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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어콜린스] Wind Beneath My Wings

18.05 재록본 수록. 콜린스가 아직 신입이었을 때.

* 오리지널 캐릭터 나옵니다. 






“그놈 신수 한 번 훤하다. 이름이 콜린스라고?”

“잭 콜린스 소위입니다, 파리어 대위님!”

“목청 커서 좋네. 포티스에 온 걸 환영한다, 병아리.”

돌이켜보면 파리어가 웃으며 농담을 던지던 그때부터 이미 그에게 빠졌던 것 같다고, 콜린스는 회상했다. 얼마나 대책 없이 빠져들었느냐면 당시 신참 조종사들을 놀릴 때나 쓰던 병아리라는 별명을 듣고도 기분 나쁘기는커녕 가슴 한 구석이 간질간질했으니. 자신을 병아리라고 부르는 그 사람 앞에서 하루 빨리 어엿한 독수리가 되어 날아 보이고 싶었다. 경례를 붙인 손끝이 흥분인지 긴장인지 모를 감정으로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하늘은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하루라도 빨리 선배들로부터 인정받고 싶다는 욕심은 조급한 마음으로 이어져 한심한 실수를 연발하게 했다. 첫 출전은 아직도 어설픈 기억으로 범벅돼있다.

첫 단추부터 좋지 않았다. 150시간의 비행훈련이나 4주간의 기지훈련 중 어느 쪽도 실전의 지독함을 알려주진 못했다. 무엇보다 훈련은 소집명령과 출격 신호 사이에 기나긴 지루함이 버티고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준 적 없었다.

콜린스는 배치 신고를 마친 다음 날 새벽부터 곧바로 비행장으로 나갔다. 해가 떠있는 시간을 최대한 활용해서 출격해야 하므로 전방 기지 전투기 조종사의 일과란 활주로에서 시작해서 활주로로 끝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항공기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세워진 분산대기실은 콜린스가 막연히 상상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그날 아침 대기실에 모인 조종사들 중에서 규정대로 제복을 갖춰 입은 사람은 콜린스뿐이었다. 다른 조종사들은 연차를 막론하고 흰색 스웨터에 무스탕을 걸치고, 규정된 흑색 구두 대신 사제 부츠를 신는 등 제멋대로였다. 대량생산 된 하늘색 셔츠, 목까지 단추를 채운 파란색 정장, 검고 불편한 흑색 장화를 전부 갖춰입은 사람은 콜린스뿐이었다. 한 조종사가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담배 연기를 뻐끔거렸다.

“야, 그냥 사제품 사 입어도 돼. 미련 맞게 단추까지 채웠네.”

콜린스의 하얀 뺨이 붉게 물들었다.

게다가 슬레이트 건물로 만든 분산 대기실 안은 문자 그대로 너구리굴이었다. 창문을 닫아 환기도 되지 않는 대기실 안에서 조종사들은 저마다 시가나 궐련 한 대씩을 물고 있었고, 열댓 명의 사내들이 동시에 뿜어내는 자욱한 연기는 천장까지 타고 올라가 시야를 뿌옇게 흐렸다.

콜린스는 따끔거리는 눈을 빠르게 감았다 뜨며 앉을 자리를 찾아보았다. 패드가 푹 꺼진 일렬 소파는 이미 카드놀이를 즐기는 선배들 차지였고 그 옆의 팔걸이가 부서진 흔들의자도 임자가 있었다. 남은 공간에는 우비며 구명조끼가 널려있고, 헐벗은 여인이 가슴을 자랑하는 잡지가 쌓여 있어서 비집고 들어갈 틈도 보이지 않았다. 신입은 하는 수 없이 다시 밖으로 나갔다.

다행히 접이식 의자가 있어서 들판 위에 펴고 앉을 수 있었다. 방황 끝에 자리를 잡은 콜린스는 자신에게 허락된 비좁은 의자 위에서 최대한 허리를 쭉 펴고 절도 있게 앉았다. 주먹 쥔 두 손을 가볍게 무릎 위에 올리고 시선은 앞으로 향한다. 전방에는 항공기가 활주하기 쉽도록 경사진 풀밭이 펼쳐 있었다. 곧 출동 명령을 알리는 종이 울리면 자신도 저 들판 위를 달려가 기체 위로 올라탈 것이다. 벨트를 연결하고 시동을 걸고 콕핏을 닫고, 관제탑에서 이륙 신호가 떨어지면 저 구릉을 구르듯 내려가 하늘로 날아오를 것이다. 매뉴얼은 몇 번이나 몸으로 머리로 숙지했다. 대전쟁의 에이스들처럼 솟구치리라. 콜린스는 벅찬 심경으로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십 분. 삼십 분. 한 시간. 두 시간.

그러나 시계바늘이 벌써 두 바퀴를 돌아가는데도 명령은 좀처럼 전달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작전지휘실에서 내린 지시를 전달해주는 빨간 수화기는 수 십분 째 침묵만 지켰다. 점점 지연되는 출격 앞에서는 아무리 성실한 콜린스여도 초조해졌다. 특히 첫 실전을 겪는 신입에게 무한히 이어지는 기다림은 다른 어떤 위기상황이나 적기보다도 더 치명적인 싸움이었다. 기껏 끌어올린 사기는 바닥으로 추락하고 좀이 쑤시다 못한 몸이 제멋대로 들썩이기 시작했다.

슈투카보다도 무섭다는 지루함 앞에서 새파랗게 젊은 신입이 힘겹게 저항하는 동안, 멀찍이 앉아있던 다른 조종사는 한가하게 이발을 받고 있었다. 하얀 천을 두르고 이발사에게 머리를 맡기고 있는 조종사의 모습은 여유롭기 짝이 없었다. 구명조끼와 수건이라는 해괴한 조합도 신문을 읽으려는 그의 열정을 막진 못했다. 간간이 그와 이발사가 나누는 시덥잖은 대화가 들려왔다.

“오늘 저녁 시간 있나?”

“저야 중위님 머리만 끝내면 한가하죠.”

“그럼 돌아오면 펍에서 보지. 한 잔 살게.”

조종사는 오늘 밤 당연히 살아 돌아올 것처럼 말했다. 공포의 위협도 죽음의 문턱도 처음인 콜린스에게는 두 사람의 스스럼없는 대화가 그저 낯설기만 했다.

긴장한 콜린스를 거들떠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최소한 다섯 번 이상의 출격 경험이 있는 조종사들─다시 말해 살아남은 자들은 군기가 바짝 든 신입의 존재를 당연하게 여겼다. 특별히 챙겨주지도, 그렇다고 정신 바짝 차리라며 주의를 주는 이도 없는 분위기 속에서 햇병아리는 점차 주눅이 들었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호전성도 그 낯설고 이해불가한 분위기 속에서는 점점 날이 죽었다.

계속되는 대기를 견디다 못한 콜린스가 결국 이발 중인 조종사에게 물었다.

“출격 신호는 언제쯤 떨어집니까?”

조종사는 치기 어린 질문을 듣고 피식 웃었다.

“왜? 빨리 죽고 싶어서? 때 되면 알아서 전화 오겠지.”

