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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파리어콜린스] As You Are 2 (끝)

전후 콜린스를 찾아 스코틀랜드로 가는 파리어.

작가: soniclipstick, MessKit

Paring: Farrier/Collins

원문: http://archiveofourown.org/works/13196148

키워드: 원작 이후(post-canon), 포근한 가정물(domestic fluff)


번역 허락.
번역 허락.

* 늦어서 죄송합니다. 오역이나 오류는 댓글로 문의주세요. 








As You Are 

너의 있는 그대로




거실은 아담하지만 안락했다. 소파 위에는 담요 여러 장이 깔려 있었고, 소가죽 깔개도 있어서 덕분에 콜린스가 연기가 피어오르는 뜨거운 차를 가져다주기 전까지 그 속에 시린 발을 데울 수 있었다. 앙증맞게 꽃문양이 그려진 찻잔은 콜린스의 거친 손에 들려 있으니 어딘가 어색해 보였다. 루시는 자기소개를 마친 다음엔 난로 옆 양가죽 카펫 위에 자리를 잡고서 모서리가 잔뜩 접힌 책을 읽느라 정신이 팔려 버렸다. 곧 콜린스가 파리어 옆의 빈 흔들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서로 무릎이 닿을락말락하는 거리였다. 그 접촉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그러나 그 순간 떠오른 생각 하나가 파리어를 막았다. 지금까지 그의 상상 속에서 콜린스는 행방불명된 실종자였다가, 다시 생존자가 되었다가, 결혼해서 아이를 가진 남편이 되더니 결국엔 홀로 조카를 기르는 삼촌이 되는 변화를 겪은 참이었다. 놀랄 만한 일은 여기서 끝인 걸까? 아니면? 파리어는 약간 혼이 나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지금의 행복한 순간도 사실은 꿈이어서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둘은 말없이 차를 들었다. 파리어는 콜린스를 너무 쳐다보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쓸데없는 짓이었다. 콜린스가 뭔가 말하려는 듯 살짝 입을 벌렸다 곧 다시 닫아버리기를 반복했다. 입을 뻐끔거리기는 파리어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 무겁고 숨 막힐 듯한 침묵을 깨고 싶었지만, 달리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전쟁이 콜린스에게 참 많은 것을 남기고 지나갔다는 사실이었다. 턱부터 야윈 쇄골까지 붉고 울퉁불퉁하게 솟은 흉터가 길게 남아 있었다. 눈동자에는 이전에는 본 적 없던 탁함이 서려 있었으며 그 아래로 초췌한 다크서클이 매달려 있었다. 혈색이 좋지 않았고 입술은 이로 물어뜯은 흔적이 역력했는데, 그건 긴장되거나 무서울 때마다 튀어나오는 콜린스의 버릇이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숨 막힐 듯 아름다웠다.

책장 넘기는 소리에 파리어는 루시 쪽으로 주의를 돌렸다. 루시는 네 살밖에 되지 않은 연약하고 작은 아이였지만 아이의 얼굴에서는 콜린스 가족의 피 속에 흐르는 어떤 특징─금욕적인 결의 같은 것을 느껴졌다. 바로 이 아이가 삼촌에게 곧바로 물건을 전달한 것이 파리어에게는 천만다행인 일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쯤 그는 자신이 어떤 미래를 놓쳤는지도 모른 채 런던으로 가는 기차에 앉아있었을 테니까. 희극적이리만치 경이로운 우연이었다.

“페기 누나는 무선 라디오 통신원이 아니라 암호 해독원이었어요.”

콜린스가 불쑥 말을 꺼냈다. 파리어가 돌아보자 그는 애써 시선을 조카에게 고정했지만, 떨리는 두 손만은 감출 수 없었다.

“당연히 전쟁 동안에는 당신한테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죠. 블레츨리(*2차 대전기 영국의 암호 해독 본부가 위치한 곳. 이곳에서 독일의 암호 기계 에니그마를 해독했다.)에서 가장 뛰어난 실력자 중에 하나였는데, 대공습 때 목숨을 잃었어요.”

“유감이야, 콜린스.”

“그런 말 말아요.”

