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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유럽을 재미있게 읽는 법 : 움베르토 에코

최근 에코의 소설 두 권을 동시에 읽고 있다. 그중에서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독파 중인 <바우돌리노>의 감상을 메모하다가, 이왕 쓰는 김에 지금까지 읽은 에코의 책에 관한 간단한 추천을 써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니아라고 자칭하기에는 모자란 점이 너무 많지만, 또 에코의 소설은 중세에서 시작하여 20세기를 지나 긴 시간축을 넘나들지만, 그래도 적어본다. 중세 유럽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한 가지 방법: 움베르토 에코.


 

1. 장미의 이름(1980) : 광신에 대한 경계


십삼 년 전 처음으로 <장미의 이름>을 읽었을 때는 책의 어디까지가 역사적 사실이고 어디부터가 허구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화자가 우연한 기회에 멜크의 수도사 아드소의 수기(手記)를 발견했다고 설명하는 서문부터가 너무 그럴 듯해서 감쪽같이 속아 넘어갔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무서울 정도로 정교한 수도원의 일과표에 따라서 진행되기 때문에 현실로 착각했을 수도 있다. 어쨌든 당시 나는 상권의 마지막 장에서 주인공인 윌리엄과 아드소 수사가 미궁의 입구를 발견하기 전까지도 철썩 같이 소설의 내용을 사실로 믿었더랬다.

<장미의 이름> 독일어판을 번역한 데 융은 에코의 소설을 일러서 <교수 소설Professorenroman>이라고 부르는 게 더 적합하지 않겠느냐고 의견을 피력하는데, 적극 동의하는 바이다. 역사 추리 소설이라고만 부르기에 에코의 소설들은 현실과 허구의 경계가 너무나 흐릿하고, 박학다식하고, 지나치게 역사 같다. <장미의 이름>을 읽다 보면 중세 유럽의 교회사 개론 정도는 마스터할 수 있다는 말이 과장이 아닐지도 모른다. 게다가 에코는 익히 알려진 대로 썰 푸는 솜씨가 현란하기 때문에(박사학위논문을 소설처럼 썼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회자된다) 일단 이야기의 궤도에 올라타고 나면 이 사람이 하는 말의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부터가 거짓인지 헤아릴 수 없게 된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야 비로소 지금까지 숨 가쁘게 달려온 1,200쪽이 진짜와 거짓의 촘촘한 거미줄이라고 어렴풋이 느낄 뿐이다. 중세사가(이자 기호학자)가 소설을 쓰면 어떻게 될까? <장미의 이름>은 이 질문에 대한 에코의 첫 번째 답변이었다.

줄거리 자체는 간단하다. 14세기 북부 이탈리아의 수도원에서 요한계시록의 내용을 연상시키는 의문의 연쇄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이방인 수사 두 명이 그 범인을 추적한다. 일곱 명의 피해자들은 저마다 숨기고 있는 사연들이 있으며, 범죄의 흔적은 모두 수도원의 미궁 같은 장서관을 가리킨다. 세계를 본뜬 장서관의 미궁 안에서 두 수사는 어떻게 길을 찾고, 범인을 가려낼 것인가? 그리고 이 같은 기본 줄거리 사이사이로 14세기 교황권 대 황제권 논쟁, 가톨릭 분파 내부의 이념 대립이 촘촘히 얽혀들어 소설을 꾸려낸다.

<장미의 이름>의 유명세를 듣고 책을 집어들었다가 결국 내려놓는 독자들은 보통 두 지점에서 읽기를 그만두는 것 같다. 첫 번째 지점은 윌리엄 수도사의 입을 빌려서 14세기 당시 서유럽 수도원의 생태를 설명하는 상권 초반부다. 여기가 대략 백 페이지 정도 된다. 초입부터 몰아치는 전개를 택하는 추리 장르와는 다르게, 느릿하고 여유로운 속도다. (그러나 다른 에코의 소설들을 읽어보면 감이 올 테지만, <장미의 이름>은 정말 빨리 본론이 등장하는 편이다.) 두 번째 지점은 하권 초반에 등장하는 우베르티노와 미켈레의 기나긴 이단 논쟁이다. 족히 두 장(章)은 차지한다. 심지어 장서관의 비밀이 드디어 풀리려는 지점에서 탁 끈이 끊어진다. 다섯 번째 희생자까지 등장한다. 이 대목에서 범인의 향방과는 관계가 먼 중세 가톨릭의 이단 논쟁이 길게 등장하니 해당 분야에 관심 있는 전공자가 아니라면 지칠 법도 하다. 사실 나도 지금까지 <장미의 이름>을 다섯 번 정도 정독했지만, 이 이단 논쟁 대목에 이르면 거의 뛰어 넘겼다. 그러니 부담스럽다면 일단 이 부분을 제끼는 편을 추천한다. (누구 말처럼 <레 미제라블>이나 <전쟁과 평화>, <피네간의 경야>를 한 글자 한 글자 다 읽고 지나가는 사람은 없다.)

사정이 이러다보니, 빠른 전개를 최고로 치는 독자들은 간혹 ‘이렇게 복잡하고 어렵게 시작할 거면 쓰지 말라’고 혹평을 내리기도 한다. 그런 평가를 볼 때면 개인적으로는 에코가 작가 노트에서 밝힌 다음의 이야기를 조심스레 들려주고 싶다.

