 풀썩 꺾이고 말았다. 이후 한동안 자비에 영재학교 내에서 포켓몬이라는 존재는 잊히는 듯 했다.

직접 대문을 두드리며 초인종을 누르는 개체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1. 분홍빛 바람 타고 날아온 손님



초봄의 어느 아침, 신문 수거 담당인 피터는 무거운 팔다리를 휘적거리며 신문을 가지러 가는 중이었다. 정문 밖 우편함 앞에 도착한 그는 눈도 뜨지 않은 채로 손만 뻗어 안을 뒤적였다. 익숙한 펄프지의 감촉이 손끝에 걸리자마자, 신문뭉치를 낚아채서 등을 돌렸다. 그리고 부족한 잠을 보충하러 저택으로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다리 밑에서 뭔가 묵직한 무게감이 바지를 끌어당겼다.

“응?”
“푸―린.”

동그란 분홍색 풍선 하나가 바짓단에 달라붙어 있었다. 그는 단순히 풍선줄에 다리가 걸렸다고 생각하고선 오른다리를 휘휘 공중에 털었다.

“에이, 귀찮게.”

그런데 풍선은 떨어지기는커녕 자라나는 엉겅퀴처럼 더더욱 바짓단에 엉겨 붙는 것이었다! 심지어 똥그란 몸통 옆에서 조그만 삼각형 모양 손이 쑥 튀어나오더니 도망가지 못하도록 다리를 꽁꽁 휘감았다. 뒤늦게 이 풍선이 평범한 풍선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채고서, 피터가 당황하며 아래를 내려다봤다.

“뭐, 뭐야?”
“푸린, 푸푸린!”

그 순간 손바닥만큼 커다란 파란색 눈동자 두 개가 피터의 졸린 눈과 마주쳤다. 풍선이 말을 하고 있었다. 피터는 졸음이 싹 달아나면서 전신에 소름이 쫙 돋는 것을 느꼈다.

“으어어, 이거 뭐야 이거 뭐야!”

경악한 피터가 붙잡힌 오른다리를 열심히 허공에 휘둘러봤으나, 풍선은 짤똥한 팔다리를 사용해서 더더욱 찰싹 달라붙을 뿐이었다. 그러더니 왕방울만한 눈을 깜빡이며 명령을 내렸다.

“푸리린.”

‘푸’와 ‘리’, ‘린’―단 세 음절로만 말을 하는데 어떻게 뜻을 이해했느냔 질문은 말기를. 그 뾱뾱거리는 소리를 듣자마자 피터는 통역기 없이도 의미를 알 수 있었다. 당장 저택을 향해 손짓하는 짧은 팔만 봐도 풍선의 요구를 짐작 할 수 있었다.

<나도 데려가.>

분명 그런 뜻이었다. 쬐깐한 풍선 주제에 명령은! 피터는 순간 심통이 터져서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였다.

“내가 왜, 이 수상한 풍선 몬스터야!”

실언이었다. ‘풍선’과 ‘몬스터’ 둘 중 어느 쪽이 도화선이었는지는 몰라도, 그 대형 풍선은 피터의 모욕에 몹시 화가 난 듯 했다. 살아있는 풍선이 다음 순간 공중 위로 펄쩍 뛰어오르더니, 자그마한 손바닥을 펼쳐서 번개 같은 속도로 피터의 뺨을 호다닥 때리기 시작한 것이다.

“푸리리리리리리리린 푸리린―!”
“으, 으아아~”

졸지에 습격당한 피터가 비명을 지르며 펄쩍 뛰었다. 맹렬하게 달려드는 녀석을 떼어내 보려고도 했으나, 저항할수록 어쩐지 풍선은 더욱 커다랗게 부풀어 오르기만 했다. 부풀어 오르고 부풀어 올라서 마침내 교장 선생을 닮은 새파란 눈이 수리부엉이만큼 커질 때까지.

결국 피터는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인간의 자존심을 내세우기에는 연속 뺨때리기 공격이 너무나 매서웠다.

