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내용으로 건너뛰기

[밀레톨비] 사람의 아들 3

톨비쉬가 밀레시안을 만나기까지.

g20, 21 스포일러 포함. 원작 설정 조금 변경. 초고 주의




8. 티르코네일에 떨어진 많고 많은 밀레시안 중의 하나였다. 작고 허약한 그. 톨비쉬가 찾던 유성은 그렇게 보잘 것 없는 별이었다.

빈손으로 낯선 세계에 떨어진 그는, 티르코네일 촌사람들의 도움이 아니었더라면 얼마 버티지도 못하고 소울스트림으로 되돌아 갈 만큼 약해 보였다. 나뭇가지처럼 가늘고 얇은 팔로 목도 하나를 들고서 모험을 시작한 그의 모습을 처음 보았을 때, 톨비쉬는 허탈한 나머지 오랜 세월 준비해온 계획도 내팽개치고서 그냥 포기할까 싶은 마음이 들었다. 저렇게 작고 보잘 것 없는 존재가 뭘 할 수 있을까 싶어서. 아발론도 포기한 자신한테 대체 무슨 구원이 될 수 있을까 싶어서. 티르코네일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아 겨우 에린에서의 홀로서기를 시작한 밀레시안을, 톨비쉬는 실망스러운 심경으로 지켜보았다.

그런데 톨비쉬의 생각에 반발하기라도 하듯, 그 밀레시안은 포기하지 않고 에린에서 살아남았다. 갓 떨어진 다른 어른 밀레시안들처럼 붉은 곰의 앞발에 한 번에 죽었다 부활하기를 반복하고, 포워르와 싸우다가 가진 짐을 몽땅 떨궈서 빈털터리가 되어 한숨 쉬기를 반복하면서도, 그만두지 않고 계속 에린에 남아 있었다. 그에게는 낯선 세상일 터인 에린의 주민들과 공생해보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별에서 온 그는 불멸이라는 태생적 한계 때문에라도 필멸하는 다난이나 포워르의 삶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리란 걸 알고 있을 텐데도.

그 헛된 노력들을 톨비쉬가 초조한 심정으로 관찰하는 동안, 작은 밀레시안도 조금씩 나이를 먹고 성장해 갔다. 열일곱 소년만큼 키가 자란 밀레시안은 이제 단검 대신에 제법 어엿한 대검을 다룰 줄 알게 됐고, 마법과 궁술도 조금 다룰 줄 알게 됐다. 그밖에 에린에서 생존하기 위한 여러 기술을 차근차근 익혀 나가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별에서 온 종족은 약하고 보잘 것 없이 태어나지만 에린의 누구보다도 끈기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던 여신의 말이 그저 허풍은 아니었다는 점을 톨비쉬도 마지못해 수긍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톨비쉬가 관찰하는 밀레시안은 마을 주민이 잃어버린 귀걸이를 찾아줘야 한다면서 작은 외출을 떠나더니, 여신을 구출하는 여정에 올랐다. 사람들은 옛 이야기에나 나오는 전설을 진짜로 믿고서 허튼 짓을 한다며 비웃었다. 여신을 구하려고 고군분투하고, 거짓 혐의를 쓰고 경원시 당하는 밀레시안을 몰래 지켜보는 동안, 관찰자의 기억 속에서도 광야를 배회하던 시절의 일들이 떠올랐다. 거처 없이 떠돌며 박해받고, 가장 낮은 곳을 전전하며 믿음과 신념을 부정당하던 시절의 일들이.

‘우리의 왕은 헐벗은 옷을 입고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시는 왕이라. 그 별은 초라하고 낮은 모습으로 나타나, 듣지 않는 이들을 설득하고 보지 않는 이들을 일깨우며—’

잊은 줄 알았던 경구가 떠올라 마음을 어지럽혔다.

나중에서야 밀레시안이 여신의 무모한 요청에 응한 이유를 전해 들었다. 여행자로 위장한 그에게 티르코네일 사람들이 들려준 소문은 단순했다.

‘마을 사람들한테 받은 게 너무 많아서.’

기가 차서 헛웃음이 나왔다.

그날, 톨비쉬는 사막에서 돌아온 후로 정말 간만에 기도 시간을 가졌다. 행복한 시절에는 단조로운 단어의 나열로만 생각됐던 그 영창이, 갈등으로 시달리는 지금에 와서는 마음에 숨겨둔 걱정이며 고해를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창구가 된 탓이었다. 그는 여러 가지 생각이 얽혀서 복잡한 머릿속을 풀어내려고 묵상을 하다가, 밀레시안에 관한 대목에 이르자 문득 발작적으로 신경질을 냈다. 그는 로자리오를 쥐고 있던 손을 강박적으로 비틀며 중얼거렸다.

“그 대답이 진심이라면 정말로 무모하고, 착하다 못해 바보 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다가 곧 자기가 내뱉은 말에 놀라서 흠칫했다. 분명 화가 나는데, 정작 화가 나는 이유를 댈 수 없어서였다. 호승심 넘치는 밀레시안이 분에 맞지 않는 일을 떠맡았다가 혹 다치거나 소울스트림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그게 무슨 상관이 있다고? 자문해봤지만, 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아연한 톨비쉬는 손 안에 쥔 묵주만 만지작거렸다.

여신을 구출한 밀레시안의 모험은 빛의 기사와 어둠의 기사를 승계하고, 새로운 대륙을 개척하는 데까지 이어졌다. 그는 또한 다난의 멸족을 막아내고, 주신께서 인간들에게 맡겼던 창조의 검을 계승하더니, 종국에는 원하지도 않는 신이 되었다. (모리안이며 다른 팔리아스의 신족을 언짢이 여기는 톨비쉬에게는 굉장히 거슬리는 사건이었다. 돌이켜보건대, 하위신에 지나지 않는 그들이 무슨 권한이 있어 주신께서 빚으신 종족을 내치고, 또 그들에게 맡긴 칼리번을 오염시켜 멸족에 이르게 한단 말인가? 아무리 무소불위한 힘을 지닌 신족이라고 해도, 주신의 충실한 종인 그의 눈에는 절대신이라는 빛에 기대어 아른거리는 부산물, 말하자면 동굴의 그림자로밖에 비치지 않은 것이다.)

그렇게 절정에 올랐으니 다음은 추락할 차례였다. 에린의 요구에 떠밀려 힘을 손에 넣게 된 밀레안은, 이제 너무 강해졌다는 이유로 의심받았다. 의도를 추궁당하고, 국왕 시해자로 지목됐으며, 그를 처음 에린으로 불러온 여신에 의해서 직접 에린을 위협하는 존재로 낙인찍혔다. 다행히 명분을 잃은 신들이 극적으로 타협에 응하면서 종족 전체가 소멸하는 미래만은 피했지만, 작은 밀레시안에게는 아직 과거의 인연이 끌고 온 비극이 남아있었다. 이리니드의 대륙에서 마지막 대단원이 내렸을 때, 밀레시안에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우정도 신뢰도 잃고, 변하지 않으리라 믿었던 옛 친구들마저 죽음의 베일 너머로 빼앗겨 버렸다.