불퉁한 대꾸를 들은 콜린스는 자신의 치기어림이 부끄러워져 목덜미를 붉혔다.

모두가 새로 들어온 콜린스를 가만히 내버려두었다. 특별히 전면전에 돌입하지 않더라도 목숨을 잃기 쉬운 전투기대대에서는 처음 출격하는 신참 조종사에겐 별다른 말을 걸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신입이 첫 출격에서 살아남을 확률은 3할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괜한 상실감을 느낄 필요는 없었다.

그런 암묵적인 규칙을 모른 채, 홀로 긴장 속에 남겨진 콜린스에게 유일하게 먼저 말을 걸어준 사람이 파리어였다. 어디서 혼자 시간을 때우다가 뒤늦게 나타난 파리어는 콜린스를 찾더니, 덤덤히 어깨를 쳐줬다.

“걱정하지 마, 병아리.”

콜린스는 긴장한 나머지 머리가 새하얘진 탓에 그 위로하는 말의 내용도, 파리어의 온화한 표정도 인지하지 못했다. 다만 어깨를 꽉 쥐어주는 따뜻한 온도에서 담담한 용기를 받았다. 두려움을 끌어안도록 이끄는 그 손길 때문에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 순간 요란스런 전화벨이 울리고, 늘어지게 앉아있던 조종사들이 카드며 신문을 내팽개치고 달려나갔다. 굳이 말로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출격 명령이었다.

 

*

 

첫 비행은 완벽한 혼돈이었다. 횡전, 급강하, 방향 전환을 할 때마다 전신이 찌그러질 듯이 중력에 눌렸다가 다시 공중으로 떠올랐다. 후미에 붙은 적기를 발견하고 허둥지둥 기수를 틀 때는 하늘로 솟구쳤다. 교본에서 배운 대로 300m로 영점 거리가 좁혀졌을 때 사격을 시도해보았지만 적기 날개에 스치지도 못하고 빗나갔다. 너무 가뿐하게 피해서 적 조종사에게 농락당하는 기분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사격 후에는 마주보고 달려오는 적기와 충돌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전속력으로 급강하를 해야 했는데, 거대한 관성이 붙은 항공기를 바닥으로 끌어내리기 위해선 미친 듯이 조타 페달을 때려 밟아야 했다. 방탄유리에 어깨가 닿을 만큼 좁은 콕핏 안에서 팔다리가 이리저리 부딪혀 멍이 들었다. 지면에 충돌하기 직전 다시 기체를 끌어올리기 위해선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조종간을 당겨야 했다.

상대 메서슈미트에게 완전히 놀아나고 있었다.

전투기를 여자처럼 대하라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전투기는 부드럽게 다뤄야 할 숙녀가 아니라 전력을 다해 다퉈야 하는 파트너였다. 살아남으려면 모든 완력과 체력을 쏟아 부어야 했다. 급하게 변하는 중력 가속도, 속이 울렁대는 방향 변화. 기체와 연결된 산소마스크 때문에 입안이 바싹 말랐다. 조종석 바로 앞에 탑재된 연료 탱크에서는 끊임없이 가솔린과 오일 냄새, 배기가스가 새어 나왔다. 눈이 따끔거려서 수시로 문질러야 했다. 영하 34도까지 떨어진 기체 내부에서 땀이 다 날 지경이었다.

무엇보다 괴로운 것은 귀에 쓴 헤드폰을 통해 들려오는 온갖 소음, 지시와 경고, 먼저 격추당한 동료기의 비명 소리가 쏟아지는 것이었다. 전투가 이뤄진 삼십 분 동안 조종사 콜린스는 수십 초씩 사격을 퍼부으면서도 단 한 대의 Bf109조차 빗맞히지 못했고, 목숨을 보전하는 것만으로도 탈진할 지경이었다.

철수 명령이 떨어지고 마침내 지상으로 내려왔을 때, 지상요원들은 콕핏 안에서 기진맥진한 신참 조종사를 대신 끌어내야 했다. 스스로 안전벨트를 풀 힘도 없어서 도움을 받아 끌려나온 신참은, 땅 위에 발을 디디자마자 그대로 속을 게워냈다. 그는 더 이상 뱉어낼 것이 없어 신 위액이 나올 때까지 헛구역질을 계속했다. 예상한 광경에 지상요원들은 대충 등을 두드려주고선 다른 조종사들을 살피러 떠났다.

만신창이가 된 콜린스에게 다가온 이는 선임 파리어였다. 그는 위를 비워내고 있는 콜린스 앞에 조용히 수통을 내밀었다. 콜린스가 헛구역질을 멈추는 것을 확인한 다음, 손수건을 꺼내 대신 입을 닦아주고 물로 입 안을 헹구게 시켰다. 호흡이 진정된 것까지 확인하고 나서야 조곤한 목소리로 다독였다.

“첫 비행인데 잘 견뎠다.”

그 말을 듣는데 어쩐지 눈물이 찔끔 났다. 순간 콜린스는 너무 부끄럽고 당황한 나머지 상체를 둥글게 말았다. 덕분에 졸지에 껍질 속으로 숨은 거북이 꼴이 되어버렸다. 하필이면 누구보다 인정받고 싶고 듬직하게 보이고 싶은 상관 앞에서 못난 꼴을 보이다니, 너무 민망하고 속상했다. 콜린스는 신물이 쏠리느라 쉬어버린 목으로 더듬더듬 변명했다.

“죄송, 흡, 죄송합니다. 너무 메스꺼워서 그만,”

“첫 비행 땐 다 그래. 그 정도면 잘 버틴 거야. 내 동기 중에는 저 위에서 토한 놈도 있었어.”

키득거리는 목소리가 그렇게 다정할 수 없었다. 수통의 물을 다 마실 때까지 묵묵히 기다려주는 남자의 존재 곁에서 콜린스는 전투의 피로와는 다른 이유로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다. 본능적으로 그를 좇으려는 시선을 억지로 끌어내리며, 콜린스는 우물거리며 감사를 표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대위님.”

“앞으로 배워야 할 게 많네, 병아리. 잘 따라와. 길 잃어버리지 말고.”

파리어가 짓궂게 놀렸다. 콜린스는 옅게 물든 얼굴로 대답했다.

“그림자처럼 딱 붙어서 따라다니겠습니다!”

 

*

 

딱 붙어 다니겠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포티스의 병아리는 어미닭 좇듯 파리어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활주로, 대기실, 병영, 술집─어딜 가나 선배 윙메이트를 따라다니는 콜린스를 보고서 대원들은 노란 꺽다리가 들러붙었다며 파리어를 놀렸다. 파리어는 화내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에 든다는 듯이 웃고 말았다. 사람들은 콜린스가 첫 격전에서 호되게 당한 나머지 그 반작용으로 파리어 뒤로 숨어 다닌다고 말했지만, 잘 모르고서들 하는 얘기였다. 호승심 깊고 영리한 병아리는 단순히 파리어의 그늘 속으로 숨어드는 것이 아니라 점차 그의 또 다른 분신이 되어갔다. 태양빛 아래서 서로 어우러지는 그림자처럼.

파리어가 물으면 콜린스가 성실히 답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비행 십계명. 읊어봐.”