“소설로 들어간다는 것은 산을 오르는 것과 같다. 산을 오르자면 호흡법을 배우고, 행보를 익혀야 한다. 배울 생각이 없으면 그 자리에 남아있는 게 낫다.”

"한 독자가 소설의 처음 백 페이지라고 하는 잠재적인 난관을 극복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그것은 다름 아닌, 거기에 이어지는 것을 읽어낼 만한 힘을 지닌다는 뜻이다. 따라서 작가가 소설의 모두(冒頭)에다 백 페이지의 잠재적인 난관을 매설하는 것은 자기의 독자층을 조직하는 작업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장미의 이름 작가 노트> 중 발췌.)

사람에 따라서는 오만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사실 모든 독서는 이와 비슷한 유형의 ‘호흡 배우기’를 필요로 한다. 다른 필체, 다른 스타일, 다른 사고를 이야기하는 각양각색의 책을 넘나 들려면 첫 장에서는 어느 정도 그 책의 행보에 수긍하고 산세를 익힐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 에코의 항변을 너무 까다롭다고 비판하지 말고 일단 첫 백 페이지를 천천히 걸어보시라. 그의 자신감이 허위에서 나온 것은 아니라는 것을 금방 깨달을 수 있을 테니.

에코 소설에 관심을 가진 독자라면 <장미의 이름>으로 시작할 것을 추천하는 또 한 가지 이유가 있다. <장미의 이름>에는 이후 에코의 책에서 등장할 중심적 사고들이 한 번씩 언급된다. ‘미소를 모르는 독선’에 대한 경고, 진실과 거짓이 분간되지 않는 세상, 책을 이야기하는 책, 내분하는 이탈리아의 역사 등등. 그리고 도서관, 책, 다시 도서관. 책과 도서관에 매료된 사람이라면 다른 이유를 제치더라도 바로 책에 관한 이야기인 이 책을 사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 한 가지, <장미의 이름>은 이후 발표되는 에코의 소설 중에서 가장 추리소설적인 면모가 강한 작품이다. 연쇄 살인 사건과 수수께끼의 미궁이라는 자극적인 요소가 등장하기 때문에 그의 다른 소설들보다 훨씬 더 빠르게 책장을 넘길 수 있다.

 

*대목들

“내 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보았으되, 마침내 찾아낸, 책이 있는 구석방보다 나은 곳은 없더라.”

“그런데 희극이라고 하는 것은 실상이 아닌 것을 보여 주는데도 불구하고 기지 넘치는 수수께끼와 예기치 못한 비유를 통해 실상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검증하게 하고 (…) 말하자면 실재보다 못한, 우리가 실재라고 믿던 것보다 열등한 인간과 세계를 그림으로써, 서사시보다, 비극보다 더 열등한 것을 그림으로써 진리에 도달하는 하나의 방법을 제시한다는 것입니다.”

“잘 들어 둬. 당신은 속았어. 악마라고 하는 것은 물질로 되어 있는 권능이 아니야. 악마라고 하는 것은 영혼의 교만, 미소를 모르는 신앙, 의혹의 여지가 없다고 믿는 진리…… 이런 게 바로 악마야!

“철학에 대한 증오로 일그러진 그의 얼굴에서 나는 처음으로 가짜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았다. 가짜 그리스도는 유대 족속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고 먼 이방 족속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 가짜 그리스도는 지나친 믿음에서 나올 수도 있고, 하느님이나 진리에 대한 지나친 사랑에서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성자 중에서 이단자가 나오고 선견자 중에서 신들린 무당이 나오듯이…… 아드소, 선지자를 두렵게 여겨라. 그리고 진리를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자를 경계하여라.”

“지난날의 장미는 이제 그 이름뿐,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덧없는 이름뿐.”

 

<장미의 이름> 한국어판의 또 다른 장점은, 고 이윤기 번역가의 세심한 주석에 있다. 번역자는 93년에 처음 번역본을 낸 뒤, 끊임없는 수정을 거치며 현재의 판본을 내기에 이르렀다. 초판에서의 번역이 허술했던 것을 오래도록 안타까워 하다가, 이곳저곳 잘못된 곳을 바로잡고 이해가 어려운 부분을 주석과 주해를 통해 보강한 것이다. 그 결과 <장미의 이름>의 수많은 번역본 중에서 한국어판 번역은 손에 꼽을 만한 정확도를 가지게 되었다. 가령 영문판 번역의 경우, 원판에 등장하는 수많은 라틴어 경구, 이탈리아 속어, 프랑스 속어, 독일어 속어 및 중세 교회 텍스트에 관한 번역과 출처를 누락했기 때문에 교양 있는 일반 독자들이 <장미의 이름>을 읽고 즐기기란 어려운 일이었다고 한다. 한국어판의 경우, 성실한 번역가와 다른 많은 전공자들의 도움으로 상세한 주해가 달린 덕분에 그 내용과 감성을 온전히 음미할 수 있으니 감사한 일이다. 에코가 그려내는 중세 유럽을 질 좋은 번역으로 즐길 수 있는 기회를 추천한다. (고 이윤기 번역가의 선례를 따라서일까? 이후 한국에서 발간되는 에코의 책들은 문학, 비문학 가릴 것 없이 모두 주해가 자세하고 섬세한 편이다. 가끔은 주석만 읽어도 재미있다.)