“알았어, 알았다고! 데려다 줄 테니 그만 때려! 얼얼해~”

그렇게 낯선 분홍빛 손님은 첫 등장부터 강렬한 존재감을 뽐내며 자비에 저택에 나타났다. 심지어 그 손님은 풍선 주제에 정수리 위에는 풍성하고 곱슬곱슬한 갈색 머리터럭까지 달고 있었다. 반강제로 풍선을 무등 태우는 동안, 피터는 얼얼해진 뺨을 갸웃거리며 생각했다.  

‘근데 아무리 봐도 누굴 닮았단 말이지.’

“푸린, 푸리린!”

딴생각에 빠진 피터의 옆구리를 풍선이 후려쳤다.

“으아악!”

풍선한테 맞아봤자 얼마나 아프냐고 비웃을 수도 있겠지만, 녀석의 후려치기는 정말로 아팠다. 눈물이 찔끔 흐를 정도였다. 피터는 구겨진 자존심과 쓰라린 옆구리를 문지르며 저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등 뒤에 업힌 풍선의 무게가 어쩐지 전신을 무겁게 짓눌렀다.






2.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래서 이 분홍 친구 이름이 뭐라고?”

찰스가 떨떠름한 눈빛으로 새 손님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피터가 데려온 요상한 포켓몬은 저택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당연하게도 모두의 이목을 끌었다. 동글동글하고, 통통 튀어 다니며, 부들부들 윤기가 흐르는 풍선 포켓몬. 저학년 아이들은 이미 홀딱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아이들은 고사리 같은 손을 뻗어서 한 번만이라도 녀석을 쓰다듬어 보려고 열심이었다.

“귀여워!”
“보들보들해!”
“말랑거린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 당돌한 분홍빛 손님은 자기 덩치의 서너 배는 되는 인간들한테 둘러싸여서도 도통 기죽는 법이 없어 보였다. 녀석은 마치 교장의 질문에 답이라도 하듯 눈을 반짝이며 외쳤다.

“푸린, 푸푸린!”
“푸린이라는 거야 아님 푸푸린이란 거야?”

교장이 혼란스러워 하며 재차 물었다. 그러나 풍선의 대답에는 별 진전이 없었다.

“푸리리리리리리리리리리리리리리리――― 푸린!”
“……그냥 푸린이라고 부르도록 하지.”

찰스는 더 이상 어떤 의미 있는 답변을 들으려는 생각을 포기하고 대신 한숨을 폭 내쉬었다. 바람 타고 날아온 분홍빛 손님은 어쩐지 꽤 까다로운 손님이 될 것 같았다. 그래도 내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정체불명의 풍선이라고 해도 어쨌든 작은 뮤턴트 친구였으니까.

“우리 자비에 영재학교는 모든 뮤턴트에게 열려있다네. 동물이든 식물이든 중요하지 않지. 그럼! 비록, 음, 그러니까…… 풍선이라고 해도 말이야!”

찰스가 짐짓 근엄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와! 교장 선생님 멋있어요!”
“이제 풍선 친구도 우리 학교에서 같이 사는 거야!”
“귀여워! 사랑스러워!”

푸린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아이들이 찰스의 선포를 듣고 기뻐하며 환호했다. 그 격렬한 반응을 본 찰스는 덩달아 어깨가 으쓱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졸지에 박수세례를 받게 된 분홍빛 손님도 싫지 않았는지 기다란 발로 번갈아 제자리 뛰기를 하며 통통 튀어 올랐다. 몸통의 반을 차지하는 커다란 푸른 눈이 뒤집어진 갈매기처럼 방긋 휘며 기쁨을 표현하고 있었다.

“푸린푸린 푸리린~”

찰스는 자신의 관대함에 새삼 자부심을 느끼며, 들떠서 하늘 위로 둥실둥실 떠오르려고 하는 푸린의 발끝을 잡아당겼다. ‘큼큼’, 그는 헛기침으로 주의를 집중시킨 다음,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자, 그럼 새로운 학생이 왔으니까 제대로 이름을 가르쳐 주겠어? 학생 명부에 등록해야 하거든. 아, 그리고 너만의 특별한 능력이 무엇인지도 알려주면 도움이 될 거야.”

그렇게 말하며 교장이 기대감 어린 눈빛을 던졌다. 푸린은 멍한 얼굴로 찰스를 올려다봤다. 그리고 갑자기 모르는 외국어를 듣기라도 한 것처럼, 작은 입을 세모나게 벌린 채로 한참을 멍 때렸다. 찰스는 재촉하지 않고 인자하게 웃었다. 그리고  능력을 보여주기를 기다렸다.

