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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어콜린스] 재회 2

종전 AU.



휘익—. 음침한 휘파람 소리가 났다. 뻐꾸기 울음을 닮은 소리가 인적 드문 병영을 울렸다. 그림자 안에 숨어있던 파리어는 기척이 들려오기를 기다렸지만, 소리가 위층까지 닿지 못했는지 인영 하나 얼씬하지 않았다. 조바심이 난 파리어는 조금 더 크게 휘파람 소리를 내었다. 휘익—. 그제야 창문에 익숙한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감질 맛나게 흔들리던 커튼이 걷히고, 그 사이로 하얀 얼굴이 빼꼼 고개를 드러냈다. 하얀 얼굴은 그림자 뒤에 숨은 익숙한 인영을 발견하고서 재빨리 창문을 닫았다. 잠시 뒤, 달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나는 금발을 휘날리며 콜린스가 나타났다. 일찍 잠자리에 들참이었는지 생활복 위에 급하게 스웨터를 껴입고 있었다. 그는 그림자 뒤에 숨어있던 파리어를 찾아내고서 반갑게 다가왔다.

“오래 기다렸어요?”

“별로. 괜찮아.”

“밤에 휘파람 불지 말랬잖아요. 불행한 일을 불러온다니까요.”

말로는 타박하지만 얼굴에는 신이 난 미소가 한 가득이었다. 내심 소설 속 세레나데의 한 장면 같다고 생각하는 게 틀림없었다. 그러나 콜린스가 어떤 로맨틱한 상상을 하는 중이건, 정작 그 상상의 대상은 다른 생각에 골몰하느라 알아차리지 못했다. 연상의 남자는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이 망설이고 있었다. 콜린스는 주름진 그의 이마를 살살 펴주며 애교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 잘생긴 얼굴 다 구겨지겠네. 표정 좀 펴요.”

나긋나긋하게 말을 붙여보지만 칭찬을 들은 파리어의 표정이 어쩐지 더 어두워진다. 그는 어딘가 불안한 기색으로 망설이고 있었다. ‘에드워드?’ 콜린스가 소곤거리는 이름을 듣고서야 겨우 입을 떼었다.

“아까 낮에 면회 온 여자는 잘 바래다줬어?”

예상치 못한 단어가 튀어나오자 콜린스가 눈을 깜빡였다. 금시초문이라는 듯이 말갛게 고개를 까닥이는 모습을 보고서 초조해진 파리어의 입에선 재촉이 튀어나가고 말았다.

“그…… P 소위가 에스코트한 아가씨 말야. 파란 원피스를 입은……”

말을 잇기가 어려웠던지 문장은 제대로 끝맺지 못하고 흐지부지 끊겼다. 발끝만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에서 언뜻 자책감이 비쳤다. 대위는 낮에 콜린스를 찾으러 하급 장교들이 쉬는 휴게실을 찾았다가 낯선 여인과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그를 발견한 참이었다. P소위의 오랜 소꿉친구라고 하는 아리따운 아가씨는 몇 마디만으로 콜린스의 얼굴에서 친근한 미소를 이끌어냈다. 자기 사람과 아닌 사람 간의 구분이 뚜렷한 콜린스가 좀처럼 보여주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 웃음을 이끌어내기까지 반년의 시간을 기다려야 했던 파리어로서는 심장이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덕분에 기껏 찾아와놓고서 정작 그를 불러낼 수 없었다. 두 사람이 주변 호수를 산책하는 내내 파리어는 숨겨야 할 치부가 된 기분으로 그들 곁을 맴돌았다.

그런 추악한 질투는 혼자 안고가려고 했는데,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결국 실토하고 만 것이다. 비밀스런 밀회를 기대하며 내려왔을 콜린스에게 못 볼꼴을 보였다는 생각에 파리어는 먼저 말해놓고도 몸 둘 바를 몰랐다. 질투와 수치심으로 혼란스러워하는 그를 멈춰 세운 것은 볼에 닿는 콜린스의 손길이었다. 한참 어린 소위는 파리어의 뺨을 잡고 자신을 바라보도록 눈을 맞추며 속삭였다.

“잘 들어요, 대위님. 지금까지나 앞으로나 내 인생에는 당신밖에 없을 예정이에요. 내가 고백했을 때 ‘Yes’라고 대답했던 그 순간부터 돌이킬 기회는 물 건너간 거라고요. 아니면 내가 다른 사람을 만났으면 좋겠어요? 그 아가씨처럼 젊고 상냥한 영애를 만나서 사귀고, 결혼하고, 그랬으면 좋겠어요? 응, 아이는 딸 하나 아들 하나, 그렇게 도란도란 낳아서 가정을 꾸릴까요? 당신 아닌 다른 사람이랑?”

