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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어콜린스] 콩깍지와 편견 (마지막)



13. 무차선 도로

 

몰리 가족과 한 약속은 지키지 못했다. 세 사람이 보더 주의 작은 농가를 방문하는 때는 영원히 오지 않았다. 상사는 기체 정비 사고에 휩쓸렸고, 부인은 마지막 공습 때 런던의 지하철역에서 실종되었다. 폭격의 여파로 배수로가 터지면서 급류가 그곳에 대피해 있던 시민들을 덮쳤고, 불길이 이는 지상으로 나갈 수 없어 헤매던 사람들은 천천히 물에 잠겨 죽어갔다. 몰리 부인의 시신이 발견되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돌아오지 못하리란 건 눈에 보이듯 뻔한 결말이었다.

남은 아이들은 고아원으로 옮겨졌다고 들었다. 하룻밤 사이에 너무 많은 부모들이 사라진 바람에 도시의 고아원은 어딜 가나 아이들로 넘쳐 났다. 아직 상황을 몰라서 의아해하는 아이들의 처지와 비교하면 작은 몰리는 차라리 나은 편이었다. 어머니가 물에 실려 간 덕에 처참한 마지막 모습을 보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다른 고아들은 도로변에 임시로 늘어놓은 시신들 사이에서 가족의 얼굴을 찾아 일일이 신원을 대조해야 했다.

이 모든 소식을 전해들었을 때 콜린스는 삶이 중앙선 없이 달리는 무차선 도로 같다고 생각했다. 아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아도 작은 사람들의 삶은 제멋대로 뒤집히고 어그러진다. 그는 군인이었지만, 전장에서 죽음을 목격하는 것과 전선 밖에서 민간인의 죽음을 보는 것은 전혀 다른 경험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죽음의 행렬에는 이제 적응됐다0고 생각했는데, 방공호에서 보호받는 자의 자만일 뿐이었다. 이게 데드레이스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 운명이라는 점잖은 이름으로 포장해주기엔 지나치게 잔인한 처사다. 그는 제 것이 아닌 불행 앞에서, 최초로 살인을 저지른 이래 처음으로, 보이지 않는 신의 존재를 욕했다.

상사의 장례는 다른 전사자들처럼 조촐하고 간소하게 치러졌다. 망자에 대한 예의는 갖추지만 평시에 비하면 격식이며 의전이 형편없이 보잘 것 없었다는 뜻이다. 같은 날 사고를 당한 다른 두 명의 군인과 함께 그들의 이름을 새긴 묘비를 세우고, 마지막 인사를 보냈다. 군종 신부는 장례식의 마지막 곡으로 <주님 인류의 아버지>를 골랐다. 떠나보내는 길에 들려주기엔 너무 아름다운 선율이었다.

<시원한 바람과 위안으로 욕망의 열기를 식혀 주시고

감각은 무뎌지게, 육체는 쉬게 하소서

괴로운 영혼의 짐과 고난을 거둬주시는

아름다운 주님의 평화>

갈라진 목소리로 후렴을 따라 부르는 내내 콜린스는 허망함에 떨지 않을 수 없었다. 죽은 자는 이제 흙에 묻혀 썩어 문드러질 것인데, 이마 위를 흐르는 땀이 무슨 상관이며 주님의 평화는 또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당신 평화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모순된 시간을 견디는 동안, 그는 잔여물처럼 남았던 신앙마저 서서히 흩어져 날아가는 것을 느꼈다. 생전에 해주지 못한 일, 미안한 기억만이 남아 미련처럼 맴돌았다.

‘축구를 못하는 줄 알았으면 억지 부리지 말 걸 그랬지.’

그는 남은 하루를 죽음에 관해 생각했다.

그리고 다음 날에는 다시금 적국의 도시를 가장 효율적으로 파괴할 수 있는 전략을 짜내는 데 골몰했다. 그뿐이었다.

 



14. 충동 혹은 결심


베를린이 항복했다. 제국의회의 제단에서 나치기가 끌어내려지고 대신 적기가 게양됐다. 붉은 군대보다 한 발 늦게 도시에 입성한 영미 연합군 중에는 콜린스 대위도 포함되어 있었다. 깃발을 꽂음으로써 전쟁을 끝내는 것은 보병이지만 보병이 그곳에 닿기까지 길을 열어주는 것은 공군이기 때문에, 그에게도 참관할 자격이 주어진 것이다. 마침 점령지의 민간인을 감독할 인력이 필요하기도 한 참이었다. 그렇게 해서 콜린스는 그동안 야간폭격으로만 방문했던 도시를 처음으로 대낮의 지상에서 보게 되었다.

민낯을 드러낸 정복지는 영광스럽지도, 자부심을 느끼게 하지도 않았다. 건물은 부서지고 도로는 군데군데 파여서 곰보 자국이 남은 피폐한 얼굴을 연상케 했다. 살아남은 시민들은 포탄이 남기고 간 구덩이를 피해서 남는 공간에 간신히 시신을 늘어놓았다. 여기까지는 몰리 부인의 신원을 확인하느라 런던에 가서 본 광경과 다를 바 없었다. 다만 이번에는 가지런히 누운 몸들의 크기가 훨씬 작았다. 그 앞에서 독일인 경찰들이 죽은 소년 소녀들의 옷이나 가방에 적힌 이름표를 일일이 들추어서 신원을 확인하고 있었다. 전염병이 퍼지기 전에 한시라도 빨리 대량의 시신을 수습해야 했기 때문에 감상에 젖어 있을 여유는 없었다.