“절대로 20초 이상 수평 직선 비행을 하지 않습니다!”

“꼬리에 적이 붙었을 때는?”

“뒤로 돌아가서 기회를 노립니다!”

“사격은 언제?”

“적의 흰자위가 보일 때까지 기다렸다가!”

시속 550km로 날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실제로 적 조종사의 흰자위를 볼 수 있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콜린스의 씩씩한 대답에 파리어는 고개를 끄덕이며 신신당부했다.

“사정거리 안에 들어왔다고 그물 던지듯이 사격하지 마. 총탄을 아껴. 덫에 걸려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놈과 일렬로 서는 순간, 그때 딱 2초만 쏘는 거야. 왜 그런지는 알지?”

“네. 우리 항공성은 늘 자금 부족에 시달리기 때문입니다!”

콜린스의 농담에 파리어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커다란 손을 뻗어 한 뼘 높은 콜린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본인이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 의식하지 못하는 듯 했다. 강아지 쓰다듬듯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리는 파리어의 손길을 느끼며, 콜린스는 체온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붉어진 목덜미를 들킬까봐 상의 깃을 더욱 바짝 세웠다.

“그거, 단추 그렇게 바짝 채우면 안 좋아.”

파리어가 꽉 조여 맨 콜린스의 상의 단추를 풀어주며 말했다. 능숙한 손길이 콜린스의 셔츠 칼라를 빼냈다. 드러난 흰 목덜미 위에는 붉은 발진 같은 것이 죽죽 나 있었다. 상처 난 살갗을 본 파리어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럴 줄 알았어. 살갗이 다 쓸렸잖아.”

자기가 더 속상해하는 파리어의 어조에 콜린스는 서둘러 변명했다.

“아, 그게 적기를 확인하느라 자꾸 뒤돌다보니까, 그래서 좀 쓸렸나봅니다. 괜찮습니다! 하나도 안 아픕니다!”

파리어는 믿지 않았다. 그는 단단하게 뭉친 콜린스의 목을 대신 마사지 해주며 타박했다.

“아주 돌처럼 단단하게 굳었네. 스핏파이어가 다 좋은데 이게 문제야. 후방 시야 확보가 안 돼서 매번 직접 고개를 돌려야 하잖아. 우리 목뼈만 죽어나는 거지.”

콜린스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눈알만 도로록 굴렸다. 목덜미에 닿는 파리어의 손이 따뜻했다.

“목에 담 걸리는 것만 해도 억울한데 피부까지 쓸리진 말아야지. 자, 이거 받아.”

파리어가 품안에서 꺼낸 것은 파란색 바탕에 흰색 물방울 무늬가 수놓인 스카프였다. 그는 그것을 콜린스의 쓸린 살갗 위에 둘둘 덧대주었다. 걸치고 나니 가장자리에 붙은 술이 커튼처럼 나풀거렸다. 콜린스는 경악해서 반항했다.

“이게 뭡니까? 꼭 할머니 같잖아요!”

“앞으로는 칼라 대신에 이거 두르고 다녀. 웬만하면 넥타이도 답답하니까 하지 말고.”

파리어는 그렇게 말하며 벌어진 셔츠 사이로 스카프를 꾹꾹 눌러 넣었다. 존경하는, 그리고 사적인 감정까지 피어나기 시작한 사람이 손수 스카프를 꺼내 둘러주자 콜린스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붉어진 피부를 들키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오직 파리어가 둘러준 스카프 덕분이었다.

“그래도 역시 할머니 손수건 같지 말입니다.”

“스핏 좀 몬다는 놈들은 다 차고 다니니까 잔말 말고 하고 다녀. 까지면 너만 손해야.”

덩치 큰 후임이 괜히 마음에도 없는 투정을 부려도 파리어는 웃음 한 번 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그의 목깃을 정리해 주었다. 쓸린 부위를 다 감추고도 파란 스카프가 든든하게 맨살을 덮고 나자, 그때서야 머쓱하게 웃는다.

“길고 예쁜 목인데. 아깝잖아.”

콜린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얌전히 스카프를 둘러주는 파리어의 손길을 받아냈다. 쓸리지도 않은 볼이 뜨거운 것만 같았다.

 

*

 

간만에 돌아온 휴일이었다. 콜린스는 습관처럼 분산대기실로 출근했다가 그날의 출정 명단에 자기 이름이 체크되어 있지 않는 것을 본 뒤에야 그 사실을 기억해냈다. J. Collins 위에 적힌 E. Farrier 옆에도 큼직하게 X자가 표시돼 있었다.

“휴일인데 출근했어? 성실하네.”

뒤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콜린스가 깜짝 놀라 몸을 돌렸다. 창가 옆 소파 위에 파리어가 앉아있었다. 한 손에 들린 책으로 보아 독서 중인 것 같았다. 콜린스는 슬쩍 주위를 살폈다. 적기의 정찰을 알리는 레이더 신호도, 폭격을 예보하는 첩보도 들려오지 않았다. 좀처럼 맞기 드문 평화로운 날이었다.

다른 대원들은 보이지 않았다. 분산대기실에는 파리어와 그 단 둘 뿐이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콜린스는 들뜬 걸음으로 소파로 향했다. 가까이 다가가자 파리어가 몸을 뒤척여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그 옆에 조심스레 앉는 내내 콜린스는 들뜬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따라붙는 평소라면 엄두도 못 낼 행동이었다. 그는 올라가려는 목소리를 애써 낮추며 대답했다.

“휴일인 걸 까먹었지 뭡니까. 다들 펍으로 갔는데 대위님은 시내에 안 나가십니까?”

“어제 읽다 만 책이 있어서. 이럴 때 읽어야지, 평소엔 시끄러워서 원.”

조금이라도 좀이 쑤시는 걸 견디지 못하는 보통의 조종사들과 달리, 파리어의 성격은 사실 정적이고 내향적인 편이라는 걸 콜린스는 다시 한 번 깨달았다. 그런 점이 훈련이나 전투 때 보여주는 호전적인 모습과 대비되는 것 같아서 어쩐지 더욱 멋져 보였다. 절로 호감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단 둘뿐이라는 사실에 긴장했던 것도 풀어지고, 곧 기다란 두 다리가 아이처럼 앞뒤로 흔들린다. 얼빠진 바보처럼 실실 웃음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막은 건 오직 한 가닥 남은 이성덕분이었다.

그는 다시 책 속의 세계로 빠져든 파리어를 가만히 내버려둔 채 대기실 여기저기를 구경하기로 했다. 늘 북적거리던 대기실도 사람 소리가 사라지고 나니 갑자기 넓어보였다. 벽에는 융커스, 하인켈, 메서슈미트의 그림자를 담은 항공기 식별 카드가 덕지덕지 붙어 있고, 천장에도 고무로 만든 기체 모형이 여럿 매달려 있었다. 먼 곳에서도 적기를 보고 구분할 수 있도록 교육시키기 위한 장치였다. 낡아빠진 소파 위에는 파리어와 그의 애견이 졸고 있고, 탁자 위에는 낡은 빅터 축음기, 레코드판 한 무더기, 묵은 잡지와 신문, 트럼프 카드, 체스 판이 어지러이 널려 있다. 벽 옷걸이에는 이젠 돌아오지 못하는 조종사의 우비와 비행복이 너저분하게 걸려 있었다. 떠나간 이들의 얼굴로 생각이 흘러가려고 하자 콜린스는 애써 다른 곳으로 주의를 돌렸다.