10초.
20초.
30초.
1분.

끈기 있게 기다렸다.

마침내 푸린이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덩달아 찰스의 주먹 쥔 손에도 땀이 차올랐다.

‘드디어―!’

다음 순간 푸린이 양 볼 가득 바람을 빨아들이더니 하늘 위로 둥실둥실 떠올랐다.

“푸린푸린~☆”
“와아! 푸린 굉장해! 몸이 빵빵해졌어!”

곁에 있던 아이 하나가 진심으로 감탄하며 짝짝짝 박수를 치건만, 찰스는 마냥 웃을 수 없었다. 풍선이 날아가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것 아닐까? 게다가 공중부양 정도라면 이 학교에 할 수 있는 사람이 이미 널리고 널렸다! 찰스는 자기가 속물적이란 생각을 하면서도, 어쩐지 기운이 쭉 빠지고 말았다. 실망을 감출 수 없었다.

“이봐, 친구. 공기를 빨아들여서 날 수 있는 능력은 멋져. 아주 좋아. 하지만, 뭐랄까, 음― 우리 학교는 특별한 학생들을 위한 자비에 ‘영재’학교거든. 보여줄 만한 또 다른 능력은 없는 거니?”

아까보다 기합이 빠진 찰스의 물음에 푸린은 기껏 넣었던 바람을 도로 푸쉬쉬 뱉어내며 바닥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짧은 양 손을 허리에 척 올린 자세로 불만스레 볼을 찌푸렸다.

“푸린푸린, 푸리리리 푸린! 푸린푸린!”

몸통 아래 짧게 붙어있는 다리로 바닥을 탁탁 내려치는 몸짓은 꽤 귀여웠지만, 자비에 영재 학교에서는 귀여움만으로 승부할 수 없는 법이었다. 무엇보다 귀여움으로 말하자면, 창립자인 교장 선생부터가 한 자신 있기도 했고.

‘이 학교의 귀여움 담당은 나 하나면 충분하다고.’

찰스는 슬슬 짜증이 나려는 것을 억누르며 툭 던졌다.

“다른 능력은 전혀 없는 거야? 비행이라면 우리 에릭도 할 수 있―”
“아니, 내가 하는 건 비행이 아니라 호버링(hovering)에 더 가깝지.”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저택 거실에서 벌어진 한 바탕 소란을 보고서 뒤늦게 에릭이 기척을 냈다. 그는 자연스럽게 찰스 옆에 자리를 잡았다. 그 사실에 찰스가 기뻐한 것도 잠시뿐.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에릭의 눈길 또한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인 작은 포켓몬에게 향했다.

그리고 그 왕방울만한 파란 눈과 시선이 마주친 순간, 에릭의 어깨가 움찔했다.

“찰스……?”
“응?”

그러나 에릭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마치 최면에라도 걸린 사람처럼 멍하니 낯선 뮤턴트 생물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다시 말을 이었다.

“……이 포켓몬은 너를 닮았군.”

찰스는 친근한 몸짓으로 에릭의 어깨를 탁탁 치며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우리 에릭은 참 재미나기도 하지! 내 얼굴이 한 귀여움 하는 건 맞지만 이런 합성수지 고무풍선은 아닌 걸? 그리고 난 저렇게 무책임할 정도로 동글 빵빵 하진 않다네!”

그러나 찰스가 던진 수준 낮은 농담에도 에릭의 진지한 표정은 변함없이 그대로였다. 오히려 어깨 위에 올라온 찰스의 끈적끈적한 손길을 탁 쳐내더니 분홍 풍선 앞에 무릎을 꿇고 앉는 것이었다. 그는 풍선의 커다란 파란 눈과 곱슬곱슬한 앞머리를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푸린이라고 했던가? 너는……”

좌중에 정적이 흘렀다. 모두가 에릭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비에 영재학교의 얼굴 마담이 자비에 교장이라면, 그 뒤에서 사실상 모든 것을 진두지휘하는 장본인이 에릭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갓 입학한 신입생들조차 앞으로 내려질 에릭의 선고가 꼬마 뮤턴트 친구의 운명을 좌우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리고 그들은 모처럼 만난 귀엽고 통통 튀는 이 분홍색 친구를 잃고 싶지 않았다. 한 아이가 침을 꿀꺽 삼키더니 조심스레 앞으로 나섰다.  

