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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어콜린스] 콩깍지와 편견 A

국민성 개그.



*사투리 알못, 짧음



1. 플러팅

 

천사가 후임으로 들어왔다. 처음 신고식에서 만났을 때도 같은 생각을 하긴 했지만, 나른한 조명을 받아서 은은하게 빛나는 콜린스는 하늘에서 가브리엘이 강림했다고 해도 믿길 것 같았다. 그것이 신참들 회식을 감시하러 술집을 들렀다가 콜린스와 마주친 파리어의 감상이었다. 술기운으로 발긋하게 물든 두 뺨은 무르익은 천도복숭아 같다. 서글서글하고 붙임성 좋게 반가이 맞아주는 몸가짐은 또 얼마나 기특한지. 배치 받은 지 일주일 만에 상하 가릴 것 없이 부대원들을 두루 사귄 붙임성의 소유자답다. 아랫사람에겐 너그럽고 윗사람에겐 깍듯한 태도를 볼 때마다 파리어는 이런 사람이 인싸라는 것이구나, 감탄했다. 여러모로 그와는 다른 점이 많은 아이였다. 지금도 붙임성 좋게 파리어 몫의 잔까지 챙기질 않던가.

“안녕하심니까, 대이님! 대이님도 같이 한 잔 하심더!”

사투리도 어찌나 귀여운지. 모음을 하나씩 빠트리고 말하는 습관은 고향 사투리일 테지만, 덕분에 한 마디 한 마디에서 애교가 묻어나온다. ‘이’에 강박을 넣어서 자기를 부르는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파리어는 심장을 폭격당하는 것 같다. 불시에 짝사랑하는 상대한테서 눈웃음 폭격을 받은 대위는 행복회로를 돌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사근사근 인사를 하다니. 원래 신입들은 상관이랑 술자리를 가지는 걸 부담스러워 하지 않나? 역시 나랑 친해지고 싶어서? 과열로 녹기 시작한 파리어의 뇌가 빠른 결론을 도출해냈다.

대위는 입 근육이 흐물흐물 녹는 것을 주체할 수 없었다. 군중 사이로 우뚝 솟은 노란 머리통으로 자꾸만 시선이 고정된다. 어쩜 이렇게 훤칠할까. 기럭지 한 번 시원해서 좋네. 왕 크니까 왕 귀엽다. 좋은 건 크게 봐야지, 응.

아름다운 명화를 보고 감탄하듯, 저절로 가슴이 벅차오른다. 그와 단둘이 마주보고 있다는 생각에 한껏 긴장하고 만 그는 엉겁결에 속내를 토해내고 말았다.

“군복 멋지다.”

“예?”

콜린스가 커다란 눈을 꿈뻑거리며 물었다. 복장 지적을 당하는 거라고 생각했는지 널따란 어깨가 바짝 긴장하는 것이 보였다. 당황한 파리어가 서둘러 수습했다.

“내 말은, 각이 아주 잘 잡혔네. 칼 같이 잡혔어.”

“?”

수습하려고 했다.

그러나 아스팔트 위의 껌딱지 마냥 화끈하게 녹아버린 그의 뇌는 필터 하나 거치지 않고 속마음을 떠오르는 대로 뱉어내고 있었다.

“구두가 아주 빤짝빤짝해. 아주 잘 닦나봐.”

“???”

그 뒤로도 파란색이 잘 받네(공동구매한 셔츠), 스카프가 세련됐네(할머니가 빌려준 땡땡이 무늬), 칼라에 자국이 멋지네(안주 먹다 흘림) 같은 실없는 소리가 연이어 터졌다. 어색한 분위기가 이어지자 당황한 파리어의 입에서는 급기야 아무말이 흘러나왔다.
“키 큰 사람이 입으니까 핏이 다르네, 달라. 아, 그래, 문짝만하니 시원하고 보기 좋아, 소위.”