무더기로 쌓인 신문 만화가 눈에 들어온 것은 그때였다. 야한 하드보일드 스릴러, 반쯤 헐벗거나 전라의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신문 만화가 적나라하게 펼쳐져 있었다. 아마 이전에 읽었던 사람이 정리하는 걸 깜빡한 모양이었다. 콜린스는 그중 <데일리 미러>지의 간판스타인 핀업걸 삽화를 집어 들었다. 구불거리는 금발 고수머리와 육감적인 몸을 자랑하는 제인(만화 주인공의 이름이었다)은 조종사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캐릭터였다. 콜린스는 짧게 개조한 여군 스커트 아래로 하얀 팬티를 드러내고 있는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위님은 제인 안 좋아하십니까?”

“뭐? 누구?”

파리어가 책에서 눈도 떼지 않은 채로 물었다. 머쓱해진 콜린스는 소심하게 핀업걸을 가리켰다.

“여기, 이 만화 주인공이요. 다들 좋아하잖습니까. 별명이 RAF의 첫사랑인 걸요.”

제인은 스핏파이어의 여신으로 분한 채 종이 너머 독자에게 유혹적인 키스를 던지는 중이었다. 남자라면 누구나 홀릴 만한 그 굴곡진 실루엣과 대리석처럼 새하얀 살결을 파리어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관찰했다. 그는 RAF의 살로메라는 그녀의 매력을 찾아 한참을 헤맨 끝에 작게 중얼거렸다.

“만화를 잘 안 봐서……”

콜린스는 다시 한참을 우물쭈물했다

“이런 스타일은 취향이 아니십니까?”

말을 꺼내자마자 곧바로 후회가 몰려왔다. 대체 어디서 그런 용기가 튀어나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생각하기도 전에 말부터 먼저 튀어나가는 자기 행동에 콜린스는 몹시 당황스러워졌다. 그러나 파리어는 여전히 무심하게 되물을 뿐이었다.

“어떤 스타일?”

“금발에 하얗고…… 머리도 길고 구불거리고…… 글래머에…… 하늘하늘한……”

“금발이 예쁘긴 한데.”

대답을 들은 콜린스의 고개가 푹 꺼졌다. 그 바람에 그는 자기를 힐끔거리는 파리어의 행동을 눈치 채지 못했다.

“난 좀 더 키 크고 건강한 쪽이 취향이라서.”

휙! 숙였던 고개가 다시 번쩍 들린다. 먹구름 낀 것처럼 어둑어둑하던 안색도 어느 새 원래의 밝은 빛을 되찾았다. 너무 쉽다고 말해도 어쩔 수 없다. 도무지 정체를 모를 이 이상한 마음은 존경스럽고 믿음직한 연상의 파트너 앞에만 서면 제멋대로 오싹해졌다 뜨거워졌다 널을 뛰었으니.

기분이 좀 풀린 콜린스는 다시 살갑게 파리어 옆으로 달라붙었다. 그는 실랑이를 벌이느라 파리어가 내버려두었던 책의 표지를 슬쩍 들어올렸다. 단테의 『신곡』. 예상은 했지만 훨씬 더 고상하고 낭만적인 제목이 튀어나오는 바람에 콜린스는 깜짝 놀랐다.

“가끔은 왜 대위님이 군에 지원하셨는지 궁금해집니다.”

콜린스가 짓궂게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교육 받은 중산층이 많기로 유명한 RAF 내에서도 파리어의 취향은 특히나 평균적인 군인과는 거리가 먼 편이었다.

“그럼 너는 왜 공군에 지원했는데?”

“그야 하늘을 날고 싶었으니까요.”

“나도 마찬가지야.”

하긴 그나 파리어나 모두 비행가들의 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이다. 대서양을 횡단한 에어하트와 린드버그의 모험을 들으며 자랐고, 대전쟁에서 활약한 전설적인 에이스들의 영웅담을 읽으며 꿈을 키웠다. 콜린스의 고향집 다락에는 아직도 어린 시절 열정적으로 수집한 유명 파일럿들의 사진카드와 모형 비행기가 한 상자였다. 납득한 콜린스는 두 번째 주제로 질문을 돌렸다.

“그럼 특별히 독실하셔서?”

“아니. 지금 읽고 있는 부분은 지옥에 떨어진 연인 이야긴데.”

파리어가 씩 웃으며 말했다. 그는 책을 내려 콜린스에게 펼쳐보였다.

“같이 책을 읽다가 키스하게 되는 불멸의 연인에 관한 이야기지.”

곧 낮고 중후한 목소리가 그중 한 대목을 읽기 시작했다.

“‘단테가 파올로와 프란체스카를 만난 것은 지옥의 두 번째 단계 소용돌이 속에서였다. …… 라벤나 통치자의 딸인 프란체스카는 리미니 영주의 아들과 결혼했지만 영주의 또 다른 형제인 파올로와 사랑에 빠지고 만다. 파올로 역시 이미 결혼한 상태였다. 두 사람은 랜슬롯이 처음으로 기네비어 왕비를 포옹하는 대목을 읽으면서 서로를 더 이상 거부하지 못한다 ……’”

문장은 여인의 회고로 이어졌다.

“‘어느 날 우리는 랜슬롯의 이야기를 읽고 있었습니다. 사랑이 어떻게 그를 속박했는지, 어떻게 그 사랑에 빠진 미소가 연인에게 키스 받았는지를 읽을 때 그가 떨면서 내 떨리는 입에 키스했지요. 그날은 더 이상 읽지 않았어요.’”

“‘그들은 결혼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기에 분노한 프란체스카의 남편에게 살해당하고 지옥에 떨어져 평생 함께 그곳에 머물면서 그들을 타락하게 만든 부정한 키스를 끊임없이 되풀이해야 한다.’”

파리어를 따라 책을 읽던 콜린스는 말도 안 된다는 듯이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사랑하는 사람과 평생 키스해야 하는 벌이라니, 이게 저주라고요?”

그러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침묵에 이끌려 고개를 든 순간 파리어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오고 곧 따뜻한 숨결이 입술에 닿았다. 노크하듯 입 안으로 들어오는 혀는 데일 것처럼 뜨겁고 말캉했다. 그 불가항력인 중력에 이끌려, 콜린스는 상관의 품 안으로 쓰러졌다.

사랑이 키스를 불러왔는지 아니면 키스가 사랑을 불러왔는지. 세상이 뒤섞여 분간할 수 없었다. 펼쳐진 책장에서는 발가벗은 파올로와 프란체스카가 영원히 끝나지 않을 입맞춤을 나누고 있었다.

