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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어콜린스] 재회 1

종전 AU. 파리어가 돌아왔다.






유월의 마지막 날인 그날은 기이하도록 날씨가 좋았다. 햇살은 화사했고 기온은 덥지도 스산하지도 않아 딱 적당했다. 선선한 바람이 부니 오랫동안 밖에 서 있어도 땀이 나지 않을 것 같았다. 조금 있다가 기차역 플랫폼에서 오랫동안 기다려야 하는 콜린스에게는 여러모로 다행인 날씨였다. 오늘은 모든 일이 잘 풀릴 것만 같았다. 콜린스는 간만에 가뿐한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외출 준비를 했다.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은 오랜만에 보는 단정한 차림새였다. 전보를 받자마자 급하게 보더주에서 런던으로 내려온 터라 꼭 필요한 짐만 챙겨올 수 있었다. 가방에 든 옷가지는 전역 후에 처음으로 마련한 기성복 몇 벌 뿐으로, 중요한 날에만 꺼내 입는 귀중한 것들이었다. 긴장한 콜린스는 먼지 하나 묻지 않은 옷매무새를 몇 번이나 다시 확인했다. 그를 다시 만났을 때 최대한 깨끗하고 아름다운 모습만 보여주고 싶었다. 전쟁의 상흔은 모두 덮어버리고 옛날 그때처럼 밝은 얼굴로 맞이하고 싶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매일 밤 꿈꿔왔던 상황이 곧 현실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자, 가슴이 빠르게 뛰었다.

이젠 뒤통수를 덮을 만큼 길어진 머리카락을 정돈하고, 밖에 나가도 위축되지 않도록 챙이 달린 모자도 눌러쓴다. 챙을 왼쪽으로 살짝 기울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세심하게 조정된 모자 그늘이 울긋불긋한 왼쪽 뺨을 가려주었다. 행여 바람이 불어 모자가 벗겨지는 일이 없도록 주의 깊게 위치를 맞췄다. 두 손을 보호해 줄 나사 장갑까지 착용한 다음, 콜린스는 마지막으로 매일 아침 치르는 의식을 반복했다. 그는 거울을 바라보며 느리고 깊은 호흡을 내뱉었다.

“괜찮아. 이상하지 않아. 다 잘 될 거야. 날 사랑해.”

그리고 문을 열고 런던의 거리로 나섰다.



일 년 만에 다시 찾은 런던은 여전히 번잡하고 소란스러웠다. 이곳에 주둔했을 때와 달라진 점은 길가 곳곳에 무너진 채 방치된 건물이나 폐허 더미가 있다는 점뿐이었다. 전쟁 막바지까지 공습을 받았던 고도(故都)는 아직까지 포탄의 흔적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도 곧바로 재건에 뛰어든 시민들이 무너진 교회며 도로를 복구하는 노력이 헛되지는 않았는지, 도로는 전쟁 이전보다도 더 많은 인파와 차량으로 붐볐다. 콜린스는 마지막으로 방문했을 때보다 길거리를 활보하는 택시의 수가 월등히 증가한 것에 놀라워하며, 한 대를 잡았다.

“채링크로스 역으로 부탁합니다.”

택시기사는 낮고 부드러운 손님의 목소리에 흘끗 돌아보았다가 무심히 대답했다. 검은 모자를 눌러쓴 청년의 모습이 그에게는 그리 낯설지 않았다. 요즘에 자주 볼 수 있는 차림새였다. 전쟁이 끝난 후로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예에, 12시 도착 맞으시지요? 아침에만 벌써 손님 셋을 데려다주는 길입니다. 귀환병들이 좋아하겠어요. 손님은 누굴 맞으러 가십니까? 가족? 친구?”

“옛 친구입니다.”

“잊지 않고 배웅 나온 걸 알면 기뻐하겠어요.”

콜린스는 대답 대신 밝게 웃었다. 정말로 그러기를 바랐다.