이 모든 횡설수설을 파리어가 너무나 예의바르고 담담한 표정과 함께 지껄였기 때문에, 콜린스는 지금 상관한테 칭찬받는 건지 비꼼 당하는 건지 몹시 헷갈려 했다. 어린 소위는 찜찜한 표정으로 파리어의 말을 따라했다.

“문짝”

파리어는 굳기 시작한 콜린스의 낯빛을 보고 나서야 뒤늦게 표현을 바꿨다.

“아니아니, 문짝이 아니라, 매미 옆의 고목나무……헙”

“고목나무”

비유가 틀렸다. 순한 강아지 같던 콜린스의 얼굴이 야차처럼 변하고, 대위는 합죽이가 되었다. ‘도전: 예쁜 후임과 친해지기’를 말아먹은 상관은 땀만 뻘뻘 흘렸다. 분위기는 걷잡을 수 없이 싸늘해졌다. 파리어는 도망치듯 황급히 작별인사를 둘러댔다.

“큼, 나는 이만, 이만 가보지. 재밌게 놀고, 음, 너무 늦지 않게 일찍 들어와.”

일찍 들어오긴 뭘 와. 니가 얘 보호자냐? 형이야? 이렇게 오지랖 넓고 바보 같은 소리를 하다니. 파리어는 자신이 이토록 근본 없는 횡설수설을 지껄이고 있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민망해서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그는 본능적으로 백스텝을 밟으며 뒤로 사라졌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이 너무나 믿음직스럽고 과묵한 파리어의 얼굴로 이뤄졌기 때문에 혼자 남은 아기장교는 아무것도 따질 수 없었다.

이것이 바로 파리어가 잉글랜드 출신이라는 증거다. 내성적이고 과묵하고 말주변 없는 전형적인 잉글랜드 남자. 감정을 말로 표현하는 것에 극도로 취약한 사람들. ‘데이트’라거나 ‘관계’ 같은 단어에 경기를 일으키는 것은 당연하고, 어쩌다 관심 있는 사람한테 칭찬 한 마디 해보려고 해도 어색해하다가 망하기 일쑤. 기껏 큰맘 먹고 플러팅을 걸어 봐도 뻣뻣하고 조잡한 단어 선택 때문에 실패하고 만다. 평소에는 그런 과묵함이 남자다운 거라며 내심 자랑스럽게 여겼는데, 정작 농담의 주인공이 되고 보니까 절대 으쓱해 할 일이 아닌 것이다.

설상가상 콜린스는 곱상한 외모와는 대조적으로 매사에 직설적인 편이다. 방금 전 실패한 칭찬도 철없는 상관의 놀림으로 받아들일 공산이 컸다. 썸은커녕 단단히 밉상을 샀겠지. 고개 숙인 잉글랜드 남자는 발걸음도 우울하게 길을 걸어갔다. 대책이 필요했다.

 

2. 데이트 신청

 

다행히 영국에는 티타임이라는 좋은 구실이 있다. 파리어는 다음 날 하루 종일 신병들 주위를 서성이며 콜린스에게 말을 걸 기회를 엿보았다.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을 때, 그는 처음 출병하던 때보다도 더 큰 용기를 끌어 모아 외쳤다.

“소위, 혹시 내일 낮에 시간 되나? 괜찮으면 차 한 잔 하지.”

“차 말임니까”

“응, 시내에 좋은 티룸이……”

“제가 내일은 하루 종일 훈련이라서예.”

차갑다 차가워. 고사 한 번 안 하고 재깍재깍 대답하는 태도가 군인답다고 해야 할지, 냉정하다고 해야 할지. 여지를 주지 않는 철벽에 파리어는 더 이상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다. 사실 잘 노려보면 기회야 또 있을 테지만, 두 번이나 도전했다 실패했는데 또 들이댈 자신이 없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속담은 사회성 떨어지는 잉글랜드 남자에겐 너무 거리가 먼 얘기였다.