떠보는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파리어는 농담인 걸 알면서도 시기가 울컥 솟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콜린스의 도발을 따라 머릿속으로 그와 다른 여인이 있는 장면을 상상했다가, 차오르는 질투를 누르지 못하고 콜린스의 두 손을 힘주어 잡았다.

“……절대로 안 돼. 네가 먼저 꼬여 놓고서 이제 와서 다른 사람 따위……!”

파리어가 몸서리를 치며 인상을 찌푸렸다. 여전히 두 뺨을 콜린스한테 꽉 잡힌 채로 사자처럼 무시무시한 표정을 짓는 것이 퍽 귀엽다. 질투를 일으킨 장본인은 파리어의 반응이 만족스러운 듯 씩 웃을 뿐이었다. 콜린스는 아직도 이마를 씨근거리고 있는 파리어한테 이마를 콩 맞대며 덧붙였다.

“그러게 감당하지도 못할 상상은 왜 하고 그래요? 귀엽게.”

보조개 진 눈웃음이 꽃처럼 활짝 핀다. 콜린스는 늘 그렇게 파리어의 마음을 녹일 줄 알았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애교에 넘어간 파리어는 어느 새 불안했던 마음도 잊고서 조심스레 손을 내밀었다. 다정한 달빛 아래 남몰래 둘이서 손을 잡고 걸어갔다.

그날 밤 잠자리에서 엄마 잃을까 두려워하는 아이처럼 품 안으로 파고드는 그를 콜린스는 밀어내지 않고 마주 포옹했다. 누구보다도 강하게, 놓치지 않도록 꼭 끌어안았다. 거칠게 아래를 파고드는 압력에도 밀쳐내는 시늉 없이 받아주는 그에게 파리어는 당부하고 또 당부했다.

‘내가 잘 할게. 내가 잘 할 테니 내 곁에 있어. 영원히 나랑 같이 살아, 콜린스.’

이기적인 애원 앞에서 너는 어떤 얼굴을 했었나. 흐릿해진 기억 속에서는 그의 얼굴 위로 떠올랐던 마지막 표정이 웃음인지 울음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었다.








“……스… …린스……”

“에디, 일어나. 에디!”

억센 손이 어깨를 흔들었다. 익숙하게 그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사람은 간수들이 듣지 못하도록 목소리를 낮춘 채로 그를 깨웠다. 갑자기 현실로 끌려나온 파리어는 한동안 눈앞에 보이는 차가운 벽돌과 낮은 천장에 적응하지 못하고 혼란스러워했다. 한참을 포근한 콜린스의 품 안에 싸여서 꿈속을 헤맨 탓에 현실에 익숙해지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등을 찌르는 딱딱한 바닥을 느끼고서야 아직 감옥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를 깨운 알렉이 염려스러운 눈길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신 좀 들었어?”

“간수는?”

“방금 지나갔어. 잠꼬대가 조금만 더 컸다가는 들킬 뻔 했지.”

파리어는 긴장하느라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한밤중에까지 독방 문을 따고 들어와 폭행할 일은 없지만, 그래도 거친 독일어로 욕설 세례를 받는 것은 꺼림칙한 일이다. 낮에 두들겨 맞았던 곳곳이 아직도 욱신거리는 중이었다. 구둣발에 짓밟혀서 탈골됐던 손가락은 다시 맞췄음에도 탱탱 부어서 지끈거렸다. 그는 고통스러운 손가락 대신 팔꿈치로 바닥을 짚고 상체를 일으켰다. 아파하는 소리를 들은 알렉이 힐끗 쳐다보며 물었다.

“손은 어때?”

“맞췄으니 나아지겠지.”

헛된 희망일 뿐이지만, 알렉은 굳이 토를 달지 않았다. 대신 방금 전까지 파리어가 애타게 부르던 이름으로 화제를 돌렸다.

“꿈에 누가 나왔길래 그렇게 애타게 이름을 불렀어?”

“……”

대답이 없자 알렉이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애인?”

파리어의 고개가 위아래로 끄덕였다. 같은 감방에 갇힌 이후로 처음 파리어로부터 이끌어낸 반응이었다. 알렉은 손가락을 까딱이며 말했다.