역에 도착했을 때 근처의 노천카페들은 이미 만원 상태였다. 이른 아침부터 귀환하는 이를 맞으려고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은 피곤함도 잊은 것처럼 보였다. 하나 같이 상기된 얼굴 위로 흥분 어린 미소를 띠고 있었다. 여인들, 아이, 나이 든 초로의 부부, 형제자매. 관계는 다양했다. 초조함이 지배했던 일 년 전의 대합실 분위기와는 대조적이었다. 콜린스는 침착하게 가라앉혔던 마음이 조금씩 뛰려는 것을 가라앉히며, 빈자리를 찾았다. 다행히 플랫폼으로 올라가자 작은 카페 옆에 파라솔이 있어 해를 피할 수 있었다.

콜린스는 가장 저렴한 차 한 잔을 주문한 다음 파라솔 아래 자리를 잡았다. 낯선 억양으로 주문하는 콜린스의 말소리를 들은 점원이 신기한 듯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거칠고 울퉁불퉁한 것은 스코틀랜드 억양만이 아니었다. 손님의 얼굴을 확인한 점원은 자꾸 시선이 가려는 것을 참기 어려웠다. 그는 주문한 차를 가져다주면서도 손님의 얼굴을 흘낏 흘낏 관찰했다. 손님은 그 무례한 시선을 느끼지 못했는지 기차의 예정 도착 시각을 알려주는 표지판에만 온 신경이 쏠려 있었다. 앞에 놓인 차에는 거의 손도 대지 않고서 철로만 바라보고 있는 손님은 초조한 기색이었다. 어쩐지 들뜬 것도 같아 보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가끔씩 홀로 미소를 짓는 일도 있었다. 소년처럼 밝은 그 웃음을 본 점원은 속으로 생각했다.

‘저런 꼴을 하고서도 웃네.’

그 직후 요란한 열차의 경적이 들려왔기 때문에 콜린스가 점원의 묘한 시선을 알아차릴 틈은 없었다. 멀리서부터 선로에 쇠바퀴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기차가 오기만을 기다리던 사람들은 흥분한 발걸음으로 몰려들었다. 플랫폼 전체가 한시라도 빨리 그리운 이를 만나보려는 사람들의 행렬로 붐볐다. 콜린스도 그 대열에 합류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기차를 향해 뛰었다. 곧 열차가 완전히 멈춰서고 문이 열렸다. 그 안에서 귀환한 포로들이 한 무더기 쏟아져 나왔다.

막혔던 댐이 열리듯 우르르 쏟아져 나온 포로들은 저마다 복장이 제각각이었다. 한참 전에 보급 받았을 군복은 오랫동안 유목 생활을 하는 중에 낡고 변형되었고, 개중에는 다른 동맹국 병사의 군복을 빌려 입은 경우도 있었다. 유럽 각지에서 칼레로, 칼레에서 다시 도버를 거쳐 런던까지 오는 긴 여정을 마친 참인 군인들은 피곤하고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역을 가득 채운 사람들의 모습을 확인하자, 금세 기력을 찾고 익숙한 얼굴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콜린스는 까맣게 몰려드는 인파 속에 떠밀리면서도 낯익은 옛 전우의 얼굴을 찾아 헤맸다. 뒤늦게 그의 이름을 크게 적은 종이라도 가지고 왔어야 하나 후회가 들었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예전보다 시력이 약해진 눈을 최대한 크게 뜨고서 그의 얼굴이 보이지는 않는지 끝까지 찾아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콜린스의 시야에 익숙한 형태가 들어왔다. 다부진 이마와 살아 숨 쉬는 눈빛. 파리어였다. 보잘 것 없이 얇아진 체구만이 달라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만났던 때보다 많이 마른 그 실루엣을 보자 가슴이 시렸다. 그는 안쓰러움으로 떨리는 다리를 움직여 옛 윙메이트가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한 쪽 다리를 저는 탓에 속도를 내기 어려웠지만, 콜린스는 재활을 시작한 이후로 어느 때보다 더 열심히 속도를 내어 파리어 뒤를 좇았다. 닿을 듯 말 듯, 자꾸 발걸음을 놓치는 것이 몹시 초조했다. 다른 귀환 포로들이 가족과 연인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것과 대조적으로, 파리어는 피로한 안색으로 무심히 출구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자기를 맞으러 나온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해보지 않은 듯한 태도였다. 그 지친 모습을 보다 못한 콜린스는 결국 목소리를 높여 그의 이름을 외쳤다.

