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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톨비] 사람의 아들 1

톨비쉬가 밀레시안을 만나기까지



* 달리다가는 넘어질 것 같아서 천천히 쓰기로 했습니다.

* g19~21 스포일러, 원작 외 설정 다수

* 초고. 수정은 시간 나는 대로 틈틈이. 

*덧붙이는 말은 맨 아래에. 




1. 

“톨비쉬님은 누굴 사랑해본 적 있으세요?”

어린 신도가 물었을 때, 톨비쉬는 질문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기도를 드리려고 들었던 묵주를 다시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아이의 마음을 헤아려보려는 듯 찬찬히 눈을 맞췄다.

“무슨 뜻이니?”

보석처럼 빛나는 하늘색 눈이 제 얼굴을 또렷이 바라보자, 아이는 어쩐지 쑥스러워져서 보드라운 뺨을 옅게 붉히며 말했다.

“소설에 나오는 것처럼 깊은, 아주 깊은 사랑을 해본 적 있으세요?”

열렬한 빛을 띠고 올려다보는 아이의 기대에 부응해주고 싶었지만, 톨비쉬는 여전히 질문의 뜻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는 재촉하지 않고 천천히 대화의 실마리를 풀어나갔다. 톨비쉬는 일부러 속도를 늦추며 아이가 한 질문의 의미를 되물었다.

“책에서는 사랑이 무어라고 하던?”

무릎을 굽혀 아이와 눈을 맞추고, 아이의 입에서 나올 한 마디 한 마디에 귀를 기울이는 모습에서 타고난 깊은 인내가 비쳤다. 아이는 그 인자한 눈빛에 힘입어 제가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차례차례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 사람을 생각하면 마음이 포근해지고 온유해지는 마음이요. 어둡고 깜깜한 밤중에 서 있어도 그 사람을 생각하면 가슴이 따뜻해지고 다시 웃을 수 있게 되는 마음. 험한 골짜기에 갇혀서 꼼짝할 수 없을 때 그 사람을 생각하면 두려움도 안개처럼 사라지고 용기가 난대요. 그래서 이 세상에서 나는 외톨이가 아니라 늘 그 사람이 곁에 있음을 알게 되고, 나도 그 사람을 위해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마음이 사랑이래요.”

아이의 설명을 들은 톨비쉬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다면 나는 아튼 시미니 님을 사랑하는 거로구나. 어두운 골짜기를 걸을 때 다시 용기를 내게 하시고, 슬프고 고통스러울 때 다시 웃음 짓게 하시는 분은 내게는 오직 아튼 시미니 님뿐이니 말이야.”

조곤조곤 대답하는 사제님의 얼굴이 너무나 온화했기 때문에 아이는 어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차마 반박할 수 없었다. 낙원의 주민으로 태어나 아발론에 살고 있는 이상,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과 향기로운 것들을 만드신 분은 아튼 시미니 님이라는 진리를 아이는 가슴 깊이로부터 믿고 있었다. 그러나 아이가 읽었던 많고 많은 연애소설에서 아튼 시미니 님이 주인공이었던 적은 없었다. 주님은 은혜로운 분이지만 아무도 그분의 모습을 본 적이 없고 그분의 그림자나마 밟아본 적이 없으니, 아튼 시미니 님이 누군가와 포옹을 하거나 입맞춤을 하는 장면은 상상되지 않는 일이었다. 톨비쉬님은 아튼 시미니 님을 직접 만나본 적이 있는 걸까? 아니면 제가 사랑해 마지않던 그 소설들이 틀린 걸까?

이런 혼란에 사로잡혀 끙끙대던 아이는, 결국 민망함을 참지 못하고 자리를 피했다.

“그게 아니고…… 그게…… 아니라…… 으, 죄송해요, 톨비쉬님!”

황망하게 고개를 휘젓더니 바람처럼 뛰쳐나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톨비쉬는 멍하니 지켜보았다. 분명 차근차근 잘 대답했다고 생각했는데, 사춘기를 막 겪기 시작한 소년소녀의 심리는 도통 감을 잡을 수가 없다. 자신도 어렸을 때는 저리 변덕스러웠을지 궁금해 하던 차였다. 뒤에서 묵직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한 그림자는 톨비쉬의 곁에 멈춰서더니 웃음기 섞인 어조로 그를 타박했다.

“단장님은 정말로 사람의 마음을 모르십니다.”

“내가 뭘?”

톨비쉬가 되물었다. 두터운 눈썹을 찌푸리는 그 모습에서는 한 치의 반성도 느껴지지 않았다. 부단장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신실한 것도 좋지만 가끔은 사람의 마음도 헤아려 달란 뜻입니다. 저 애는 연애 얘기를 하고 있지 않았어요?”

“남녀 간의? 그런 것이라면 나한테 물을 게 아니라 자네한테 상담을 하는 게 나을 뻔했군.”

“저맘때 애들은 제 눈이 보기에 아름답고 예쁜 것들에 홀리는 법이니까요. 저처럼 산적 같은 인상보단 반짝반짝 빛나는 단장님 쪽에 끌렸겠지요.”

“허.”

‘반짝반짝 빛나는 단장님’은 짧게 혀를 차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얼굴빛 하나 바뀌지 않고 요지부동인 그 엄숙한 표정을 보자, 부단장은 어쩐지 약이 올랐다. 그는 반쯤 심술부리는 심정으로 항간에 떠도는 소문을 꺼냈다.

“가끔은 바깥에 떠도는 소문도 찾아보고 그러십쇼. 자기에 관한 소문이 어디서 어떻게 떠돌아다니는진 누구라도 모를 일이니까요. 사람들이 단장님더러 인간이 아니라 석상의 천사가 살아난 것 같다고 떠들더군요.”