콜린스가 갈라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는 헛기침을 몇 번 한 후에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매형 존은 아르덴에서 보병대로 싸웠고요. 거기서 독일군한테 잡혔죠.”

파리어는 아르덴에서의 전투(*1944년 12월 연합군이 서부전선에서 독일군을 결정적으로 몰아낸 전투. 벌지 전투라고도 불린다)가 몹시 처참했다던 소문을 기억해냈다.

“우리 어머니 혼자서 루시를 돌보고 계셨는데, 폐렴에 걸려버리셨죠. 전쟁 내내 상처 하나 없이 무사히 견디셨는데, 고작 승전일 삼 주 후에 돌아가신 거예요.”

콜린스는 헛웃음인지 흐느낌인지 모를 소리를 냈다. 루시한테는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소리였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파리어는 상체를 구부려 콜린스의 무릎 위로 양 손을 포갰다. 그러다가 곧 자기가 한 행동을 깨닫고 급히 몸을 뒤로 물리려 했으나 이번에는 콜린스가 강한 힘으로 그의 손을 잡고서 놓아주지 않았다.

“당신이 죽었다고 생각했어요, 토마스.”

“편지를 썼었어.”

파리어는 같은 대답을 되풀이했다.

“한 통도 받질 못했어요. 그래서 당신이─”

“아냐. 이렇게 돌아왔잖아. 자, 봐.”

파리어가 명령했다. 콜린스는 여전히 눈물 맺힌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나 무사해. 죽지 않았어.”

그 편지들─콜린스를 위해 쓰고 또 썼던 편지들은 결국 처음부터 전달되지 않았거나 중간에 분실된 거였다.

“나도 네가 죽은 줄 알았어. 찾아보느라 꽤 시간이 걸렸지.”

“그래도 끝까지 찾아줘서 고마워요.”

콜린스가 잡힌 손을 빼내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분위기는 다시 어색해졌다. 파리어는 시선 둘 곳을 찾아 무릎 위에 놓인 못 박힌 자기 손을 내려다봤다. 이제는 더 이상 곧게 펴지지 않는 왼손의 두 손가락을, 마치 처음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뚫어져라 응시했다.

“비스킷 하나 줄까요, 파리어?”

갑자기 팔꿈치 아래서 들려온 작은 목소리에 그는 깜짝 놀라 옆을 돌아봤다. 루시가 작은 손으로 접시 한 가득 새까맣게 타서 모양이 흐트러진 비스킷을 들고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제가 직접 만들었어요.”

“제대로 불러드려야지, 아가씨. 너한테는 파리어 아저씨야.”

콜린스가 짐짓 훈계했지만 파리어는 그의 목소리에서 짐짓 귀여워하는 기색이 감도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아, 괜찮아.”

파리어가 상관없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그는 평생을 그저 ‘파리어’라고 불리며 살아왔다. 어린 아이였을 때조차 고아원의 수녀들은 원생들을 단지 성으로만 불렀다. 그러니 문제될 것 없었다. 어쨌든 아까 전 먼저 아이에게 ‘파리어’라고 자기를 소개한 사람도 그였으니까.

“죄송해요, 파리어 아저씨. 비스킷 하나 드릴까요?”

루시가 기대 어린 미소를 활짝 지으며 물었다.

“그거 맛있겠는걸. 고맙다, 루시.”

파리어는 그나마 덜 타 보이는 것을 골라 한입 깨물었다. 맛이 아주 훌륭하지는 않았다. 배급제는 여전했고 그 덕에 버터와 설탕을 덜 넣는 레시피를 사용해야 했기 때문이다. 과자는 바싹 말라서 금방이라도 가루가 떨어질 것 같았다. 그렇지만 파리어는 지난 오 년 간 삶은 양배추와 묽은 수프로만 연명한 참이었기 때문에 탄 비스킷을 맛있게 먹는 시늉을 내는 정도는 한 입 거리도 되지 않을 만큼 쉬웠다.

“고맙다, 아가. 비스킷이 정말로 맛있구나.”

“천만에요, 파리어 아저씨.”

아이는 자랑스럽게 두 눈을 빛내더니 활짝 웃으며 콜린스를 향해 접시를 내밀었다.