“파리어! 에드워드, 여기에요! 에드워드!”

가까스로 파리어를 따라잡은 콜린스는 손을 뻗어 그의 팔을 두드렸다. 스치듯 닿은 손길이 마침내 그를 멈춰 세웠다. 파리어가 뒤를 돌아보고, 그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콜린스는 반가운 마음이 앞서면서도 슬픔이 차오르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건강하고 혈색 돌던 얼굴은 오 년 만에 피골이 상접해 있었다. 매일 아침 면도를 하던 남자의 턱 위로 수염이 까슬까슬하게 올라오고, 새치가 늘어난 머리카락은 그동안 그가 겪어야 했을 고난의 시간들을 가감 없이 보여주었다. 멋진 두 눈 밑에 짙게 그늘이 깔린 것을 보고서 콜린스는 울컥 올라오려는 울음을 삼켰다. 그리고 참을 수 없는 그리움을 담아 파리어를 향해 팔을 뻗었다.

“잘 돌아왔어요, 파리어. 많이 보고 싶었어요.”

그는 파리어가 걱정하지 않도록 일부러 더 환한 웃음을 띠우며 인사했다. 그리고 포옹하려고 몸을 숙였다. 그러나 끌어안으려던 시도는 실패하고 말았다. 콜린스와 마주한 파리어는 연인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예상 밖의 반응을 맞닥뜨린 콜린스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린 채 파리어가 먼저 움직이기를 기다렸다. 공허해진 동공이 한참을 놀란 듯 방황하다가 이내 콜린스를 피해 시선을 돌렸다. 미처 붙잡을 틈도 나지 않았다. 오 년 만에 돌아온 파리어는 인사 한 번 없이 그의 품을 빠져나갔다. 아무도 보지 못한 듯이 뒤돌아갔다. 그 눈빛이 경악스러우면서도 죄책감에 물들어 있었다. 콜린스는 혼란한 거리 속으로 사라지는 파리어의 뒷모습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그는 파리어를 잡으려고 했던 오른손을 거둬 자기 얼굴로 가져갔다.

“……많이 놀랐나보네.”

콜린스가 불에 그을려 민둥해진 왼쪽 뺨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

흉터를 얻은 것은 전쟁이 끝나기 한 달 전이었다. 드레스덴으로 가는 폭격기를 호위하는 길이었다. 거대한 폭격기가 독일 유수의 중세도시 위로 소이탄을 흩뿌리는 동안 콜린스의 보파이터는 그 곁에서 등을 지켰다. 빛이 반짝이고, 도시 위로 유성처럼 불이 쏟아졌다. 지상에 닿으면 산화해서 폭발을 일으키는 소이탄이 불기둥을 만들어냈다. 성벽과 건물, 도로를 휩쓸며 세력을 얻은 불의 폭풍은 가로막는 모든 것을 집어삼키며 하늘 위로 솟구쳐 올랐다. 상공에 떠 있는 전투기에 안에서도 그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화마가 도시와 사람을 산화시키는 것을 확인한 다음, 콜린스는 보파이터의 기수를 돌렸다. 도시가 불타면서 내는 빛이 인근 지역을 벗어날 때까지도 밤하늘을 환하게 밝혔다.