천사라는 단어를 듣자 톨비쉬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주신은 제일 먼저 팔리아스와 삼신(三神)을 창조하고 그 밖의 하위 신들을 만드신 다음, 마지막으로 에린과 인간을 빚으셨지만, 그 어디에도 천사라는 존재를 계획하신 적은 없었다. 최초의 인간으로서 창조의 과정을 곁에서 지켜봐온 톨비쉬로서는 꺼림칙한 미신이었다. 그는 천사라는 존재는 미신에 지나지 않으며 그런 미신에 사람들이 현혹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라며 염려를 표했다. 물론 부단장은 귓등으로 흘러 넘기며 코웃음을 쳤다.

“자, 이러니까 사람의 마음을 모른다는 겁니다. 단장님은 신앙심이 너무 돈독해서 인간의 사랑은 모를 것만 같다는 소문이 이미 사람들 머릿속에 콱 박혔다고요. 직접 들은 말들을 그대로 옮겨볼까요? 우리 단장님은 주님을 바라보는 마음이 너무 신실해서 꼭 천사 같아. 그 아름다운 용모도 천사이기에 받은 축복일 테지.”

“세상에.”

기겁하며 탄식하는 톨비쉬를 못 본 척, 부단장은 상관을 둘러싼 시구를 짓궂게 읊어댔다.

“금빛 머리는 팔리아스의 황금을 녹여 뽑아낸 실 같고, 백옥처럼 하얀 피부와 온화한 물빛 눈동자, 한 곳 한 곳이 성서에 나오는 진귀한 보석을 빚어 만든 것 같아. 질투와 탐욕과 시기를 모르는 얼굴은 태양처럼 생기 넘치고, 만군의 적을 앞에 두어도 두려움에 떨지 않지. 방패를 치켜 든 강건한 자세는 백악의 성벽처럼 단단하니, 당신은 저 석상에서 깨어난 천사이리까?”

“낯 뜨거워서 들어줄 수가 없군!”

목덜미를 붉힌 채로 곤란스레 눈길을 내리는 모습을 보고난 뒤에야 부단장은 놀리는 것을 그만 뒀다. 저보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그의 상관은 오랜 시간 적지 않은 시련 속에서 무두질되고 단련되었으면서도 아직 무른 곳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부단장을 비롯한 아발론의 많은 이들이 그의 그런 점을 사랑했다. 부단장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만큼 단장님을 경애하고 있다는 뜻일 테니 좋게 생각하십쇼.”

“하지만 금발벽안인 사람이야 저잣거리에 나가면 널리지 않았어?”

동의를 구하는 단장의 얼굴이 태양처럼 순진무구했기 때문에 부단장은 조용히 하고픈 말을 삼켜야했다. ‘금발벽안이야 널렸지만 금발벽안인 미남은 널리지 않았죠.’ 토를 달고 싶은 것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으나, 초승달처럼 곱게 접히는 눈이 한 치의 의심조차 품지 않고 있었기에, 그는 결국 말을 아꼈다.


*

이처럼 톨비쉬는 자신의 외모를 언급하는 풍문이며 칭찬을 들을 때마다 겸손하게 고개를 숙였지만, 자신의 타고난 용모를 부정하거나 부끄러워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눈코입과 손가락 하나, 머리카락 한 올에 이르기까지, 그의 살점과 핏줄에 이르기까지 아튼 시미니 님께서 빚어내신 창조의 기적임을 아는 이상, 그것을 부끄러이 여긴다는 건 이 신실한 남자의 상념 속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약한 인간의 마음이 세속적인 아름다움을 흠모하는 말들에 현혹되지 않도록 자기 안의 자만과 허영을 단속할 뿐, 그가 주님이 주신 자신의 육체를 미워하거나 아쉽게 여길 리 없었으니까.

다만 세속의 칭찬과는 별개로, 톨비쉬는 사람들이 자신의 용모가 아름답다고 하여 감탄 이상의 감정을 품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때때로 자신을 마주하는 신자들의 눈빛 속에서 은근한 열기나 정열을 느낄 때마다 의문과 호기심이 일었다. 동요하는 심리는 타고나기를 차분한 표정 뒤에 숨기면 되지만, 어떻게 신에게나 품을 법한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느낄 수 있는지, 그 질문만은 뿌리치기가 어려웠다. 다른 사람들이 서로의 용모를 아끼고 귀애하며 사랑에 빠지는 것을 볼 때마다, 직접 결혼 서약에 입회할 때조차, 기사는 그 또한 주신께서 축복하는 일임을 알면서도 자신이 직접 그러한 열정에 빠지는 미래는 상상할 수 없었다.

기이한 일이었다. 소녀의 말대로 사랑이 누군가를 그리고 동경하며 흠모하는 마음이라면 그것은 응당 신에게서나 찾을 법한 감정이었다. 신을 사랑하는 마음이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변질된 것일까? 완전하신 신을 사랑하기에 지친 나머지 한결 수월한 지상의 사랑을 택한 것일까? 질문을 곱씹던 끝에 기사는 나름의 답을 구했다. 만약 신을 사랑하는 것에 지쳐 택하는 것이 인간의 사랑이라면, 자신은 절대로 지치는 법이 없으리라고. 세상 사람들이 신앙을 포기하고 인간의 사랑을 택하더라도 자신만은 절대로 그분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주신이 그를 포기하지 않으니 그 또한 주신을 포기하지 않으리라. 육체의 열정을 모르고 성애도 모르는 남자는 오만하게 자부했다.

그래서 여느 때처럼 기도를 올리기 위해 성소를 찾았을 때, 톨비쉬는 확신에 차서 읊조렸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주님을 잊고 인간의 사랑을 탐할 지라도 저는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겁니다. 나를 빚으시고 나를 이끄는 분은 오직 한 분. 내 머리를 뉘이고 편히 쉴 곳도 오직 주님의 무릎뿐이니 나는 영원히 그 곁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흔들림 없는 고백을 올렸을 때, 그의 주님이 침묵에서 일어나 대답했다.