 


2. 푸코의 진자(1988) : 음모론을 향한 통렬한 풍자




 

미소지니적인 서술과 <장미의 이름>보다 늘어지는 속도가 단점이나, 팔백 년 이상 지속된 성전기사단 음모론의 기원을 추적해가는 부분이 흥미로운 작품이다. 기나긴 ‘썰풀이’를 견딜 준비만 되어있다면, 진실이 밝혀질 결말을 기대하며 계속 책장을 넘기게 되는 소설. <장미의 이름>을 처음 접했을 때와 비슷한 호기심을 느낄 수 있다. 마지막 장을 넘기기 전까지는 다른 일을 시작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묘한 마력을 주는 책. 주인공들이 지어낸 허구의 세계가 현실로 개입해 들어온다는 점에서 보르헤스의 단편 <틀뢴, 우크바르>와 유사한 주제를 함유하고 있기도 하다.

<장미의 이름>보다도 분량이 늘어난 이 책의 줄거리를 어떻게 해야 간단히 요약할 수 있을까? 왜곡의 위험을 무릅쓰고 압축해보자면, 한 마디로 중세 유럽에 존재했던 성전기사단 음모론에 관한 이야기다. 다만, 성전기사단의 진실을 파헤치는 것이 아니라, 성전기사단 전설을 재구성해서 하나의 음모론 출판물을 기획하려는 희대의 사기꾼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탈리아의 한 영세 출판사에 근무하는 벨보, 카소봉, 디오탈레비 세 사람은 오컬트에 심취한 독자들을 겨냥한 은비학 시리즈를 하나 출판하기로 한다. 핵심이 되는 소재는 수천의 금을 숨겨두고 사라져버렸다는 성전기사단의 전설. 세 출판인은 벨보의 컴퓨터 아빌라파이에 그럴듯한 은비학 용어들을 입력한 다음, 컴퓨터가 무작위로 인과관계를 산출해내는 방법을 통해서 이 기막힌 사기극을 구성해낸다. 컴퓨터를 이용한 무작위 관계성 추출에 더해서, 문헌학을 전공한 카소봉의 방대한 문헌지식이 뒷받침되자 이들의 <너울 벗은 이시스> 총서는 유럽에 흩어진 오컬트 추종자들을 벌떼처럼 끌어모으기에 이른다.

여기서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났다면 좋으련만. 편집자라는 소명 때문에 평생 자기만의 세계를 창조해본 적이 없던 벨보는 난생 처음 자기 손으로 만들어낸 이 허구의 전설에 스스로 매료되고 만다. 아울러 <너울 벗은 이시스>의 내용을 사실이라고 믿기 시작한 음모론자들은 세 명의 출판인에게 비밀을 밝혀내라며 현실 세계에서 위협을 가하기 시작한다. 허구로 만들어낸 세계가 사실로 호도되는 순간이다. 벨보와 카소봉, 디오탈레비는 존재하지 않는 책 하나를 만들어내면 그 책이 현실화될 수도 있다는 점은 알았으나,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음모론의 위험성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 <너울 벗은 이시스> 총서는 다른 책이 다루는 주제와 동일한 주제를 다루어야 합니다. 그러면 서로 확증하는 셈이 되고, 그게 곧 <참>이 되는 거 아닙니까? 독불장군의 독창성이라는 거, 그거 사실 없는 겁니다.” (p.499)

“상징의 이어달리기. 한 상황이 다른 상징의 이름을 댈 뿐, 전거(典據) 같은 것은 근심하지 않는다.” (p.946)

교차 검증되지 않은 무비판적 인용과 전거가 어떻게 음모론과 오류를 재생산하는지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자가 인용과 상호 전거가 만들어내는 음모론에 대한 풍자.

“포르투갈에서 돌아오면서 나는 나 자신에게 끊임없이 다짐을 주었다. <이것은 성전 기사단 비밀을 캐기 위한 작업이 아니라 만들어내기 위한 작업이다.>”

위 한 마디는 소설을 관통하는 주제를 한 마디로 함축한다.

 

그런데 음모론 창작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이들은 어느 새 자신이 편집하고 있는 총서가 진실인지 허구인지 스스로도 헷갈리는 지경에 이르고 만다. 허구가 현실세계로 침투하기 시작한 것이다. 예를 들어, 창작에의 욕망에 불탔던 벨보가 가장 먼저 그 경계를 혼동하기 시작한다.

“결국, 독일인입니다. 장미 십자단 선언을 다시 읽어봐야겠어요.”

“하지만 당신은 그 선언문이 가짜라고 하지 않았나?”

그래서요? 우리가 만들어 내려고 하는 것도 가짭니다.”

“하긴 그렇군. 그걸 잊고 있었네.” 벨보가 중얼거렸다. (p.698)

허탈한 벨보의 혼잣말.