폭격을 성공하고 귀환 준비를 할 때까지도 일이 잘 풀린 줄로만 알았다. 적기의 급습을 받은 것은 기지 귀환을 코앞에 둔 상황에서였다. 공격을 받고 재빨리 인근 기지에 비상 착륙을 시도했지만 꼬리에 불이 붙고 말았다. 폭발음이 들렸고 몸이 날아가는 것을 느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야전병원의 병상이었다. 의료진은 목숨을 건진 것이 용했다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운이 좋았다는 말도. 오른쪽 다리를 절게 되고 시력이 많이 나빠진 것을 제외하면 생존에는 지장이 없었다. 장기도 머리도 모두 무사했다. 고온의 열기에 노출되었던 왼쪽 얼굴과 상체 일부에 화상을 입었을 뿐이다. 주위에 누워있는 부상자들의 평균에 비하면 나은 상황이었다.

화상을 입은 조종사들의 치료를 전담한다는 의사는 그에게 용기를 내라고 말했다. 직접 불에 닿지 않고 피부 겉이 열기에 노출되었을 뿐이니까 수술을 하면 된다고, 새로 개발된 이식 수술이 있으며 다른 조종사들도 이를 통해 다시 잘 적응하고 있다고 응원을 북돋았다. 다른 선택지가 없었던 콜린스는 그 해 봄 내내 매킨도 박사의 병원에서 이식 수술을 받고 재활 과정을 거쳤다. 무솔리니의 실각과 히틀러의 자살 소식을 들은 것도 병상 위에서였다. 그들의 시체는 모두 불에 태워져 수장되거나 전시되었다는 뉴스를 접했을 때는 다행이라는 한편, 어딘가 불편한 감정을 감출 수 없었다. 마치 한 달 전 드레스덴을 공습했던 그날 밤, 그가 떨어트린 소이탄의 불길에 당한 독일인들의 복수인 것만 같다는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 비합리적인 감상인 걸 알지만 그랬다.

숯이 돼버린 괴벨스 부부의 시신에 비하면 확실히 자신의 화상은 어느 정도 치료할 수 있는 운 좋은 부상이었다. 두 차례의 이식 수술을 받은 왼쪽 뺨은 울룩불룩한 주름이 지긴 했지만 시뻘건 물집은 복구되었다. 부상 후 처음으로 거즈를 떼고 왼쪽 얼굴을 확인하던 날을 기억한다. 거울을 보고 시험 삼아 웃는 표정을 지어보았는데, 어쩐지 어색한 웃음이 완성되었다.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부상 전만큼 섬세하게 움직일 수 없게 된 안면 근육들은 부자연스러운 미소를 만들어내는 것이 한계였다. 네가 웃으면 세상이 태어나는 것 같다며 속삭이던 파리어의 칭찬이 떠올라, 콜린스는 한동안 웅크려 앉아 울었다.

퇴원 후에는 전역 수속을 밟았다. 가급적 교관으로라도 남아서 일을 계속 하고 싶었지만, 부상 이후로 급격히 저하한 시력이 문제가 되었다. 전역을 권유하는 상관의 미안한 듯한 표정과 식상한 격려, 손에 들어온 소정의 목돈을 받고서 군을 떠났다.

보더주로 돌아오던 날, 마중 나온 할머니는 그를 껴안아주었다. 변해버린 얼굴을 들기가 무서워 고개를 숙였는데, 할머니가 그의 민둥하고 뻣뻣한 왼쪽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잘 돌아왔다, 아가. 앞으로는 여기서 살자. 위험한 밖은 다 잊고 우리랑 같이 살자.’

스물여덟 살의 콜린스는 그날 작은 할머니 품에 안겨 아이처럼 울었다.

다시 스코틀랜드에 정착했다. 고향집에서의 생활은 확실히 회복에 도움이 되었다. 군인연금과 화상 피해 조종사들을 위한 보조금이 나와서 아껴 쓰면 그럭저럭 생활을 꾸려나갈 수 있었다. 농장이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있는 덕에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도 피할 수 있었다.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워진 것보다도 더 콜린스를 위축시킨 건 사람들의 시선이었다. 언제나 잃고 나서야 빈자리를 알아채듯이, 당연하게 여겼던 얼굴조차도 더 이상 그의 것이 아니었다.