“말해 봐.”

“뭘?”

퉁명스럽게 대꾸하는 파리어를 향해 알렉이 턱짓을 했다.

“애인 얘기. 어차피 잠도 깼잖아.”

알렉의 호기심 어린 눈빛을 받은 파리어는 말없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나 알렉의 말대로 밤은 길었고, 중간에 깨버린 잠은 쉬이 다시 오지 않았다. 사방이 벽으로 막힌 감옥 안에서는 생각을 분산시킬 거리도 많지 않았다. 벽을 도화지 삼아 그리운 얼굴을 덧그려보는 것 외에는. ‘아파서 그런 것뿐야.’ 파리어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빛 한 줄기 새어들지 않는 삭막한 독방에서 콜린스의 환상을 보는 것도, 만난 지 하루 밖에 되지 않은 사람한테 그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도. 모두 얻어맞느라 열이 오른 머리가 만들어내는 변덕일 뿐이라고, 파리어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니 지금만큼은, 열에 들떠 몽롱한 지금만큼은 맘 놓고 그를 그리워해도 되지 않을까.

망설이던 끝에 내놓은 첫 마디는 제가 생각해도 뜬금없는 회상이었다.

“……강아지를 닮았어.”

“뭐?”

되묻는 알렉의 목소리에서 당황이 묻어나왔다. 예상했던 반응이 돌아오자 부끄러움이 몰려들었지만, 파리어는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다는 생각으로 계속 이야기를 풀었다.

“노란 머리카락이 아주 부드럽거든. 짧게 자른 건 다른 사람들이랑 다를 바 없는데 만져보고 싶을 만큼 부슬부슬했어. 아무리 빗질을 해도 아침에는 새 둥지처럼 붕 떴어. 꼭 어릴 때 기르던 금빛 강아지 같았지. 털을 만지면 잠이 올 것처럼.”

“그래서 만졌어?”

“만졌지. 누가 자기 머리카락을 가지고 놀리는 걸 참 싫어했는데, 내가 만질 때는 가만히 웃더라고. 한 번은 내가 괜히 짜증을 부린 적이 있었는데, 쭈삣거리면서 오더니 머리를 긁적이는 거야. ‘제 머리 쓰다듬으면 강아지 같은 느낌인데, 만져보실래요? 좋아하시잖아요, 강아지.’”

“결국 쓰다듬었겠군.”

“뿌리칠 수가 없었지. 나중에는 내가 왜 화를 냈는지도 까먹고 말았어.”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파리어가 웃었다.

“강아지를 닮았다는 건 그것뿐? 다른 건?”

“건강하고 밝은 사람이야. 어렸을 때 모습 그대로 자란 것처럼 뛰어다니는 걸 좋아하고, 늘 거침이 없고. 기쁠 때는 솔직하게 기뻐하고 슬플 땐 솔직하게 슬퍼했지. 힘든 일이 있어도 금방 툭툭 털고 일어나고. 매사에 비관적인 나랑은 대조적인 사람이었어. 가끔은 어떻게 나랑 만나게 된 걸까 싶을 만큼 말야. 눈앞의 현재에 충실할 수 있다는 건 강한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잖아. 갓 눈을 뜬 강아지가 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진 않는 것처럼.”

회상에 젖어든 눈매 위로 온화한 기운이 떠올랐다. 고백은 계속 되었다.

“그 애가 웃으면 세상이 다시 태어나. 별이 탄생하는 순간을 지켜보는 것 같아. 그럼 그 옆에 있는 내가 미안해져. 회의에 찌들고, 지치고…… 그래도 바라보는 걸 멈출 수가 없었어.”

희망이 꺼져가는 잿빛 세상을 거닐다 겨우 발견한 빛인데, 어떻게 그 빛을 외면할 수 있을까. 그것이 나름의 변명이라면 변명이었다.

이야기를 할수록 다시 돌아오기 시작한 생기를 알아차린 건 파리어뿐만이 아니었다. 보고 싶은 이의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칙칙하게 죽어있던 수감 동료의 눈에 빛이 어리기 시작한 것을 보고 알렉이 말했다.

“엄청 좋아했나 보네, 그 여자. 넌 꼭 살아서 나가야겠다. 듣고 있자니 그 아가씨가 없으면 넌 절대 못 살 것 같거든.”