 

“상징이라고 하는 것은 모호하면 모호할수록 난해하면 난해할수록 그만큼 더 의미심장하고 강력해지는 것이 아닌가요? 그래서 천의 얼굴을 가진 헤르메스 신의 정신은 이로써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까?” (p.777)

여기서 등장하는 ‘헤르메스 정신’이란 전혀 관련이 없는 두 개념 사이에 인위적으로 관련성을 부여함으로써 만물을 연결시키려는 움직임이다. 말인즉 음모론자들의 원동력이다. 상징이 모호할수록 대중은 그 상징을 더 경외하게 되고, 믿게 된다. 모든 것이 허구일 뿐인데도. 일견 박학다식해보이는 세 편집자의 거짓 놀음을 통해서 에코는 음모론자들의 사고를 풍자하려 했던 것이 아닐까?

 

이상의 두 권 분량을 할애해서 세 출판인의 음모론 총서 제작기를 숨 가쁘게 달려가다가, 비로소 3권에 들어서야 이 소설에서 유일하게 정상적인 인물이 등장한다. 카소봉의 아내 리아다. 리아는 사료에 근거한 합리적 판단을 통해서 성전 기사단 전설의 발단이 되는 “프로뱅의 밀지”의 진실을 밝혀낸다. 성전 기사단이 마지막 재보를 숨겨놓은 비밀지도라고 철썩 같이 믿었던 속칭 “프로뱅의 밀지”라는 것이, 사실은 프로뱅 지역 상인들의 단순한 배달 명세서였을 뿐임을 밝혀내는 것이다. 황당하지만 속이 다 시원해지는 장이다. 리아는 프로뱅 관광책자에 소개된 그 지역의 간략한 역사와 엄밀한 사료 분석에 근거해서 ‘성전 어쩌구’ 하던 밀지가 어느 시대에나 존재하는 평범한 배달 명세서에 지나지 않음을 입증한다.

“당신네 계획은 전혀 시적이지 못해요. <일리아스>는 명쾌하고 투명하지만, 당신네 장미 십자단 선언문은 명쾌하지도 투명하지도 않아요. 호메로스에게는 비밀이 없지만 당신네 계획은 비밀과 모순투성이에요. 바로 이 때문에 당신들은 이 비밀과 모순을 자기네들과 동일시할 준비가 되어있는, 불건전한 사람들(=음모론자)을 무수히 찾아낼 수 있었던 거라고요. 속임수를 조심해야 해요. 자주 쓰면 사람들이 믿어버린다고요.” (pp.963~964.)

리아의 대사는 음모론에 심취하는 대중과, 그런 음모론을 부추기는 문헌 제작자들 모두에게 날카로운 경고를 던진다. 주인공 삼총사는 장난삼아 위작을 만들어내고 음모론을 부풀리는 과정에서 지나치게 진짜 같은 역사를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그렇게 탄생한 위작의 세계는 음모론에 열광하는 대중을 끌어들이면서 마침내 <계획>을 세운 삼총사들에게 총구를 겨누기에 이른다.

 

이후 이어지는 이야기를 간략히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삼총사 중에서 가장 허영심이 강했던 벨보는 수중에 보유하지도 않은 성전기사단의 지도를 가지고 있다며 음모론자 앞에서 허풍을 터트리는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그 바람에 음모론 신봉자들에게 납치당해서 실존하지도 않는 <지도>를 실토하라며 심한 고문을 받게 된다. 두 갈래로 갈려서 지도의 실존에 대해 얼토당토 않는 설전을 벌이는 음모론자들을 보는 바로 그 순간, 벨보는 마지막으로 제정신을 차린다.

“내가 보기에 벨보는 두 적대 세력이 논쟁을 들으면서, 세 영매의 시체를 보면서, 몸부림치면서 깩깩거리는 이슬람교 탁발승 영창단을 보면서, 엉클어진 고위 사제들의 차림새를 보면서 문득 자기의 천부적인 자질, 즉 부조리한 것을 보고 웃을 줄 아는 자질을 회복하지 않았나 싶다. 그 자질을 회복하는 순간부터 그는 두려움을 떨쳐 내기로 마음먹었던 것 같다.” (p.1056)

그렇게 풍자할 줄 아는 능력을 되찾은 벨보는, 소설 내내 겁쟁이처럼 움츠리던 모습을 떨쳐내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멋지게 한 마디를 던진다.

“Ma gauta la nata (마개를 뽑아 헛바람 좀 빼시지).” (p.1059)

이 거절의 단말마를 마지막으로 벨보는 광인 무리의 소동에 휩쓸려 진자 줄에 목이 졸려 살해당한다.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카소봉은 평한다. ‘평생 인생에서 주인공이었던 적이 없는 벨보는 죽는 순간에서야 비로소 자기가 만든 <계획>의 주인이 됨으로써 진짜 주인공이 되었다’고.

벨보가 죽음으로써 호도된 음모론 대중들은 또 몇 세기 동안이나 지도를 찾아야 한다. “그들은 이로써 천박하고 감상적인 욕망을 온전히 지키게 된 셈이다.”

성전기사단의 행방, 지구공동설, 히말라야에 숨은 샹그리라의 신화, 산노인 아싸시노의 성채, 토라의 수를 헤아리는 카발라 비경(秘經)들. 어지러이 등장했던 서양 중근세의 수많은 신비주의는 다만 독자를 현혹하는 가림막에 지나지 않았다. 그 모든 베일을 걷어낸 후 밑바닥에 남은 것은 음모론을 향한 작가의 통렬한 비웃음뿐이다.