“사랑하는 아들아, 너는 사람의 아들이다. 내가 네게 영과 숨을 불어넣었으나 흙으로 만든 육신과 부모의 혼을 빌려 네가 이 세상에 섰으니, 너는 사람의 사랑을 알고 인간의 길을 걸을 것이다. 네 눈에 너를 빚어낸 내가 어떻게 비치더냐? 너의 주님은 질투하는 주님도 복수의 주님도 아니고, 오직 사랑과 지혜의 주님이라.”

예기치 못한 응답을 받은 톨비쉬는 놀라서 머뭇거렸다. 충성스런 제 마음이 의심받는 것일까 두려웠던 기사는 애타는 마음으로 매달렸다. 신 앞에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린 채 간청했다.

“나의 주님, 어찌 그런 이야기를 하십니까? 어머니의 배를 빌려 이 땅에 태어나 눈을 뜬 이후로 단 한 번도 제 창조의 근원을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세상의 비밀이신 주님을 알게 된 이후로 사람의 일이며 번잡한 속세에는 눈이 멀어버렸습니다. 지금도 이렇게 에린의 대기를 빌어 숨 쉬고 있는데 그 근원을 잊을 수가요. 생명을 만드신 분이 당신이니 영원히 당신을 사랑할 수밖에요. 지고한 주님을 경애하게 되었으니, 이제 제 심장에는 어느 한켠에라도 인세의 정열이 끼어들 자리는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나는 영원히 이곳에, 나의 사랑하는 주님이 빛을 내려주시는 이곳에 머무르리다. 당신의 한량없는 은총 안에서 세세토록 머무르리다.”

호수처럼 잔잔하던 푸른 눈 위로 열렬한 파도가 몰아치고, 법열에 휩쓸린 몸은 애정을 갈구하듯이 쉴 새 없이 떨었다. 그 넘실거리는 애정, 충성스런 경애를 받고서 절대신은 고했다.

“너는 사람의 아들이다. 회한과 고통이 네 앞길에 찾아들고 너는 그 속에서 분노하고, 좌절하고, 원망하고, 회의하며 방황할 것이다. 한없이 기꺼운 마음으로 그 여로를 걸으려무나. 나는 그렇기에 네게 그 이름을 주었다.”

불가해한 축복을 받은 톨비쉬는 어찌할 줄 몰라서 시선을 헤매다가, 결국 주인의 옷자락에 안겨 얼굴을 숨겼다. 그리고 부모의 마음을 달래려는 아이처럼 ‘이제 그런 이야기는 마시고 즐거운 이야기를 들려주십사’ 부드럽게 졸랐다. 오래 전에 아발론에 들어와 생의 대부분을 성지의 울타리 안에서 보냈던 아들은 그 밖의 세계를 알지 못했다. 이 평화가 계속될 것으로 믿었으며 자신은 태어날 때와 마찬가지로 죽을 때도 아튼 시미니 님의 곁에서 눈을 감으리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는 아직 찾아오지도 않았고 불필요한 두려움만 주는 미래는 잊기로 했다. 톨비쉬는 얕은 한숨을 내쉰 다음, 재차 사랑하는 주인의 품을 찾아 파고들었다.

청년 시절의 기억이었다.

 


2. 

평화로운 계절은 오래 가지 못했다.

<시간이 흐르면 낙원은 저절로 완성될 것이다. 그중 최초의 설계에서 계획되지 않은 밖의 존재가 문제가 될 것이다.>

절대신은 두 마디의 계시를 남기고 사라졌고, 신이 사라진 자리에 이교도와 불신자가 대신 검은 횃불을 쳐들었다.

성지가 훼손당하고 아발론에 불신자의 발자국이 넘쳐나는 것보다도 톨비쉬를 괴롭게 한 것은, 와해되는 공동체였다. 교회가 흔들리고 같은 믿음을 공유하던 도반들이 하나 둘 스러지거나 포기할수록, 알반의 단장도 절망 속에 고립되어 갔다.

망루에 올라 전황을 살피고 있을 때였다. 전령으로부터 소식이 도착했다.

“부단장이 쓰러졌습니다.”

그때 단장은 성벽 아래 광경을 바라보던 중이었다. 푸릇하던 언덕은 잿빛으로 그을리고, 황폐해진 초원 군데군데 적인지 아군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시체가 널려 있었다. 천혜의 요새라고 불리던 성벽도 머지않아 침범당할 것이다. 단장은 낡아버린 성벽 위로 해가 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시뻘겋고 불길한 노을이었다.

“수습은?”

“시신이 적의 손에 넘어갔기에…… 불신자들의 진영에서 불길이 솟는 걸 봤다는 자가 있습니다.”

적진에서 쓰러진 부하는 살점 한 조각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멀리 떨어진 이곳까지 살타는 냄새가 풍기는 것만 같았다. 톨비쉬는 상상 속의 역한 냄새를 떨치려는 듯이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 탓에 투구에 꽂힌 푸른 깃이 힘없이 흔들렸다.

그것을 본 전령은 흠칫했다. 언제 어디에서나 위풍당당하던 투구 깃이었다. 그 깃이 지금 시든 잎처럼 가라앉으려 하고 있었다. 아발론을 지키는 전력은 두 개 대대 밖에 남지 않았고 나머지는 무기를 들 수 없는 노인과 어린아이들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단장마저 포기한다면 미래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전령이 겁을 집어먹은 것은 당연한 반응이었다. 사제이자 기사인 그들의 왕이 포기한다면 요람은, 믿음은 어떻게 된단 말인가?

다행히, 예리한 단장의 눈은 전령의 불안스런 기색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재빨리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절망 앞에서 잠시 흐트러졌던 투구를 다시 내려 쓰고선, 얼음장 같이 단호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원로원에 가겠다고 전해두게. 회의를 소집하지.”

돌아서는 뒷모습은 어둠 속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이탈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원로 하나가 말을 꺼냈다. 원탁에 앉아있던 다른 기사들의 얼굴에도 그림자가 드리웠다. 먼저 말을 꺼낼지 망설였을 뿐, 모두가 공감하고 있던 사안이었다. 그 공감의 이름은 두려움이었다.