 

정사는 열정적이면서도 느릿하게 지나갔다. 낮 동안 비어버린 배럭, 그들만의 방에 틀어박혀 처음으로 몸을 겹치는 경험이 눈물 날 정도로 짜릿해서, 아직 그런 일에 면역이 덜한 콜린스는 파리어 밑에서 움직이는 내내 몽롱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기억나는 것은 허리 아래를 쳐올리는 내내 끊임없이 속삭여주던 부드러운 달램과 그를 따라 부끄러운 말을 내뱉을 뻔한 자신의 실수들뿐이었다. 늦봄의 열기 속에서 피어난 땀은 끈적거리지도 않고 포근해서 그 땀을 아교 삼아 살과 살이 바짝 달라붙을 것만 같았다. 기억나지 않는 어린 시절 어머니의 품에서 젖을 빨던 때보다도 훨씬 가깝게 달라붙은 파리어의 체온을 느끼면서, 콜린스는 영원히 그 후덥지근한 오후가 계속되기를 기도했다.

몇 시간이고 이어질 것 같던 행위를 끝내고 마침내 몸을 떼어냈을 때는 몸 위에 얇은 이불을 두르는 것조차 꺼려졌다. 살갗 위로 맞닿던 파리어의 열기를 뺏기고 싶지 않았다. 아무것도 덮지 않으려고 내빼는 콜린스 위에 체온이 식으면 안 된다며 끝내 이불을 덮어준 이는 파리어였다.

“그러다 감기 걸리지.”

정작 그렇게 말하면서 본인은 전라에 아무것도 두르지 않는다. 콜린스는 당장이라도 얇은 모시 이불을 벗어내고 그와 피부를 맞대고 싶은 욕심을 꾹 참았다. 대신 하얗고 비치는 이불로 고치처럼 몸을 감싼 다음 파리어의 옆구리 틈으로 파고들었다. 아이처럼 달라붙는 몸짓에도 파리어는 뒤로 피하지 않고 조용히 허리를 끌어안아주었다. 한 번도 자신을 내친 적 없는 그 팔 안에서 든든한 안정을 느낀다. 콜린스는 가만히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

“내 어디에 반했어요?”

철부지 십대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긴 했으나 저절로 움직이는 입을 멈추진 못했다. 비웃음을 살 거라고 생각한 것과 다르게 파리어는 한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조곤조곤 대답해주었다.

“노력하는 모습. 포기하지 않고 달라붙는 끈기. 무서워도 계속 걸어가는 용기.”

기대하지 못한 칭찬 세례에 콜린스의 얼굴이 붉어졌다. 어느 하나 미숙하고 어설픈 자기한테 붙이기에는 과한 칭찬들이었다. 차라리 파리어에게 훨씬 더 잘 어울리는 묘사 같았다.

그런데 끝난 줄 알았던 칭찬이 계속 이어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 뒤를 놓치지 않고 따라오는 발걸음도.”

그렇게 말한 파리어는 곧장 쑥스럽다는 듯이 웃었다. 그리고 멍하니 자기를 올려다보는 콜린스의 이마를 쓸어내리며 덧붙였다.

“참 이기적이지? 넌 나보다 훨씬 더 높이 날아오를 사람인데 꼭 잡아놓을 수 있는 것처럼 말하잖아.”

그리고 고개를 가로저으려는 콜린스를 부드러운 손길로 저지했다.

“하늘을 날고 싶어서 공군이 됐다고 했지? 그럼 날아. 끝까지 살아남아서 날아라. 꺾이지도 말고 바람에 휩쓸려가지도 말고서. 상처가 깊을 땐 잠시 앉아서 쉬었다가, 다 쉬고 나면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그렇게만 날아가면 돼.”

“나는 결국 살인자로 남지만 넌 그 업보를 넘어설 거다.”

그렇게 말하는 남자의 그늘이 너무 다정해 보여서, 콜린스는 마음에 묻은 말을 꺼낼 수 없었다. 무슨 소리에요, 파리어. 당신은 내 영웅이고 내가 바라는 모든 모습들인데. 당신이 있어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는데.

하늘에 닿을 만큼 높이, 독수리보다 더 높이 날아오를 수 있는 것도 모두 날개 아래 부는 당신이라는 바람덕분이라는 것을, 그땐 말하지 못했다.

 





철수 작전이 끝나고 본토 항공전이 시작될 때 즈음에는 모든 것이 뒤바뀌어 있었다. 파리어는 돌아오지 못했고 남은 영광은 살아남은 자들의 몫으로 돌아갔다. 켄필드도 파리어도 없이 홀로 남은 포티스 막내에게는 공군 십자 훈장이 수여됐다. 그리고 막내는 더 이상 막내가 아니게 되었다. 국왕의 궁전에서 훈장을 하사받고 비긴 힐로 돌아와 최전방 편대의 어엿한 퍼스트 윙으로 진급했을 때, 콜린스는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공허한 마음은 파리어와 나눠 쓰던 배럭으로 돌아왔을 때 절정에 달했다. 빈 방에 혼자 들어가기가 싫어서 몇 번을 망설이다 겨우 문고리를 돌렸다. 그런데 비어있어야 할 파리어의 자리에선 다른 사람이 서성이고 있었다.

“누구?”

날카로운 질문이 튀어나갔다. 파리어의 관물대와 파리어의 침대 근처에 다른 사람이 기웃거리고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신경이 곤두섰다. 화난 걸음이 쿵쿵 바닥을 울렸다. 낯선 침입자는 그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 몸을 돌렸다.

“아, 저, 제프리 캠벨입니다! 오늘 포티스 팀에 배정받았습니다!”

신참이 급하게 경례를 붙이며 관등성명을 댔다. 군기가 바짝 든 그 모습을 본 순간 콜린스는 심장이 바닥으로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잊고 있었던 것이다. 켄필드의 빈 자리가 다른 대장으로 채워졌듯이 파리어가 떠난 자리도 다른 신병으로 채워질 거라는 사실을. 그가 쓰던 침대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는 것을 보고서야 콜린스는 비로소 현실을 체감했다.

“……”

콜린스가 반응하지 않자 신참은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자, 잘 부탁드립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콜린스 중위님!”

신참은 아직 스물도 안 돼보였다. 어린 신병은 직속상관이 반가이 맞아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콜린스는 기대와 긴장으로 가득한 그 얼굴을 무시한 채 발걸음을 돌렸다. 쾅 소리가 나도록 문을 닫고 나오는 내내 한 가지 생각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네가 뭔데 파리어 침대에 있어?’

설명할 수 없는 원망이 차올랐다.

 

새로 온 막내는 콜린스와 비슷한 점이 많았다. 밝은 금발, 성실하고 순해 보이는 인상,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자력으로 공군에 입대한 것 등 유사한 점은 셀 수 없이 많았다. 제프가 스코틀랜드 인버네스 출신이라는 것을 전해 들었을 때는 불쾌감이 들 정도였다. 언제나 단정하게 정복을 차려입고, 선배 조종사들이 던져주는 팁을 성경처럼 받아 적고, 상관에게나 사병들에게나 싹싹하게 대하는 제프. 소싯적 자신을 닮은 제프. 예의바른 제프가 점점 비긴 힐의 사람들 사이에서 인정을 받을수록 콜린스의 심기도 따라서 불편해져갔다. 상식대로라면 윙메이트인 두 사람이 가장 친해야 하건만 콜린스는 도무지 제프에게 정이 붙지 않았다.