절망이 할퀴고 간 상처가 덜 아물었을 적에는 매일 아침이 두려웠다. 거울을 보는 것이 무서워서 집 안의 유리를 모조리 천으로 덮은 적도 있었고 흉이 진 얼굴을 일부러 짓이긴 적도 있었다. 얼굴에 새겨진 주홍글씨가 마음의 주홍글씨로 번지는 날이면, 시들지도 않고 피어난 열꽃 같은 자국들이 미워서 한참을 주저앉아 울었다. 그러나 시간은 모든 것을 무뎌지게 했고, 살려면 언젠가는 적응해야 할 현실이었다. 좌절보다도 아직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던 심장은 어느 순간부터 한 가지 위로를 되뇌기에 이르렀다.

‘이젠 받아들일게. 이런 날 사랑해.’

헛된 자위라고 해도 그것만이 계속 살아있도록 해주는 주문이었다. 살아남아서 파리어를 만나고 싶었다.

전쟁이 끝난 후 일 년이 지났을 때, 속보가 풀렸다. 유럽에 흩어져있던 포로들이 귀환할 거라는 소식이었다. 그동안 억류되었던 사람들도 대거 돌아온다고 했다. 전화를 받은 사령부에서는 귀환 명단에 파리어가 포함되어있다고 알려줬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콜린스는 떨리는 손으로 짐을 챙겨 다음 날 아침 곧바로 런던으로 내려갔다. 그 후 일 주일 동안 콜린스는 파리어가 타고 올 열차의 도착 날짜와 시간을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그가 돌아온다는 얘기가 사실이라면 꼭 그날이 아니더라도 다음에 만날 수도 있을 테지만, 역시 온전히 숨 쉬는 파리어를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다. 직접 만지고, 직접 껴안고, 숨이 모자랄 때까지 키스하고 싶었다. 함께 있었을 때는 사람들의 의심을 살까봐 손깍지 한 번 껴보지 않았는데, 모든 것을 잃고 난 지금은 세상 앞에서 그를 꼭 안아주고 싶었다.

파리어를 만난 이상 이제는 마냥 좌절할 수도 없다. 그 확신은 기차에서 내린 그의 파리한 얼굴을 보았을 때 더욱 굳건해졌다. 살아있는 시체처럼 활기가 사라진 그 눈빛을 보고 나자 더 이상 무엇도 주저할 수 없었다. 정확히 무슨 일을 겪었는지 모르겠으나, 돌아온 파리어는 마치 세상으로부터 문을 닫고 돌아선 사람처럼 아득해보였다. 지긋지긋한 전쟁에서 겨우 온전한 몸으로 돌아왔는데, 이제 와서 그를 잃을 수는 없다. 여전히 왼쪽 얼굴에 꽂힐 사람들의 시선이 무섭긴 했지만, 바보 같이 파리어를 놓쳐버리는 것은 훨씬 더 무서웠다. 더 멀어지기 전에 잡아야 한다고.

역에서 바람을 맞은 다음 날, 콜린스는 전날과 똑같은 의식을 치렀다. 그는 객실의 흐릿한 거울 앞에 서서 매일 같이 읊는 그 말을 반복했다.

“괜찮아. 이상하지 않아. 날 사랑해.”

눈동자에 비치는 일말의 걱정을 억누른 채, 그는 다시 한 번 문을 나섰다.



*

콜린스는 퇴역군인 사무소를 수차례 드나든 끝에 파리어의 주소를 받아냈다. 그는 고향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아직 런던의 숙소에 머물고 있는 듯했다. 묵는 호텔 주소만 달랑 남겨놓았기 때문에, 빨리 만나러 가지 않는다면 소리 없이 사라져버릴지도 몰랐다. 전화번호도 주소도 남기지 않은 채 그가 증발해버린다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무엇에 기대어 이 부질없는 삶을 계속 이어가야 할까. 그렇게 생각하니 숨이 턱 막혔다. 다시 혼자 남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짓눌린 콜린스는 언제 돌아오느냐는 할머니의 전화도 물리고서 파리어를 찾아 나섰다.