 

“우리는 존재하지도 않는 <계획>을 발명해 내었다. 그러자 <그들>은 그 <계획>이 실재하는 것이라고 믿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네들이야말로 여러 세기에 걸쳐 그 <계획>의 일부분이었다는 것을 확신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누가 계획을 발명하고 다른 사람이 그것을 수행한다면, <계획>은 존재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이 대목에 이르면 <계획>은 실제로 존재하게 된다.“ (p.1097)

“오늘 내가 한 생각을 모조리 여기 적어두었으면 좋았을 것을. 그러나 그랬다 해도 <그들(음모론자)>은 내 글을 읽고 여기에서 또 하나의 괴상한 이론을 유추해 내고, 내 글의 배후에 숨겨져 있는 밀지를 해독한답시고 세월을 보낼 테지.”

침묵하고 있어도 침묵의 배후에서 의미를 찾으려 할 테니까. 워낙 그런 사람들이다. 계시에 눈이 먼 사람들. 말후트는 말후트일 뿐이다. 그것뿐이다.” (p.1135)

 

3. 바우돌리노 (2000) : 진실과 허구의 경계가 어디입니까

 


광신에 대한 경계(<장미의 이름>), 음모론을 향한 통렬한 풍자(<푸코의 진자>). 에코가 들려줄 다음 이야기는 무엇일까? 3차 십자군 전쟁과 사제 요한의 전설을 집대성한 <바우돌리노>를 통해 그 대답을 내놓았다. 바로 ‘진실과 허구의 경계의 모호함’이다. 진짜와 가짜 사이를 교묘하게 넘나드는 에코의 작법은 이미 다른 작품들에서도 여러 번 사용되었지만, <바우돌리노>는 아예 주제를 진실과 허구의 혼동으로 잡고서 에코가 작정하고 大사기극을 벌이는 소설이다.

우선 난이도에 대해서 말하자면, 지금껏 읽은 에코의 소설 중에서 가장 친절한 소설이다. 시대 배경에 대한 설명은 <장미의 이름>보다 친절하고, 사건 전개는 <푸코의 진자>처럼 복잡하지 않고 단선적이다. 첫 번째 장인 바우돌리노의 독백을 제외하면 언제, 어디에서, 어떤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지 파악하기에 별 무리가 없다. 아마 <바우돌리노>의 유일한 난관이 제 1장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나머지 부분들은 술술 읽힌다. (학창 시절에 처음 이 책을 집어들었다가 금방 내려놓았던 것도 아마 제 1 장의 난관을 넘기지 못해서인 듯하다. 그 난관만 무사히 건넜더라면 에코의 소설 중에서 가장 에코적이면서도 중세적인 소설을 읽을 수 있었을 텐데.) 후에 역자 후기를 읽어보니 <바우돌리노>는 에코가 일부러 대중을 겨냥하고 쓴 소설이었다고한다. ‘교양있는 지식인 독자’를 위한 책이었던 <장미의 이름>보다 대사와 문장을 훨씬 세속적이고 간결하게 편집하고, 복잡한 트릭도 집어넣지 않았다. 그러나 번역자가 지적하듯이 에코의 소설은 문체가 단순하다고 해서 그 내용까지 단순한 것은 아니다. 그러니 바우돌리노와 함께 십자군의 세계를 건너는 여정에서도 우리 독자들은 작가가 겹겹이 짜놓은 온갖 전설과 역사의 태피스트리를 지나가게 될 것이다.

 

주인공 바우돌리노는 북부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에서 한미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특이한 재능을 두 가지 갖고 있었다. 어느 지방의 말이건 한 번 들으면 똑같이 흉내 낼 수 있는 능력, 그리고 거짓말을 해도 언제나 진실처럼 들리는 능력이었다. 그의 친부 갈리아우도는 아들을 거짓말쟁이, 사기꾼이라고 꾸짖지만, 훗날 바우돌리노를 만나게 되는 사람들(황제나 귀족처럼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다)은 그의 거짓말을 의심하면서도 그 허구에 매료되어 그를 지원하게 된다. 거짓을 말해도 진실처럼 들리는 바우돌리노의 기이한 능력. 그의 정교하고 세밀한 상상력과 화술에 대해서 액자 밖 기록자인 비잔틴의 역사가 니케타스(실존인물이다)는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니케타스는 자기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작은 사자를 보았다. 대체 내 앞에 앉아있는 이 사람, 자기 고향 사람들 이야기를 할 때는 농부들의 언어를 사용할 줄 알고 군주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왕의 언어를 사용할 줄 아는 이 사람은 대체 어떤 사람일까?” (pp.93~94.)