“해미쉬 삼촌, 삼촌도 하나 드실래요?”

콜린스가 한 조각 들고 나자 루시는 빈 접시를 들고서 바람처럼 부엌으로 쏙 사라졌다.

“가여운 것. 루시는 배급으로 받는 비스킷 말고는 한 번도 다른 과자를 먹어본 적이 없어요. 이 지역에선 아직도 배급 제한이 있어서 편찮으신 어머니는 루시를 데리고 도시까지 갈 기회가 마땅치 않으셨거든요. 선물로 제대로 된 간식을 받아본 적이 없는 거예요.”

그렇게 말하며 콜린스는 루시를 마치 삶의 등불이라도 되는 양 바라보았다. 루시의 이야기를 입에 올릴 때마다 두 눈은 밝게 빛났고 굳어있던 안색은 부드러워졌으며 피로한 기색 사이로 옛 시절의 그가 비치는 것만 같았다. 부엌에서 돌아온 루시는 보자기로 싼 꾸러미 하나를 들고 있었다. 아이는 삼촌을 지나쳐 곧장 파리어에게로 뛰어오더니 황금 달걀을 전해주기라도 하듯 조심스러운 손짓으로 손님에게 꾸러미를 건넸다. 파리어의 손목을 스치는 아이의 손길은 작지만 온기로 가득했다.

“가실 때 더 가져가셔도 좋아요, 파리어 아저씨.”

“고맙다, 루시. 꼭 그러도록 할게.”

그때 루시가 살짝 몸을 뒤로 물렸다.

“하지만 지금 당장 돌아가실 건 아니죠? 네? 저녁은 같이 드시고 가실 거죠? 파리어 아저씨도 우리랑 같이 자고 가면 안 돼요, 삼촌? 응?”

두 남자의 시선이 얽혀들었다. 루시가 기대에 찬 눈빛으로 두 어른을 번갈아 보는 그 잠시 동안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잠시 뒤 콜린스가 부드럽고 익숙한 몸짓으로 아이를 두 팔로 안아들었다. 그 자세로 제자리를 한 바퀴 휘 돌자 아이는 까르륵 기쁜 환호를 터뜨렸다.

“물론이지, 우리 아가씨. 파리어 아저씨도 같이 자고 가실 거야. 자, 이제 저장고에 가서 감자랑 당근, 그리고 양파랑 양배추도 바구니에 좀 담아 오거라. 손님을 대접하려면 스튜를 더 많이 만들어야겠지, 응?”

루시는 곧장 식품 저장고를 향해 달려갔다.

잠시 후 세 사람은 꽤 넓은 부엌에 나란히 서서 야채들을 깍둑 썰고 잘게 다졌다. 파리어는 콜린스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콜린스는 지금껏 파리어가 본 것 중 가장 프릴이 많이 달린 앞치마를 입고 있었는데, 그걸 보고 웃음을 터트리지 않기 위해서는 엄청난 자제력이 필요했다. 루시는 용감하게도 식탁 끝자리 둥근 의자 위에 걸터앉아서 자기의 작은 손으로는 다 잡기도 버거운 감자 껍질을 벗기느라 끙끙대고 있었다. 파리어가 도무지 할 말을 찾지 못했던 탓에, 이웃집 닭에서부터 공습 대비 훈련까지 온갖 잡다한 일들에 토를 다는 루시의 수다만이 어색한 분위기가 감도는 사태를 겨우 막아냈다. 흘깃 곁눈질로 콜린스 쪽을 보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고 있는 건 그쪽도 마찬가지 같았다.

“여하튼 그렇게 해서 마조리와 내가 친구가 된 거에요. 교회 종에다가 마멀레이드 잼을 덕지덕지 바르는 사고를 쳤는데도 말예요.”

루시의 조잘대는 말소리가 몽상에 빠져있던 두 어른을 깨워냈다. 콜린스가 움찔하더니 상체를 숙여 루시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루스, 모르는 사람들 앞에선 그 얘기 안 하기로 했었지, 음?”

콜린스는 파리어와는 눈도 마주치지 않고서 루시의 머리를 쓱쓱 헝클어뜨렸다. 그리고는 허둥지둥 자리를 일어나더니 어깨너머로 두 사람에게 당부했다.