“에릭 선생님, 푸린은 바람을 타고 우리 학교에 찾아왔어요. 우린 푸린을 보내고 싶지 않아요…”

아이는 물기 어린 목소리로 말끝을 흐렸다. 아이의 말소리에 에릭이 잠시 푸린에게 꽂혀 있던 시선을 거두었다. 그는 쌀쌀맞게 응대하는 대신 안심시키듯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걱정 마라. 찰스 말대로 이곳에서 모든 뮤턴트는 환영이야. 그 동료가 동물인지 식물인지, 아니면 합성수지 고무풍선인지는 중요하지 않지.”

에릭은 마지막 문장을 덧붙이면서 찰스 쪽으로 살짝 눈을 흘겼다. 찔끔한 찰스는 변명을 해보려는 듯 몸을 살짝 앞으로 기울였다. 그러나 그 시도는 다음 순간 벌어진 초유의 사태 앞에서 저지되고 말았다.

“푸리리리리리 푸린푸린! 푸린푸린♡_♡”

고무풍선이 짧은 다리로 도도도 달려가더니 에릭의 품에 폭 안겨 들었다. 그리고 감격한 듯 눈물을 지어내며 그 가슴에 격렬하게 얼굴을 비벼댔다. 전직 테러리스트라는 위험한 꼬리표도 감동의 물결에 젖은 작은 포켓몬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않는 듯했다.

그러나 푸린의 자연스러운 스킨십보다 찰스를 더욱 경악하게 만든 것은 이어지는 에릭의 행동이었다. 그는 셔츠가 구겨지는 것도 개의치 않고 가슴팍에 안긴 푸린을 꼭 껴안는 것이었다! 그리고 거짓 눈물을 쥐어 짜내고 있는 푸린의 뒤통수를 부드럽게 토닥이며 말했다.

“널 찰스라고 부르고 싶지만 그러면 큰 찰스가 헷갈려 할 테니, 대신 찰푸린이라고 부르도록 하자. 괜찮겠니?”
“푸리린♡”

푸린이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와아! 찰푸린도 이제 우리 친구다!”
“자비에 영재학교에 온 걸 환영해, 찰푸린!”
“찰푸린은 참 귀엽구나!”

그렇게 모두가 찰푸린의 거취가 정해진 것에 기뻐하며 환호했다. 단 한 사람, 학교 설립자를 제외하고.

“자, 잠깐만, 얘들아!”

빠른 속도로 돌아가는 상황 앞에서 찰스가 뒤늦게 어질어질한 정신으로 말려보러 뛰어들었다. 대체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었다. 푸린의 이름은 어쩌다가 찰푸린이 되었으며 저 괘씸한 풍선 뮤턴트는 어느 새 학생들의 사랑을 독차지해버린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이 학교에 귀여움 담당은 나 하나만으로 충분해!’

교장은 어쩐지 눈물이 흐를 것만 같은 것을 꾹 참으며 들리지 않을 저항을 외쳤다. 그러나 이미 찰푸린의 매력에 빠져든 학생들과 에릭은 패배한 찰스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모두가 자그마한 신종 뮤턴트―찰푸린을 둘러싼 채로 그의 이야기를 듣느라 정신이 홀려 있었다. 그래봤자 할 줄 아는 말이라곤 ‘푸’와 ‘린’밖에 없는 단순한 풍선일 뿐인데!

찰스는 좌절과 패배감 앞에서 홀로 몸부림쳤다. 바로 그 순간, 에릭의 품 안에 안겨있던 찰푸린과 찰스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 포켓몬은 이제 아예 제 자리마냥 에릭의 가슴팍을 차지하고 있었다.

“너, 너 이놈!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인 줄 알고!”