점잖게 문을 두드리면 그가 열어주지 않을 것 같아서 일부러 밖에서 기다리다가 그가 돌아오는 순간을 노렸다. 예상은 틀리지 않아서 콜린스는 외출을 마치고 돌아오는 파리어를 붙잡을 수 있었다.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인지 한 쪽 팔에 짐 꾸러미를 들고 있었는데, 손잡이를 잡고 있는 손이 어딘가 불편해보였다. 관절이 굳은 것 마냥 뻣뻣하게 뒤틀려 있었다. 그것을 보자 울컥 눈물이 차오를 것만 같았다.

콜린스는 모른 척 지나가려는 파리어 앞을 가로막았다.

“나랑 얘기 좀 해요, 에드워드.”

가라앉은 목소리에서 애절함이 묻어났다. 일렁이는 파란 눈동자와 마주치자, 파리어가 머뭇거리며 몸을 뒤로 물리려 했다. 거부의 몸짓을 본 콜린스는 심장이 콕콕 쑤셨지만 용기를 내서 앞으로 다가갔다.

“……여긴 어떻게 찾았어.”

“말 돌리려고 하지 마요. 그날 왜 그랬어요?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거예요? 그런 거면 나한테 말을 해ㅈ—”

“그만 헤어지자.”

짧은 두 마디가 비수처럼 내리 꽂혔다. 콜린스는 잠시 이해하지 못하고 주춤했다. 귀가 먹먹해지고 심장이 조여들었다. 손발이 돌처럼 무거워졌다. 한참을 고장 난 기계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진공 같은 수초가 흐르고 나서야 겨우 시멘트처럼 굳어버린 입술을 움직일 수 있었다.

“……예?”

“우리 그만 헤어지자고.”

이별을 고하는 입술이 오히려 제가 더 힘들다는 듯 희미한 한숨을 쉬었다. 갑작스럽고 불가해한 선언이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밀려 나왔다.

“아니, 이미 오래 전부터 끝나있었어. 어차피 끝이 보이는 관계였는데 천치 같이 그걸 계속 붙들고 있었지. 세상 모든 것들이 이건 안 된다고, 안 될 거리고 비상등을 깜빡이는데 우리 둘만 미련 맞게 매달리고 있던 거야. 천치 같이 현실도 모르고서.”

파리어가 회의와 후회가 가득 찬 표정으로 말했다.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에서 조소가 묻어나오는 것도 같았다. 차디찬 말의 내용보다도 더 당황스러운 건 그 핏기 빠진 시선이었다. 콜린스는 떨리는 손을 뻗어 파리어의 옷깃을 붙잡았다.

“많이…… 많이 아팠어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거기서 혼자 많이 아팠어요? 많이 힘들었던 거죠? 우리 같은 군인들이 돌아온 후에 많이 그런댔어요. 다들 그렇다고. 괜찮아요. 이제 돌아왔으니까, 이제 안전하니까 괜찮아요. 우리 같이 있으니까 괜찮아질 거예요. 전부 괜찮아질 거야.”

내가 다 괜찮게 만들게요. 역류할 것 같은 심장으로 말했다. 그러나 파리어는 그늘이 드리운 얼굴로 시선을 피할 뿐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따라 나올 말이 두려워 콜린스는 절박하게 고개를 저었다. 돌아온 남자는 야속하게도 그 애타는 눈길을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이젠 널 보고 있기가 힘들다.”

선고하는 파리어의 얼굴은 피하고 싶은 장애물을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심하게 구겨져 있었다. 피로와 지친 기색이 역력한 그 얼굴을 마주했을 때, 콜린스가 할 수 있는 것은 부정뿐이었다.