“밖에 냉동고에서 고기 좀 꺼내올게요. 나 없는 동안 난로에 이상한 거 넣지 말고.”

“나 그런 짓 안 해!”

루시는 조그만 체구가 놀라울 만큼 커다랗게 화를 내더니 잠시 후 파리어를 바라보며 물었다.

“앗, 혹시 파리어 아저씨한테 말한 걸까요?”

허를 찔린 파리어는 덕분에 허파가 당기도록 웃을 수 있었다.

“글쎄, 그냥 삼촌이 농담한 거 아닐까? 원래 그런 사람이잖아.”

그 말에 루시가 이마를 찌푸렸다.

“우리 삼촌이 그래요?”

순간 파리어는 심장이 콱 조이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미처 그가 변명을 생각해내기도 전에 루시가 먼저 살짝 몸을 기울이더니 조곤조곤 속삭였다.

“삼촌은 다른 사람들이 마멀레이드 일을 알게 되면 삼촌한테 참 나쁜 삼촌이다, 그러고 날 데려 갈까봐 저래요. 그치만 파리어 아저씨는 모르는 사람이 아니니까 괜찮아요. 아저씨도 군데… 군대? 군데? 아무튼 삼촌이랑 같이 싸웠으니까, 규칙 어긴 거 아니야. 아저씨는 우리 삼촌 나쁜 삼촌 아닌 거 알죠, 응?”

“그럼, 잘 알지. 콜린스는 나쁜 거 아무것도 없지.”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그때 마침 콜린스가 돌아왔다. 귀 끝이 아직도 살짝 빨갰다. 그는 제가 들고 있는 조그만 정육점 꾸러미에 파리어의 시선이 꽂히는 것을 알아챈 것이 분명했다. 곧장 미안하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이더니 꾸러미를 열어 보여준 것이다.

“이 지역에선 겨울이 일찍 와서요. 가을에 수확한 걸 다 저장해둘 틈이 없었지 뭐에요. 애초에 모아둘 음식이 많지도 않았지만요. 거기다 배급제도 있어서 자라는 애한테 먹일 만한 고기 한 덩이 구하기가 어렵더라고요.”

포장을 벗겨놓고 보니 고기는 세 명은 물론이고 고작 한 명이 겨우 먹을 만한 양이었다.

“다행히 삼촌은 고기를 안 좋아한대요. 그래서 전부 나한테 줘요. 그치만 편식하면 안 되는데. 그쵸, 아저씨? 난 삼촌도 한 입 맛이라도 봐야 된다고 생각해요.”

“나도 그렇단다, 루시. 오늘은 우릴 봐서라도 먹어보지 그래, 해미쉬?”

콜린스는 보잘 것 없는 고기 한 점을 자르며 조용히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아니, 오늘은 됐어요. 이걸 삼등분하면 각자 한 입씩밖에 안 돌아갈 걸요.”

“아, 나는 고기 못 먹어. 물 같은 수프만 먹었더니 한동안은 과식하지 말라고 하던 걸.”

파리어는 언제 어느 상황에서든 말로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재주가 있는 남자였다. 그는 어린 조카를 먹이기 위해 콜린스가 대신 굶는 상황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순 없었다.

“아직 고기는 금지. 의사 명령이야.”

“말이 되는 소릴 해요, 토마스. 세상에 어떤 의사가 포로였던 환자한테─”

“의사, 명령. 이라니까.”

말을 마친 파리어는 남아있던 재료를 덜어 냄비에 집어넣은 다음 오래된 목조 스토브 위에 올렸다. 뒤돌아본 콜린스의 야윈 얼굴 위엔 지치고 패배한 기색이 어려 있었다. 파리어는 그런 그의 어깨를 다정하게 툭툭 쳤다. 손을 떼기 전 한 번 꼭 쥐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럼 이제 그만 식탁 차릴까?”