제프가 비긴 힐에 짐을 푼 지 일 주일 째 되던 날, 그는 콜린스와 똑같은 스카프를 목에 두르고 나타났다. 가운데를 부풀려서 넥타이처럼 모양을 낸 것까지 콜린스의 방식─그 전에는 파리어의 방식이었던─과 완전히 똑같았다. 콜린스는 참지 못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이렇게 하면 고개를 돌려도 목이 덜 쓸린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정식으로 RAF 배지를 받기도 했고요.”

제프가 쑥스러운 듯 웃으며 말했다. 고쳐 쓴 모자 위에는 정말로 금빛 실로 수놓은 독수리가 빛나고 있었다. 자대 배치 후 최종 실전 훈련까지 모두 완료했다는 증거였다. 그 사실이 못내 자랑스러운지 제프는 가슴을 쫙 피며 활짝 웃었다. 콜린스의 대답을 기다리는 모습에 선임이 칭찬해주기를 기대하는 빛이 한껏 어려 있었다. 만약 파리어였더라면 털털하게 웃으며 같이 호응해 줬을 테다. 그렇게 생각하자 콜린스는 오히려 기분이 더 나빠졌다. 결국 매몰찬 대답이 튀어나가고 말았다.

“멋 낼 궁리할 시간이 있으면 가서 계기판 조작 하나라도 더 외워.”

기대에 잔뜩 부풀었던 제프는 냉정히 돌아서는 선임의 태도에 당황해서 주춤거렸다. 콜린스는 관심 한 번 주지 않고 등을 돌렸다. 기가 꺾여서 축 처지는 그 모습을 보니까 그나마 조금 속이 풀렸다.

티가 날 만큼 냉정한 콜린스의 태도를 다른 동료들이 눈치 채지 못할 리 없었다. 결국 보다 못한 편대장이 나섰다. 켄필드의 뒤를 이어서 새로 포티스 팀을 이끌게 된 소령은 평소 얌전하고 성실하기로 유명한 콜린스가 왜 막내한테만 그토록 매몰차게 구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어쨌든 두 사람의 합이 어떤지에 따라 팀의 명운이 갈리기 때문에 일단 직속 부하부터 훈계하고 볼 수밖에 없었다. 셋이 처음으로 함께 출격하기 전날 밤, 새 리더는 콜린스를 불러 질책했다.

“너 왜 그래? 캠벨하고 무슨 문제라도 있어? 다른 때는 싹싹한 녀석이 왜 걔만 보면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야?”

사실 그 자체인 편대장의 지적에 콜린스는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최근 점점 냉랭해지는 제프를 향한 태도는 콜린스 자신이 더 잘 느끼고 있었다. 면목 없이 고개를 숙이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편대장은 수치심으로 벌개진 콜린스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네 파트너잖아. 네가 안 챙기면 누가 챙겨.”

“……시정하겠습니다.”

“내일 걔 첫 출전인 거 알지. 잘 해.”

재차 당부하는 편대장에게 솔직히 털어놓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왜 그 녀석만 보면 원인 모를 분노가 치솟는지, 아무리 마음을 다잡아도 왜 자꾸 밉상으로 보이는지, 말할 수 있을 리 없다. 그 녀석과 ‘파트너’라는 이름으로 엮이는 것 자체가 싫었다. ‘왜 네가 파리어 침대에 누워? 왜 네가 파리어의 무전 신호를 사용해?’ 선배답게, 연장자답게 자기가 잘 이끌어야 한다고 스스로 타일러 봐도 못된 심보는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파리어라면 절대로 이런 치졸한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에게 해주었던 것처럼 인내심 있게 기다려주겠지.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한층 더 비참해진 콜린스는 방으로 돌아와서도 제프한테는 눈길 한 번 마주치지 않은 채 그대로 잠이 들었다. 자기 자신을 포함해서 세상 모두가 원망스러웠다.

그런 자괴감 때문에 다음 날 아침 대기실에서 제프와 마주쳤을 때도 콜린스는 못 본 척 시선을 피했다. 그런 콜린스에게 제프가 뭔가 전할 말이 있는 것처럼 입술을 달싹였지만, 수심에 젖은 콜린스의 표정 탓에 그만 단념해야 했다. 그렇게 제대로 된 사과 한 번 하지 못하고 하늘로 올랐다. 비겁한 자기의 선택이 몇 시간 후 얼마나 큰 후회가 되어 돌아올지, 그때 콜린스는 상상하지 못했다.

 

*

 

신입 조종사가 처한 환경은 열악하다. 전투 경력이 없는 신입에게는 보통 가장 느리고, 낡고, 수리를 많이 받은 고물 비행기가 지급된다. 정비팀도 실력과 의욕이 가장 낮은 팀이 배정되고 편대 비행 시의 위치도 편대의 최후미, 즉 적기가 가장 공격하기 쉬운 위치에 배정하는 것이 관행이다. 첫 전투에서 사망할 확률이 절반을 넘는 신입에게 좋은 자원을 배분할 수는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최초 다섯 번의 출격을 무사히 견뎌내야 비로소 제대로 정비된 전투기와 정비팀을 배정받을 수 있다. 따라서 무자비한 학습곡선을 견뎌내고 이제 열 번째 출격을 맞이하는 콜린스에게는 최고 수준의 기체와 좋은 위치가 배정됐다. 반대로 제프에게는 V자 대형의 꼬리에서 따라오라는 지시가 떨어졌고, 배정된 기체도 몇 번이나 중고 부품들로 때운 자국이 즐비한 하급 물건이었다.

바보 같은 신참은 자기가 처한 불공평한 현실도 모르고서 탑승을 준비하느라 온 신경이 쏠려 있었다. 콜린스는 그 긴장한 티가 역력한 뒷모습을 일부러 무시하고 지나갔다. 긴장하지 말라는 위로도, 그밖에 어떤 격려의 말도 건네지 않았다. 어깨라도 토닥여줄까 하는 마음이 잠깐 머릿속을 스쳤지만 그것도 금방 사라졌다. 어떻게 해도 제프와 자기 사이에 있는 불편한 벽을 무너뜨릴 수 없었다. 단지 자기를 닮은 애송이가 싫어서? 아니면……

‘그만.’

콜린스는 소용돌이처럼 몰아치려는 생각에 제동을 걸었다. 전투를 앞둔 상황에서 생각해봤자 좋을 것 하나 없는 고민이었다. 그는 머릿속 한 구석을 벌레처럼 갉아먹는 무서운 의혹을 애써 무시하고 엔진에 시동을 걸었다.

“2411기 이륙.”

프로펠러 돌아가는 소리가 나고, 활주가 시작됐다. 철괴는 곧 짐승처럼 가르릉 대는 소리를 내며 공중 위로 떠올랐다.