그들이 하는 일을 감독하고 있는데, 발작적으로 오른쪽 눈꺼풀이 떨렸다. 의지와 상관없이 바르르 떨리는 얇은 살갗은 안구가 빨아들이는 황량한 광경을 견딜 수 없어하는 듯 제멋대로 움직였다. 소이탄을 떨어트릴 때는 그저 또 다른 나치 부역자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인데, 왜 지금에서야? 말라버린 심장이 뒤늦게 죄책감 시늉이라도 내는 건가 싶었다. 그러나 그는 비행기를 조종하고 어둠 속에서 목표물을 찾고 정확한 지점에 총구를 겨누는 법은 배운 적 있어도 죽인 상대를 대하는 방법은 배우지 못한 사람이었다. 밀려드는 죄책감을 다루는 기교에 대해선 누구도 가르쳐준 적이 없다. 그는 다만 동요를 숨기기 위해 더욱 딱딱하게 자세를 잡았다.

그날 정복지의 참상을 보고 느낀 죄책감 때문이든 아니면 묵은 외로움 때문이든, 영국으로 돌아온 이튿날, 콜린스는 곧바로 런던으로 향했다. 몰리 부부의 아들이 머무는 고아원으로 미리 전화를 넣어놓고 아이의 후견인이 되겠다는 의사를 밝힐 때까지, 모든 절차가 번개처럼 눈 깜짝 할 사이에 처리됐다.

무의식에 가까운 일처리였다. 종전 즈음해서는 아직 자녀가 없는 군인들이 죽은 동료의 자녀를 후원하거나 입양하는 일이 심심치 않았기 때문에 고아원 측에서도 흔쾌히 콜린스의 제안을 반겼다. 평시였다면 복잡했을 서류 절차와 인터뷰도 사나흘 만에 빠르게 처리됐다.

필요한 짐을 챙겨 고아원 정문에 당도했을 때서야 콜린스는 비로소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지른 것인지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러나 이미 결정은 내려졌고 이제 와서 물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고아원의 시설은 직원들이 아무리 정성들여 관리하고 있다고 해도 만성적인 예산 부족에서 오는 허름한 분위기까지 숨기진 못했다. 메마르고 버석버석한 고아원의 환경을 목격한 직후, 원래 후견인 신청이었던 것을 현장에서 입양 신청으로 변경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보육직원이 말했다.

“아이들 점심시간이어서요. 주소를 알려주시면 연락을 넣어드릴게요.”

“아니오,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마침 고아원 옆에 작은 놀이터가 딸려 있어서 거기서 기다리면 좋겠다 싶었다. 그는 벤치에 앉아서 아이들의 식사 시간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하루 세 끼 양식을 섭취하는 시간은 빈자에게나 부자에게나, 부모가 있는 아이에게나 없는 아이에게나 공평하게 찾아오는 시간이다. 그는 작은 몰리와 그곳에 있는 모든 아이들이 이 순간만큼은 안락하게 식사를 즐길 수 있기를 기도했다. 천지가 뒤집히고 도시가 쇠해도 세상에는 변치 않는 것이 있으며, 그런 고집스럽고 소소한 일상이야말로 계속 앞으로 나아가게 해주는 힘이었으니까.

기다리는 동안 콜린스는 습관적으로 담배를 물고 연기를 태웠다가, 담배가 새끼손가락 반 마디만큼 타들어나고 나서야 뒤늦게 옷에 담배냄새가 밸 거라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오 년 간 군대에 몸을 담다보니 담배가 물 다음으로 익숙한 생필품이 되었다지만, 아무래도 아이들 건강에는 별로 좋을 것 같지 않았다. 급히 흙바닥에 재를 비벼 끈 다음, 옷소매에 코를 박고서 냄새를 킁킁대는 사이, 오후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 다른 아이들이 마당으로 와르르 몰려나오는 가운데로 보육직원이 꼬마 몰리를 데리고 나타났다. 작은 빵모자를 쓰고 제 몸 만한 가방을 든 아이는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보다 차분해 보였다. 몸의 반을 차지하는 저 작은 가방 안에 필요한 짐을 구겨 넣느라 정신이 없었을 테다. 콜린스는 미리 연습한대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 몰리. 오랜만이제? 씩씩하게 잘 있었나?”

아이는 몸을 배배꼬며 입을 꾹 다물었다. 빤히 쳐다보는 몸짓을 보아하니 피하는 것 같진 않지만, 쉽사리 입을 열 것 같지도 않았다. 콜린스는 당황을 감추려 어색한 미소를 띠었다. 그는 무릎을 꿇고서 몸을 낮추어 앉았다. 눈높이가 맞자 잔뜩 힘이 들어가 있던 아이의 어깨도 조금은 부드러워졌다.

“그…… 아저씨네 고향에 놀러오기로 했었자나. 기억나나? 쪼금 늦었지마, 같이 갈래?”

작은 몰리는 망설이는 듯하더니, 잠시 후 보일 듯 말 듯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상으로 말을 꺼내기까진 용기를 모을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해 보였다. 콜린스는 재촉하지 않고 아이가 내켜할 때까지 기다렸다. 인내는 결과로 보답했다. 신발로 애먼 땅을 문지르기만 하던 몰리가 드디어 조그마한 목소리로 물었다.

“……송아지 아직 있어요? 폭탄에 맞았으면 어떡해요?”

긴장이 풀리면서 가벼운 웃음이 터졌다. 콜린스는 몰리의 이마를 살살 쓸어주며 답했다.

“스꼬뜰랜드 송아지들이 얼마나 씩씩한데. 그런 거 다 피해버렸다.”

웃음은 공포를 불식시키고 내일을 낙관하게 한다. 한결 따뜻해진 손을 잡고서 어른과 아이는 기차역으로 난 길을 걸었다. 철로는 그들을 언덕과 바람의 땅으로 데려다 줄 것이다.