작은 밀레시안은 영광과 명예를 손에 넣었으나 정작 그를 이해해 줄 벗 하나 없이 고독 속에 남겨졌다. 그처럼 외따로 남겨져 우는 처지로 전락하고서야, 오직 그러고 나서야 톨비쉬는 밀레시안의 민낯을 보게 되었다. 상실감으로 떨고 있는 영웅의 등을 본 그때, 기이하게도 톨비쉬의 눈을 가리고 있던 냉정한 관찰자의 가면이 떨어져 나가고 비로소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조소가 아닌 다른 감정이 피어났다. 오래 전 그가 사막에서 느꼈던 비참한 고독, 하루하루 갉아 먹히는 희망, 노력해도 바뀌지 않는 세계에 대한 절망, 그런 망각한 줄로 알았던 감정들이 낯선 밀레시안의 낯 위에서 다시금 재현되고 있었다. 그 익숙한 슬픔을 알아본 순간, 자기 운명을 망쳐놨다고만 여겼던 사람을 향해 이름 모를 연민과 동질감이 피어났다. 머리가 아찔했다.

사라진 밀레시안의 뒤를 쫓다가 이리아의 깊은 숲 속에서 혼자 울고 있는 그를 발견했을 때, 관찰자의 얼어붙은 심장에는 한 줄기 미풍이 불었다.

‘나도, 나도 그래요. 버림받고, 홀로 남아 떠돌고, 헤매고. 지울 수 없는 과거에 몸부림치다가, 눈뜰 수 없을 만큼 지쳐서. 때로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기를 바랐지. 사람과 명예, 모든 것을 잃고서 악몽 같은 시간을 혼자 견뎌왔어. 뒤를 돌아 여기 있는 나를 봐요. 나도 당신과 같아.’

관찰자는 그림자 뒤에 숨어있던 것도 잊고서 그대로 달려 나가고픈 충동에 시달렸다. 고개 숙인 별의 작은 등을 껴안고서 눈물을 거둘 때까지 달래주고 싶었다. 답을 찾아 헤매던 사람은 당신만이 아니라고, 혼자가 아니라고 다정하게 속삭여주고 싶었다.

바다를 만난 사막처럼 달려가고픈 발걸음을 잡은 것은, 상대방은 아직 자길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 떠오른 덕분이었다. 톨비쉬는 오랫동안 자신이 고수해온 위치—방관자이자 염탐자라는 자신의 위치를 기억해냈고, 그러자 불길처럼 솟았던 자신감이 연기처럼 흩어졌다.

그날 이리아의 비 내리는 숲속에서, 톨비쉬는 커다란 너도밤나무가 드리운 그림자 뒤에 숨어 한참을 서성였다. 우정과 추억을 잃고서 죄책감에 몸부림치는 밀레시안을 오래토록 바라보았다. 다 자랐다고 생각한 소년인데, 그 순간만큼은 풀잎처럼 작아 보였다.

톨비쉬는 마른 혈관을 타고 전신으로 퍼지는 열기에 전율했다. 독처럼 퍼진 그 열기는 이미 오래 전에 말라 부스러진 줄로만 알았던 혈관을 흐르며 죽은 심장을 되살려냈고, 멈춘 맥박은 세상을 부술 것처럼 다시 한 번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뜻 모를 열정에 잠식되어가는 심장. 그것이 관찰자가 오랜 은둔을 멈추고 비로소 세상에 자신을 드러낸 이유였다.

 

‘그가 세상 가운데 있었으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다.’

이보다 더 밀레시안의 상황에 들어맞는 경구도 없을 거라고, 톨비쉬는 생각했다. 이리아에서 일어난 배신과 비극의 복수극은 세간에는 알려지지 않은 비밀스런 이야기였고, 범인(凡人)들은 세 영웅의 말로에 대해 아는 바 없이 지나갔다. 그들은 영웅 밀레시안은 알되, 인간 밀레시안은 영원히 모르는 채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오직 나만은 당신을 이해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자 톨비쉬의 마음에 작은 허영심이 차오르면서 어떤 만족감이 차올랐다. 그 생각은 상상이라기보단 강한 확신에 가까웠다. 그래서 웃는 낯으로 첫 인사를 나눌 수 있었던 거다.

“처음 뵙겠습니다, 밀레시안.”

수백 년을 원망의 칼날을 갈며 기다려온 상대방에게, 최선의 미소를.

“알반 기사단의 일원인 톨비쉬라고 합니다. 소문으로만 듣던 분을 직접 만나 뵙게 되니 솔직히 조금 떨리는군요.”

수없이 되풀이하며 준비한 그 인사를 꺼낼 때 내 심장이 얼마나 떨리고 있었는지, 당신은 모를 테지.

 

9. 직접 만나본 밀레시안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무른 인물이었다. 멀리서 지켜만 봤을 때는 보이지 않던 유약함이 그의 옆자리에 서자 투명한 수면처럼 들여다보였다. 밀레시안이 호인이라는 점은 다난들에게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으나, 슬쩍 스치기만 해도 부스러기를 털어내는 암염처럼 어수룩한 성품은 그를 이용하려던 톨비쉬조차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세상의 소금이라는 존경의 별칭조차 이 정도면 저주로 의심될 정도였으니.

그렇게 어수룩한 사람이기 때문에 이용할 수 있었다. 제 뜻대로 꾀어 낼 수 있었다. 상실감에 빠져서 무력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사람에게 일을 떠맡기고, 정체는 밝히지 않은 채 부탁에 부탁을 거듭하다, 끝내는 밀레시안이 알터를 아낀다는 사실을 알고서 일부러 그 아이를 미끼로 내걸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알터와 밀레시안은 이 기묘한 연합에 결사단이라는 이름을 붙여가며 기뻐했으나, 그들을 지켜보던 톨비쉬는 참으로 교활한 덫이라고 생각했다. 밀레시안이 얼마나 타인의 애정에 목마른 사람인지 알고 있기에 던질 수 있던 미끼라고. 불멸을 떠안은 영웅에게 우정이란 평생 찾아 헤매야 할 저주나 마찬가지이고, 그런 영웅에게 봇물처럼 애정과 호의를 퍼붓는 어린 기사가 얼마나 귀중한 인연이었을지는 물 보듯 뻔하다. 다른 누구보다 밀레시안의 사람에 대한 결핍과 그리움을 잘 알고 있는 톨비쉬였기에, 그런 도박을 걸 수 있었다.

“어차피 밀레시안 씨는, 겸사겸사 세상을 구하는 것 정도야 많이 해보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런 사람이니까 그런 무례한 농담을 듣고도 웃으면서 대답할 수 있었겠지.

“으응. 정말 그렇네. 어찌어찌 살다보니 그렇게 됐나 봐.”

귓불을 붉히며 쑥스럽게 웃는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당신은 왜 당신의 수고를 폄하하고 고통을 경시하는 말에조차 제대로 대꾸하지 못하지? 그런 이유 모를 신경질이 솟구치다가도, 잠시 후에는 다시 짜증을 내는 자기 모습이 낯설어 오싹해졌다. 마치 밀레시안과 마주할 때마다 심장이 서늘한 바늘로 찔리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구멍 난 심장 사이로 바닷물이 밀려들 듯 복잡한 감정들이 밀려들어, 불가해한 변덕을 그려냈다.

그가 오염된 괴물들을 해결하기 위해 들린 타라에서 여왕의 원망을 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넌 신이잖아! 어떻게든 해 봐! 가장 필요한 순간에 도움이 되지 못하면…… 그게 무슨 영웅이고 신이야!”

