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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어콜린스] 서신 1

포로로 잡힌 파리어에게 편지를 보내고 싶은 콜린스.

* 리퀘 소재: 원작 배경으로, 어쩔 수 없이 이별을 겪는 파리어와 콜린스. 




독일 제 3 공군 포로 수용소, 1945. 눈보라 속의 행진.




런던 우편 접수국의 포로 장병 서신을 담당하고 있는 비커슨 상병은 그날도 하루 종일 쌓인 업무를 처리하느라 몹시 지친 참이었다. 약 한 달여 전에 개시된 포로 장병 서신 업무는, 그 소식이 시민들에게 전해지자마자 첫날부터 편지를 부치려는 사람들의 행렬로 만원을 이뤘다. 많은 시민들이 낯선 이국의 수용소에 가족이나 연인을 떠나보낸 참이었으며 그런 방문객들은 하나 같이 애처롭고 주눅 든 낯빛을 띠고서 그녀 앞에 나타났다. 세 아들이 모두 독일에 포로로 잡힌 어머니, 프랑스에서 체포됐던 남편이 이젠 폴란드까지 이송돼버렸다는 젊은 아내, 갓 스무 살을 넘긴 막내의 행방을 찾아 어렵사리 발길을 옮긴 초로의 노인. 저마다 가슴 저민 사연 하나씩은 품고서 접수국을 찾았다.

단순한 우편 접수 업무일 거라고 생각했던 일은 알고 보니 전혀 단순한 일이 아니었다. 그 우편을 받는 대상이 적국에 사로잡힌 포로 신분이고 발신인은 뒤에 남겨진 유가족인 이상, 단순 서류 업무 이상의 감정노동이 따라오는 것은 다소 필연적인 결과였다. 그런 과중한 직무에 단순히 ‘여군이니까 사람을 잘 상대할 것’이라는 쉬운 핑계만으로 배치된 지 서른 밤 째. 제인 비커슨 상병은 아침 아홉 시부터 저녁 여섯 시까지 장장 여덟 시간 동안 쉴 틈 없이 밀려드는 유가족의 갖가지 부탁과 애원을 처리해주느라 탈진하기 직전이었다. 지금까지 전근 신청서를 내지 않고 버틴 것은 오로지 그 불쌍한 사람들을 향한 약간의 동정심과 일말의 책임감 덕분이었다.

그러니 그날 늦은 오후, 종료 시간을 십여 분 남겨놓고 마지막 손님이 뛰어오는 발소리가 들렸을 때, 절로 한숨이 흘러나온 것도 어쩔 수 없는 반응이었다. 그녀는 서류에서 눈도 떼지 않은 채 기계적으로 말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좋은 저녁이군요.”

부드럽고 생기 있는 음성이 빈 사무실을 울렸다. 이곳에서 마주치기 드문 젊은 남자, 그것도 현직 군인이었다. 검은색 코트 사이로 살짝 비치는 남색 정복이 청년의 직급을 알려주고 있었다. 장교였다. 그녀의 무뚝뚝하던 태도가 무의식적으로 풀어졌다.

“제가 도와드릴 일이라도?”

“편지와 소포를 좀 보내려고 합니다.”

드문 일이었다. 새벽부터 창구에서 자리를 지켰지만, 군복 차림의 젊은이가 손님으로 방문한 것은 처음이었다. 대개는 남편이나 애인, 오라비나 아버지를 떠나보낸 여인들이 찾아오기 마련이었으니까. 간혹 남자 손님들이 찾아오는 경우는 유가족의 부탁을 받고 대리로 찾아온 중년 남성들이 대부분이었다. 한창 나이의 젊은이들은 전부 군대 아니면 공장으로 출근했으니.

간만에 보는 동년배의 방문에 그녀는 한결 부드러워진 기분으로 이 낯선 손님을 맞아주려 했다. 그러나 어쩐지 이 젊은 장교의 안색 위로도 남편 잃은 여인들의 것과 비슷한 그늘이 깔려 있었다.