찰스는 마지막 남은 원통함을 끌어 모아 사자후를 내질렀다. 그러나 그 사자후는 에릭의 재킷 사이로 슬쩍 보이는 찰푸린의 눈빛 앞에서 막히고 말았다. 풍선 녀석이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음흉한 미소를 띠며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당황한 찰스가 뒤늦게 다른 사람들에게 방금 자신이 목격한 것을 알리려 해보았으나, 그 전에 아기자기한 목소리가 먼저 그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멍청한 놈.>

순간 굳어버린 찰스는 대답하지 못했다. 방금 자신이 들은 것이 사실이란 말인가? 그러나 질문에 대답해줄 사람은 남아 있지 않았다. 모두가 찰푸린의 귀여운 외모에 정신이 팔려 방금 저 말을 듣지 못했으니까. 아니, 어쩌면 자신한테만 들린 걸지도 모른다.  

찰스가 그 놀랍고도 잔인한 현실을 미처 받아들이기도 전에, 아기자기한 목소리는 쐐기를 박듯 덧붙였다.

<내 능력이 궁금해?>

“비열한 자식! 네놈 몸통을 바늘로 터트려버리겠―”

그러나 찰스의 욕설은 끝을 맺지 못했다. 지금까지 찰스가 시도한 항변은 하나도 안 들었으면서 뒤늦게 푸린한테 던진 욕설만 용케 알아채고는, 에릭이 엄한 눈빛으로 그를 쏘아봤기 때문이다.  

“찰스, 어떻게 그런 심한 말을! 선생이라는 자가 자기보다 힘없고 약한 동족에게 그런 협박을 할 수 있는 건가? 응?”

졸지에 일생일대의 연인한테마저 인간쓰레기 취급을 당하게 된 찰스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첫 번째 싸움은 완전한 패배였다. 아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찰스의 머릿속으로, 방금 전과 동일한 목소리가 스치고 지나갔다.

<이게 내 능력이다 머머리 조빱새끼야 :-) >
“――!!”

강적의 등장이었다.






3. 그는 나에게로 와서 연적이 되었다



애초에 이름을 물어보지 말아야 했다. 아니, 그 뺀질거리는 유사 풍선이 저택에 발을 들인 순간 쫓아버려야 했다. 그날 바보 같이 성인 흉내를 내며 관대한 척 하지만 않았더라도 지금의 굴욕은 겪지 않았을 텐데!

찰스는 눈물을 머금으며 한탄했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텔레파시 능력을 지닌 풍선 괴물은 재빠르게 찰스의 아늑한 보금자리에 완벽히 둥지를 텄고, 더 나아가 자비에 저택 사람들의 모든 사랑을 독차지하기에 이르렀다. 무엇보다 원통한 점은 아무도 저 수상한 풍선 녀석의 진짜 능력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아무리 찰스가 녀석의 숨겨진 능력에 대해서 다급히 퍼뜨리고 다녀도 사람들은 그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네? 풍선이 어떻게 텔레파시를 쓰겠어요?”
애제자 진은 재미있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고,

“찰스, 노이로제 걸린 거 아냐? 저 조그맣고 작고 사랑스러운 아이가 어떻게 텔레파시처럼 음흉한 능력을 쓰겠어?”
사랑하는 여동생은 기가 차다면서 꾸짖었다.

‘그렇게 말하면 선천적 텔레패서인 나는 뭐가 되니, 응?’

목구멍 끝까지 반론이 차올랐지만, 찰스는 그저 눈물을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지나가던 행크 박사가 그 꼴을 보고 마음껏 비웃음을 날렸다.

“천벌 받는 겁니다, 찰스. 그동안 당신한테 부려 먹힌 조교들의 원한이 풍선으로 형상화돼서 정의를 구현하러 온 거죠. 그 복수의 대리자는 우선 당신한테서 에릭을 빼앗아가는 것부터 시작할 거고요. 저주 받아라, 착취자.”

평소의 찰스였다면 기어오르는 행크를 인자한 웃음으로 마음껏 괴롭혀줬을 테지만, 에릭의 사랑을 빼앗긴 그는 마치 끈 떨어진 인형처럼 모든 의욕을 잃어버렸다. 그 재밌던 행크 부려먹기조차 전혀 흥미가 일지 않았다. 어차피 대자보 사건 이후로 에릭의 감시가 부쩍 심해진데다가 이미 저택에 더 이상 그의 편이라 할 만한 사람이 남아있지도 않았다.