“……아파서…… 당신이 많이 아파서 그래요, 파리어. 같이 돌아가서 쉬어요. 의사도 보고 우리 고향집에도 가서 쉬어요. 푹 쉬면 나아질 거야. 응? 항상 가보고 싶다고 했었잖아요, 우리 고향집. 나쁜 생각 하지 말고 우리 둘이서 같이 살면……”

마지막 단어는 물기 어린 소리에 먹혀버렸다. 말을 잇기가 어려워진 콜린스는 동아줄을 붙잡는 심정으로 파리어의 두 손을 잡으려 했다. 심한 병을 앓고 난 것처럼 바싹 마르고 비틀린 그 두 손을 꼭 안고서 품어주려고 했다. 그러나 뼈가 뒤틀린 그 손에 콜린스의 하얀 살결이 닿는 순간, 파리어는 전갈에라도 물린 사람처럼 손을 뒤로 빼냈다. 공포와 질색이 어린 그 표정을 맞닥뜨린 콜린스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파리어는 돌처럼 단단하고 차가운 눈빛으로 침묵했다. 콜린스는 자꾸 자기 얼굴을 피하려는 그의 행동을 알아차리고 나서야 서서히 피가 식는 느낌이었다. 파리어의 다친 손을 보듬어주려던 두 손이 온기를 잃고 아래로 떨어졌다. 콜린스는 파리어의 눈길이 향하는 곳을 찬찬히 따라갔다. 자신의 왼쪽 뺨에 꽂히는 비수 같은 시선을 깨달은 순간 심장이 추락했다. 애틋함과 그리움, 연민—그 모든 것이 빛을 잃고 사라진 자리에 대신 원망과 분노가 피어올랐다. 그는 허탈한 웃음을 터뜨리며 중얼거렸다.

“내가 보기 흉해져서 그래요?”

남자는 외면하며 시선을 피했다. 그 몸짓을 본 콜린스는 전신이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날카로운 비난이 쏟아졌다.

“이젠 부드럽지 않고 하얗지도 않아서? 예전처럼 보기 좋지 않아서, 당신이 좋아하던 얼굴이 아니라서 그래요?”

콜린스가 격앙된 목소리로 외쳤다. 그는 주체할 수 없이 떨리는 손을 세게 주먹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에 파고들어 붉은 피를 흘렸다. 살갗이 따끔한 고통도 인지하지 못한 채, 콜린스는 다만 하얗게 질린 채로 전신을 떨었다. 당장이라도 발아래 구멍이 뚫려서 땅 속으로 꺼질 것만 같았다. 왜 어서 자길 집어삼키지 않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이렇게 배신으로 아프게 할 거면 차라리 칼로 찌르는 편이 나았을 텐데. 불에 타던 고통도 이처럼 아프지는 않았다.

끝까지 아무 변명도 하지 않는 파리어를 보고서, 콜린스는 온 힘을 다해 쏘아 붙였다.

“비겁한 사람.”

돌아서는 순간까지도 파리어는 붙잡지 않았다.



이스트엔드 한 구석에 위치한 펍의 간판을 콜린스는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평소라면 펍에는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가봤자 실망할 게 분명하니까. 그렇지만 오늘 밤은 마른 목을 적셔줄 술이 참을 수 없이 고팠다. 아침 일찍부터 파리어가 머무는 곳을 알아내려 군 사무소 수십 군데를 돌아다녔고, 겨우 찾아간 파리어 앞에서는 꼴사납게 울고 말았으니 심신이 지친 것도 이상하지 않다. 허기와 갈증에 진이 빠진 콜린스는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어느 새 펍의 문을 열고 있었다.

금요일 저녁을 맞은 펍은 사람들로 붐볐다. 단골, 지나가다 들린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서로 말문을 트고 술잔을 나누고 있었다. 펍이란 그런 곳이었다. 경계심 많고 배타적인 런던 시민들조차 의심을 누그러뜨리고 낯선 사람들과 이야기를 터놓게 하는 예외적인 장소. 그것이 콜린스가 펍의 분위기를 좋아하는 이유였다.

그러나 이젠 지나간 세상의 이야기였다. 흉터를 얻은 후에는 모든 것이 바뀌었다. 콜린스는 낯익은 체념을 받아들이며 조용히 카운터로 걸어갔다.