 




15. 계절이 불시에 찾아들 듯

 

하나님이 어린이에게 준 최고의 선물은 그들의 놀라운 적응력이리라. 도시보다 한적하고 소박한 보더 주의 농장에서 작은 몰리는 빠르게 적응해 갔다. 물이 스며들 듯 자연스럽게 그곳의 생활에 익숙해졌기 때문에, 콜린스가 변화를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석 달이 훌쩍 흐른 뒤였다. 슬하에 자식이 생긴 이상 조부모님 집에 계속 얹혀 살 수는 없었기 때문에 콜린스는 동네 멀지 않는 곳에 집을 한 채 구했다. 그 동네의 흔한 주택답게 소박한 2층집이었지만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니 두 식구가 살기에 딱 좋은 장소였다.

날씨 좋은 초가을에는 볕이 잘 드는 창가에 앉아 몰리와 함께 보드게임을 하거나 장난감을 만들며 놀고, 낙엽이 내리는 오후가 되면 마당으로 나가 단풍과 은행잎을 모으며 놀았다. 시장에 나가 함께 장을 보고, 고장에서 나는 송아지 고기와 생선과 야채를 고르고, 그 재료들로 서투르지만 맛있는 요리를 해 먹는다. 긴 폭풍이 지나간 세계에는 작은 행복들이 도처에 널려 있었다. 이만하면 백수놀음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당분간은 마을 어르신들을 도와드리면서 연금을 주 수입원 삼아 지내기로 했다. 막 낯선 시골 생활에 정착한 몰리에게 온전히 에너지를 쏟아야 할 필요도 있었고, 여러 가지 작지만 중요한 일들로 일상을 뿌듯하게 꾸려가고 있으니 조급해 할 것은 없었다.

단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면 런던에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소식을 기다리는 시간이 점차 잦아들었다는 점뿐이다. 그러나 너무 많은 시간을 헛된 기대와 실망에 허비해야 했던 그에게는, 고향 생활에서 누리는 게으름이 달콤한 유혹 같았다. 달궈진 쇠도 물에 넣으면 식듯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집착과 미련도 시간의 무게 앞에서는 점차 흐려져 갔다. 게다가 적극적으로 소식을 찾으려 든다면 피하고 싶은 결말을, 원치 않는 부고를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마음 한 구석을 맴돌았다. 머리만 숨기고 완벽히 숨었다고 믿는 타조처럼, 어리석은 도피라고 해도 콜린스는 조금 더 이 나태한 무지에 감싸여 지내고 싶었다. 그 품에 안기면 두려움도 그리운 추억도 조금은 무뎌지는 기분이어서. 간혹 악몽이 찾아들 때는 자기암시와 몰리에 대한 책임을 변명으로 삼아서 다시 도망쳤다. 그는 소극적인 저항을 이어가고 있었다.

 


꼬마 몰리의 눈으로 보자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진다. 콜린스 아저씨는 적어도 처음 석 달 동안은 오랫동안 신문을 들여다보는 일이 잦았다. 재미있는 사건도 신기한 소식도 없는 신문의 한 면을 미동도 없이 들여다 볼 때면 아저씨의 젊은 이마에 짜글짜글 주름이 지고는 했다. 나이 차이가 크지 않아서 몰리의 삼촌이라는 소리를 듣기도 하는 아저씨였지만, 그럴 때면 너덧 살은 더 나이가 들어 보였다. 또 아저씨는 일주일에 서너 번 정도는 꼬박꼬박 시내의 신문사를 들락날락거리기도 했다. 저녁 시간에는 늘 라디오를 뉴스 채널에 맞췄고, 마치 기다리는 선물 상자가 있는 사람처럼 매일 매일 뭔가를 찾아 다녔다.

그러나 여기저기 들추고 다녀도 나타나지 않는 양말처럼 아저씨의 선물 상자도 오래토록 도착하지 않았고, 함께 산지 일 년을 채울 때 즈음엔 결국 숨은 상자 찾기를 포기한 것 같았다. 아저씨가 찾아다니던 선물의 정체는 알 수 없게 되었지만, 그 덕에 함께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길어졌기 때문에 몰리는 내심 기뻐했다. 신기한 말버릇을 가진 커다란 아저씨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다정하고 재밌었던 것이다. 여전히 가끔씩 밤이면 부모님이 보고 싶어서 울고 싶은 때가 있는데, 그럴 때면 다른 방에서 자던 아저씨가 조용히 나타나서 잠들 때까지 머리맡을 지켜주었다. 밤이 깊도록 침대 옆에 앉아서 꾸벅거리는 아저씨의 그림자는 꼭 어릴 때 읽었던 동화책의 곰인형처럼 듬직했다. 자는 틈에 아이들을 노리는 유령을 쫓아내는 마법에 걸린 곰인형처럼, 창문에 비치는 둥글고 너른 아저씨의 그림자를 보면 어떤 악몽 속에서도 안심할 수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제루샤의 키다리 아저씨보다 우리 아저씨가 키도 더 크고 더 세고 더 용감할 거라고, 몰리는 남몰래 우쭐했다. (실제로도 아저씨는 문짝만큼 컸다.) 그리고 그런 둘만의 시간에 아무런 변화도 없을 것이라고 철썩 같이 믿었다.

 





16. 반가운 소식 들려오리라

 

그날 저녁도 몰리는 아저씨와 함께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오늘의 메뉴는 토마토와 감자를 곁들인 연어구이. 아저씨가 약속했던 송아지 고기만큼이나 이곳 스코틀랜드에서 자주 먹는 음식이 연어였다. 연어로 할 수 있는 요리는 이미 열 가지도 넘게 먹어본 것 같지만, 그래도 아저씨와 함께 도란도란 식사를 준비하는 이 시간이 싫지 않았기 때문에 몰리는 얌전히 아저씨를 따랐다.

“오늘은 연어구이다! 야이!”

“야이~!”