이교도들의 설교에 홀려서 전선을 이탈하고 배교하는 병사들이 얼마나 늘었던가? 그나마 기사들은 신앙의 맹세를 했으니 나은 편이었다. 더 시급한 건 남몰래 성벽을 넘어 이교도들의 사원으로 찾아가는 평신도들이었다. 패배를 향한 공포 때문인지 아니면 진심으로 이교도들의 설교에 감화된 것인지. 늘어나는 변절자 앞에서도 아발론의 성벽은 그들을 막지 않았다. 나가려는 자들을 막기 위해 성문을 폐쇄하지도 않았다. 성지는 그곳을 원하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어야 한다는 단장의 의지에서였다. 그들의 단장은 그것이 아튼 시미니께서 아발론을 세울 때 정하신 초석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의 공포에 질린 원로들과 다른 기사들은 쉬이 안심하지 못했다. 개중 가장 나이가 많고 연륜 있는 원로가 어렵사리 말을 뗐다.

“단장, 용서하십시오. 아마 우리는 단장처럼 믿음이 굳지 못한 사람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나는 두렵습니다. 복음을 전파하라며 열어놓은 저 문으로 우리의 피와 살이 흘러나가는 게 무섭고, 신자들이 이탈하는 것이 두렵습니다. 그렇게 도망친 형제들이 우리에게 칼을 겨누고 골육상쟁을 벌이게 될 것이 두렵습니다.”

늙은 원로가 힘없는 목소리로 호소했다. 단장과 눈을 맞추기 위해 들어 올린 얼굴에는 깊은 주름이 패여 있었다. 피로와 체념이 깃든 그 주름에는 세월의 힘 말고도 커다란 절망이 지나간 흔적이 남아 있었다. 노인은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이며 망설이다가, 마침내 어려운 간언을 올렸다.

“이젠 문을 닫아야 합니다.”

무언의 동의가 원탁을 휩쓸었다. 그 불온한 침묵을 깨트리기까지 톨비쉬는 억겁 같은 용기를 그러모아야 했다. 그는 오랜 싸움으로 인해 거칠어진 손을 세게 그러쥐었다. 그리고 끓어오르는 감정을 삼키려는 듯이 원탁을 짚고 일어섰다.

“지금 흔들리는 사람들은 겁에 질린 나머지 잠시 그릇된 판단을 내린 것뿐입니다. 우리가 승리로서 주신의 뜻을 보여주면 흩어지던 때보다 더 빠르게, 밀물처럼 돌아올 겁니다.”

“아, 믿음이 깊으신 분께 신의 보호를! 하지만 자꾸만 이런 생각이 듭니다. 달이 차면 이지러지듯, 아무리 강대한 민족이나 왕국이라도 시간이 흐르면 쇠하듯이 그저 우리에게도 끝이 온 것은 아닌지 해서. 생각해 보십시오. 계시를 받지 못한지 너무 오래 지났습니다. 우리가 바치는 기도는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데 응답은 돌아오질 않으니, 변절하는 그네들을 비난 할 처지도 못되지요.”

노인은 침묵하는 동료들에게 동의를 구하려는 듯, 좌중을 둘러봤다. 다시 말을 잇는 노인의 음성에는 비통함이 눈물처럼 어려 있었다.

“신은 어디에 계십니까? 우리는 버림받았습니까? 평생을 주신의 계시를 섬겨왔건만 이제는 그분의 목소리마저 기억나지 않습니다.”

노인의 절절한 호소는 침묵하는 신에 질려버린 동지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원탁에 둘러앉은 이들 중 아직 한결 같은 기대와 희망을 품고 있는 사람은 단장 하나뿐인 것처럼 보였다. 굳건하리라 믿었던 원로들의 신앙이 흔들리는 현실을 보고서 단장의 심장은 걷잡을 수 없이 공포에 휩싸였다. 성벽을 타고 오르는 적들보다도 무서운 것은 공동체의 붕괴였다. 신의 침묵은 견딜 수 있었다. 그렇지만 신앙의 마지막 요람인 아발론마저 붕괴한다면, 우리마저 등을 돌린다면, 먼 훗날 아튼 시미니께서 다시 돌아올 때에 누가 그분을 맞는단 말인가? 믿음이 깨진 삶에 무엇이 남는단 말인가? 톨비쉬는 애써 떨리는 표정을 감추며 동료들을 설득했다.

“여러분은 기도의 응답이 돌아오지 않는다고 불평하지만, 떠올려보십시오. 우리가 어떻게 아발론을 찾아냈던가요? 어떻게 해서 빛이 충만하고 젖과 꿀이 흐르는 이 땅을 발견했던가요? 풍랑에 휘말려서 죽어가고 있을 때에 그분이 손짓으로 우리를 이끌었습니다. 그 계시가 우리를 살리고 우리를 낙원으로 인도했단 말입니다. 내가 아직도 그때의 음성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듯이 여러분의 기억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지금 들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신의 기억까지 외면하진 마십시오. 과거를 잊는 순간 미래도 없을 테니까요.”

“하지만, 하지만, 지금 목숨을 잃으면 그게 다 무슨 소용입니까? 우리는 생명을 위협당하고 있습니다!”

원로가 언성을 높이려던 찰나였다. 의자가 부딪치면서 큰 소리가 났다. 좌중의 시선이 상석으로 집중되었다. 상석에서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그들의 지도자가 떨리는 손으로 원탁을 짚고 있었다. 뼈마디가 하얘질 만큼 세게 주먹을 쥐고 있는 모습에서 깊은 갈등이 전해졌다. 단장은 파리해진 안색을 더욱 꼿꼿이 쳐들며 대답했다.

“진실을 알고 싶습니까? 우리가 이대로 불신자들에게 굴복했을 때 일어날 일을 알고 싶습니까?”