그러나 천사가 괜히 천사는 아닌지, 곧 구원의 손길이 내려왔다. 차가운 애기 장교가 드물게 시무룩한 대위의 안색을 빤히 바라보다가 툭 말을 던진 것이다.

“그러지 말고 오늘 저녁은 어떠심꺼. 끝나고 맥주 한 잔 하실라예?”

“!!! 맥주…… 응, 그러지. 맥주가 좋지! 가자고. 이따 데리러 갈게.”

차에서 맥주로 급상승. 첫 데이트부터 술이라니! 대범하다고 해야 할지, 둔하다고 해야 할지. 어쨌든 황금 같은 기회인 건 틀림없었다. 어쩌면, 만에 하나 어쩌면, 관계가 빠르게 진전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아직 여리고(팔척장신) 가녀린(체력장 1등) 후임이 처음 맛보는 군부대의 독한 알콜로 힘들어 하면 여유롭게 부축해주면서 연상의 멋짐을 보여준다. 그러다가 분위기가 잘 풀리면 비틀거리는 애기 장교를 토닥여도 주고, 토닥이다가 손도 좀 잡고 어깨도 좀 안고…. 개떡 같이 플러팅을 해도 찰떡 같이 복이 굴러 들어오는 행운의 대위님은 두근두근 행복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영국인 대위가 미처 고려하지 못한 한 가지는 소위가 스코틀랜드인이라는 사실이었다. 장교들이 마을 아가씨들이랑 데이트 할 때 자주 찾는 펍으로 콜린스를 안내했을 때부터 젊은 소위는 뭔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아기자기한 술집 내부를 구경했다. 과일향이 첨가된 부드러운 에일을 맛보았을 때는 찜찜한 표정이 더해졌다. 소위는 단 세 모금에 파인트를 끝내 버리고서 ‘탁’ 잔을 내려놨다.

“이거 너무 묽은데예. 사장님, 이거 설탕물 탄 거 아니지예? 소다처럼 쭉쭉 넘어가네예.”

일부러 애교를 섞어 장난스럽게 물어보니 사장님도 기분 나빠하기보다는 사람 좋게 웃었다.

“좀 달지? 한 잔 더 드릴까?”

“아 진짜요. 근데 날씨가 하도 더워서 쪼꼼 시원한 게 좋을 것 같아예. 혹시 스카치는 업슴니꺼?”

“몰트는 있는데.”

“그걸로 주이소.”

그러더니 그 자리에서 드라이로 세 잔을 깨끗이 비웠다.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빠른 속도로 위스키를 흡입하는 소위를 보고서 파리어가 퍼뜩 놀랐다. 그러나 복숭아 담금주가 될 거라고 염려하던 그를 비웃기라도 하듯, 콜린스 앞의 빈 잔은 점차 늘어만 갔다. 혼자만 마시니까 뻘쭘했는지 뒤늦게 파리어 앞으로 살짝 잔을 밀어주며 웃기도 했다.

“대이님 멀 보고만 계심꺼! 같이 하셔야지예. 자, 대이님도 짠!”

살포시 웃는 그 얼굴에 홀린 게 실수였다. 조금 정신을 차렸을 땐 콜린스의 두 팔에 쓰러지듯이 기대서 반쯤 강제로 옮겨지고 있는 중이었다. 두께는 한 뼘 얇지만 그만큼 위로 한 뼘 더 솟은 콜린스는 생각보다 거뜬히 파리어를 부축했다. 대위는 그 넓고 듬직한 가슴팍으로 쓰러질 듯 안긴 채, 나오는 대로 주절댔다.

“소위가, 우리 소위가, 힘이, 끄윽, 힘이 세네!”

“그럼 군인이 힘이 세지 비실거리겠슴꺼.”

“튼튼해서 보기 좋다! 끅!”

딸꾹질을 하며 큰아버지 같은 칭찬을 던지는 파리어를 콜린스가 가만히 내려다보다 말고 한숨을 폭 쉬었다.