얼마 지나지 않아 맛있는 스튜 냄새가 부엌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콜린스는 앞치마를 벗어 문 걸이에 건 다음 파리어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루시는 아직 아래층 욕실에서 나무배를 가지고 한창 신나는 모험을 즐기는 중이었기 때문에 부엌엔 두 사람뿐이었다. 잠시 동안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단지 서로를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했다. 들리는 소리라곤 두 명 분의 숨소리와 스튜 끓는 소리뿐이었다. 가끔씩 복도에서 들려오는 루시의 혼잣말이 유일한 쉼표였다. 그대로 수 분이 흘렀다. 문득 콜린스가 한 쪽 손을 뻗어 식탁 가운데로 가져갔다. 파리어가 그를 따라 천천히 콜린스의 손가락 끝을 만져보았다. 작은 손짓일 뿐이었지만, 그 작은 손짓 하나가 파리어에게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귀중했다.

콜린스가 살아있다.

콜린스가 지금 여기, 살아 숨 쉬고 있다. 수용소에 갇혀있던 내내 눈을 감고 마음속으로 그려보았던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살아있다. 그 지친 표정 뒤에 적힌 생각을 읽을 수만 있다면 무엇인들 못할까?

그때 복도에 걸린 할아버지 시계가 정시를 알리는 종을 쳤고 두 사람은 화드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콜린스는 말없이 루시를 데리러 나갔고 파리어는 다시 의자에 앉아 접시 위에 음식을 덜기 시작했다. 그는 절반 이상의 고기를 콜린스 접시 위에 덜어낸 다음, 자기 몫으로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이어서 진행된 식사는 파리어 인생에서 거의 최초로 경험하는 ‘평범한’ 저녁이었다. 그는 그동안 고아원의 공동 식당에서부터 시작해서 노숙인을 위한 수프 배식줄, 군대의 병사식당, 수용소 식당을 거쳐 병원 식당에서 식사를 해왔다. 그런데 지금 처음으로 효율과 계산에 따라 대량으로 조리된 것이 아닌 식사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파리어는 그 시간을 충분히 음미했다.

배급제 때문에 스튜는 전쟁 전보다 훨씬 더 묽었지만, 파리어는 개의치 않았다. 이 스튜에는 단지 배를 채우는 것 이상의 의미가 깃들어 있었다.

“우리 집에 손님이 오는 건 정말 오랜만이에요, 파리어 아저씨.”

루시가 스튜를 가득 문 입새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보통은 나랑 삼촌, 우리 둘밖에 없거든요. 아, 그건 아니구나. 가끔씩 편지 아저씨도 들린다.”

“우체부 아저씨라니까, 루시.”

콜린스는 조곤조곤 정정했다.

“그리고 입에 뭐 넣은 채로 말하는 거 아니랬지.”

그는 헌신과 슬픔이 뒤섞인 표정으로 아이를 바라봤다. 루시는 그런 눈빛은 알아채지 못한 채 다시 음식으로 신경을 돌렸다.

“어린 여자아이한테 내가 좋은 친구가 못 된다는 건 알고 있어요. 하지만 페기가 그렇게 간 후로는…… 얘한테 남은 건 이제 나밖에 없잖아요.”

식기 부딪히는 소리 외에는 고요했다. 루시가 빈 접시를 치우러 간 사이 파리어는 재빨리 손을 뻗어 식탁 위에 있던 콜린스의 손을 조용히 그러잡았다.

“너처럼 사랑해주는 삼촌이 있다니 루시는 행운아인 거지.”

그 말에 콜린스가 살짝 웃었다. 빠르게 사라지고 마는 희미한 미소일지언정. 두 사람은 루시가 돌아오는 소리가 들리자 서로 붙잡았던 손을 다시 떼어냈다.





설거지를 하는 내내 둘은 나란히 어깨를 맞대고 조용히 일만 했다. 루시는 욕실에서 열심히 이를 닦고 있는 중이었다.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접시나 컵을 건넬 때 살짝 피부가 스치는 것만으로도 파리어는 평화로웠다.

설거지를 마치고 이 빠진 찻잔에 향기 나는 차를 따르고 있던 때였다. 낡은 계단 위로 작은 두 발이 타닥타닥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 잘 준비 다 됐어요!”

“파리어 아저씨한테 ‘안녕히 주무세요’ 인사하고 자자, 아가.”