그러더니 원탁에 앉아있는 사람들과 일일이 시선을 마주치며 말했다.

“티아가가, 부단장이 쓰러졌습니다. 시신은 찾지 못했지요. 적의 관례에 따라 심장이 도려내졌으니까.”

대리석처럼 아름답던 얼굴이 괴로움으로 일그러졌다. 도려내진 티아가의 심장은 제물로 바쳤거나, 아니면 벌써 들짐승에게 먹혔을 것이다. 그것이 이교도들이 승리를 축하하는 방법이니까. 단장은 죽어서도 고향에 묻히지 못한 옛 친구를 떠올리며 말했다.

“우리의 적은 그런 자들입니다.”

메마른 목소리가 원탁에 울렸다. 한낮의 태양처럼 포근하고 부드럽던 목소리가 기근에 시달린 토양처럼 쩍쩍 갈라져 있었다. 원탁에 앉아있던 사람들은 며칠 사이에 거칠어져버린 그 음성에 놀라서 숨을 들이쉬었다. 단장은 그들의 동정어린 시선을 못 본 척 더욱 고집스레 고개를 치켜들었다. 뒤엉키는 생각과 혼란스런 갈등을 헤맨 끝에, 그는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원한다면 성문을 닫겠습니다. 하지만 신자들을 가두려고 닫는 것이 아니라, 이교도를 막기 위해 닫는 것입니다. 어차피 아발론의 신성력이 선지자와 사도를 이끌 수밖에 없는 거라면, 차라리 이곳에서 동귀어진하면 되겠지요.”

단장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무서운 계시라도 들은 것처럼 몸을 떨었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그 시선들을 지켜본 후, 단장은 타이르듯 조용히 덧붙였다. 다시 부드러워진 그 눈빛은 과거에 사제로서 예배를 올리고 신도들을 다독이던 때처럼 온화한 빛을 띠고 있었다.

“다른 생각이 있거나 원치 않는 사람은 먼저 성을 떠날 수 있도록 유예를 두겠습니다. 여로에 필요한 말과 경비를 챙겨드리죠. 성에 남아 있는 민간인도 그때 함께 피난시키고요. 남을 인원은 봉인 의식에 필요한 몇 명이면 됩니다.”

처음부터 이렇게 했다면 좋았을 것을. 단장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끝에 내린 결정이지만, 그 표정은 체념이나 포기보다는 해답을 찾은 사람의 표정에 가까웠다. 그 표정을 본 원로들은 더 이상 어떤 반론이나 만류도 꺼낼 수 없었다. 결정은 내려졌고, 그들의 지도자는 희생을 감내할 것이다.

단장의 흔들림 없는 목소리가 당부했다.

“내가 선봉에 서겠습니다.”

‘너는 깃발이다.’

톨비쉬는 스스로를 타일렀다. 사제의 몸으로 칼을 들고 투구를 쓰기로 결심한 이상, 그 무게에 걸맞는 의미를 감당해야 한다고. 제 손으로 투쟁을 시작했으니 함께 끌어들인 사람들을 책임져야 한다고.

깃발은 가장 앞에서 휘날리는 상징. 어떤 바람이나 폭풍 앞에서도 꺾이지 말고 쓰러지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부러지지 않는 표지가 되어 방향을 가리켜야 한다. 깃발이 흔들리면 뒤따르는 이들의 용기와 의지도 함께 꺾이기에. 그것이야말로 아튼 시미니로부터 투구를 받았을 때 가슴 깊이 새긴 다짐이었다. 주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은빛 투구를 톨비쉬는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했다. 한때는 투구의 푸른 깃이 주는 명예에 홀렸을 뿐이지만, 신이 침묵하고 혼자 남은 지금에서야 그 의미를 깨닫는다. 제가 치켜든 푸른 깃을 따라 안개를 헤치는 사람들이 있기에, 길을 찾아 걷는 그 사람들 덕분에 깃발 또한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는 더 없이 온유한 기분으로 선포했다.

“이계신은 여기서 잠들 것입니다.”

무구하던 시절은 끝나고 백합은 저문 지 오래.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을 내리는 지금에서야 그 현실이 사무쳤다.

 


3. 

“톨비쉬 님, 오늘 헤어지면 다시는 못 만나는 거죠?”

사랑하는 아이는 물기 어린 얼굴을 쳐들며 물어보았다. 톨비쉬는 마지막으로 손수 아이의 짐을 챙겨주던 것을 멈추고서 아이를 내려다봤다. 태어났을 때부터 특히나 아끼고 귀애하던 아이였고, 마지막까지 아발론에 머무르던 아이였다. 이제는 가족을 따라서 아발론을 떠나 다른 어딘가에 정착할 것이다. 그가 모르고 가본 적도 없는 새로운 거처를 찾아서 떠날 것이다. 그래도 톨비쉬는 아이가 자신의 고향을 잊지 않길 바랐다. 부족한 사제를 따라서 함께 기도를 올리고, 울고 웃던 요람을 잊지 않길 바랐다. 그는 아마 마지막이 될 손길로 아이의 뺨을 부드러이 쓸었다.

“그때 말한 책은 다 읽었니?”

갑작스런 질문을 받은 아이는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한참 전에 다 읽었는걸요.”

소녀는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곧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에 슬퍼하는 제 마음을 몰라주는 단장님을 향해 부루퉁히 입술을 깨물었다. 그것을 본 톨비쉬는 무릎을 꿇고 시선을 맞췄다.

“우리는 왜 사랑을 할까?”

톨비쉬 님의 눈이 그토록 쓸쓸한 빛을 띠고 쳐다본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아이는 동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는 톨비쉬의 뜻을 헤아리려는 듯 그의 눈치를 보다가, 이내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사랑하는 데는 이유가 없는 거래요. 어떤 사람을 좋아하게 되면, 그 사람이 그냥 좋아서 참을 수 없는 것처럼요.”