변이한 괴물들에게 수도가 위협당하는 상황이어서, 갓 왕위에 올랐던 여왕이 경황이 없었을 거라고들 했다. 그렇다고 해도 참 무심한 질책이었다. 이신력에 오염되어 본래 힘의 절반도 못 쓰는 상황에서는 별의 종족이라고 해도 별 수가 없을 뿐인데. 좌절한 여왕을 본 밀레시안은 한숨 한 번 쉬지 않고 묵묵히 대답했다고 한다.

“괜찮아. 어떻게든 될 거다.”

체념인지 납득인지 모를 그 대꾸를 나중에서야 전해들었을 때, 톨비쉬는 제가 다 인상을 찌푸렸다. 뒤늦게 밀레시안을 구하러 뛰어간 아벨린은 ‘밀레시안은 미친 사람’이라며 기함했고, 알터는 걱정에 사로잡혀 눈물을 뚝뚝 흘렸다. 밀레시안의 무사가 확인된 후에도 한참이나 역정을 내던 아벨린을 진정시키기 위해 톨비쉬는 한참을 설득해야 했다.

그러나 흥분한 두 기사를 차분히 달래어 돌려보냈던 바로 그 사람이, 밤이 되어 방에 홀로 남게 되자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자리를 맴돌았다. 묵주를 쥔 손이 파르르 떨리고 고요히 묵상해야 할 기도 소리에서는 잔 떨림이 파르르 묻어났다. 그는 여느 때처럼 대답 없는 분을 향해 기도를 올리려고 무릎을 꿇고 앉았다가, 얼마 지나지도 못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답답함을 참지 못한 나머지 원망하고 하소연하는 소리가 빈 실내에 울렸다.

“만약 저였다면 절대로 가만있지 않았을 겁니다. 에일레흐의 여왕께서 아직 어리신 탓에 생각이 설익었다 비웃었겠지요. 조롱했겠지요. 신이라니요! 원치 않은 신성이라니요! 하늘 아래 어느 피조물이 그런 무서운 책임을 탐내고, 또 어느 피조물이 그런 저주 앞에서 수긍하겠습니까?”

감히 생각하건대, 톨비쉬는 자신만큼 타인의 무게를 뼈저리게 경험한 사람은 없을 거라고 믿었다. 의지에 상관없이 부과된 책임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자기보다 더 잘 이해하는 사람은 없으리라고 믿었다. 바란 적 없건만 다른 이의 생명이 억지로 짐 지워지고, 그 무게를 어깨로 떠받치며 발이 푹푹 꺼지는 진흙 속을 걸어가야 하는 고통을, 대체 어느 우둔한 자가 자진해서 떠맡으려 한단 말인가? 피조물은 뛰어넘을 수 없는 한계를, 그는 뼈에 사무칠 정도로 직접 겪어보았던 것이다. 그런 밑바닥조차 모른 채 어린 여왕과 그녀의 백성들은 다만 겁에 질려서 밀레시안에게 그런 비난을—

그런데 밀레시안의 입에서 나온 말은 단 한 마디, ‘어떻게든 될 거다’ 그뿐이었다. 어떤 변명이나 회피도 없이 여왕의 무리한 부탁을 받아들였다. 조금은 체념하는 얼굴로, 또 불안해하는 사람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조금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면서. 그 장면을 머릿속으로 그려보자 심장이 텁텁해지고 속이 막혀오는 것 같았다. 톨비쉬는 자신의 유일한 말동무인 하늘을 향해 노여움을 토로했다.

“그는 구제할 수 없이 오만한 사람이거나, 그게 아니라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누구에게랄 것 없이 퍼붓는 그 울분 속에는 불안한 염려가 한소끔 녹아있었다.

그렇게 매일 기도를 핑계 삼아서 밀레시안에 관한 온갖 감정과 생각들을 고스란히 털어놓았다. 대답하지 않는 신이 이번만큼은 고마웠다. 방황 끝에 무뎌진 줄로만 알았던 마음이 이상하게도 이 별에서 온 존재만 얽히면 온갖 감정의 파고에 휘말려서 하루 밤낮에도 수십 번씩 뒤집어지기를 반복했다. 그 변덕스런 감정 변화에 시달리다 못한 톨비쉬는 심신이 지칠 대로 지쳐버렸다. 이제는 스스로도 어느 방향을 향해 내달릴지 모르는 마음을 누군가에게 털어놓아야만 한다면, 차라리 모든 것을 듣고도 대답하지 않는 신께 털어놓는 편이 나았다. 그는 사냥꾼을 피해 도망치고 도망치다가 마침내 탈력해버린 사슴처럼 무너졌다. 경전 위에 이마를 대고 엎드린 그림자에서 작은 발원이 흘러나온다.

“철의 심장을…… 차갑게 벼려 후회도 회한도 모르는 심장을 내려 주십시오. 아직은 망설여서는 안 됩니다…… 아직은……”

앓듯이 읊조린 고백은 격렬한 만큼 솔직하고, 숨김없는 만큼 인간적이었다.

 

목걸이를 흘려보낸 것은 그렇게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서였다. 단장 시절의 목걸이를 밀레시안의 손에 들어가도록 조정하는 것은 여러모로 효율적인 계책이었다. 밀레시안을 알반 기사단의 핵심으로 좀 더 깊이 이끄는 동시에, 그를 기사단의 책무에 묶어놓을 수 있었다. 쉽게 정을 붙이는 밀레시안이라면 초대 알반의 고군분투를 목격한 이상 기사단을 못 본 채 내버려둘 리 없을 테니까.

무엇보다도 톨비쉬는 밀레시안의 눈을 따라서 옛날의 고통스런 시간을 다시 체험해야 했다. 형제를 잃고 홀로 남아 문을 닫던 순간의 고독, 자살을 하려던 순간의 공포, 관 속의 음습한 어둠, 그 고통스런 기억을 복기하면 해이해지려는 결심을 다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밀레시안의 누설로 인해 뒤엎어진 그와 형제들의 인생을 똑똑히 눈에 새기고, 처음 별에게 품었던 원망을 다시 벼려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막상 밀레시안이 개울에서 단장의 목걸이를 건져내던 순간에는 자기만의 공포며 두려움, 내밀한 과거를 까발려지는 것 같아 심장이 떨렸다. 행여 목걸이 속에 남겨둔 자신의 기억 사이로 자기의 비겁하고 초라한 면모들이 비칠 것이 두려워 벌거벗은 아이처럼 떨었다. 별빛이 한낮의 태양처럼 무섭게, 준엄한 벼락처럼 매섭게 내리치던 순간이었다.

목걸이를 들여다 볼 때마다 밀레시안의 안색은 조금씩 시들어 갔다. 건강한 상아빛이던 얼굴색이 옅은 회색으로 질려있는 것을 본 톨비쉬는 짐짓 의아한 척 그의 심중을 떠봤다.

“괜찮으십니까? 목걸이를 사용할 때마다 조금 지쳐 보이는군요. 제가 괜히 힘에 부치는 일을 떠맡긴 건 아닌지 걱정이 됩니다.”

눈썹을 늘어뜨리고 걱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면, 밀레시안은 곧장 고개를 내저었다.

“난 괜찮아.”

“이마에 식은땀이 흐르는데요.”

“갑자기 긴장이 풀려서 그래. 순간적으로 집중해서 마나를 소모하다 보니까…… 정말 괜찮아.”

밀레시안이 보란 듯이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며 말했다. 아직 종잇장처럼 하얀 얼굴을 하고서 잘도 그런 응원의 말을 하는 사람. 관찰하던 톨비쉬의 표정이 조금 미묘해졌다.