힘차게 기합을 넣고 시작한 요리하기는 귀신처럼 착착 역할 분담이 나눠졌다. 몰리가 작은 손으로 깨끗이 토마토와 감자를 씻어서 체에 털어내면 콜린스 아저씨가 예리한 솜씨로 서걱서걱 야채를 자르고 다졌다. 예열해 둔 오븐에 손질한 재료를 차례로 넣고 구우면 맛있는 냄새가 솔솔 새어 나온다. 분홍색으로 먹음직스럽게 구워진 연어 옆에 깍둑썰기 한 구운 감자와 반달 모양을 낸 구운 토마토를 놓고 소금과 후추를 챱챱 뿌리면 완성.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조리법이 너무 단순하다고 야유할지도 모르지만, 그런 사람들에게는 콜린스 아저씨가 심플함이 바로 스코틀랜드 요리의 핵심이라고 가르쳐줄 테니까 상관없다.

둘이 함께 만든 저녁은 늘 그렇듯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꼬마 몰리는 꼬물꼬물, 콜린스는 호쾌하게 칼질을 한 보람이 있었다. 두 사람은 붉은 연어 살을 한 입 크기로 잘라서 입에 넣었다. 생선살 층층에 갇힌 육즙이 흐르면서 고소한 맛이 미뢰를 자극한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동시에 감탄이 흘렀다.

“크으~ 쫀득쫀득!”

“크으~ 쫀득쫀득!”

입맛으로 따지면 몰리는 이미 콜린스와 완벽하게 동화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같은 피를 타고 나진 않았지만 누구라도 그들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본다면 혈연사이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것이다. 정이 든다는 것은 그토록 강한 힘이었다.

고소한 풍미를 음미하며 차례로 두툼한 생선살을 격파하고 있을 때였다. 밖에서 초인종이 울렸다. 창문으로 보이는 하늘은 이미 노을도 넘어가고 푸릇푸릇한 회색이었다. 미리 정한 약속도 없다. 주말 저녁에 무슨 일로 찾아온 것일까? 콜린스는 의아해하며 몰리를 주의시켰다.

“아저씨가 보고 올 테니까 가만히 기다려.”

콜린스는 걸쇠를 잠근 채로 문 밖을 내다보았다. 손가락 한 마디만큼 열린 문틈 사이로 커다란 그림자가 비쳤다. 그곳에는 상상치도 못한 인물이 서 있었다. 집주인은 손에 힘이 풀린 나머지 문을 열지도 닫지도 못한 채로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허름한 꼴을 한 방문자는 미안한 목소리로 사정했다.

“늦게 찾아와서 미안해. 종일 온 동네를 뒤지고 다니느라…… 그, 들어가도 괜찮을까?”

콜린스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길어지는 침묵 앞에서 남자가 머쓱하게 덧붙였다.

“조부모님 댁으로 찾아갔는데, 여기로 옮겼다고 하시더라고.”

비로소 콜린스의 입술이 달싹였다.

“……입이 늘었는데 계속 얹혀 살 순 없잖슴꺼.”

그는 시선을 피하며 걸쇠를 풀었다.

무뚝뚝하게 열어주는 문틈으로 남자가 천천히 발을 들였다. 실내로 몸을 들이는 순간 그의 고단한 몸 주위로 온기가 훅 풍겼다. 벽돌로 지은 작은 난로 안에서는 기름으로 떼는 불이 타닥타닥 타들어가고 있었고, 현관에서부터 거실까지 이어지는 길 곳곳에 깔개와 쿠션이 깔려 있어서 푹신함을 더했다. 거실 벽 중앙에는 어린 아이의 솜씨 같은 액자가 앙증맞게 걸려 있었다. 앞서는 콜린스를 따라가는 동안, 남자는 그 모든 것을 놓치지 않고 꼼꼼히 관찰했다.

집이 그리 넓지 않았기에 거실에 서면 부엌과 식탁이 얼핏 보였다. 먹다 만 두 쌍의 식기, 식탁 아래서 꼼지락대는 짧은 다리. 파리어는 떨리는 손을 주머니 속으로 숨겼다. 콜린스는 낯선 거실에 그를 혼자 내버려두고서 레인지 앞에 서서 주전자에 물을 채우는 중이었다. 얼굴을 보여주지 않고 무뚝뚝하게 등만 보여주는 몸짓이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해보였다. 늦어도 너무 늦은 손님에 대한 불만과 화. 그리고 겨우 제자리를 찾은 일상에 다시 균열을 내러 온 불청객에 대한 야유.

떨어져 있는 동안 그가 어떤 인생을 살았을 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다만 집안 어디에도 여자의 흔적이 남아있지 않기에 현재는 아들과 단 둘이 살고 있다는 정도만 추측할 뿐이었다. 그렇게 콜린스의 삶을 제멋대로 재단하다가, 파리어는 번뜩 자신이 얼마나 무례하고 오만한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깨달았다. 이미 한참 전에 서로의 길이 어긋난 이상 서로의 생활에 참견할 어떤 권리도 존재하지 않는데. 연인이라는 명분을 방패삼아 그의 삶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던 시절은 오래 전에 지나가 버린 것인데.

파리어는 눈물이 샐 것 같은 것을 참으며 조용히 고했다.

“더 야위었네. 옛날에는 제때 끼니 잘 챙겼으면서. 나한테 식사 거르지 말라고 투덜거렸던 거 기억나? 그때 너 좋다던 아가씨랑 결혼 했더라면 고집 부려서라도 식사는 제대로 하게 했을 텐데.”

콜린스는 못 들은 척 주전자의 물을 따랐다. 침묵을 견디기 어려웠던 나머지, 파리어는 결국 참고 있던 질문을 털어놓고 말았다.

“그런데 왜 안 했어?”

“뭐를요?”

“결혼. 이런 말하기 창피하지만 난 아직 못했어. 너 같은 사람이 없었거든. 어째서 재혼하지 않았어?”

“아들이 생겼으니까.”

“그럼 더욱 했어야지. 혼자서 어떻게 다 감당해.”