파리어는 대꾸할 수 없었다. 알렉의 말은 진실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는 철조망을 벗어나 다시 한 번 콜린스와 만나는 것을 꿈꿨다. 헤어져 있던 시간만큼 그대로, 긴긴 밤을 자신이 겪은 모험을 들려주며 수놓는 꿈을 꿨다. 국경을 가르는 상상 속에서 헤매는 파리어를 향해 알렉이 중얼거렸다.

“탈출 꼭 성공해야겠다.”

그래, 몸을 떨며 옛 방으로 돌아가 사랑을 속삭여야지. 여행이야기를 들려줘야지. 며칠 밤이 걸리더라도 서로 포옹을 한 채로, 사랑의 속삭임 속에서 모험과 끝없는 이야기를 나누어야지.

가물가물해지는 의식 속에서 파리어는 생각했다.




며칠 후, 알렉이 제안한 탈출 계획에 파리어가 가담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만 모르고 있었을 뿐 그동안 수용소의 포로들은 저마다 탈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영국인들이 만든 비밀 모임만 서너 개였다. 그중 하나가 깊이 땅굴을 파서 탈출하는 작전이었다. 황무지인 연병장을 벗어날 수만 있다면 철조망 밖은 빽빽한 침엽수림이기 때문에 몸을 숨길 수 있었다. 그대로 준비한 민간복으로 갈아입고 가까운 도시의 기차역으로 가서 흩어진다는 것이 기본 골자였다. 가담한 인원은 이백 명. 무모한 규모였다.

처음 탈출 인원을 들었을 때 파리어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포로들의 탈출이야 처음 독일군한테 잡힌 이후로 수도 없이 보고 겪은 일이지만, 한 번에 백 명 이상이 도망을 시도한다는 건 듣도 보도 못한 용기였다. 하룻밤 사이에 포로의 절반이 사라진 것을 알고 나면 독일군들은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들의 황망해할 표정이 보고 싶었다. 터무니없는 작전인 걸 알면서도 숟가락을 얹은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날이 더해가는 초조함도.

시간이 흐를수록 꿈에 콜린스가 나타나는 빈도가 늘어났다. 밤이면 그리운 옛 침대에서 콜린스와 잠드는 꿈을 꿨다가 아침이면 식은땀에 젖어 잠에서 깼다. 꿈과 현실의 괴리가 커질수록 일상에 적응하기도 어려워졌다. 새벽 점호에 끌려나올 때마다, 강제로 노동을 할 때마다 잠깐이라도 눈을 감으면 그의 얼굴이 자꾸만 어른거려서 현실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주저앉고 싶은 것을 견디게 해준 것은 머지않아 다시 만나게 될 거라는 희망이었다. 그리움이 사무쳐서 견디기 어려워질수록 더더욱 작전에 몰입했다. 비좁고 어두운 땅 밑에서 흙을 파내는 고통조차 집으로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가는 순례의 고행으로 여겼다.

독방에서 나오고 세 달째 되던 밤, 굴이 완성됐다. 터널의 입구로 들어가던 순간의 상황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땅 밑으로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어깨를 두드려준 알렉과의 대화만이 남아있다.

‘행운을 빌어, 에디. 살아서 보자고.’

좁은 터널 속에서는 한 번에 한 명씩밖에 이동할 수 없었다. 눕다시피 엎드려서 기어가는 자세 탓에 숨이 턱턱 차올랐다. 손전등 불빛에 의지해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감각이 흐려지려는 순간, 빛이 보였다. 철조망 너머로 연결된 출구로 흘러들어온 달빛이었다. 파리어는 마지막 남은 힘을 짜내서 올라가는 사다리 끝을 잡았다. 자유가 코앞이었다.

멀리서 발포하는 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곧 지상에서 요란한 경적과 어지러운 고함이 들렸다. 되돌아가는 길은 어느 새 막혀버렸다. 파리어는 남은 유일한 선택지를 잡았다. 그는 이를 악물고서 사다리를 올랐다.

지상 위로 머리를 들이밀자마자 보인 것은 포박당하고 있는 포로의 모습이었다. 먼저 출발했던 이들 중 몇이나 성공하고 몇이 잡혔는지 알 수 없었다. 아마 철조망을 넘지 못한 이들이 더 많았을 것이다.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는 몰라도 작전은 실패였다. 이마에 들이밀어지는 총구 앞에서 파리어는 절망한 채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진짜 지옥은 잡힌 뒤에 찾아왔다. 캠프를 벗어나기 전에 발각된 포로들은 다시 감옥으로 끌려갔고, 간신히 도시에 닿았던 사람들도 날이 밝자 하나 둘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돌아온 포로 중에 살아남은 이는 없었다. 게슈타포가 개입했다는 소문이 사실이었던 듯싶었다. 날이 밝자 기다란 가죽 코트를 입은 독일인들이 나타나 철조망을 빠져나가는 데 성공했던 포로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처형했다. 파리어가 즉결 처형에서 빠져나갈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그들보다 더 일찍 잡혔다는 사실 덕분이었다.