콜린스의 말에 루시가 가까이 다가왔다.

“안녕히 주무세요, 파리어 아저씨. 아침에도 계속 있을 거죠?”

“그럴 것 같진 않단다, 루시. 여관이 문 닫기 전에 가봐야 하거든.”

파리어가 말했다.

“만나서 정말로 반가웠어, 작은 아가씨.”

그 말을 듣자 루시의 표정이 조금씩 울먹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이가 뭐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콜린스가 먼저 목소리를 높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요, 토마스. 여기서 같이 자고 가요. 자, 이제 그 차 다 마신 다음에 소파에서 좀 쉬고 있어요. 난 루시 재우고 올게요.”

“해미쉬.”

파리어가 뭐라 끊어보려 했지만, 콜린스는 못 들은 채 루시를 힘껏 안아 들었다. 그는 아이의 엉덩이를 받쳐 단단히 안아들더니 곧장 계단을 올라가 버렸다.

파리어는 한숨 쉬고 남은 차를 들이킨 다음 얌전히 거실에 앉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성경은 루시가 올려놓은 그 자리─커피 테이블 위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파리어는 성경을 집어 들어 책장을 넘겼다. 콜린스가 다시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들릴 때 즘에는 벌써 에스더 서 셋째 장이 시작되려던 참이었다.

파리어는 고개를 들어 콜린스를 돌아다봤다. 그는 오래됐지만 따뜻한 잠옷을 입고 있었고 손에도 곱게 개어진 또 한 벌을 들고 있었다.

“손님방에 먼지가 너무 쌓인 데다 매트리스도 아직 다락에 있더라고요. 생각해봤는데 파리어가 내 방에서 자고 내가 소파에서 자면 될 것 같아요.”

“널 쫓아내고 네 방을 차지할 생각은 절대로 없어, 해미쉬.”

파리어가 대답했다.

“난 여기에서 자도 얼마든지 괜찮아. 아니면 여관으로 가도 되고.”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말라고 또 말해줘야 해요, 토마스?
콜린스가 잠옷을 건네주며 타박했다. 파리어는 옷은 받아들었지만 콜린스의 침대만큼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여기 오기 전에 미리 전화로 알리지 않았다는 사실은 차치하고서라도, 콜린스 냄새가 밴 침대에서 얌전히 잠들 자신이 없었다. 게다가 정작 콜린스는 있지도 않은 침대라면 더더욱.

“어차피 난 계단도 못 올라가. 다리가─”

“이십 분 거리를 짐도 끌고서 잘만 걸어왔잖아요. 이제 와서 계단 몇 개를 못 올라간단 소리는 아니겠죠, 설마.”

“내 말이. 아까 그 이십 분 걸은 거 때문에 다리가 말을 안 듣네.”

결국 콜린스가 과장된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요. 그럼 거실에서 자요. 밤 동안 필요한 만큼 장작을 더 땔게요. 그리고 이 담요도 덮어요. 그거면 좀 더 따뜻할 겁니다.”

파리어는 고맙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아침 일찍 런던 행 열차를 타야 돼.”

콜린스는 한숨을 푹 쉬더니 파리어 옆쪽의 소파에 잠옷과 담요 여러 겹을 내려놓았다.

“꼭 가야 해요?”

“런던은 나한테 남은 전부야. 연금 수표를 받을 주소도 있고. RAF 자선기금에서 살만한 집을 하나 구해준 데다, 알잖아. 하룻밤 사이에 그냥 사라져버릴 수는 없어. 게다가 다른 데 어딜 가겠어?”

파리어는 콜린스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한 손에는 성경을, 그리고 다른 한 손에는 파리어 자신의 심장을 쥐고 있는 사람이었다.

“글쎄요, 당장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그냥 여기에서 같이 지내면 되잖아요. 그러니까, 앞으로 계속 같이요. 런던에 가서 볼 일 다 보고 와요. 기금에서 일도 다 처리하고. 당신이 다른 데로 이사 간다고 해서 그쪽이 싫어할 것 같진 않은데요? 연금 수령지를 바꾼다고 하면 분명 발 벗고 나서서 도와줄 걸요. 런던보다 더 안정된 거처를 찾았다고 하면 더더욱요. 크리스마스까진 집으로 돌아올 수 있을 거예요.”