 

처음으로 바우돌리노의 거짓말을 신용하는 인물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붉은 수염(Barbarossa)’ 프리드리히다. 그렇게 소설은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대왕(실존 인물)과 그의 양아들이 된 바우돌리노(허구 인물)가 긴 모험을 떠나며 시작된다. 이야기 초반부터 이 소설은 허구와 사실의 모호한 경계를 거니는 줄타기 같은 이야기가 될 것임을 암시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바우돌리노는 대체 어떤 거짓말을 지어내서 프리드리히 대왕─실제 역사에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 인도 너머 극동에 존재한다는 기독교 왕국 ‘사제 요한의 나라’를 만들어냄으로써다. 다시 말해, <바우돌리노>는 프리드리히 왕이 어떻게 하여 3차 십자군 전쟁에 참가하게 되었는지와, 중세 유럽 세계에서 ‘사제 요한(Prester John)의 전설’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퍼져나갔는지에 관한 이야기다. 소설인 만큼 그 이야기는 허구지만, 바우돌리노가 전설을 만들어내는 과정 자체를 놓고 보자면 12세기 유럽에서 일어났던 실제 양상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기실, 바우돌리노와 친구들은 기존에 존재하던 사제 요한에 관한 단편적인 문헌들을 긁어모아서 약간의 세부를 더하고 편집한 것에 다름 아니다. 음모론과 전설이 그럼직한 문헌 기록의 형태를 띨 때, 허구도 진실로 호도될 수 있다는 걸 생생히 보여줄 뿐이다.

사제 요한의 전설(일명 Prester John 또는 Presbyster Johannes의 전설)은 중세사 교양 수업을 들은 이후 간만에 만나는 이야기다. 인도 너머 극동 지역에 초기 기독교의 한 지파인 네스토리우스파(이들은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아리우스파의 한 가지다)가 살고 있으며, 그들을 이끄는 지도자가 ‘사제인 동시에 왕’인 요한이라는 전설이다. 사제이자 왕인 요한이 다스리는 동방의 기독교 국가는 강대하고 풍요로워서 이슬람 세력에 맞서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한 싸움에 큰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는 신앙이 12세기 유럽을 휩쓸었다. 이에 더해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성경 말씀 또한 12세기 유럽인들로 하여금 프레스터 존의 왕국을 찾아 떠나게 만든 한 동인(動因)이었다.

인도 너머 극동에 있다고 상상된 사제 요한의 왕국. Presbiter Johannes.

<바우돌리노>에서는 프리드리히의 숙부이자 조언자인 오토 주교의 유언에서 처음 이 전설이 등장한다. 12세기 중엽,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프리드리히는 고향인 독일보다 이탈리아에 더 많이 머무르며 이탈리아 반도 통일을 꿈꾼다. (에코의 표현에 따르자면) ‘영원히 내분하는’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을 통일하고 자신의 제국 안에 포섭시키기 위해 지진부진한 전쟁을 이어가는 것이다. 어느 새 본국인 독일보다 이탈리아 반도에서 더 많은 일생을 보내고, 대왕은 로마 교황과의 풀리지 않는 교권 대 황제권 싸움에 깊이 빠져든다. 늪처럼 말려들기만 하는 이탈리아에서 황제의 발을 빼내기 위해 오토 주교는 사제 요한의 전설을 이용하기로 한다. 극동의 기독교 국가인 요한의 왕국을 찾기 위해 군사를 돌린다면, 이탈리아에서 발을 뺄 수 있는 좋은 명분이 될 뿐만 아니라 ‘사제인 동시에 왕’인 요한에게서 직접 인정받은 군주로써 로마 교황과의 정당성 싸움에서도 고지를 차지할 수 있으리란 계산에서다.

“그러니까 네가 이 왕국에 대한 다른 이야기를 알아내지 못한다면 이야기를 꾸며내도록 해라. 네가 진실이라고 믿는 것을 거짓으로 증언하라는 것이다. 분명 페르시아 인들의 땅 너머에 동방 박사들의 후손인 요한이 살고 있을 거야. 프리드리히를 동으로 가게 하려무나. 그쪽에서, 그 어느 왕보다 프리드리히를 빛나게 만들어줄 빛이 비치고 있기 때문이란다. 밀라노와 로마 사이에 뻗어있는 이 진흙탕에서 황제를 구해다오─. 어쩌면 황제는 죽는 날까지 그 진흙탕 속에서 뒹굴지도 몰라. 교황도 통치권을 가지고 있는 이 제국에서 그가 멀어지도록 만들어라. 그렇지 않으면 프리드리히는 이 제국의 반쪽짜리 황제로 영원히 남을 게다.” (p.103)

이 같은 오토 주교의 유언과 당부는 바우돌리노에게 이어지고, 이후 바우돌리노와 친구들은 반평생에 걸쳐서 사제 요한의 전설을─구체적으로는 ‘사제 요한이 프리드리히 대제에게 보내는 서신’을 창조해낸다. 그들이 예상하지 못한 것은 그가 만들어낸 허구의 왕국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져서 온 유럽의 제후와 교황, 심지어 비잔틴 황제마저 요한 왕국 찾기에 뛰어들도록 만들 거란 미래뿐이었다. 바우돌리노 자신이 토로하고 오토 주교가 예언했던 것처럼, 바우돌리노가 진실이기를 바랐던 거짓말들은 결국 진실로 화해서 그를 덮치기에 이른다.

“내 인생의 문제는 내가 직접 두 눈으로 본 것과 내가 보고 싶어했던 것을 항상 혼동한다는 겁니다.” (p.61)

“다른 세계들을 상상하는 것이 결국은 이 세계마저 바꿔 놓는다는 것을 그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겁니다.”라고 말하는 바우돌리노의 발언은 <푸코의 진자>에서 자기가 만들어낸 음모론에 희생당한 벨보, 장난삼아 만들어낸 백과사전이 현실세계에 구현되어 버린 <틀뢴, 우크바르>를 연상시킨다.