그는 망설임 섞인 동작으로 품에 안고 온 꾸러미를 꺼냈다. 긴장돼 보이는 그를 안심시키려는 듯, 제인이 살짝 웃으며 소포를 받아들었다. 그러자 남자가 놓칠 새라 작은 봉투 하나를 같이 내밀었다.

“수취인 성명이?”

상병이 받아 적을 준비를 하며 물었다.

“파리어. 에드워드 파리어.”

“계급과 소속은요?”

“제 12 전투비행중대 소속. 비행사관, 대위입니다.”

“어디에 있는지는 알고 계시죠?”

그녀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타자를 치며 말했다. 남자는 막힘없이 낯선 지명을 읊기 시작했다. 곧바로 대답이 튀어나오는 것으로 보아, 아마 낯선 외국의 지명이 외워질 만큼 여러 번 편지를 읽은 듯 했다.

“Sagan, Lower Silesia, Germany. Stalag Luft Ⅲ.”

사무적으로 타자를 치던 두 손이 살짝 멈칫했다.

“자간, 남 슐레지아, 독일. 제 3 공군수용소. 맞습니까?”

“정확합니다.”

하필 혹독하기로 악명 높은 수용소라니. 접수를 받던 제인의 눈길 위로 순간 안쓰러워하는 빛이 스쳤다.

“……유감이에요.”

약해진 가면 사이로 살짝 연민이 새어나왔다. 그러나 남자는 못 본 척, 의연하게 대답할 뿐이었다.

“어디 그 사람 하나뿐이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청년의 얼굴이 노인처럼 담담한 답변과는 다르게 너무 말갛고 어려 보여서, 가슴이 쓰렸다.

“발신인 신원은 어떻게 되죠?”

“잭 콜린스. 제 12 전투비행중대, 비행 사관, 중위입니다. 보내는 물건은 편지 한 통과 옷가지, 그리고 영양제 몇 통─”

“잠깐! 잠깐만요. 민간복인가요?”

“예. 무슨 문제라도?”

온화하던 분위기가 갑자기 변하자, 콜린스 중위가 걱정스런 눈길로 되물었다. 그러나 받아든 소포를 점검하던 접수 장병의 낯빛은 쉽게 밝아지지 않았다.

‘민간복은 탈옥 조장 혐의로 어차피 압수될 텐데.’

그녀는 머리에 떠오른 접수 규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곤란해졌다. 망설인 끝에 내놓은 말은 또 다른 형식적 질문이었다.

“수취인과의 관계는 어떻게 되죠? 가까운 친척인가요?”

파리어와 콜린스라는 두 성(性)이 혈연으로 묶여있을 가능성은 적었다. 상병은 그래도 일말의 가능성을 기대하며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여전히 구제할 길이 없었다.

“동료……입니다. 같은 편대 소속이었죠.”

“가족이나 대리인은 아닌 거고요?”

“예.”

콜린스 중위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것을 듣는 상병의 표정은 어쩐지 편치 않았다. 송장을 작성하던 손놀림이 멈추고, 곧 그녀가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중위를 올려다보았다.

“죄송하지만 포로 장병에게 가는 모든 우편은 직계 친척이나 가까운 가족의 우편만 발송이 허락돼요. 아시다시피 가족 외의 외부인한테서 받는 우편은 일단 첩보로 간주해서요.”

“아……”

설명을 들은 장교의 몸짓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안타까운 마음에 제인은 어떻게든 대안을 마련해보려 머리를 굴렸다.

“위임장이나 관계 증명서를 가져오면 가족 대리인으로 처리할 순 있어요. 혹시 위임장은 없으신가요?”

그러나 돌아온 중위의 답변은 야속하리만치 솔직한 내용이었다.

“그의 가족은…… 모릅니다. 마지막으로 들었을 때 부모님이나 형제와는 사별했고 그 밖의 친지는, 글쎄요. 연락해 보려고 했지만 닿지 않아서…….”