그때까지 묵묵히 듣고 있던 콜린스였지만, 결국 마지막 한 마디에 폭발하고 말았다. 젊은 아버지는 근처에 아이가 있다는 것도 잊고서 주전자를 식탁에 쾅 내려놓으며 소리쳤다.

“미쳤슴니꺼 진짜? 눈이 삔 것도 아이고, 방금까지 아랑 밥 잘만 묵고 있던 거 안 보입니꺼? 내가 곯기는 뭘 곯아예! 못 먹어가지고 삐쩍 마른 건 그쪽이겠지예! 그리고 결혼이 아들 장난임니꺼? 밥 차려주고 빨래 해달라고 아가씨를 들여요? 그런 심뽀가 어딨슴니꺼 세상에? 독일놈들 땅에서 구르는 동안 양심도 거기 놓고 왔어라.”

그러고도 콜린스는 한참을 씩씩대다가 분에 못 이겨 팩 쏘아 붙였다.

“나 좋다고 따라다니던 아가씨들도 대이님 이후로 다 떨어져 나갔어라!”

순한 인상에 가려서 종종 잊어버리는 사실이지만, 화를 낼 때의 콜린스는 무시무시했다. 높아지는 언성을 따라서 안 그래도 커다란 덩치가 짐승 털처럼 부풀고, 날카롭고 억센 억양으로 빠르게 몰아붙이고, 장난기 어린 음색은 걸걸한 사자후로 변한다. 그러나 스치듯 지나간 대답 속에서 꿈같은 소리를 들은 파리어의 귀에는 전혀 가닿지 않았다. 그는 이기적인 질문이란 걸 알면서도 용기를 내어 물었다.

“친아들이 아니었어……? 결혼한 게 아니었어?”

“대이님 진짜로 이기적인 사람이어라.”

푸른 눈 위로 허망한 빛이 떠올랐다.

“오 년 반 동안 소식 한 번 없다가 처음 만나서 하는 말이 그 소립니꺼? 아니면 일부러 속 좀 썩여보라고 그러는 검미꺼? 예? 내가 대이님 찾으러 가지도 않고 여기로 숨어버렸다고 돌려서 화내는 거냐꼬예!”

분을 삭이지 못해 씩씩거리는 얼굴에는 벌써 눈물자국이 흘렀다. 난생 처음 콜린스의 우는 모습을 목격하게 된 파리어는 당황해서 발을 동동 굴렀으나 적당한 말을 찾을 수 없었다. 한참 연상인 그가 어린애처럼 안절부절 못하는 사이, 정작 콜린스는 대위의 당황 따윈 안중에도 없이 참고 참아 온 속내를 미사일처럼 터뜨릴 생각으로 가득했다. 이 바보 천치 같은 윙맨의 답답함을 돌로, 주먹으로, 바위로 아주 시원하게 깨부수고 싶었다. 콜린스는 토끼처럼 붉어진 눈을 거칠게 닦아내며 빠르게 쏘아붙였다.

“어떻게 시간이 흘러도 변한 게 하나도 없어야? 결혼했다꼬 하면 또 홀딱 젖은 강새이마냥 음침해가지고 질투할 거면서, 왜 결혼 소리를 꺼내냐꼬예! 왜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냐꼬예! 지가 신신당부했잖아예…… 한 번만이라도 좀 솔직해져 보라고……”

너무 흥분하는 바람에 마지막 말은 뭉개져서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신경이 곤두 선 파리어의 청각에는 혼잣말처럼 작은 그 소리가 헛되이 흘러가지 않았다. 까맣게 타버린 줄 알았던 혈관으로 다시 피가 흐르는 기분이었다. 발을 내딛을지 말지 고민하느라 망설이고 있는 그 태도를 보고서 콜린스가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지긋지긋한 잉글랜드인 같으니라고.”

“흔적도 안 남기고 사라진 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어떻게 한 마디도 안 지는기라!”

그렇지만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기에 처음으로 콜린스의 어깨가 작게 움츠렸다. 이 대화는 아주 길어질 게 틀림없었다. 그는 바짝 얼어서 두 어른의 대화를 멍하니 구경하고 있던 아이 쪽으로 몸을 틀었다.

“몰리야, 니 먼저 올라가 자라. 설거지는 아저씨가 할 테니까, 응. 양치 꼭 하고 얼굴도 깨끗이 씻고. 내일 아침에 검사할 테니까 꾀부리지 말어.”

“아저씨, 나두 같이―”

“응, 안 된다. 올라가라 언능.”

사슴 같은 눈망울에 흔들리지 않고 단호하게 잘라내는 모습이 제법 경험이 쌓인 아버지 같았다. 제가 없는 사이에도 그는 계속 자라고, 변화하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던 것이다. 파리어는 코앞에서 콜린스의 분노가 터지고 있는 무지막지한 상황이었음에도 긴장이 풀리는 걸 멈출 수 없었다. 그는 풀어지려는 표정을 힘을 줘서 참았다. 콜린스는 아이가 이층으로 올라가는 것을 톡톡히 확인하고 난 다음, 다시 파리어를 똑바로 쳐다보며 일갈했다.

“아한테 싸우는 꼬라지를 보여줄 순 없으니까 참았지마는, 대이님은 나 좀 따라오소. 우리 사이에 할 얘기가 좀 많은 것 같아예. 밤을 홀딱 새는 한이 있더라도 결판을 내야겠어라. 그 음숭수레한 모냥을 이번에 싹 고쳐놔야지 안 그럼 평생 속 썩이고 살게 생겼으니까!”

콜린스가 큰 걸음으로 한 번에 두 단씩 계단을 올라가며 별렀다. 파리어는 대꾸하지 않고 조용히 뒤를 따랐다. 그를 따라 방으로 들어가려던 찰나, 연하의 남자가 문득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팩 돌리며 소리쳤다.