우문현답이었다. 그 답은 아이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자, 자신이 듣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흔들리려는 믿음을 지탱해줄 주문. 톨비쉬는 아이의 눈가에 맺힌 방울을 닦아주며 다독였다.

“그래. 사랑에는 이유가 없지. 아튼 시미니 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데 아무 조건도 한계도 없으시듯이 말이야. 나는 그런 마음으로 너를 사랑한단다. 이곳을 떠나 다른 어디로 가서라도 부디 잊지 말아.”

그는 마지막으로 아이를 꼭 안아준 다음 떠나보냈다. 포옹하는 커다란 손이 언제나처럼 온기를 띠고 있었기 때문에 소녀는 그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쉬운 듯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는 아이를 향해 톨비쉬는 안심시키는 웃음을 지어보였다.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고 마침내 작은 점처럼 작아져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게 되자, 그때서야 긴장을 내려놓았다. 미소가 사라진 자리 위에 서글픈 기색이 어렸다. 우울한 낯으로 아이를 배웅하기 싫어 마지막으로 쥐어 짜낸 미소였다.

게이트로 돌아온 톨비쉬는 휘하 조장들을 소집했다. 느슨히 차려입었던 튜닉 대신에 갑주를 장비하고 무구를 겸한다. 검게 빛나는 투구를 발견했을 때는 잠시 시선이 흔들렸다. 그는 망설임 끝에 결국 투구를 썼다. 맨 얼굴로 나서기엔 떨림이 컸다.

단장의 모습으로 선 톨비쉬는 원탁에 앉은 조장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하나 같이 나쁜 소식과 좋은 소식 중 어느 것을 듣게 될지 몰라 초조해하는 기색이 어려 있었다. 그것을 보자 투구를 쓰기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포고를 전하는데 혹시라도 침통한 낯으로 전하고 싶진 않았다.

“게이트를 닫겠다.”

조용한 충격이 기사들을 덮쳤다. 톨비쉬는 그 충격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목청을 높였다. 감정을 배제한 건조한 목소리였다.

“아발론이 창건된 이래로 문이 닫힌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이곳의 신성력이 불신자와 이교도들을 끌어들이는 원천이라면 게이트는 닫혀야 한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톨비쉬는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길게 들이쉬었다.

“그것이 유일한 방법인 것 같으니.”

그는 나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원로원에서도 동의했다. 남아있는 민간인들이 오늘 밤 마지막으로 떠날 것이고, 기사단은 봉인 의식에 필요한 인원을 제외한 나머지는 떠나는 사람들을 보호하는 병력으로 돌린다. 계시의 증표를 네 조각으로 나눌 테니까, 각 조의 조장들 네 명…이 나와 함께 남으면 되겠군.”

알반의 네 문양이 새겨진 증표가 원탁 위로 떠올랐다.

“신성한 날 신성한 장소를 골라 이 증표를 봉인하면 된다. 봉인을 맡은 자는 증표와 함께 봉인되어야 한다. 아마 이 명령이 여러분에게 내리는 마지막 명령이 되겠지.”

그 사실을 전할 때 단장이 느꼈던 떨림은 어떤 갑주나 투구로도 가리지 못할 것 같았다. 원탁의 기사들은 그들의 단장이 냉정함을 되찾을 수 있기까지 묵묵히 기다려주었다. 톨비쉬는 작은 끄덕임으로 감사함을 표했다.

‘용기를 주소서.’

간절한 기도를 올린다. 침묵하는 신께서 저희들을 향한 사랑만은 침묵하지 않으실 것을 바라며. 단장은 검을 내려놓고 원탁을 향해 깊이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이제 믿음이 위태롭고 교회가 위협받는 위기 앞에서 간청하니, 아발론의 나무 아래서 맹세했던 여러분의 서약을 떠올려다오. 피와 살을 바쳐 신앙을 보호하겠다던 서약을 지켜다오. 삶과 죽음을 넘어 주신의 에린을 수호하겠노라 맹서했던 약속을 이뤄다오.”

오래된 서약의 내용이었다. 큰절을 올리느라 깊이 숙인 어깨에서 푸른 망토가 흘러내렸다. 톨비쉬는 어둠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 하얀 대리석을 내려다보았다.

“이것이 내 마지막 부탁일세.”

몸소 허리를 숙이고 팔을 벌려 인사를 올리는 모습은 무인에게서 나온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정중하고 우아했다. 깃발이 스스로 고개 숙이는 것을 본 기사들은 그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당신과 함께 하겠습니다.”


*

“이걸로 마지막 봉인이군.”

톨비쉬는 은빛으로 빛나는 제단 앞에 서서 중얼거렸다. 여기에 도달하기까지 참 많은 일을 겪었다. 전장에서 적을 베고 살육을 행하는 것보다야 의식을 치르는 쪽이 더 안전한 것이야 사실이지만, 한 번 의식을 치를 때마다 전우를 함께 떠나보내는 일은 그에게 커다란 정신적 고통을 떠밀었다.

평생을 함께 한 친우들이 증표와 함께 관으로 들어가 봉인을 기다리는 모습은 가슴에 핏빛 슬픔을 남기며 각인됐다. 자신이 먼저 제안한 희생이라고 해서 슬픔마저 못 느끼는 것은 아니다. 톨비쉬는 차라리 어서 빨리 자기 차례가 돼서 자신도 함께 저 관에 묻히고 싶었다. 성역이 완벽하게 봉인되어 이 땅에서 불신이 뿌리 뽑히는 것을 확인한 다음, 마지막으로 무덤에 누워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하면, 그때 비로소 요동치는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의 차례가 될 마지막 봉인을 기꺼이 환영했다.

그는 자신과 함께 해준 엘베드의 조장과 카엘릭을 돌아보며 말했다.

“함께 해줘서 고맙네. 카엘릭, 하시딤.”

“당연한 일을요.”

“마지막까지 함께 할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단장.”