남은 친척이 없어 옛 동료가 대신 겨우 연락을 해줘야 한다니. 듣자하니 파리어 대위라는 사람도 어지간히 고독한 처지인 것 같았다. 그래도 규정은 규정이었다. 사정이 아무리 안타깝더라도 일개 상병이 예외를 봐줄 수 있는 사항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녀는 부러 더 단호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상황은 알겠지만 가족이 아니면 어려워요. 일단 독일로 넘어가는 모든 소포와 편지는 검열 대상인데다 현직 군인이 보내는 물건이라니…… 무사히 국경을 넘더라도 그쪽에 닿자마자 간수들한테 압수당할 겁니다. 밀반입이나 스파이 혐의 1위인 걸요.”

“그냥 옷가지 몇 벌에 영양제 몇 통뿐입니다. 다른 위조 서류나 화폐, 사진 같은 건 한 장도 없어요. 살펴봐도 좋아요.”

그렇게 해명하는 중위의 표정이 몹시 다급해 보여 제인은 더욱 미안함을 느꼈다. 사로잡힌 옛 동료가 마치 친형제라도 되듯이 처절하게 매달리는 젊은 중위. 그리고 다른 한쪽에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교육받은 규정들. 진퇴양난이었다.

그녀의 망설이는 기색을 눈치 챘는지, 중위는 한결 힘주어 매달렸다.

“남은 옷이라곤 잡힐 때 입고 있던 군복 단 한 벌밖에 없는데, 그쪽에서 더 지급해주질 않는답니다. 거기 환경이 어떤지는 소문으로 들어서 당신도 알잖습니까. 곧 겨울이 코앞이에요. 제발─”

“차라리 정보부에 부탁하는 건 어때요?”

“정보부?”

중위가 혼란스런 표정으로 되물었다. 점차 희망을 잃어가는 그 얼굴에서 눈길을 돌리며, 제인이 빠르게 덧붙였다.

“독일로 넘어가는 연락책들이야 항상 있을 테니까, 그 선으로 전해달라고 요청해보세요. 어차피 당신도 장교니까 들어줄지 모르는 일이잖아요. 저는…… 저는 정말로 권한이 없어요.”

그게 마지막 타협이었다. 맥 빠진 남자의 얼굴이 차마 보기 힘들어, 그녀는 애써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고개를 숙인 채로 손만 뻗어 갈색 꾸러미를 밀어냈다. 되돌아온 소포를 받아드는 중위의 어깨가 유독 처져 보였다. 부치지 못한 편지를 만지작거리는 그림자는 듬직한 체구에 비해 초라하고 앙상했다.

“……알겠습니다. 바쁠 텐데 붙잡아서 미안했어요.”

그가 아직 떨리는 손으로 주섬주섬 소포를 챙기며 그렇게 말했다. 끝까지 예의를 잃지 않은 정중한 태도였지만, 처음의 생기가 사라진 건 어쩔 수 없었다. 희망과 기대를 품고 찾아왔던 남자는 그렇게 실망을 안고서 문 밖을 나섰다.




기지로 돌아가는 콜린스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독일 소인이 찍힌 세 통의 엽서를 받자마자 급하게 편지와 짐을 꾸려 런던으로 상경했건만, 돌아온 것은 단호한 거절뿐이었다. 담당병의 현실성 없는 제안도 음울한 마음을 위로해주진 못했다. 그는 역 대합실에 도착하자마자 의자 위에 스르르 주저앉았다. 일말의 희망마저 사라진 기분이었다.

그때 벌어진 외투 주머니 사이로 낡은 엽서가 비죽 고개를 내밀었다. 그는 멍한 눈길로 그 끄트머리를 바라보다가, 느리게 손을 뻗었다. 싸구려 군용 엽서는 얼마나 여러 번 읽었는지 귀퉁이가 다 닳아 있었다. 손때 묻은 보드지 위에는 딱딱한 인쇄체로 형식적인 인사말이 적혀 있었다.

<독일에서 포로로 잡혔으며 건강 상태 매우 양호함. 추후 며칠 안에 다른 캠프로 이송될 예정. 새 주소를 보내기 전까지는 연락할 필요 없음.