“생각해보니 이제 대이님도 아니네! 지도 대이로 전역했어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씨근대는 모습이 진심으로 억울해 보여서, 파리어는 현명하게 침묵을 지키기로 했다. ‘한 번 선임은 영원히 선임’이라고 구닥다리 같은 소리를 해봤자 화만 돋울 것이 분명했기에. 마지막으로 확인한 창문 너머에선 캄캄한 능선 위로 별이 뜨고 있었다.

 


몰리는 갑자기 나타난 아저씨가 누군지, 왜 우리 집에 왔는지, 앞으로 계속 같이 지내는 건지, 궁금한 점이 너무나 많았다. 그렇지만 그날 하루 너무 많은 일을 겪은 참이었기에 이른 저녁부터 잠이 쏟아졌다. 수마에 굴복한 소년은 오늘은 일찍 잠자리에 들라는 콜린스 아저씨의 말을 따라서 터벅터벅 아이용 침실로 올라갔다. 방 안으로 들어가기 직전, 맞은편 복도에 서 있는 아저씨가 보였다. 아이는 무거운 눈꺼풀을 비비며 물었다.

“흉터 아저씨는 어디서 자요?”

콜린스 삼촌은 낯선 칭호가 이상했는지 어리둥절해 하다가, 이내 의미를 깨닫고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응, 오늘은 삼촌 방에서 같이 잘 거야.”

“계속 같이 있는 거예요?”

콜린스 삼촌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삼촌은 대답 대신 몰리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방으로 들여보냈다.

“잘 자라, 몰리.”

몰리는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고 잘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꿈나라로 빠져들기 전, 가물가물한 정신으로 생각했다. 눈을 뜨고 나서도 아저씨가 계속 우리 집에서 지내면 좋겠다고.

 

*

 

지난 밤 일찍 잠자리에 든 덕분에 몰리는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눈을 떴다. 창살 틈으로 들어오는 빛은 신새벽의 푸른빛이었다. 다시 잠이 찾아오기를 바라며 이불로 고치를 틀고 꿈지럭대보았지만, 그 놀이도 얼마 안 가서 지루해졌다. 좀이 쑤신 아이는 그만 침대에서 일어나기로 했다. 아이는 타박타박 작은 발소리를 내며 일층으로 내려갔다.

이맘때면 잠이 적은 콜린스 삼촌이 일찍부터 집안 여기저기를 바지런히 돌아다니는 소리가 나야 하는데, 사방이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살금살금 발소리를 죽이고 온 집안을 쏘다녀봤지만, 부엌에서 물 끓이는 주전자 소리도, 거실의 난로에 연료를 새로 집어넣는 소리도, 달그락달그락 그릇 씻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저씨는 이른 새벽부터 밖에 나간 것일까? 그러자 혼자 남았다는 생각이 들면서 소년의 가슴이 빠르게 뛰었다.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콜린스 삼촌의 얼굴이 무척이나 그리워져서, 소년은 아직 온기가 남아 있을 삼촌의 방으로 뛰어올라갔다. 경첩이 끼륵거리는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작은 침대 위에는 두 어른이 나란히 겹쳐 있었다. 푹 곯아떨어진 콜린스 삼촌과 그 아래 깔린 새로 나타난 아저씨의 모습을 확인하고 나서야 몰리는 비로소 어제 저녁의 일을 기억해냈다. 삼촌이 아저씨에게 매우 화가 나 보였다. 그렇게 좋아하는 연어 요리도 마다하고 벌떡 일어서서 삿대질을 하길래 심각하게 싸우지는 않을까 겁이 났는데, 화해했구나. 사이좋게 곤히 잠든 두 아저씨를 보니 다행이었다.

몰리는 새로 나타난 흉터 아저씨─팔과 목 이곳저곳에 검은 잉크로 신기한 그림을 그려놓아서 그런 별명을 붙였다─가 궁금해져서 살금살금 침대 가까이로 다가갔다. 흉터 아저씨는 콜린스 삼촌보다 조금 더 나이 들어 보였고 몸에 검은 색 그림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으며, 키는 콜린스 삼촌보다 조금 작았다. 안 그래도 작은 아저씨 위에 콜린스 삼촌의 길쭉한 팔다리가 철푸덕 엎어져 있어서 좀 무거울 것 같았다.

게다가 콜린스 삼촌이 베개를 끌어안듯 온몸으로 흉터 아저씨를 꽉 얽어매고 있었기 때문에 더 숨 가빠 보였다. 사지로 아저씨를 꽁꽁 잡아가둔 삼촌의 모습은 꼭 기둥을 타고 오르는 억센 등나무 줄기 같았다. 그러나 그 줄기에 깔린 아저씨의 표정이 너무 편안해 보였기 때문에 몰리는 곧 걱정을 덜었다. 짧고 희끄무레한 수염이 난 아저씨의 얼굴에는 더 이상 어젯밤 현관문을 두드렸을 때의 지친 기색은 남아 있지 않았다. 피로가 가시고 나자, 적당히 하얗게 샌 새치 때문에 모험을 마치고 돌아온 멋진 나그네 같기도 했다. 그런 아저씨를 꼭 끌어안고서 새근새근 잠든 삼촌의 모습도 평온해 보였기 때문에 몰리는 완전히 걱정을 내려놓았다.

몰리는 자리를 옮겨 콜린스 삼촌 곁으로 다가갔다. 둥지처럼 이리저리 뻗은 노란 머리터럭을 손가락 사이에 넣고 비벼보았다. 민들레 솜털처럼 부드러웠다. 마지막으로 콜린스 삼촌이 잘 숨을 쉬고 있나 확인한 다음, 소년은 들어왔던 그대로 조용히 발걸음을 물려 삼촌의 방을 빠져나갔다.