 

해안을 벗어난 지 십 분도 채 지나지 않아 맞닥뜨린 광경에 콜린스는 숨을 멈췄다. 거대한 폭격기 수십 대와 그들을 엄호하는 전투기 백 대 이상이 전방 하늘을 까맣게 물들이고 있었다. 수평선을 덮을 듯 넓고 두텁게 퍼진 대열이 갈퀴처럼 아군을 덮칠 준비를 했다. 염탐한 첩보를 통해 오늘 큰 공격이 있을 거라고 전해 듣긴 했지만 이렇게 대규모로 몰려들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지금쯤 레이더 본부의 상황판이 어떤 꼴일지는 상상도 가지 않았다. 점점이 몰려든 검은 항공기들이 마치 파리 떼 같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여긴 포티스 리더. 최대한 높이 올라가서 고지를 확보한다. 폭격기가 우선이다. 폭격기부터 마크해.”

“포티스 원, 라져.”

“포티스 투, 라져.”

무선 너머로 들려오는 2호기의 목소리가 당긴 실처럼 팽팽했다. 콜린스는 다만 편대장의 지시에 몰두했다.

“절대로 전투기에 정신 팔리지 마. 폭격기 격추가 최우선이다.”

편대장이 재차 당부했다. 잠시 후, 분산을 알리는 수신호가 떨어졌고 포티스 팀을 포함한 열 대의 기체는 다섯 갈래로 갈라져 각자 흩어졌다. 콜린스는 옆에 따라붙는 2호기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망설이다가 결국 짧게 한 마디를 던졌다.

“2호기, 내 뒤에 붙어서 엄호해.”

“알겠습니다.”

제프의 대답이 들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시야 가장자리에 검은 점이 나타났다. 먼지처럼 작은 그 점을 포착한 콜린스는 본능적으로 고도를 올렸다.

“04시 방향 적기 출현. Bf 109…… 위에서 영점 확보하겠다.”

그는 대답을 기다리는 대신 조종간을 몸 쪽으로 세게 당겼다. 기체가 구름을 뚫고 높이 치솟았다. 곧이어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시작됐다. 적기가 스핏파이어가 따라 붙은 것을 알아채고서 구불구불한 곡선으로 진로를 바꿨고 그 뒤를 콜린스의 기체가 바짝 따라붙었다. 일단 후상방을 차지한 이상 스핏파이어 쪽이 유리했다. 전투기끼리의 접전에서는 먼저 꼬리를 잡는 쪽에게로 승기가 기운다. 콜린스는 손 안에 들어온 기회를 놔줄 생각 따윈 없었다. 그는 아드레날린이 치솟는 것을 느끼며 무리해서 속력을 높였다. 그때까지의 혼란스럽던 마음을 떨쳐버리기라도 하듯, 더욱 더 눈앞의 적기에 온 신경을 쏟아부었다. 그 탓에 전투기에 정신 뺏기지 말라던 당부를 잊고 만 것이 실수였다.

도망가던 적기가 한 바퀴 공중제비를 돌더니 정반대로 방향을 돌렸다. 두 전투기는 이제 서로 마주보는 형국이 되었다. 콜린스는 숨을 들이켰다. 적 조종사는 그가 덫에 걸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스핏파이어와 머리를 마주보게 되자 비로소 속력을 높여 앞으로 달려든 것이다. 충돌하기 싫다면 그만 포기하라는 경고였다.

그 순간 콜린스는 눈앞에 놓인 두 가지 선택지 중에서 좀 더 대담한 쪽을 택했다. 그는 방향을 돌리는 대신 계속 속도를 유지한 채로 적기를 향해 달려들었다. 600m, 500m, 400m. 두 전투기는 빠른 속도로 거리를 좁히며 충돌할 것처럼 서로를 향해 다가갔다. 콜린스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서 계속 속도를 유지했다. 300, 250, 220…… 200m.

‘타다닥!’

단 200m를 남긴 지점에서 양측이 거의 동시에 총탄을 내뿜었다. 콜린스는 반사적으로 조종간을 앞으로 밀었다. 다음 순간 스핏파이어가 수직으로 치솟았고, 109는 몸통에서 연기를 내며 아래로 추락했다. 명중이었다. 콜린스는 방금 전까지 자기를 향해 돌진하던 적기가 엔진에 불이 붙은 채 바다로 떨어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살아남았다.’ 한계까지 조여들었던 심장이 펄떡거렸다.

계속 참고 있던 숨을 내뱉으니 비로소 다시 뇌에 산소가 돌기 시작했다. 콜린스는 작은 승리감에 취해서 무전을 쳤다.

“여긴 포티스 1호. 방금 한 대 격추했다. 109기 추락 확인.”

그러나 통신 건너편에서는 아무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콜린스는 다시 한 번 재촉했다.

“포티스 2호, 목표 재설정하고 다시 엄호한다.”

침묵은 계속했다. 콜린스의 목소리가 점점 다급해졌다.

“포티스 2호? 대답해. 어서!”

이어지는 정적. 프로펠러와 엔진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하늘에서 콜린스는 한 달 전의 상황이 되풀이되는 것을 느꼈다. 응답이 없는 무전, 보이지 않는 아군기. 돌아오지 않는 대답. 켄필드. 파리어. 하늘 위를 달리는 수많은 아군기 중에 포티스 2호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뒤늦게 자기가 저지른 실수를 깨달았다. 호승심에 취해 앞뒤 가리지 않고 적기를 향해 돌진하다가 그만 2호기를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1호기의 무리한 횡전과 공중제비를 따라오지 못한 2호기는 낙오됐다. 하늘 위에 홀로 남았음을 깨달은 콜린스는 눈앞이 깜깜해졌다.

 

1940년 8월 15일 오전 11시 도버 해안에 나타난 적기의 수는 100대가 넘었다. 12시에는 70대 이상이 더 건너왔다. 삼십 분 후에는 200대 이상이, 오후 늦게는 각각 300대와 400대, 초저녁에는 700대가…… 이날 하루에만 약 천 대의 독일 항공기들이 잉글랜드 남부와 북부에서 전투를 벌였다. 그 장대한 행렬을 보던 지상의 관측 대원들과 구경꾼들은 하늘에서 벌어지는 진귀한 쇼를 넋 놓고 바라봤다. 해가 넘어가고 어둠 때문에 더 이상 공격을 지속할 수 없게 되자, 그때서야 몰려들었던 독일 항공기들은 다시 바다 너머로 돌아갔다. 그날 총 세 번의 출격을 감내해야 했던 콜린스도 저녁이 내려앉은 뒤에야 드디어 조종석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연이은 전투에 몸이 지칠 대로 지쳤지만, 지상에 내려온 콜린스는 비틀거리는 다리를 추스를 새도 없이 활주로를 뛰었다.

“포티스 2호! 포티스 2호 귀환했나?”

대기 중이던 정비병들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프를 담당한 병사가 빈 격납고를 가리켰다. ‘아직 포기하긴 일러.’ 콜린스는 애써 불길한 마음을 다잡으며 대기실로 뛰어갔다. 그러나 그날의 비행 명단을 적은 칠판에서 제프의 이름은 공란으로 남아 있었다. 이름이 지워지진 않았지만 귀환에 체크되어있지도 않았다. 확인 불가. 그것이 뒤늦게 돌아온 리더가 전해준 보고였다.