성명: 에드워드 T. 파리어

계급: 대위

소속: RAF>

이름과 직위를 적은 란을 제외하면 하나 같이 차가운 활자체였다. 한눈에도 독일군에서 일괄적으로 배포한 인쇄 문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콜린스는 거짓과 위선으로 뒤덮인 그 문단을 뛰어 넘어 익숙한 필체를 찾아 아래로, 아래로 시선을 헤매었다. 복잡한 도장과 서명 무더기를 한참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사람 온기 묻은 진짜 편지가 나타났다. 파리어의 필체였다.


<C에게,

이 편지가 너 있는 곳까지 잘 전달되길 바란다. 여기 도착한 후로 처음 얻는 기회거든. 나는 무사하니 염려 말고 항상 몸조심하기를. 어디 다치진 않았겠지? 출격하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많이 가르쳐 줄걸 그랬어. 낯선 하늘에서 혼자 날고 있을 널 생각하면 숨이 막혀.

진심을 담아, 파리어. 44. 8. XX.>


급하게 흘려 쓴 편지는 그토록 짧았다. 계속되는 이송과 이송 사이에 잠시 틈을 내서 쓴 흔적이 역력했다. 한여름에 받았던 작은 엽서는 너무 여러 번 펼쳐보느라 이젠 검은 손때로 흐릿해져 있었다. 그것이 벌써 반 년 전의 일이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그 사이 낯선 동토에서는 두 통의 편지가 더 날아왔다. 콜린스는 계속해서 다음 편지를 펼쳤다. 두 번째 편지는 철자를 지웠다 쓴 흔적으로 시작했다.


< 친애하는 콜린스,

세 달 만에 양초를 지급받았어. 그 불빛에 의지해 글을 쓴다. 지금은 소등시간이지만 누가 보더라도 상관없어. 옆 사람 숨소리까지 들릴 만큼 비좁은 곳이지만 밤에는 누가 뭘 하든 신경 쓰지 않으니까. 온종일 사람에 부대껴 생활하는데 이 정도의 사생활은 괜찮겠지. 네게 보낼 편지를 쓰는 이 시간만이 나한텐 오롯이 제정신을 유지할 시간이나 마찬가지야.

자간, 그게 내가 있는 땅의 이름이야. 네가 있는 켄트까지 닿기엔 너무 많은 강과 바다가 가로막고 있지. 그래도 아직은 이런 우울한 상념들에 매몰되지 않으려고 해. 크리스마스까진 돌아가고 싶었는데 약속을 지키지 못해 미안하다.

영혼을 대신 담아, 파리어. 44. 11. XX.>


세번째 편지에는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난 날짜가 찍혀 있었다. 겨우 손바닥만 한 엽서를 빼곡히 채운 글자는 추위 속에서 급히 쓰기라도 했는지 볼품없이 흔들려 있었다.


<그리운 콜린스,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네가 궁금해 견딜 수 없다. 나는 내일 아침 다른 수용소로 떠나. 붉은 군대가 몰려올 기미가 보이니 더 외진 곳으로 옮기는 거겠지. 날씨가 춥긴 하지만 가는 길 내내 너에게 부칠 이 편지를 품고 있으면 견딜 만할 거야. 내 걱정은 하지 마. 네가 씩씩하게 잘 지내면 그것만으로 난 충분해. 내가 돌아갈 때까지 늘 웃음 잊지 말기를.

사랑을 담아, 파리어. 45. 1. XX.>


그게 마지막이었다. 한겨울 시린 추위 속에 긴 여로에 올랐다던 사람은 그 후로 연락이 없었다. 아마 아직 새 보금자리에 터를 잡지 못한 탓이리라. 그러나 애써 변명거리를 생각해낸다고 해서 불안한 마음이 가라앉는 것은 아니다. 콜린스는 말없이 손을 들어 헤진 엽서를 매만졌다.

갈라지고 터진 손끝이 날짜 위를 쓸었다. 대륙의 겨울은 브리튼 섬보다 훨씬 혹독하다 들었던 기억이 났다. 목이 메었다. 그는 밭은 숨으로 혼잣말했다.

“추위를 많이 타는 사람인데.”

꼭 보내주고픈 답장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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