“하이고, 우리 대이님 알콜쓰레기시네, 알콜쓰레기. 술이 참말 약하시구만예.”

“그러치, 끄윽, 그러치 않아, 소위. 내가 소위 바래다주려고 오늘 자제를, 끅”

“허튼소리 마시고 두 발로 서이소. 쓰러져도 방에 가서 쓰러져야제.”

그날 밤 자꾸만 발이 끌리는 대위를 데려다가 침대에 눕히고 이불까지 꼭 덮여서 재운 사람은 콜린스였다. 소위는 삼촌뻘 되는 상관의 곯아떨어진 얼굴을 한참 내려다보았다.

“이래가지고는 혼자 술자리도 못 가시겠어야.”

하는 수 없지 모. 하냥 누가 데리꼬 살아야것네.

한숨처럼 흐른 그 푸념을, 달콤한 꿈에 취해있던 대위는 듣지 못했다.

다음 날 점심, 그때까지도 숙취가 덜 깬 파리어가 끌려간 곳은 인근 보양식 가게였다. 닭 한 마리를 통째로 고아다가 뜨끈뜨끈하게 차려 낸 상을 파리어가 얼떨떨하게 내려다봤다.

“소위, 이건……”

“어제 보니까 대이님 너무 기력이 없으신 것 같슴더. 날도 더운데 잘 먹고 힘내셔야지예.”

어깨도 울끈불끈, 활기차게 힘을 불어넣는 후임의 행동을 보고 파리어는 당황했다. 동시에 어제 필름이 끊긴 동안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겁이 나기 시작했다. 설마 부끄러운 말을 내뱉었다던가, 고백을 했다든지 그런?

“크흠, 콜린스 혹시 내가 어제 무슨 실수라도……?”

“? 그런 거 없었는데예. 확 취하셔가꼬 제가 모셔다드리긴 했지예.”

“으응… 그럼 다행이고.”

다행인 한편, 가슴 한 구석에서 어쩐지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차라리 술기운을 핑계로 용기있게 고백이라도 했더라면 억울하진 않을 텐데. 술에 취해서 추태만 보이고 정작 본전도 못 찾은 것 같아서 대위는 너무나 속상했다. 다른 (영국) 사내들은 용기가 없으면 술기운을 빌려서라도 거사를 치른다던데, 난 대체 뭘 했나. 그렇게 기가 팍 죽어서 포크만 깨작거리고 있을 때였다. 소위가 잘 익은 닭다리를 쭉 뜯어다가 제 접시 앞에 덜다 말고 퍼뜩 생각났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 그리고 대이님. 지가 좋으면 좋아한다꼬 시원하게 말로 하시라예, 말로. 솔찍히 답답해 죽겠심더. 강새이도 아니고 말로 안 하면 사람은 알 수가 없는 거라. 남쪽 사람들이 아주 의뭉스럽다더니 진짜였어라.”

그러면서 실한 닭다리를 찹찹 야무지게도 흡입한다. 그 먹는 모양이 너무 복스러워서 대위는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것도 잊고서 멍하니 구경했다. 애기 장교라며 놀렸는데 진짜 먹는 것도 이팔청춘 십대일 줄은 몰랐지. 다만 콜린스가 너무 잘 먹는 게 신기해서 그런 것뿐이라고, 대위는 한 곳에 꽂혀 움직일 줄 모르는 시선의 이유를 변명했다.

“응? 대이님, 허벅지살 안 좋아하심꺼?”

파리어는 조용히 윤기 흐르는 허벅지살을 떼어다 소위의 접시에 옮겨주었다. ‘헤. 잘먹겠심더.’ 뽀얀 볼이 우물우물, 복스럽게 움직인다. 어쨌든 사귀는 구나, 우리. 닭다리 두 개와 제일 맛있는 허벅지살이 모두 콜린스의 뱃속으로 들어가는 광경을 지켜보며 파리어는 조금 수줍게 생각했다. 오늘부터 1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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