간밤에 슬픈 일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내일도, 모레도 아픈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긴장이 풀린 몰리는 거실 소파에 가로 누워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뻐꾸기시계가 여덟 시를 알리는 소리를 냈다. 창틈으로 드는 햇살은 따스한 노란 빛을 띠고 있었다.

 





17. 후일담

 

“……그렇게 해서 콜린스 삼촌과 파리어 아저씨, 두 분과 같이 살게 된 겁니다. 그 뒤로 지금까지 이십 년을 함께 보더 주의 작은 카운티에서 지냈어요. 소학교와 중등학교를 모두 그곳에서 나왔지요. 글래스고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고 나서야 처음으로 떨어져 살았습니다.”

“그전까지는 두 분이 몰튼 씨의 부모님이셨던 셈이군요. 혈연이 아니었는데도요.”

“포궁의 양수보다 함께 나눠 마신 술잔의 피가 더 진하다는 말이 있죠. 두 분은 누구보다도 헌신적이고 고마운 부모님이었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거고요. 제 인생에 찾아온 최고의 행운이었던 걸요.”

단호하게 말하는 몰튼 씨의 얼굴에는 추호의 의심도 어려 있지 않았다. 그건 마르지 않는 사랑을 받고 자란 사람한테서 발견할 수 있는 종류의 온화한 얼굴이었다. 그가 두 남자에게서 받고 자랐을 사랑의 깊이를 짐작하기만 해도 덩달아 마음이 따스해지는 기분이었다. 기자는 부러움을 담아 푸근하게 말했다.

“두 분에 대해 좀 더 들려주시겠어요? 부모님께서 어떻게 몰튼 씨를 길러주셨는지 말예요. 그 당시에는 이웃들 분위기가 호의적이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확실히 어두운 시기였습니다. 두 분께 특히나 어두운 시기였어요. 전쟁이 끝나고 십 년 동안은 동성애자들에 대한 탄압이 거의 마녀사냥 수준이었으니까요. 이웃들은 아직 결혼을 안 한 옆집 남자나 여자가 친구와 둘이서만 산다 싶으면 의심을 했고, 달 걸러 한 번씩 경관이 찾아오고…… 운이 나쁘면 실제로 구치소에 갇히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징역을 사는 사람도 있었고요. 다행히 저희 부모님은 단속을 전부 피해가셨지만요.”

“아, 베테랑이셨잖아요. 아무리 보수적인 경찰이라도 훈장까지 받은 호국 영웅을 건드릴 배짱은 없을 겁니다.”

농담을 들은 몰튼 씨는 조금 망설이는 표정이었다.

“사실, 종전하고 전역한 이후로 두 분은 다시는 군으로 돌아가지 않으셨습니다. 제 친아버지께 했던 말, 말뚝 박을 생각이 전혀 없다는 말은 진심이었던 거죠. 돌아가면 교관은 맡아놓은 자리나 마찬가지라고 옛 전우들이 회유도 많이 했지만 끝까지 거절하셨어요. 진짜입니다. 저희 집에선 십자훈장도 다락 옆 화장실 가는 길에다 덜렁 걸어놓고 말았는 걸요! 소학교 시절 제가 받았던 개근상 옆에 나란히,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요.”

그 대목을 말하는 몰튼 씨의 눈에는 먼 과거를 회상하는 듯 아련한 기운이 떠올랐다. 덩달아 그리운 기분이 된 기자는 부드럽게 읊조렸다.

“이야기로만 전해들어도 정말 두 분을 사랑하셨다는 게 느껴져요.”

“그렇습니다. 제 친부모님 만큼이나…… 아니, 때로는 그보다 더 많이 사랑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많이 그리우시겠어요.”

“항상 그렇지요.”

“이젠 만날 수 없어도 두 분은 기억에 남아서 계속……”

“예?”

“예?”

몰튼 씨의 추임새에 기자도 덩달아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한쪽으로 고개를 갸웃하는 몰튼 씨를 보고 나서야 기자는 대화가 어딘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사전 조사한 질문지를 서둘러 훑으며 말했다.

“저어, 양친께서 돌아가신 게 아니었습니까? 취재진에서 연락했을 때는 더 이상 연결이 닿지 않는다고 들었는데요……”

“그건 콜린스 삼촌이 워낙 이런 일을 번거로워 하셔서 일부러 피하신…… 세상에, 오해가 있었군요. 두 분은 멀쩡히 잘 살아계십니다. 아직 마흔다섯, 쉰다섯밖에 안 먹으셨는 걸요!”

기자는 놀라서 물었다.

“예? 그럼 지금은 어디에 계신 겁니까? 왜 몰튼 씨가 대신 인터뷰에 응하신 거죠?”

몰튼 씨는 담담히 무릎을 두드리며 대답했다.

“낚시 여행을 가셨습니다. 연례행사죠.”

 

*

 

“아이스박스에 귤 남은 거 있어요?”

“내가 까줄게, 기다려, 기다려!”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 아이스박스를 뒤지는 손길이 불안했는지, 파리어가 얼른 대신 귤을 찾아서 꺼냈다. 껍질을 곱게 까고 하얀 속껍질까지 가지런히 떼어낸 다음, 한 입 크기로 뜯어서 콜린스의 입 속에 쏙 집어넣어준다. 혀만 빼꼼 내밀고서 넣어주는 대로 낼름낼름 과육을 삼키는 콜린스의 표정은 몹시 만족스러워 보였다. 그는 입 안에 퍼지는 달콤한 신맛을 음미하며 입술을 우물거렸다.

“히야, 귤 맛이 제철이네예. 나이든 대이님이 까주니까 더 맛있어라.”

“나도 젊은 대위가 대신 운전해주니까 편하네.”