“그럼 계속 초대단장님과 연결을 부탁드려도 괜찮겠습니까? 현재로선 제단의 위치를 알아낼 수단은 단장님의 기억을 읽는 방법뿐이니…… 정말이지, 제가 말하면서도 영 탐탁찮은 방법뿐이군요.”

마지막 문장을 말을 할 때는 거의 진심으로 찡그린 표정이었다. 밀레시안은 그런 톨비쉬의 안색을 살피듯 시선을 힐끔거리다가, 작게 물었다.

“하지만 꼭 필요한 일이지? 이번에도 사도들한테 선수를 뺏기면 위험한 거 아니야?”

“그렇긴 합니다만.”

“그럼 해야지.”

그렇게 말하는 밀레시안의 어조에는 차분한 확신이 담겨 있었다. 담담한 그 눈빛을 보자 톨비쉬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인자하게 호선을 그리는 그 미소는 언뜻 보면 털털해보였으나, 왜곡의 가면을 들어내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호한 조소가 섞여 있었다. 예쁘게 웃는 입술이 씁쓸하고 모진 혼잣말을 뱉어냈다.

“역시 상대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으시는군요.”

“아……”

“이런 성품은 천성일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인지 좀 더 조사가 필요할 것 같군요.”

생긋 웃으면서 덧붙이자 밀레시안이 눈에 띄게 당황하는 것이 보였다. 아마 농담인지 조롱인지 갈피를 못 잡아 그런 것이다. 톨비쉬는 사과의 말로 그를 안심시키는 대신 조금 더 몰아붙이는 쪽을 택했다. 도망가지 못하도록 사방을 막고서 조금만 더 가차 없이 밀어붙이면 밀레시안의 늘 차분한 가면도 벗겨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건 조금 더 본심을 보여 달라는, 일종의 절박한 심술이었다.

“그러고 보니 밀레시안들은 소울스트림에 의해 부정적인 마음들이 묶여있다고 들은 적이 있는데. 정말인가요?”

“글쎄. 다들 그렇게 말하니까…… 그렇지 않을까?”

“부당하다고 생각해본 적은요.”

“어?”

의아하게 되묻는 밀레시안을 위해 톨비쉬는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부정적인 마음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밀레시안들의 개인적인 욕구나 바람을 소울스트림이 붙잡고 있는 것 아닙니까. 여신의 부름 덕분에 에린에 넘어왔다고는 해도 가끔은…… 단 한 번도, 부당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나요?”

“………”

밀레시안은 쉬이 답하지 못했다. 백지처럼 빈 그 표정을 보자 톨비쉬는 속이 뒤틀렸다. 망설이는 표정이 암시하는 바는 뻔했다. 소울스트림이 밀레시안들의 욕망과 욕심, 그밖에 에린에 위해가 된다고 판단되는 감정들에 통제를 걸고 있다는 건 알음알음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건 밀레시안이라는 종족의 특성이고, 그들이 에린에 넘어올 때부터 정해진 규칙이기 때문에 세계를 몇 번이나 구할 정도로 강한 밀레시안이라고 해도 벗어날 수 없는 제약이다. 그렇지만 벗어날 수 없다고 해서 저항할 마음조차 품어본 적 없는지, 그게 궁금했다.

밀레시안은 몇 번을 입술을 열었다 닫기를 반복했다. 궁리 끝에 그가 내놓은 답은 참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 답변이었다.

“내가 소울스트림이었다면 아마 똑같이 했을 거야. 어쨌든 우리는 이방인이잖아. 삐뚤어진 놈이 나오면 그 힘으로 무슨 짓을 저지를지도 모르고. 게다가 감정에 제한이 걸려있다곤 해도 증오나 탐욕처럼 기운 빠지는 감정들만 골라서 지워지는 거면…… 오히려 이득 아니야? 누구를 계속 미워하는 거, 생각보다 엄청 힘든 일이다.”

그렇게 말하는 밀레시안의 모습은 초연해보였다. 수긍인지 아니면 체념인지. 어느 쪽이든 그가 걸어온 길의 무게가 문득 크게 느껴져서 톨비쉬는 당혹스러웠다. 정말로 여신의 의도를 따라 천성마저 제어당하고 있는 거라면 어떡하나, 그런 생각이 들어서 말할 수 없이 오묘한 기분이 들었다. 에린을 위해서는 모리안의 선택이 분명 옳은 선택일 텐데, 머릿속 깊은 한 구석에서는 부당하다는 저항만이 끊임없이 떠오른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톨비쉬는 자기가 떠올린 상념에 놀라서 오한이 들었다. 어디까지 휘둘릴 생각이었나. 그는 해이해지려는 심장에 다시 고삐를 잡았다.

“뿌리까지 착한 사람이군요. 알터가 밀레시안 씨를 찾아내서 정말 다행입니다.”

한 몸처럼 편하던 가면이 그 순간만큼은 무겁게 얼굴을 짓눌렀다.

*

변화는 네 번째 제단의 위치를 알아냈을 때 찾아왔다. 여느 때처럼 초대 단장의 기억을 읽고 난 밀레시안이 부쩍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다. 허둥지둥 알터에게 달려간 그가 내민 것은 손바닥 안에서 산산이 부서진 초대단장의 목걸이였다. 그동안 봉인이 묻힌 제단의 위치를 알려주고 최초의 알반 기사단을 보여주었던 목걸이가 마치 모루로 내려친 것처럼 조각조각 깨져있었다. 당황한 밀레시안이 쩔쩔 매며 알터를 붙잡았다.

“이거 고칠 방법은 없어? 갑자기 연결이 끊기더니 산산조각 나버렸어.”

“목걸이가 부서졌다고요? 수련의 동굴에 가져가면 뭔가 방법이 있지 않을까요?! 아, 어쩌지?”

“아무 거라도 좋으니까 방법을 알려줘. 당장 다시 연결해야 해.”

조근조근 말하고 있지만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에서 부쩍 초조함이 묻어났다. 밀레시안이라면 껌뻑 죽는 알터는 이미 패닉 상태였다.

“으아, 사실 저도 목걸이에 대해선 거의 아는 게 없어요. 그동안 밀레시안 님이 목걸이를 통해 초대단장 님의 기억을 읽는다는 것만 알고,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 건지는 감도 안 잡혀서…… 으으…… 정말 죄송해요, 밀레시안 님……”

도움이 되지 못해 죄송하다며 글썽이는 알터를 더 이상 채근할 수도 없어서 밀레시안은 발만 굴렀다. 그러나 알터를 괴롭히기가 미안해서 물러난 것뿐이지 걱정이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알터에게 털어놓지는 못했지만 밀레시안에게는 다시 한 번 목걸이에 적힌 기억을 들여다봐야 할 이유가 있었다. 목걸이는 파괴된 직후부터 빠른 속도로 부식되어 갔다. 밀레시안은 모서리부터 가루가 되어 날아가기 시작하는 조각을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손을 그러모았지만, 헛수고였다. 얼마 후에는 파편 셋 중 하나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파스스 무너지는 것을 허망한 눈길로 바라보아야만 했다. 밀레시안의 반쯤 벌어진 입술에서 좌절의 신음이 새어나오는 것을 본 알터만 덩달아 패닉에 빠졌다.

상황을 진정시킨 것은 그때 마침 돌아온 톨비쉬였다.

“무슨 일입니까? 알터와 밀레시안 씨 둘이서만 속닥속닥…… 아벨린이 보면 섭섭하겠는데요.”