1940년 3월.


“그렇게 독실한 신자인 줄 몰랐는걸, 콜린스 소위.”

이층 침대 위에 늘어지게 누워있던 파리어가 비아냥거렸다. 눈부시도록 맑은 오후였다. 그런 날씨에 콜린스는 얼마 없는 휴식시간 동안 숙소에 틀어박혀 성경을 읽고 있었다. 숙소는 두 명이서 한 방을 쓰게 되어 있었는데, 파리어는 다행히 운이 좋아 콜린스와 같은 방으로 배정받을 수 있었다.

“파리어 대위님, 아무리 좋게 말해도 전 절대 착한 신자는 못 된다는 거 대위님이나 저나 잘 알고 있잖습니까.”

콜린스가 장난스레 미소를 띠우며 답했다. 그렇지만 손에서 성경을 놓진 않았다.

가까이 다가온 파리어는 그 단단한 몸 곁으로 바짝 겹쳐 누웠다. 그러자 콜린스가 자리를 몇 번 뒤척이더니 곧장 팔을 얽어왔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이 책을 주셨어요. 할아버지 책이었죠. 아버지는 말이 많은 분은 아니셨지만, 당신께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 땐 말하는 대신 행동으로 보여주셨어요.”

콜린스는 다시 성경을 펼쳤다. 그리고 찾는 면이 나올 때까지 휘리릭 종이를 넘겼다. 가까이 다가간 파리어는 종이 한 장이 뜯겨 나가있는 것을 발견했다.

“레위기 18장하고 20장. 그리고 로마서 2장이네.”

파리어는 어릴 적 고아원 수녀들한테서 강제로 암기한 성경 구절을 잊어버리려고 부단히 노력해봤지만, 끝내 레위기의 그 구절을 완전히 지워버리지는 못했다. 너희는 여자와 교합함 같이 남자와 교합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레위기 18장 22절).

언제나 비난을 담고 읊어지던 그 마지막 구절은, 훗날 파리어가 자신이 그 비난에 해당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도 전부터 그의 어린 정신 속에 새겨졌다.

“아버지가 뜯어내신 거야?”

“이 얘기는 한 번도 아버지랑 해본 적 없어요. 얘기는 무슨, 농장일이 아니면 말조차 거의 안 섞었는걸요. 그래도 이해했죠.”

콜린스는 이제 거의 속삭이듯 말하고 있었다. 그는 오래된 가죽으로 정장된 성경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담요를 당겨 파리어와 자기 위로 둘렀다. 담요 아래서 다시 자리를 뒤척이는 동안, 파리어는 콜린스 품으로 좀 더 다가가 그의 어깨 위에 머리를 기댔다. 콜린스의 날렵하게 뻗은 손가락이 대위의 머리를 살살 빗질하더니, 이어서 이마 위에 짧은 입맞춤이 내렸다. 파리어는 깨끗한 시트 내음과 콜린스의 체향을 듬뿍 들이마셨다. 그는 그 향기를 기억 속에 새겨보려 깊이 눈을 감았다.

“우리 계속 이대로 누워있으면 안 되나?”

파리어가 물었다. 콜린스가 웃는 바람에 침대가 흔들렸다. 우리 이대로 영원히 함께 있으면 안 될까? 그 한심한 질문만큼은 차마 소리 내어 말할 수 없었다.

“들키고 싶으면 마음대로 하십쇼. 이래서 우리 농장이 그립다는 겁니다. 한참을 가도 주위에 아무도 없거든요.”

콜린스가 파리어의 손을 꼭 쥐며 말했다.

“찾아오는 사람도, 우리가 뭘 하는지 들여다볼 사람도 없어요. 이웃들한테 떠벌리고 다닐 사람도 없고요. 고요하죠.”

“그거 꿈같은 얘기네, 달링.”

파리어가 대답했다.

“꼭 꿈으로만 남으란 법은 없어요.”

그것이 수마에 빠져들기 전 파리어가 마지막으로 들은 말이었다.




1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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