그래, 문제는 에릭이었다.

엄마 뱃속에서부터 인간 불신을 품고 태어난 것만 같던 남자가 푸린에게만큼은 절대적 신뢰를 보낸다는 게 이상했다. 최근 에릭은 밥 먹을 때나 운동할 때나 목욕할 때나(!), 심지어 잠자리에 들려고 할 때도(!!) 따라붙는 푸린을 막지 않았다. 찰스는 그 점이 못내 원통했다.

가령, 그의 고정석이나 다름없던 에릭의 옆자리도 푸린에게 빼앗겨버렸다. 푸린이 저택에 나타난 다음 날 아침, 아점을 먹으러 슬렁슬렁 부엌으로 내려오던 찰스는 충격적인 현장을 마주하고 말았다. 에릭의 옆자리, 그 소중한 좌석에 풍선 괴물 녀석이 동그라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심지어 팔이 짧아 테이블까지 손이 닿지 않는 녀석을 위해서 에릭은 직접 식사를 한 숟갈 한 숟갈 떠먹여주고 있었다!

“에, 에릭? 나의 에릭이 밥 시중을 들다니……?”

경악한 찰스가 벌벌 떨며 혼잣말을 했다. 그러나 에릭은 고개 한 번 돌리지 않고 무심하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찰푸린은 안타깝게도 체구가 작아서 테이블까지 손이 닿지 않는대. 정말 귀엽지 않아?”

그렇게 말하며 정성스레 한 숟갈씩 떠먹여주는 에릭의 입매 위로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위기감을 느낀 찰스는 아직 잠옷 차림인 팔다리를 열심히 흔들며 애써 자신의 원조 귀여움을 어필해보았다.

“에, 에릭! 여길 봐! 날 봐줘! 여기에도 이렇게 귀여운 교장 선생이 있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에릭의 질린 한숨 뿐이었다.

“세상에, 채신머리없게 밥상 앞에서 무슨 짓이야? 푸린 보기에 부끄러워서 못 살겠다, 정말. 앞으로 넌 따로 먹어.”

에릭이 찰스의 시선을 피하며 그렇게 선고했다.

“나는 대찬성.”

레이븐이 커피를 홀짝이며 대답했다.

“푸리린!”
“찰푸린도 좋은 의견이라네. 자, 그럼 찰스, 우린 이만 산책하러 가볼게. 푸린이 저택을 구경하고 싶어 하거든. 설거지는 가장 마지막으로 먹은 사람이 하도록 해.”

그 말을 끝으로 에릭은 품 안에 푸린을 쓱 들어 안더니 식당을 나가버렸다. 양 손으로 풍선 몬스터를 단단히 받쳐 앉은 채 아이컨택을 하는 몸짓이 퍽 다정스러워 보였다. 그리고 그 품에 안겨 가증스럽게 웃고 있는 푸린의 눈빛도.

꽤 충격이 컸던지, 홀로 남은 찰스의 턱이 쫙 벌어졌다. 그 꼴을 본 레이븐은 오랜만에 가슴이 시원하게 뻥 뚫리는 기분을 느끼며 의형제를 골렸다.

“텄네, 텄어. 에릭이 완전 홀딱 빠져버렸는걸? 세기의 사랑한테 버림받은 기분이 어때? 재혼한지 삼 개월 만에 뻥 차인 기분은? 응?”

“이건…… 이건 꿈이야. 에릭이, 나의 에릭이 내 필살 잔망 눈웃음을 보고도 저렇게 냉정한 태도를 보이다니? 한 번도 안 통한 적이 없었는데? 역시 저 풍선 괴물 녀석이 텔레파시로 에릭의 정신을 조종하고 있는 게 틀림없어! 얼른 터뜨려야겠어!”

그러더니 있을 리 없는 바늘을 찾아 부엌을 뒤지고 난리도 아니었다. 그 꼴을 지켜보던 레이븐은 멍청하다는 듯 콧방귀를 끼며 일침을 가했다.

“그래봤자 분노한 에릭이 가출하기밖에 더하겠어? 잔망은 무슨. 본인 나이를 생각하고 애교를 부려야지.”