‘헛소리 말아요, 톨비쉬!’ 멀리서 날카로운 역정이 들려왔지만, 알터나 밀레시안이나 눈앞의 사고에 정신이 팔려서 눈치 채지 못했다. 먼저 정신을 차린 밀레시안은 반쯤 가루가 되다시피 한 파편을 톨비쉬 앞에 불쑥 내밀며 설명했다.

“네 번째 제단의 기억을 읽고 있었는데 부서져 버렸어. 다시 고칠 수 있는 방법 알아?”

“글쎄요. 기억을 담은 목걸이 자체가 흔한 물건은 아니라서요. 어디 한 번 볼까요.”

그러더니 승낙이 떨어지기도 전에 파편에 손을 뻗는 톨비쉬 때문에 밀레시안은 얼굴을 붉혔다. 놀라서 순간적으로 차가워진 손바닥에 따끈한 손가락이 닿은 것이 고의인지 실수인지 밀레시안은 구분할 수 없었다. 너무 호들갑을 떨어서 괜한 짓을 한 걸까 고민하는 사이, 부서진 조각은 톨비쉬의 손끝 아래서 또다시 흩어졌다. 사금처럼 흩어져 내리는 모서리를 본 톨비쉬가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런…… 갑자기 시간이 흐르기라도 한 것처럼 부식되는군요.”

“밀레시안님이 꼭 봐야 할 기억이 남아있다는데, 어떡하죠 톨비쉬 님?!”

이미 알터는 또 한 번 패닉을 겪을 기세였다. 톨비쉬는 우선 울먹이려는 알터를 진정시킨 다음 상황을 정리했다.

“그만 진정해라, 알터. 아벨린 말처럼 호들갑 떨어서는 될 일도 안 되니 말이야. 밀레시안 씨와 상의할 일이 있으니 자리를 비켜다오.”

“네, 넵!”

밀레시안은 종종걸음으로 멀어져가는 알터를 시선으로 배웅했다. 그의 정신을 다시 돌려세운 건 톨비쉬의 질문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물어봐도 괜찮겠습니까?”

“어? 아, 응.”

“왜 그렇게 초조해 하는 겁니까? 마지막 제단의 위치는 이미 확인했고, 기억 속의 초대단장님도 더 이상 엿보기를 원하지 않았다고 하니, 더 이상 목걸이는 필요하지 않을 것 같은데요. 어차피 우연처럼 흘러온 물건이니 다시 우연처럼 사라진다고 해서 이상할 것도 없지 않습니까?”

질문을 받은 밀레시안은 어색한 표정으로 멈춰버렸다. 괜히 말꼬리를 늘이고 시선을 옆으로 돌리는 밀레시안에게 톨비쉬의 의아한 눈길이 쏟아졌다. 말없이 기다리며 침묵으로 채근하는 그 재촉에 결국 밀레시안이 먼저 꼬리를 내렸다. 그는 절대 저 잘생긴 눈썹이 곤란하게 처지는 모습에 찔려서 그런 게 아니라고 애써 자위했다.

“그…… 돌아가서 도와줘야 해.”

“초대단장님을 말입니까?”

진심이냐는 듯 고개를 흔드는 모습에 밀레시안은 얼른 설명을 덧붙였다.

“그 사람 정말 지쳐보였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이. 이단종교인들을 막아낼 만큼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란 건 알지만, 네 번째 제단 앞에 혼자 남았을 때는 정말로…… 정말로 위태로워 보였어. 깨지기 직전의 유리처럼 속에선 이미 금이 갈대로 갔는데 본인만 모르는 상황 같았다고.”

절절한 설득을 들은 톨비쉬의 눈길에 드물게 당혹이 어렸다. 빈틈을 발견한 밀레시안은 더욱 힘주어 매달렸다.

“돌아가서 도와줘야 해.”

“어째섭니까? 그 분은 단장입니다. 그 정도 책임은 깃발 든 자로서 당연히 져야 할 무게이지 않나요?”

그렇게 반론하는 톨비쉬의 시선은 유례없이 차가워서 언제나 넉살 좋고 유들유들하게 웃던 사람과 동일인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의 무기질적인 표정을 처음 본 밀레시안도 본능적으로 멈칫했다. 그는 답답하다는 듯이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해? 그렇다고 주저앉을 지경까지 혼자서만 짊어져야 할 필요는 없잖아.”

“……”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이번에는 쐐기를 박듯 힘주어 말했다.

“내가 혼자 두기 싫어서 그래. 왠지 그 사람, 혼자 내버려두면 안 될 것 같아서.”

서너 번 기억을 읽은 것 외에는 아무런 면식도 접점도 없는 상대방에게 어떻게 이토록 빨리 유대를 형성할 수 있는지, 톨비쉬는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듯 했다. 그러나 높은 담처럼 냉정하던 기사의 표정이 방금 전과는 조금 달라져 있었다. 여전히 읽기 어려운 건 마찬가지였지만, 텅 빈 도화지처럼 무심한 표정이 아니라 너무 많은 생각이 뒤섞여서 검게 물든 도화지 같았다. 밀레시안은 그 검정 도화지를 읽어내려고 애쓰는 대신, 한 번 더 손을 내밀었다. 무언의 행동은 때로 말보다 더 큰 의지를 전달하는데, 밀레시안의 손짓도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 목전에 내밀어진 부서진 조각을 톨비쉬는 한참 말없이 내려다봤다.

“톨비쉬?”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영원 같던 침묵이 깨졌다. 톨비쉬는 파편을 넘겨받는 대신 그것을 쥐고 있던 밀레시안의 손을 다시 곱게 접어주었다. 손끝과 손끝이 맞닿는 순간 창백하던 뺨 위로 홍조가 어른거렸는데, 부탁이 거절당하느라 상심에 휘말린 밀레시안은 알아채지 못했다.

톨비쉬가 이젠 유리처럼 잘게 깨진 목걸이를 넘겨주며 고개를 저었다.

“이미 너무 심하게 으스러져서 고치진 못할 겁니다. 강제로 이어붙인다고 해서 목걸이에 깃든 마법이 다시 돌아오리라는 보장도 없고요. 안타깝지만 포기하세요. 어차피 과거의 인물입니다. 개입한다고 해서 지나간 일을 되돌릴 수는 없다는 거, 밀레시안 씨도 알지 않습니까. 메모리얼 아이템이란 그런 겁니다.”

“하지만……”

좀처럼 미련을 못 버리는 밀레시안을 위로하듯 톨비쉬는 주먹 쥔 밀레시안의 손을 한 번 더 부드럽게 감쌌다.

“마법이 풀리긴 했지만, 남은 조각은 밀레시안 씨가 가지시죠. 왠지 원래 주인도 그 편을 원할 거란 기분이 드는군요. 그리고……”

그는 축 처진 밀레시안의 어깨를 가볍게 쓸면서 덧붙였다.

“이전에도 일러드렸던 것 같은데, 모르는 사람에게 너무 쉽게 정을 붙이진 마십시오. 우리 기사단의 초대단장님이긴 하지만,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기억 속 인물일 뿐입니다. 과거의 사람한테 지나치게 감정을 쏟으셨어요. 밀레시안 씨처럼 강한 힘을 지녔으면서 인정에 후한 분은 특히나 더 조심하셔야 합니다.”

“그것 참 고마운 충고네. 하지만 내 오지랖이 없었으면 애초에 너희랑 만날 일도 없었을 걸.”