고막을 울리는 포성이 지나가고 마침내 학살이 끝났을 때, 파리어는 쓰러진 시체들 가운데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알렉이었다. 눈을 감지 못하고 쓰러진 그의 얼굴 위에는 흙먼지가 잔뜩 묻어있었다. 그를 묻고 돌아오는 길에 황혼 뒤로 비치는 철조망을 보았다. 가시가 삐죽이는 철책은 절벽 위의 성채처럼 솟았고 그 위를 넘어가기란 덧없는 환상으로 느껴졌다.

그는 휘파람을 불었던 밤, 콜린스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밤의 휘파람은 불행한 일을 불러와요.’

콜린스가 맞았다. 솔직하지 못한 질투에 사로잡혀 그를 불러냈던 그 날 밤부터 운명은 이미 예정되어있었을지도 모른다.


독방에서 한 달—이번에는 정말로 혼자였다—, 그리고 다시 토끼장 같은 단체 숙소로 돌아왔을 때는 희망도 기대도 모두 사라져 있었다. 긴 악몽을 꾸고 난 뒤에 찾아온 탈진이었다. 머지않아 전쟁이 끝나고 마침내 해방되어 지난한 귀향길에 올랐지만, 대륙을 가로지르는 그 여정을 어떻게 견뎠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귀환병을 실은 배가 도버 항에 닿았다. 환호하는 군중 속에서도 파리어는 침묵을 지켰다. 사랑도 삶도 더 이상 이어갈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모든 노력이 무슨 소용이었나? 오 년의 시간을 바쳐 믿고 싸운 투쟁들이, 그 모든 싸움이 과연 그만큼 가치 있는 일이었나? 손 안에 남은 것은 흩어진 먼지뿐. 다시 돌아와 마주한 세계는 잿빛 폐허였으며 그 풍경 안에 서 있으면 어떤 열정도 감정도 다시는 솟지 않을 것만 같았다. 트라팔가의 구걸하는 수병들, 항공전의 ‘기니피그’들. 백 년이 흘러도 전쟁이 끝난 후의 풍경은 변함없다. 희생자들은 우상화된 호국 전설 속에서 너무 빠르게 잊혀갔고 과거의 영광은 벗겨진 도금칠처럼 쉽게 변색됐다. 고통이 할퀴고 지나간 자리는 회복되지 않는다. 짓밟힌 끝에 결국 망가져버린 두 손처럼.

해방된 후에도 콜린스에게 전보를 보내지 않은 것도 손 때문이었다. 치료할 시기를 놓친 열 손가락은 영구적으로 변형되어서 더 이상 못쓰게 되었다. 갈퀴처럼 비틀리고 마디가 굽은 손으로는 조종간은커녕 차의 운전대도 잡기 어려우리라. 쓸모를 잃은 손. 되살아나지 않을 열정. 변해버린 모습 중 어느 하나 콜린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다시 만난 그는 어땠는지.

‘돌아온 걸 환영해요, 에드워드.’

너무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에 귀가 간질거리기 전에, 변함없이 다정한 인사에 가슴이 떨리기 전에 울긋불긋하게 얼룩진 얼굴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손이 망가진 이후로 이보다 비참한 고통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콜린스의 흉터를 보고 나니 아무 말도 꺼낼 수 없었다. 뺨이 너무 아파보였다. 쓰다듬어주고 싶었지만 돌처럼 딱딱하게 굳은 손으로는 상처를 헤집기만 할 것 같았다.

아니, 전부 변명이다. 등 돌려 도망친 이유는 그를 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흉이 진 얼굴, 겉잡을 없이 밀려오는 죄책감. 피부가 그을리기까지 열기 속에서 얼마나 괴로워했을까? 내가 안전한 철책 뒤에 숨어 목숨을 부지하는 동안 혼자 어떤 두려움으로 전장에서 버티었을지? 생각할수록 미안함이 숨 막히도록 전신을 뒤덮었다.