카엘릭은 여느 때처럼 온화한 미소로, 하시딤은 무뚝뚝하지만 충직한 태도로 대답했다. 변함없는 친구들의 모습을 보자 톨비쉬의 가슴을 누르던 무게도 조금은 가벼워졌다. 그는 어떻게 작별 인사를 해야 할지 망설이다가 악수를 청하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저보다 작은 카엘릭에게는 어깨를 끌어당겨 짧은 포옹을 나눴다. 학자의 몸인 그가 너무 오래 고통을 겪지 않기만을 바랐다.

“너무 오래 혼자두지 않겠네. 곧 따라갈 테니까.”

“하하, 쓸데없는 걱정을 다 하십니다. 그저 단장님 가시는 길을 모시지 못해 죄송할 뿐인 걸요.”

카엘릭이 발끝으로 서서 커다란 단장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서글서글한 그의 웃음을 보자 톨비쉬는 억눌렀던 감정이 다시 터질 것만 같았다. 그는 애써 꽉 잡은 손을 떼어냈다. 두 사람이 준비를 할 수 있도록 물러나는 발걸음이 결코 가볍지 않았다.

톨비쉬는 제단 위에 선 두 사람을 먼발치에서 바라보았다. 마지막 모습을 담아두려고 눈으로 그들의 등을 좇을 때였다. 카엘릭이 문득 톨비쉬를 향해 외쳤다.

“톨비쉬 님! 후회하십니까?”

톨비쉬는 폐부를 찔린 듯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런 그를 보고서 카엘릭과 하시딤이 웃으며 소리쳤다.

“후회하지 마십시오! 오늘 우리의 용기로 전쟁은 끝나고 세상은 평화를 되찾을 겁니다! 단장님은 최선의 선택을 내린 겁니다!”

다음 순간 한바탕 밝은 빛 무리가 일었다. 눈부신 빛이 가라앉고 대기가 다시 평온을 되찾았을 때는 증표와 두 기사 모두 스러져 있었다. 톨비쉬는 투구 밑으로 뜨거운 물기가 흐르는 것을 느끼며 제단으로 다가갔다. 장례를 치를 차례였다.

생기 잃은 시신을 이끌어 관에 눕히고 꽃으로 이불을 덮어주던 바로 그 순간, 톨비쉬는 자신에게 더 이상 두려움도 망설임도 없으리란 걸 직감했다. 돌아갈 과거도, 돌이킬 길도 남아있지 않다. 남은 것은 시작한 일을 마무리하는 것뿐. 아튼 시미니 님께서 그 길을 돌보아주실 것을 믿으며 톨비쉬는 친우의 무덤을 봉했다.

그리고 아까부터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낯선 존재를 향해 외쳤다.

“어떤 후회도 번복도 없다. 오늘 이 자리에서 나의 친우들은 선을 위한 희생을 치렀고, 나 또한 그 길을 따를 것이다. 그러니 이방인이여, 돌아가라. 네가 누구인지, 어디에서 왔는지, 무엇을 하려는지 알지 못하나,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너는 이 발걸음을 멈출 수 없다. 나는 오늘 여기서 죽는다.”

칼날처럼 단호한 호령 때문인지 아니면 연결이 끊긴 것인지. 낯선 존재의 시선은 더 이상 전해지지 않았다. 톨비쉬는 만족스레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준비해놓은 자기 몫의 관으로 들어갔다. 흑단처럼 새까만 관 속은 고요하고 아늑해 보였다. 자살을 감행하는 그 순간 그는 세상의 누구보다 행복한 사람이었다. 이어서 시야가 깜깜해지고 호흡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죽어가는 심장이 희망으로 벅차오르고 있었다.


 

4. 

그렇게 잠 들어야 했는데. 의심을 버리고 결심한 바를 밀어붙여야 했는데.

오랜 피정으로도 버리지 못한 어리석음 때문인지 아니면 삶에 대한 미련 때문이었는지, 톨비쉬는 심장이 멎기 직전에 기어이 낯선 존재에게 묻고 말았다.

‘이방인이여, 에린은 아름다운가?’

우리들의 봉인은 성공했는지, 문이 닫힌 아발론은 이제 평화로운지, 게이트를 희생해서 지켜낸 에린의 사람들은 행복해졌는지. 친구도 연인도 가족도 놓고 떠나온 우리의 염원대로 이젠 세상에 주님의 평화가 도래했는지.

모든 기대를 내려놓고 던진 질문이었으나, 돌아온 현실은 상상보다도 가혹했다.

<……정말로 알고 싶어?>

낯선 존재의 망설이는 목소리를 듣는 순간 톨비쉬는 벼랑 끝으로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미처 후회하거나 만류할 틈 없이, 그의 눈과 귀에 먼 훗날의 에린이 꽂혀 들었다.

<마을엔 사도가 들끓고 전쟁이 끊이지 않아.>

<시체는 되살아나 죽어서도 쉬지 못하고>

<사람들은 울타리 안으로 숨어들고 교역은 멈췄지.>

<도시와 나라가 다투어 일어섰다 무너지기를 반복하고>

<신을 욕보이는 이교도들이 분열된 교회를 공격한다.>

<사람들은 선의와 우정이 사라진 세태를 한탄하고>

<절망한 드루이드는 알을 깨고 날아가려다 추락했어.>

<의인이 모함 받고 악인이 승승장구하는 세상>

<우리는 신이 사라진 세계를 걷고 있어.>

이 모든 선언이 너무나 생생하게 오감으로 전달되었기 때문에, 톨비쉬는 그 불온한 이야기가 차마 한낱 환상이라고 치부할 수 없었다. 수천 년 뒤의 미래가 현실이 되어 그의 눈앞에 직접 펼쳐지고 있었다.