이미 상심할 대로 상심한 밀레시안은 톨비쉬의 조언을 듣는 냥 마는 냥 대충 흘려보냈다. 그것을 본 톨비쉬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도 그렇군요. 하지만 진심으로 드리는 조언입니다. 당신은 조금 더 영악해질 필요가 있어요.”

‘차라리 소울스트림이 오염되길 바랄만큼요.’ 입 밖에 내지 않은 말은 전해지지 않았다.

밀레시안은 남은 파편을 수습해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무 쓸모가 없어진 목걸이를 조심스레 주머니에 담고서 겉옷 안쪽에 매다는 밀레시안의 모습을 보고, 톨비쉬는 자신이 패배했음을 직감했다. 굳이 목걸이를 흘려보내 아픈 기억을 스스로 들추어낸 것은 흔들리려는 자신을 질책하기 위해서였다. 과거의 쓰린 고통을 상기시켜 그때 맹세했던 원망과 분노를 되살려보려던 절박한 몸부림이었다. 이기적인 계획이 물거품처럼 흩어진 지금에야 아무 의미 없는 노력이었지만. 역공 당한 기분이었다.

 

10. 어떤 기억은 다른 기억보다 더 집요하게 뇌리에 남는다. 사건이 일어났을 때에 불던 공기의 냄새, 피부에 닿던 미풍의 감촉, 이명처럼 귓가를 울리는 대류 소리 등 오감이 물결치듯 일어나 온몸으로 그 순간을 새기는 것이다. 그렇게 각인된 기억은 응고된 회백질처럼 뇌에 눌러 붙어서 훗날 비슷한 냄새나 소리, 또는 감촉을 느끼기만 해도 당시의 괴로운 순간을 만화경처럼 되살려 내서 우리를 괴롭게 한다. 그날 페라 화산에서 사도를 맞닥뜨린 결사단의 기사들이 느꼈던 감정도 꼭 그처럼 그들의 뇌리에 각인되어 핏줄을 마르게 했다.

사도와 조우한 일이 충격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인간이나 짐승을 변형해 만든 괴물인 사도와 싸우는 것은 알반 기사단에겐 이미 일상의 일부였다. 노련한 다섯 명의 기사들, 특히 정식으로 서임 받은 경력이 가장 짧았던 알터가 충격 받은 것은 그들의 목전에서 벌어진 피비린내 나는 사고 때문이었다. 일각 전까지 함께 힘을 나누며 싸우던 전우가 스스로 쏜 총에 머리가 날아가는 것을 본다면 아무리 강철 같은 심장을 가진 용사여도 트라우마를 얻을 만 하니까.

사실 자살을 저지른 본인도 처음부터 그렇게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할 생각은 아니었다. 세 명의 기사가 팀을 이루어 방어-속박-처형이라는 연계 기술로 사도를 압도하는 작전은 이미 여러 번의 경험을 통해 효과가 보증된 전략이었고, 밀레시안도 기사단과 함께 다니면서 몸에 익힌 기술이었다. 피네와 톨비쉬가 ‘방어’를 걸고 알터가 사도를 ‘속박’하면 아벨린과 함께 ‘처형’을 하면 되는, 간단한 순서였다. 그러므로 첫 번째 심판의 칼날이 사도의 거대한 날개 한 짝을 내리찍을 때까지만 해도 밀레시안은 상당히 자신만만한 상태였다. 직전에 받은 공격으로 조금씩 출혈이 나긴 했지만 큰 상처는 아니었고, 이대로 조금만 더 몰아붙이면 금방 전투를 끝낼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한결 부담이 던 밀레시안은 근처에 있던 톨비쉬에게 대비 삼아 한 번 더 방어를 걸어줄 것을 부탁하고 움직였다. 상대적으로 무방비한 부분인 사도의 등을 노려 마지막으로 ‘처형’의 칼날을 내리칠 생각이었다. 완벽하던 계획은 목표였던 사도의 등 뒤에 도착했을 때 흔들렸다. 방금 전까지 단단히 사도를 묶고 있었던 알터의 ‘속박’이 풀리면서 사도가 앞으로 날아올랐다. 그쪽은 밀레시안이 서 있는 반대 방향이었고, 다시 말해 아직 톨비쉬가 남아있던 자리였다.

사도의 그림자가 향하는 방향을 알아차린 누군가가 경고하기 위해 목청을 높였다.

“톨비쉬! 앞에!”

연륜 있는 기사인 만큼 톨비쉬 본인이 누구보다 더 빨리 자기가 처한 곤경을 이해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 ‘방어’를 둘러주고 다시 자세를 정비하기 위해 멈칫한 찰나의 순간, 사도한테서 뿜어져 나온 검붉은 사념이 엘베드의 기사를 에워쌌다. 경직된 이의 낯 위로 깨달음의 빛이, 이어서 잠시 후에는 각오의 빛이 떠올랐다. ‘다음 공격은 못 피한다.’ 찰나의 순간이 무한처럼 늘어나고, 석고처럼 하얗게 질린 기사는 다가 올 충격을 대비했다. 본능적으로 눈을 질끈 감은 순간 그의 머릿속으로 지나간 생각은 ‘제발 살아있어야 할 텐데’라는 기약 없는 소망이었다.

“톨비쉬!”

“……!”

철과 철이 부딪치는 소리가 생물의 비명처럼 귀를 찢었다. 고막을 찢을 듯한 금속성에 이어 살이 베이는 감각이 전달될 것을 기다렸으나, 아무 징조도 느껴지지 않았다. 몸에서 어떤 고통도 느껴지지 않는 것을 깨달은 톨비쉬는 뒤늦게 감았던 눈을 치켜떴다. 부릅뜬 시야 사이로 탑처럼 전방을 지키고 선 인영이 보였다. 사도의 잔인한 발톱을 막아낸 방패 아래, 부들부들 떨리는 그림자가 서 있었다. 그 인영 아래로 불길한 액체가 뚝뚝 방울져 떨어지는 것을 본 순간, 창백하게 질려 있던 톨비쉬의 낯이 완전히 피가 빠져나간 것처럼 더욱 하얗게 표백되어 버렸다. 멀리서 어린 청년의 울먹거리는 비명이 들려왔다.

“안 돼! 밀레시안 님!”

쉽게 흥분하는 알터를 혼내고 어서 사태를 수습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톨비쉬는 아직 경직이 풀리지 않은 것인지 두 다리를 움직일 수 없었다. 밀레시안이 방패로 막아냈던 사도는 종말의 괴물처럼 사방으로 사지를 뒤틀며 저항하는 인간을 도살하려 용을 썼다. 거대한 짐승의 그림자 아래서 밀알처럼 작은 밀레시안이 힘겹게 사도의 낫을 피하려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 모든 장면을 지켜본 톨비쉬는 심장이 내려앉는 한편, 결박된 수인처럼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 대해 공포를 느꼈다. 이전에 겪어본 적 없는 빙하 같은 공포였다.

사태를 타개한 것은 아벨린이었다.

“알터, 비켜!”