 

“왕이자 사제인 동방박사들, 왕이자 사제인 요한, 이 얼마나 감탄할 만한 인물인가. 그가 지금 꿰매어가면서 프리드리히의 몸 위에 입혀 주고 있는 황제의 권위에 대한 알레고리이며, 예언이며, 계시이며, 예언이지 않은가!

‘소문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 요한 사제의 존재를 증명해 줄 문서, 그가 누구였고 어디에 살았고 어떻게 살았는지를 말해 줄 문서가 있어야 하네. 찾지 못하면 만들게.’“ (pp.197~198.)

심리학적으로 표현하자면 리플리 증후군이고 허언증인 셈이다. 다만 일반적인 허언증과는 다르게 자기 자신이 아닌 외부를 향한 허구이며, 문헌으로 그럴 듯하게 벽돌을 지은 만큼 더 위험한 허언이다. 이토록 바우돌리와 친구들이 정성들여 만들어 낸 가짜 서한은 순식간에 전 유럽에 퍼져서 우후죽순으로 사제 요한의 편지가 등장하기에 이른다.

“이제 누구든지 요한 사제와 다정하게 편지를 주고받는다고 꾸며 내고 싶어하지. 이제 우리는 약삭빠른 거짓말쟁이들의 세계 속에서 살고 있어.”라고 말하는 바우돌리노의 대사에는 실제 12세기 유럽 기독교도들이 음모론에 바쳤던 열광적인 믿음이 생생히 담겨있다.

 

거짓으로 사제 요한의 왕국을 재림시킨 바우돌리노지만, 그 또한 잠시나마 현실 위에 발을 딛고 서 있는 때가 있었다. 젊은 아내 콜란드리나와 결혼한 후 행복한 신혼을 보내는 동안만큼은 잠시 사제의 왕국을 잊고 지냈다. 그리고 추후 반인반수의 여성 철학자 히파티아와 사랑에 빠졌을 때도 그는 사제 요한의 왕국은 환상일 뿐 중요한 일이 아니라 손을 가로젓기에 이른다. 거짓말투성이인 그의 인생 속에서 유일하게 진실한 순간이다. 그러나 진실해져보려는 그를 비웃기라도 하듯 운명은 콜란드리나의 배에서 기형아를 태어나게 하고, 히파티아와는 전란 통에 헤어져버린다. 홀로 남은 바우돌리노는 독백한다.

“네가 어떤 일을 꾸며댈 때는 넌 진짜 없는 일들을 꾸며냈지. 하지만 그것은 진짜가 되었어. 성 바우돌리노 성인을 나타나게 했어. 동방 박사들이 세상을 돌아다니게 했지. 여윈 암소를 살찌게 해서 네 고향 도시를 구했어. 볼로냐에 박사들이 있다면 그것 또한 네 덕택이야. 넌 가발라의 우고 주교의 개나발 같은 소리를 듣고서는 그 어떤 것보다도 아름다운 왕국을 만들어냈지. 그런 다음에 너는 환상 속의 존재를 사랑하게 되었고 그 존재로 하여금 실제로 쓴 적이 없는 편지들을 쓰게 했어.

단 한 번, 그 누구보다도 진실한 여자와 단 한 번 진실한 일을 하고 싶었는데 넌 실패를 했어. 너는 그 누구도 믿을 수 없고, 원할 수 없는 무엇인가를 만들어냈어. 그러니까 넌 네 경이의 세계로 숨는 게 나아. 그 세계에서는 적어도 네가 얼마나 경이로울 수 있는지를 결정할 수 있으니까.“ (pp.375~376.)

진실을 따를 때마다 비극을 맞이해야 했던 바우돌리노는 대신 가짜 성인을 만들어 내고, 동방박사를 살려내고, 카롤루스 대제를 성인으로 만들고, 요한의 왕국을 실재하는 곳으로 둔갑시킨 다음, 마침내 자신이 만들어낸 허구의 세계를 향해 여행을 떠난다. 허구가 현실이 되어 그의 마음과 유럽인들의 마음을 잠식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여행을 떠난 바우돌리노와 친구들은 많은 일을 겪는다. 아버지처럼 사랑했던 프리드리히 왕을 잃고, 성배를 도둑맞고,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검은 숲 아브카시아와 자갈이 흐르는 계곡 삼바티온을 지나, 요한 왕국의 환관들이 살고 있는 변방도시 픈다페침에 이른다. 산노인 아싸시노의 노예로 잡혀 6년을 보냈다가 가까스로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온다. 십대 시절에 처음 요한의 왕국을 꿈꾸기 시작해서 예순이 될 때까지, 장장 반세기에 걸친 허구의 여행이었다. 4차 십자군의 약탈이 한창인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한 바우돌리노는 비로소 평화를 맞이했을까? 직접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일러둘 수 있는 것은 길고 지리했던 모험 이야기의 끝에 마침내 파편 같던 실마리들이 모여들어 마지막 반전을 준비하고 있다는 점이다. 진실과 허구의 경계에서 줄타기를 한 바우돌리노의 모험은, 행복으로 끝날까? 이 책의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부터가 거짓일까?