“헿”

인상을 찌푸리는 척 해도 콜린스가 자기 운전 실력에 자부심이 크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나 파리어나 비행기를 몰고 다닌 것은 똑같은데, 떨어져 지내던 몇 년 사이 실전 짬 좀 쌓였다고 운전부심이 생긴 것이 분명했다. 뭐, 덕분에 장시간 여행길을 운전 피로 없이 이동하게 되었으니 파리어로서는 고마운 일이다. 예나 지금이나 선임한테 운전을 시킬 수는 없는 법이라면서 운전대를 쏙 차지하는 콜린스가 퍽 귀엽기도 했고.

불혹을 훌쩍 넘은 나이에 운전대를 놓고 고집을 부리는 사십 오세나, 지천명의 나이에 그것을 보고 귀엽다고 생각하는 저나 별반 다를 것은 없다. 이십 년이 넘는 세월을 함께 걷다 보니 의식하지 않아도 세세한 점까지 서로 닮아가고, 작은 손짓 하나 버릇 하나까지 자연스럽게 물이 든다. 사반세기를 함께한 사이라면 으레 그렇게 변해가는 것일 거라고, 파리어는 십 년은 더 전부터 납득한 참이었다.

사이좋게 나란히 귤을 까먹던 중, 콜린스가 문득 기분이 좋아졌는지 운전대를 잡은 채로 엉덩이를 이리 씰룩, 저리 씰룩, 기지개를 폈다.

“아 다 키우고 나니까 지짜로 편하긴 편하네예! 걱정 없이 는실는실 놀러도 다니고~”

“연금 생활의 매력이지.”

“우리는 두 사람이 복무했으니까 연금도 두 배~”

“젊을 적에 실컷 구른 게 영 소득 없진 않았네.”

연금 타령에 추임새가 붙으면서 콜린스가 점차 신이 나는지 있는 대로 악셀을 밟을 기세였다. 시골이라지만 요샌 국도에도 감시카메라를 다는 세상이다. 어마어마한 액수의 청구서가 날아올 것이 걱정된 파리어는 운전대를 잡고 있는 콜린스 손 위에 자기 손을 얹고선 가만히 진정시켰다. 손을 감싸는 체온이 닿고 나서야 비로소 머쓱했는지, 콜린스가 ‘큼큼’ 목을 풀며 화제를 돌렸다.

“몰리는 집 잘 보고 있겠지야? 휴가라고 너무 붙들어 놓은 건 아닌가 몰라?”

“우리보다 더 잘 보고 있을 텐데 뭘. 취재도 대신 해주고, 잘 키웠지.”

“에잇, 그까이꺼 그냥 거절하면 될 것을 가는 애가 너무 착해서, 에그.”

콜린스는 맘에 들지 않는다는 듯 툴툴댔다. 뒷맛이 쓰다는 듯 한참 입을 우물거리고 있는 것을 파리어가 위로했다.

“다 컸으니 자기 판단대로 알아서 하겠지. 쳐낼 건 쳐내고 답할 건 답하고. 운전이나 하지 그래. 앞에 신호 들어온다.”

“걱정 마이소. 삼십 년 운전 경력 중에 속도는 좀 내도 신호는 칼 같이 지킨 거 아입니까. 그걸로 훈장도 받고, 응.”

“낚시도 그만큼 잘 하면 좋을 텐데.”

매해 연어 낚시를 가지만 매번 대어를 낚는 데는 실패했던 쓰라린 추억을 곱씹으며 파리어가 중얼거렸다. 그래도 최근에는 눈꼽만큼이나마 실력이 발전해서 작고 힘없는 녀석을 골라 낚는 정도로는 향상됐다. 예순이 지나기 전에 직접 낚은 연어 한 마리로 구워도 먹고 쪄서도 먹고 훈제해서도 먹는 꿈같은 날이 오기는 올 것인가. 양심은 회의적인 의견을 내놓았지만 파리어는 구태여 말로 꺼내진 않기로 했다. 현인들 말씀처럼 낚시의 본질은 명경한 마음과 고요한 정취에 있는 것이지 결과에 연연하는 것이 아니니까…… 아직도 자기가 맨손으로 사슴을 때려잡고 생선을 낚아채는 조상의 기상을 간직하고 있다고 믿는 스코틀랜드인한테 딴지를 걸어봤자 별 소용은 없을 테니까……

그래도 콜린스도 양심은 있는지 목덜미를 새빨갛게 붉히며 부끄러워했다.

“아, 언제적 얘기를 자꾸만 꺼내고 그래요. 이번엔 진짜 잡을 겁니더. 킬트도 입어주고 산도 탔으니까 이것만 성공하면 이제 약속은 다 지키는 거라. 내 한 번 한 약속은 꼭 지키는 사람입니더. 대이님도 알지예?”

“알지. 잘 알지.”

가망 없는 대어 낚기 대신에 킬트나 한 번 더 입어주면 좋으련만, 차마 말 못할 생각을 하며 파리어는 영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으로는 연어 구이를 먹자고.”

“헤헤. 입맛까지 닮은 거 보소. 역시 천생연분이라니까!”

한결 기분이 풀린 콜린스가 어깨를 들썩이며 휘파람을 불었다.

사실 학습된 정답이라는 사실은 무덤까지 지고 갈 비밀이다. 그래도 저리 좋아하니 무엇이든 괜찮은 기분이었다. 파리어는 이제는 조금 색이 하얗게 바랬지만 여전히 리트리버처럼 복슬복슬한 머리통을 한껏 흐트러트리며 웃었다. 그리고 남은 여로를 함께 할 동반자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나이 드는 것도 꽤 나쁘지 않은 일이로구나.’

가슴에 물들었던 멍들은 푸른 젊음. 이제 남은 삶은 덤. 그 덤이 젊음보다 감사한 덤이 될 것임을, 나이든 퇴역 군인은 흔들림 없이 믿기로 했다.





+) <주님 인류의 아버지 Dear Lord and Father of Mankind>는 어톤먼트 삽입곡 Elegy for Dunkirk에서 오마주 한 송가.

++) 끝낼 수 있어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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