그렇게 상처를 주면서까지 도망쳤으면 다신 돌아보지 않고 인연을 끊어냈어야 하는데, 이기적인 짓을 저질렀다. 상처 입고 변해버린 그를 마주할 용기는 없고 그렇다고 그 없이 살아갈 만큼 단단하지도 못해서 끊임없이 유령처럼 주위를 맴돌았다. 정작 변한 것은 콜린스가 아니라 자신일지도 모르는데. 오 년이라는 장벽을 뛰어넘어 마중을 나올 정도의 사람이 그리 쉽게 변할 리 없다.

재활치료를 받으러 병원에 있는 동안 또 다른 화상 환자를 만난 적이 있다. 얼굴과 상체가 타버린 그는 총 열 차례가 넘는 대수술을 받았다고 했다. 이식수술 끝에 고무처럼 팽팽한 피부를 갖게 된 그는 자기 같은 사람들이 더 있어서 한 곳에 모여 치료를 받는다고 했다. 밋밋해진 얼굴이 마치 실험실의 쥐 같아서 기니피그라는 별명으로 불린다는 것도.

‘그래서 우리 클럽 이름이 기니피그 클럽이랍니다.’

남자가 농담을 던졌지만 파리어는 마냥 웃을 수 없었다. 포탄의 열기에 스치는 것만으로도 살이 까지고 괴로운데, 콕핏 안에 갇혀 산화되었던 조종사들은 얼마나 무자비한 고통 속에서 스러져 간 것일까? 그들을 상상하면 파리어는 숨이 막혔다. 그랬던 동정의 화살이 이제는 콜린스가 표적이 되어 날아온 것이다.

정말로 견딜 수 없는 것은 이런 상황에서조차 콜린스를 향해 욕정 하는 자신이었다. 힘들게 하고 싶지 않다는 변명을 들어 먼저 밀어내 놓고서 여전히 그 몸을 탐하기를 욕망하다니, 얼마나 끔찍한지. 잠에서 깬 지금도 흐르는 땀과 뛰는 심장을 주체하지 못해 숨을 몰아쉬었다. 꿈에 콜린스의 미소가 나온 탓이었다. 말갛게 웃는 그 얼굴을 보고서 이기적인 욕심을 품었다. 아무리 도망쳐도, 빛 한 점 들지 않는 어두컴컴한 골방으로 숨어들어도 주박처럼 욕망이 따라붙는다. 다 꺼진 줄 알았던 열정이 남은 불씨처럼 끈질기게 생명을 부지하며 시체 같은 삶에 강제로 생기를 불어넣는다. 영면할 수 없는 저주에 걸려 연옥을 헤매는 영혼처럼, 파리어는 거부할 수 없는 정욕에 굴복했다.

서툰 손길로 하의를 내리고 단단해진 물건을 건드린다. 시멘트처럼 차갑고 감각 없는 손은 조금의 쾌감도 주지 못했다. 반쯤 선 물건에 열기를 더한 것은 오롯이 눈앞에 떠오른 콜린스의 환상이었다.

그의 흉터 남은 몸을 끌어안고서 상처를 모조리 핥아주고 싶었다. 새 살이 돋을 때까지 계속 입 맞추고 애무하고 싶었다. 반점이 남은 뺨, 찌그러든 목덜미, 거친 가슴팍까지 화마가 스치고 간 곳은 한 곳도 빠짐없이 위로해주고 싶었다. 정작 콜린스는 그 이기심 섞인 키스에 괴로워하고 타액이 닿는 곳마다 몹시 아파할 텐데. 찢겨나간 살갗은 배신자의 입술을 견뎌내지 못하고 끝내 거부할 텐데.

붉고 오뚝한 꼭지는 여전할지, 그걸 깨물면 예전 그대로 단맛이 날지. 힘을 주어 깊숙이 파고들면 여전한 뜨거움으로 반겨들지. 파리어는 야릇한 상상을 끝으로 파정했다. 뻣뻣한 두 손으로는 뜻대로 물건을 쥐고 흔들기가 어려워서 짐승처럼 시트에 하체를 비비면서 절정에 달했다. 쾌락이 어른거리는 동시에 혐오스러웠다. 이런 망가지고 이기적인 몸으로는 그를 만나러 가는 것조차 죄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이율배반임을 알면서도 콜린스가 보고 싶었다. 뻣뻣한 시트를 그러쥐고 초라한 눈물을 흘릴 만큼, 아주 많이.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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