에필로그에서 역사가 니케타스는 바우돌리노가 들려준 이야기를 과연 자신의 역사서에 포함시켜야 할지, 제외시켜야 할지를 묻는다. 친구 파프누티오스는 대답한다.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은 불확실한 증언을 믿을 수 없는 걸세. 자네 이야기에서 바우돌리노를 지워 버리게.”

“정말 멋진 이야기였는데. 그 이야기를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게 안타까워.”

“이 세상에 이야기를 쓰는 작가가 하나뿐이라고 생각하지 말게나. 곧 누군가가, 바우돌리노보다 더한 거짓말쟁이가 그 이야기를 들려줄 걸세.”


그리고 정말로, 바우돌리노보다 더한 거짓말쟁이─에코─가 나타나서 우리에게 이 슬픈 모험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 바우돌리노가 모험 중에 만난 신기한 부족들. 중세 유럽인들이 실제로 믿었던 환상 속의 존재들이다.

외발이 스키아푸스


귀큰이


머리가 없고 몸통에 이목구비가 달린 블레미아스.



덧1. 바우돌리노의 모험 이야기를 기록한 사람은 에코 하나만이 아니다. 작중 등장하는 바우돌리노의 친구 보롱은 소설 말미에서 모든 모험이 끝난 뒤 헤어짐을 말하며 이렇게 기약한다. “나는 고향으로 돌아가 우리가 한 모험에 관한 이야기를 글로 남길 걸세. 우리보다 훨씬 더 충실하고 신의 있는 기사들이 나오는 모험 이야기를 말이야.” 그렇게 프랑스의 시인 로베르 드 보롱은 원탁의 기사 이야기와 성배 전설을 결합한 <성배 3부작>을 남긴다. (그렇다. 이 소설의 등장인물 중 어디에 실존인물이 숨어있을지 긴장을 놓을 수 없다!)

덧2. <바우돌리노>는 에코의 소설 중에서 낭만적인 대목이 가장 자주 등장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12세기 유럽 세계의 학살을 다루는데, 정작 인물들은 가장 서정적이라니 아이러니하다.

a. 오토 주교의 임종과 그를 안심시키는 바우돌리노

“‘그런데 왜 이렇게 어두워진 게냐?’ 거짓말쟁이 바우돌리노는 밤이 되어서 그런 것이라고, 놀라지 말라고 오토에게 말했다. 정확히 정오가 되었을 때, 오토는 이미 목이 다 잠겨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상태에서 마지막 숨을 내쉬었다. 눈은 무엇인가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마치 왕좌에 앉은 자신의 요한 사제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바우돌리노는 오토의 눈을 감겨주고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p.104)

 

b. 낙오한 프리드리히를 찾아 헤매는 바우돌리노

“바우돌리노는 군인은 아니었지만 용기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말을 재촉해 달렸다. 검을 꽉 쥐고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는 곳으로 달려가면서 사랑하는 양아버지를 큰 소리로 불렀다. 바우돌리노는 셀 수도 없이 많은 시체들이 쌓인 그 평야에서 필사적으로 한 사람의 시체를 찾았고 자기 말에 대답을 하라고 크게 소리쳤다. 바우돌리노는 땅바닥에 얼굴을 대고 누워있는 시체들을 하나씩 뒤집어 보기 시작했다. 그는 해질 무렵의 희미한 빛 속에서 사랑하는 황제의 얼굴을 발견하기를 바랐지만 그와 동시에 발견하게 될까봐 두렵기도 했다. 그는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그는 되는대로 걸어서 작은 숲에서 나가다가 우차와 부딪히게 되었다.

‘혹시 황제폐하 보셨소?’ 바우돌리노가 눈물을 흘리면서, 미친 듯이 그리고 주저하지도 않고 소리쳤다. (…)

바우돌리노는 관목 숲도 살펴보러 갔다. 그곳에는 시체들이 쌓여 있었다. 한 구의 시체가 똑바로 누워있고 그 위에 세 구의 시체가 엎드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바우돌리노는 자신에게 등을 보이고 있는 시체 세 구를 들어올렸다. 그는 그 밑에서 피에 물들어 있는 붉은색 수염을 보았다. 프리드리히였다.“ (pp.326~327.)

 

13년 전에 처음 <장미의 이름>을 읽으면서 책의 허구와 진실이 분간이 가지 않았던 것처럼, <바우돌리노>의 세계는 실재하는 역사적 사실과 작가의 상상을 놀랍도록 ‘그럴듯하게’ 엮어낸다. 주인공 바우돌리노가 사제 요한의 왕국의 성벽을 하나씩 쌓아가듯, 책 바우돌리노 또한 그 전설이 형성되는 과정을 차근차근 추적해 나간다. 진실보다 강력한 허구로써.


2주간 이어졌던 모험담의 책장을 덮었다. 작년 이맘 때 에코의 작가 노트를 덮었을 때와 비슷한 시점이다. 때마침 절기는 처서를 지나고 올 여름을 혹사시킨 폭염도 서서히 물러나고 있다. 내일은 폭풍이 온다고 한다. 마지막 장정을 덮으며, 에코가 이끌어준 마법의 여름도 함께 끝나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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