“아냐, 아니라고! 나의 눈물 글썽과 호두턱 콤보 한 방이면 아무리 화난 에릭이라도 자빠뜨리기 성공이었다고! 십 년 전 그때 비행기에서도 비장의 호두알 연기 하나로 에릭의 수절을 확인했단 말야!”

그러면서 나이 마흔의 교장 선생은 시범이라도 보이듯 정말로 턱에 호두알을 만들어 보였다. 레이븐은 정나미 떨어진다는 듯 대꾸했다.

“와, 그거 참 알고 싶지 않은 투 머치 인포네. 혹시 에릭이 한때 잠깐 정신이 나가서 정말로 오빠의 그 자랑스러운 턱 주름을 보고 헤롱헤롱해 졌다고 쳐도 이젠 안 먹히잖아? 시대가 바뀐 거야. 잔망미만으로 승부하던 시대는 갔다고. 남자답게 포기해.”

“내가, 내가 뭘 어떻게 하면 될까? 응? 여기서 뭘 어떻게 바꿔야 저 영악한 푸린 놈의 마수에서 에릭을 구해낼 수 있지?”

더 이상 잔망미로 먹히는 시대가 아니란 말에 다급해졌는지, 찰스가 우왕좌왕하며 절박하게 매달렸다.

그래도 형제는 형제라고, 그 초라한 모습을 본 레이븐의 가슴 한 구석이 어쩐지 짠해졌다. 다정한 동생은 어떻게 대답해야 그나마 찰스가 덜 상처받을까 고민하다, 결국 진실을 뱉어냈다. 찰스가 조금 안쓰럽긴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거짓을 말할 순 없었으니.

“찰스, 정말 안타깝지만 이미 오빠는 체모에서 밀렸는걸. 푸린한테는 아직 풍성하고 복슬복슬한 앞머리가 있잖아. 그리고 알다시피 에릭은… 예나 지금이나 풍성함과 귀여움에 약하지.”
“――!”

그나마 혈기는 남아 있던 찰스의 안색이 정곡을 찌르는 레이븐의 말을 기점으로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피가 몽땅 빠진 그 몰골을 보는 레이븐의 마음도 마냥 편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는 진실이었다.

“유감이야, 찰스. 하지만 요새는 미리 밝히지 않은 대머리 유전자도 이혼 사유가 된다고 하니…….”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 레이븐의 태도에 찰스가 격렬하게 고개를 흔들며 부정했다.

“아냐, 난…… 이건 그런 게 아니라고. 내 머리는……! 세계를 구하려다 희생돼버린, 안타까운 이별이라고! 산재 처리 대상에 든단 말야!”

“찰스……”

온몸을 부들부들 떠는 찰스의 모습을 보고 나서야 레이븐은 자기가 괜한 일을 저질러버린 건 아닐까 살짝 걱정이 되었다.

웬만해서는 쉽게 여유로움과 웃음을 잃지 않는 찰스지만, 기본적으로 그의 형제는 질투심도 강하고 하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은 꼭 손에 넣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그런 사람이 애인을 빼앗겼으니 무슨 짓을 저지른다 해도 놀랍지 않았다. 문득 레이븐은 자기의 괜한 장난 때문에 작은 풍선 친구를 위험에 빠뜨리게 한 건 아닌지, 걱정이 들었다.

‘푸린은 영리하니까 괜찮겠지? 부디 찰스의 치졸한 질투에 휩쓸려 다치지 않기를―.’

들리지 않는 레이븐의 기도를 들었더라면, 푸린은 분명 기뻐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레이븐의 염려대로 사랑에 눈 먼 찰스의 질투는 어마어마했고, 심지어 평소의 그라면 절대 고안하지 않았을 위험하고 무시무시한 방법까지 생각해내고 말았던 것이다. 하루아침에 연적한테 에릭의 관심을 빼앗긴 교수의 분노는 깊고도 깊었다.

그는 무슨 비열한 수를 써서라도 에릭을 되찾을 작정이었다. 비록 그것이 작은 꼬마 뮤턴트의 신상에 위험이 가해지는 일이라 하더라도. 찰스 자비에는 집요하고 끈질긴 남자였다.

부디 가련한 푸린에게 자비 있기를!






죄송합니다..........(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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