톨비쉬에게 미래를 알려준 낯선 존재는 이후 어떤 호통이나 꾸지람도 남기지 않은 채 다시 어둠 속으로 물러났다. 다만 망설이듯이 말을 멈췄다가, 사라지기 직전에 속삭였다.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지만…… 당신이 여기서 멈추지 않으면 좋겠어. 혼자 억눌러 아파하지 마. 제발.>

연민 어린 그 말이 모든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적나라한 현실이 눈앞에 들이밀어지고, 어둠 속에 누워 있던 톨비쉬의 숨이 빠르게 가빠오기 시작했다.

끝났다. 동료들의 희생은 덧없던 것이다. 그 모든 버림과 포기와 체념이 아무 의미가 없었다. 마지막 소망이 무위로 돌아간 것을 깨달은 순간, 감은 두 눈 위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가사 상태를 헤매던 남자는 진흙처럼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목구멍을 억지로 쥐어짜냈다. 그리고 충격과 비탄 섞인 절규로 물었다.

‘그대는 누구인가? 내 안식의 꿈을 깨버리고 마지막 위안마저 쏘아 떨어트린, 잔인한 그대는 누구인가!’

낯선 존재는 톨비쉬의 절규를 안쓰럽게 여기기라도 하듯, 몹시 서글픈 기색으로 대답했다.

<우리를 에린으로 이끌었던 여신은 우리를 밀레시안이라고 불렀지. 그런 내 이름은 ── >

소리가 흩어지고 굉음이 울리며 시야가 번쩍인 것은 그 때였다. 벼락이 내리치듯 멈췄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고, 딱딱하게 굳었던 사지가 경련을 일으키며 되살아났다. 무덤 속에서 눈을 뜬 남자는 곧 온 몸을 짓누르는 흙의 무게를 느꼈다. 축축한 흙더미는 그 자체로 감옥이 되어 무자비한 악의를 품고 그의 몸과 정신을 포박했다.

흙더미에 갇힌 톨비쉬는 이제 갓 태어난 태아처럼 미약하기 짝이 없는 손길로 관짝을 밀어내려고 끙끙댔다. 가지런하던 손톱이 흙을 파내느라 사정없이 흔들리고 부서졌다. 기껏 다시 뛰기 시작한 폐는 자갈과 진토에 짓눌려 숨 대신 먼지를 토해냈고, 그는 질식의 공포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어떻게든 위로 올라가기 위해 발버둥 쳐야 했다. 바다에 빠진 사람이 수면으로 올라가기 위해 전심전력으로 헤엄치듯이, 흙더미를 사이로 비치는 가느다란 빛을 좇아 몸부림쳤다. 제 발로 들어갔던 무덤을 제 손으로 파내고 뛰쳐나왔다.

다시 찾은 지상은 시커먼 밤이었다. 제 결의 하나 완수하지 못한 비겁자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야비한 강풍이 휘몰아쳤다. 죽음에서 돌아온 남자는 세상에 나오자마자 다시 바람에 밀려 주저앉아야 했다. 땅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려 그렇게 한참을 보이지 않는 칼날에 난자당하다가, 벌벌 떨면서 대지를 기어갔다. 찬란하게 빛나던 금발이 흙먼지로 뒤덮여서 곱던 빛깔을 잃어버리고 어지러이 휘날렸다.

그렇게 엉망진창이 된 몰골을 수습할 정신도 없이 달려간 곳은 굳게 닫힌 게이트였다. 게이트는 하룻밤 사이에 낡아버린 것처럼 풍화된 흔적이 선명했다. 아니면 찰나라고 생각했던 무덤 속에서의 시간이 실제로는 수백 년이 흘렀는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자 소름 때문에 등골이 부르르 떨렸다.

톨비쉬는 자꾸만 주저앉으려는 무릎을 억지로 일으켜 가며 힘겹게 성문의 지레를 잡아당겼다. 마침내 성문이 열렸을 때 그를 맞이한 풍경은 무의 대지였다. 아름다운 초목과 완만한 구릉이 있던 자리는 화마의 손길이 할퀴고 지나갔고, 굳건하던 옹성은 메마른 황무지로 변해 있었다. 말라버린 자갈 부스러미에서는 더 이상 어떤 꽃도 싹을 틔우지 못할 것만 같았다.

이주를 준비하던 사람들의 행렬조차 보이지 않고 짐승의 발길조차 사라진 죽음의 대지를 톨비쉬는 하염없이 걸었다. 걷고 또 걸으며 옛 친구들이 묻힌 무덤을 찾아갔다. 꽃도 십자가도 없는 비석 위에 말라비틀어진 낙엽만 남아있는 것을 확인하자, 비로소 현실이 체감되었다.

그는 노인처럼 쉬어버린 목소리로 절실한 이름들을 불렀다.

“하시딤?”

그러나 죽은 자에게선 응답이 없었다.

“티아가? 카엘릭?”

공허한 부름이 메아리쳐 돌아온 그 순간, 남자는 비로소 깨달았다. 내가 너희를 구렁으로 몰아넣었구나. 의미도 없고 희망도 없는 개죽음으로 몰아넣었구나. 텅 빈 아발론에 외마디 비명이 울렸다. 제 선택의 결과를 직면한 신자는 창자가 끊어지는 통곡을 내지르며 쓰러졌다.

사흘 밤낮이 바뀌고 절망의 안개가 희미해졌을 때, 헤진 넝마를 뒤집어쓰고 맨발로 신을 삼은 사내가 성문을 나섰다. 남자는 무너지려는 정신을 겨우 끌어 모으고 있었다. 그리고 떨쳐지지 않는 자괴감과, 스스로를 향한 분노와 오기를 품 안에 그러안고서 광야로 나섰다. 마지막에 이방인의 이름을 듣지 못한 것, 그 하나가 가슴에 맺혔다.


(계속)







*기존 마비노기의 켈트 신화도 좋지만, 역시 유대신화와 구약 성서도 재밌는 것 같습니다.

*주인공 톨비쉬는 이런(↓↓↓) 앱니다. 게임 마비노기의 여섯 번째 이야기(챕터6)에 나오는 메인 캐릭터구요. 잘생겼습니다. 같이 파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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