아벨린은 밀레시안한테 달려가려던 알터를 고함을 질러 쫓아낸 다음, 사도의 뒤에서 뛰어 올랐다. 거대한 랜스가 거대한 칼날 모양을 그려내며 사도의 남은 날개를 잘라내는 동시에, 신호를 받은 카즈윈이 비틀거리는 사도의 등가죽에 연이어 ‘처형’을 내리쳤다. 두 차례 연속적으로 ‘처형’ 당한 합성수의 육체는 몇 초 간 비틀거리다가, 천천히 땅 위로 무너졌다. 천지를 진동하는 불쾌한 비명이 멎고, 거대한 시체에서 흘러나온 검은 체액이 자갈과 초목 사이를 헤치고 흙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러나 역겨운 냄새를 내는 사도의 피도 기사들을 주목시키진 못했다. 다섯 명의 기사는 너나 할 것 없이 밀레시안이 누워있는 자리로 달려갔다.

밀레시안이 지키려던 대상인 만큼 가장 가까이에 서 있던 톨비쉬가 제일 먼저 도착하고, 두 번째로 피네가 회복마법을 시전한 채로 뛰어왔다. 그러나 양 손 가득 치유의 빛을 담고서 달려온 피네는 붉게 젖은 채로 쓰러진 밀레시안을 본 순간 참지 못하고 신음을 흘렸다.

“세상에…… 피가 너무 많아……”

새빨간 핏물이 온통 밀레시안의 옷가지를 뒤덮고 붉은 웅덩이를 이루고 있었다. 사도의 반격을 받은 즉시 시작된 출혈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고 계속 되어, 이미 가진 피의 절반이 빠져나갔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끊임없이 피가 흐르는 목 아래와 대조적으로, 얼굴은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피네가 쉬지 않고 회복마법을 걸어봤지만, 단순히 빠져나간 피를 채워주는 마법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보이지 않는 곳에 커다란 상처가 있어서 막는 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출혈이 지속되는 게 틀림없었다.

“오, 옷을…… 밀레시안 님 옷을 벗겨야 해요. 상처부터 봉합해야……!”

“울지 마, 알터! 이거 들고 있어, 갑옷 벗길 테니까.”

아벨린이 들고 온 붕대 무더기를 알터에게 맡긴 다음, 자진해서 밀레시안의 경갑을 벗겨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얇은 흉배 아래서 드러난 광경이 너무 처참해서 아르후안의 기사는 희망을 가져보기도 전에 먼저 절망해야 했다. 왼쪽 어깨부터 흉부까지 살가죽이 길게 찢어져 있었다. 너무 깊은 자상이었다. 어깨부터 쇄골까지는 살이 움푹 패어서 하얀 뼈가 들여다보였고, 명치부터 옆구리까지는 시뻘건 속살까지 찢겨서 내장이 얼핏 비쳤다. 출혈을 막는 정도로는 회복할 수 없는 상처라는 걸 누구나 알 수 있는 깊은 자상이었다.

아벨린은 염료에 담갔다 뺀 것처럼 시뻘겋게 물든 손으로 밀레시안의 뺨을 붙잡았다. 아직 호흡은 붙어 있었다. 일말의 희망을 찾은 아벨린이 가볍게 그의 뺨을 두드리며 계속 말을 걸었다.

“밀레시안, 밀레시안! 정신 차려요, 절대 눈 감으면 안 돼요! 알터, 카즈윈, 그 붕대로 상처를 막아줘. 밀레시안, 눈 뜨고 앞에 봐요. 나 보여요?!”

지시받은 대로 알터와 카즈윈이 갈라진 환부를 모아서 붕대로 감쌌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나마 피네가 끊임없이 시전하고 있는 회복마법만이 겨우 숨이 붙은 상태를 유지시킬 뿐, 상태는 시시각각 악화되어 갔다. 분주히 움직이던 아벨린의 입술에서 다시 절망하는 신음이 흐르기 시작할 때, 톨비쉬가 그녀를 대신해서 밀레시안에게 말을 붙이기 시작했다.

“안 돼…… 안 됩니다. 아직은 안 돼요. 당신이 이럴 수는……”

거의 혼잣말에 가까운 그 읊조림은 불가해한 내용을 담고 있었지만, 밀레시안을 돌보느라 정신이 팔린 나머지 사람들의 귀에는 가 닿지 않았다.

피네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알터의 눈이 눈물로 퉁퉁 부어오를 때 즈음, 밀레시안의 눈꺼풀이 드문드문 움직였다. 한 시도 밀레시안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던 알터가 제일 먼저 알아차리고 소리를 질렀다.

“밀레시안 님! 정신이 드세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는 검은 눈에 고통이 가득했다. 가까스로 의식을 되찾은 밀레시안이 가장 먼저 한 행동은 눈알을 굴려 다섯 명의 기사를 살피는 일이었다. 힘겹게 고개를 돌린 밀레시안은 해골 문양을 단 육중한 갑옷이 얕게 오르락내리락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자기 옆에 살아있는 톨비쉬가 무릎을 꿇고 있음을 확인하자, 그는 비로소 뻣뻣한 고개를 숙여 자기 몸을 내려다보았다. 누워있는 자세 때문에 제대로 보이진 않았지만, 심각하게 다친 게 틀림없었다. 굳이 환부를 보지 않아도 몸 곳곳이 내지르는 비명과 가물가물한 머리 때문에 알 수 있었다. 반쯤 잘린 팔을 다시 붙일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죽었다 다시 태어나는 쪽이 더 편하고 말지. 게다가 성대가 고장난 건지 소리가 나오진 않았지만, 전신이 송곳에 찔린 것처럼 너무 너무 아팠다.

상황 판단을 끝낸 밀레시안은 남은 힘을 끌어 모아 마법을 시전했다. 아직 붙어 있는 오른손에 하늘빛 구가 형성되면서 작은 얼음 조각들을 만들어냈다. 손을 움찔거리는 그 모습을 보고 아벨린과 알터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애타게 밀레시안을 불렀다.

“움직일 수 있겠어요?! 아니, 일단 아무것도 움직이지 마요! 진정을 해야……!”

“……ㅂ……켜……”

“밀레시안?”

가물거리는 신음을 내던 밀레시안은 호소하는 눈으로 제게 매달리는 여기사를 올려다봤다. 짙은 고통을 담고 있는 그 눈빛을 아벨린과 알터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몰라 횡설수설했다. 먼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사람은 톨비쉬였다. 그는 말없이 아벨린의 어깨를 붙들었다. 붙잡힌 아벨린이 뭐하는 짓이냐고 되묻기 전에, 밀레시안의 손 위에서 형성된 얼음이 먼저 움직였다. 쐐기처럼 뾰족해진 결정 무더기는 곧장 밀레시안의 얼굴 위로 떠올라 파리한 목덜미를 향했다. 얼음송곳은 한 치의 오차 없이 정확하게 시전자의 목으로 꽂혀들었다.

“밀레시안!!!”

확실하고 빠른 자살이었다. 남은 것은 목줄기가 뚫린 밀레시안의 시체를 황망히 바라보는 다난들 뿐이었다.

“이게 대체……”

허망한 표정의 아벨린 옆에선 알터가 입을 틀어막고 충격과 슬픔이 뒤섞인 오열을 흘리고 있었다. 상황을 인지한 톨비쉬는 목이 찢겨 쓰러진 밀레시안의 시신을 수습했다. 갑작스레 벌어진 사건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기사들에게, 톨비쉬는 맥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 그들은 불사이니까…… 곧 다시 돌아올 걸세.”

참았던 네 명의 숨이 동시에 흘러나왔다. 피네가 쉽게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알터를 부축하며 물었다.

“그럼 밀레시안님의 ……는 어떻게……?”