저녁 시간이 돌아오고 조종사 식당의 빈 의자가 하나씩 확인되기 시작했다. 담당 항공기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정비반원들의 수도 확인됐다. 그중 어디에서도 제프의 이름은 확인할 수 없었다.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 하나 둘씩 격추 혹은 실종으로 분류되는 것을 지켜보는 내내 콜린스의 심장은 어느 때보다도 깊이 내려앉았다. 그때까지도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서 외면해보려 했던 현실이 기어이 파도처럼 몰려왔다.

콜린스는 그때서야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실감했다. 철없는 원망과 방향 잃은 분노에 사로잡혀 제프를 두고 온 것이다. 승리와 복수에 눈이 멀어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그를 사지 한 가운데 버려두고 왔다. 가을이 지나면 열아홉이 된다던 아이는 영영 열아홉 번째 생일을 맞지 못할지도 모른다. 죄책감이 해일처럼 가슴을 덮쳤다.

비로소 깨달았다. 결코 제프가 자기와 너무 닮아서 싫어했던 것이 아니다. 다만 그 아이가 파리어처럼 브루넷이 아니라서, 파리어의 시가 향이 나지 않아서, 파리어처럼 흰색 롤오버와 가죽 잠바를 입지 않아서. 파리어의 자리를 대신 채웠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 더 이상 자신의 윙메이트는 파리어가 아니라는 현실을 인정할 수 없어서. 방향 잃은 분노를 대신 쏟아 부은 것뿐이다. 그리고 그 대가로 자신은 새파랗게 어린 목숨 하나를 어둠으로 몰아넣었고 파리어에게 다짐했던 약속도, 긍지도 깨버리고 말았다. 파리어가 돌아온다 한들 더 이상 볼 면목이 남지 않았다. 두 손으로 이뤄낸 승리도 무고한 제프의 목숨을 바쳐서 얻은 것이라고 생각하니 수치심이 차올랐다. 시체처럼 파랗게 질린 콜린스의 안색 앞에서 어느 누구도 차마 말을 붙일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한참을 활주로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때 먼 곳에서부터 얼핏 익숙한 엔진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작은 바람처럼 시작된 그 소리는 잠시 후 작게 덜덜거리는 소리로 변하더니, 이내 삐거덕거리며 바닥을 끌었다. 콜린스는 홀린 듯이 고개를 들었다가 믿기지 않는 광경을 목격했다. 붉은 기운 하나 남지 않은 황혼을 배경으로 만신창이가 된 스핏파이어 한 대가 착륙을 시도하고 있었다. 여기저기 생채기가 난 비행기는 노파처럼 골골대며 땅 위로 내려앉았다. 아니, 착륙하기보단 거의 넘어지듯이 풀썩 주저앉았다. 여기저기 생채기가 난 기체의 배에는 익숙한 번호가 도색돼 있었다.

정신을 차린 정비반원들이 먼저 달려가 조종석에서 인영을 끄집어냈다. 한 발 늦게 뒤따라간 콜린스는 정비반원들한테 부축을 받으며 내리는 조종사를 보았다. 조종사는 몹시 어지러운 듯 비틀거리며 발을 헛디뎠다. 얼음처럼 굳어있던 콜린스의 다리가 저절로 움직였다. 그는 쓰러지는 제프를 받아들며 호통 쳤다.

“너 대체 어디 있었어! 무전을 쳐도 대답도 없고 내가, 내가 얼마나……!”

제대로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다급한 숨소리와 갈라진 목소리만이 오랫동안 가슴 졸인 흔적을 전했다. 죄책감과 수치심, 염려와 안도가 요동치는 푸른 눈동자와 마주치자 제프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다. 어린 조종사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더듬더듬 입을 뗐다.

“적기가 따라붙어서 따돌렸는데 길을…… 길을 잃었습니다. 정신 차려보니까 주위에 아무도 없고 구름밖에 없어서… 그래서……”

횡설수설 말하는 모습이 긴장한 티가 역력했다. 반나절 동안 실종됐다가 겨우 살아 돌아온 주제에 상관의 미움을 샀을까봐 염려하고 있는 것이다. 그 모습을 본 콜린스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뒤를 따라오는지 지켜보지 않은 자신의 잘못이다. 적기가 따라 붙으면 직접 교전하는 대신 자기한테 엄호를 부탁하라고 제대로 일러두지 않은 탓이다. 변명할 염치조차 없던 나머지, 콜린스는 위생병이 제프의 다친 곳을 치료하는 동안 멍하니 지켜보기만 했다.

다행히 부상은 경상이었다. 현장에서 처치를 마친 위생병이 그만 귀가해도 좋다는 허가를 내렸다. 나머지는 직속 선임인 콜린스의 몫이었다. 그는 발목을 삐끗한 제프를 배려해서 평소보다 훨씬 느린 걸음으로 걸었다. 차마 시선을 마주칠 수 없었다.

어둠 속을 걷는 동안 콜린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먼저 긴 침묵을 깨뜨린 사람은 제프였다.

“콜린스 중위님, 저 많이 미숙한 거 압니다. 파리어 대위님보다 한참 못한 것도 압니다. 그래도 노력하겠습니다. 더 많이 노력하고 더 많이 배울 테니까, 믿어주세요.”

갓 어린 티를 벗어난 목소리가 흔들리며 말했다. 조용히 그 고백을 듣던 콜린스는 결국 참지 못하고 홱 뒤돌아섰다. 그는 설명할 수 없는 충동에 이끌려 제프의 목덜미를 확인했다. 자기를 따라서 둥글게 맸던 스카프가 격전 속에 흐트러져 있었다. 그는 흐트러진 스카프를 다시 제대로 묶어주며 말했다.

“하늘에 올라가면 내 뒤만 바짝 따라와.”

무뚝뚝한 말투 끝에서 물기 어린 후회가 묻어났다.

“누굴 좇으러 갈 거면 나한테 망 봐달라고 먼저 부탁해.”

당부는 계속 이어졌다.

삼십 초 이상은 절대로 수평 직선 비행하지 마. 적의 흰자위가 보일 때까지 기다리고, 사격은 2초 이상 하지 마. 총탄이 떨어져서 못 돌아오면 안 되니까. 그리고 내가 무전 치면 절대로 잊지 말고 대답해.

“무슨 일이 있어도 꼭, 꼭 대답해야 해.”
한참 전에 가르쳐줘야 했던 것들을 뒤늦게 가르친다. 방향 잃은 원망에 사로잡혀 미처 알려주지 못한 것들을, 옛날 그때에 파리어로부터 배운 것들을 이제야 전해준다. 결국 파리어는 모두 알고 있었으리라. 혼자 남겨진 자신이 철없는 슬픔에 눈이 멀어 새 동료를 제대로 챙기지 못할 거란 걸. 업보를 남기지 말라던 말은 그런 뜻이었다. 지나간 과거에 묶여 주저앉는 반푼이가 되진 말라고. 새로운 사람들과 함께 다시 날아오르라고. 그렇게 높이 올라가 구름 너머의 세상을 보라고. ‘언젠가 너는 나를 떠나 멀리 날아갈 것’이라던 그 말의 의미를, 이제야 이해한다.

바람이었던 그를 떠나보내고, 이제는 자신이 다른 새의 날개 밑에 부는 바람이 될 차례이다. 그것이 언젠가 돌아올 파리어를 기다리며 걸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홀로 남은 독수리는 생각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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