“파인트 한 잔이요.”

주문을 받던 직원이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가 그의 흉터를 보고서 재빨리 시선을 내렸다. 나름대로 배려한 것일 테지만, 가슴이 쓰린 것은 어쩔 수 없다. 콜린스는 주문한 맥주를 기다리는 동안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내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잔을 받아든 다음에는 되도록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중심부와는 거리가 먼 그늘 진 곳에 앉아 있으니, 사람들이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옆에 자리를 청하는 말이나 간단한 인사조차 사치였다. 그러기를 기대하고 외따로 앉은 것이지만 막상 직접 홀로 남은 상황에 부딪히고 나니 어쩔 수 없이 외로움이 사무쳤다. 예전에는 먼저 인사를 하지 않아도 다들 먼저 말을 걸어왔다. 특별히 노력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친절한 이웃들처럼 웃으며 그의 곁으로 모여들었고, 세상은 상냥한 빛의 세계였다. 전쟁의 고난이 덮쳐올 때조차 콜린스에게는 그랬다. 상황은 화상을 얻고 난 후에 변했다.

펍에 들어가는 데는 공원을 산책하거나 식료품점에 들어가 물건을 살 때와는 또 다른 종류의 용기가 필요하다. 생존을 위한 외출에서는 사람들이 알아서 콜린스를 못 본 척 하거나, 혹은 동정심이 많은 이들은 어린아이 대하듯 더욱 친절하게 필요한 것을 묻는 경우가 많았다. 그 동정이 달갑다는 뜻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런 상황들에서는 길게 말을 섞지 않아도 된다. 피상적인 인사와 짧은 대화를 의무적으로 수행하고 나면 어색한 상황은 금세 지나가곤 했다.

그러나 유흥과 만남을 위한 공간인 펍은 사정이 다르다. 동네의 작은 술집이라고 해도, 아니 작은 펍일수록 더욱 더 겉도는 소외감을 느끼기 쉬웠다. 일그러진 흉 자국을 보고서 흠칫하는 사람들, 어떤 말을 건네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다가 결국 하나 둘 자리를 피하고 마는 형상들. 매일 매일 거울 속 자신에게 들려주는 응원마저도 그 순간만큼은 초라한 자기 세뇌가 되어 상처만 키웠다. 그런 시선들에는 이제 익숙해졌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사람에게 베인 상처는 옅어지지도 않고 매번 따끔한 자상을 남겼다.

타는 갈증을 식혀줄 음료와 예전 같은 사람들의 환영. 그거면 충분했는데. 결국 콜린스는 몇 모금 목을 축이다 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게 문을 열고 나오는 그 순간까지 벨벳처럼 부드러운 LP의 음악과 다정한 웃음소리가 비웃음처럼 귀에 맴돌았다.

할머니의 응원을 받은 이후로 가급적 씩씩하게 지내려고 하지만, 역시 이런 날은 표정을 유지하기 힘들다. 파리어에게는 바람 맞혀지고, 사람들의 변해버린 반응은 변해버렸다. 정말로 지친 것은 파리어가 아니라 자신일지도 모른다. 자기연민이 심해진 나머지 병에 걸린 걸지도 모른다고, 콜린스는 멍하니 생각했다. 이젠 정말 포기해야 하는 걸까. 아무리 애를 쓴다고 해도 그를 피하는 이들의 마음을 억지로 움직일 수는 없는 법이다. 에드워드의 마음도,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마음도.

낡은 호텔로 돌아온 콜린스는 외투를 입은 그대로 현관 거울 앞에 섰다. 기다란 거울에 비치는 금발이 빛바랜 지푸라기처럼 푸석푸석했다. 그는 먼지 낀 거울을 매만지며 읊조렸다.

“괜찮아. 이상하지 않아. 날 사랑해.”

“그런데…… 파리어는 날 사랑할까?”

거울 속 일그러진 얼굴은 대답이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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