차마 시신이라는 말을 꺼내지 못하는 피네에게, 톨비쉬는 말 대신 행동으로 대답했다. 밀레시안의 너덜거리는 시신을 수습해서 조심스레 팔 안에 끌어안는 그를 아무도 말리지 못했다. 결사단에서 가장 체격이 좋은 그의 품 안에 안겨 있으니 안 그래도 힘없이 늘어진 몸이 더더욱 초라해 보였다. 당장 재처럼 흩어져도 놀랍지 않을 것 같았다. 톨비쉬는 무거운 침묵을 깨며 말했다.

“일단 안전한 곳으로 이동하지. 여긴 화산 지대라서 재가 너무 많아. 이미 소용없는 일이라곤 해도, 이런 환경에 밀레시안님을 방치하고 싶진 않으니.”

호흡을 멈춘 밀레시안을 안고서 돌아가는 길은 몹시 멀고 지쳤다. 석양이 저문 언덕 위로 우울한 장례 행렬이 지나간다. 길게 늘어진 다섯 개의 그림자는 톨비쉬가 말한 대로, 절망 속에서 희망을 길어 올리려 무던히 애를 썼다. 그들 중 누구도 그날 방패와 칼이 부딪히던 날카로운 울음, 밀레시안의 몸을 뒤덮은 선명한 색의 혈액, 그리고 밀레시안의 숨에서 풍기던 비린 피 냄새를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았다. 뇌에 기억이 눌러 붙는다는 건 그런 뜻이다.

 

*

톨비쉬는 길을 걷고 있었다. 언제부터인지 모를 오래 전부터 쉬지 않고 계속 걷고 있었다. 해가 저물기 전에 빨리 도착해야 할 곳이 있다는 생각에 조급히 발을 움직이던 중이었다. 문득 뭔가를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스쳤다. 종종 깨달음은 그렇게 찾아오는 법인데, 늘 그렇듯이 정말 중요한 사실은 너무 늦게 알아차리는 법이다. 톨비쉬는 멀리서 들려오는 늑대의 우울한 장송곡을 듣는 순간 그걸 깨달았다. 넓은 보폭으로 바짝 움직이던 두 다리가 덫에 붙들린 것 마냥 멈춰 섰다. 길 한복판에 우뚝 선 톨비쉬는 안개가 끼어 가물가물한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떠나 온 집에 아주 불길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았다. 산을 태워버릴 정도로 커다란 화재가 일어나는 것 따위의. 그리고 집 안에는 아주 소중한 물건을 두고 나왔다.

‘그런데 내가 문을 열어놓았던가?’

생각을 끝마치기 전에 몸이 먼저 떠나온 방향으로 힘껏 뛰고 있었다. 가쁘게 숨을 들이쉬느라 찢어질 것처럼 아픈 폐를 붙잡고, 열심히 달렸다. 어둑어둑해진 길을 무아지경으로 달리는 동안 어느 새 해가 다 져버렸다. 어두운 밤을 헤치고 허우적거리는 동안, 두고 온 물건이 사실은 매우 아끼던 보물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떠나온 길의 절반을 되돌아갈 때 즈음에는, 그것이 보물이 아니라 살아있는 생물이란 사실이 떠올랐고, 칠 할을 되짚어 가서는 그 생물이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이 기억났다. 톨비쉬는 얼굴 위로 줄줄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칠 틈도 없이 집을 향해 뛰었다. 두 다리가 삐걱거리기 시작하고 숨이 턱밑까지 차올랐지만, 저 멀리 어둠 속에서 피어오르는 짙은 연기를 보고 나니 조금이라도 속도를 늦출 수 없었다.

끄트머리만 보이던 연기는 점점 커져서 무겁고 탁한 구름이 되고, 그 아래서 용의 혀처럼 사나운 불길이 낼름거렸다. 단단히 문을 잠그고 빗장까지 걸어놓은 집은, 맹렬한 불길 속에 타오르고 있었다. 기어이 집에 도착한 톨비쉬는 아프다고 비명을 지르는 다리를 이끌어 정문으로 달려갔다. 뜨거운 화염에 휩싸인 집은 온도가 너무 높아서 손을 대기 어려웠다. 톨비쉬는 개의치 않고 문고리에 달라붙었지만, 손바닥에 짓무른 화상만 입을 뿐 문은 굳건히 잠겨 열리지 않았다. 그는 절망하여 측면에 난 창문으로 달려갔다.

높은 곳에 달린 창문을 건너기 위해선 벽면에 튀어나온 벽돌을 짚고 담을 타야 했다. 몇 번인가 발을 헛디딘 끝에 겨우 창틀을 붙잡고 문을 열려고 했는데, 이번에도 열리지 않았다. 한참 전에 깨졌어야 할 유리창은 마법으로 봉인된 것처럼 절대 깨지지 않았다. 탄 냄새가 진동하고 매캐한 연기가 기침을 일으키는 와중에 애를 쓴 끝에 겨우 안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창 너머로 익숙한 얼굴들이 불에 타고 있었다. 아버지, 어머니, 형제와 자매. 유년 시절의 옛 친구들과 무수히 많은 동료들. 모두 화마에 일그러진 얼굴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참혹한 절규 사이로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이.

“밖으로, 밖으로 나와! 문이 엇나가서 밖에선 열지 못해! 안에서 밀어서……!”

말을 끝맺기 전에 서까래가 무너지면서 천장이 내려앉았다. 눈 깜짝할 사이 집이 무너졌다. 밀려난 톨비쉬는 바닥에 쓰러져 뒹굴었다. 안에 갇힌 사람들은 불살에 휩쓸려 검게 타버렸다. 화염이 만들어내는 소리가 너무 거세서 마지막 단말마조차 들리지 않았다.

밀레시안이, 죽었다.

무자비한 화마는 전소된 잔해에서 유골을 끌어낼 수 있는 시간조차 베풀지 않았다. 남아있던 기력마저 모두 불귀신에 빼앗겨 버린 마냥, 톨비쉬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두 다리를 지탱하고 서 있을 힘조차 남지 않았다. 이명으로 진동하는 귓가에 맴도는 것은 자책의 목소리뿐이었다.

‘왜 문을 열어두지 않았을까. 왜 문을 잠갔을까. 재앙이 올 줄 모르고서? 나는 왜 그런 선택을—’

처음에는 분명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나, 보물을 잃어버린 지금에는 아무런 위로도 되지 않는다. 홀로 남은 톨비쉬는 거친 흙에 얼굴이 할퀴는 것도 모르고서 땅에 엎드려 통곡했다. 어리석은 죄인에게는 딱 그 정도가 어울렸다. 변명할 수도 없어서 잃어버린 보물의 이름만 되뇌는 죄인에게는.

‘돌려줘…… 그를 돌려줘. 잘못은 내가 했으니 나를 데려가라. 나를 대신——’

“——헉!”

잠에서 깨어나고서도 한참을 헤맸다. 눈앞에 있는 것은 불타버린 잿더미가 아닌 낯익은 천장이었다. 금방이라도 아래로 떨어질 것처럼 낮은 천장은 아발론 경계지의 임시 숙소에 있는 것과 똑같은 무늬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흐르자 비로소 있는 곳을 알 수 있었다. 멀리 갈 수 없어 급한 대로 견습 기사단의 치료소로 밀레시안을 옮긴 일이 기억났다. 익숙하다고 생각한 천장은 이전에 종종 들린 적 있던 견습기사 숙소의 천장이었다. 서서히 정신이 들기 시작한 톨비쉬는 조금씩 몸을 움직여 손끝을 움직여보았다. 축축하게 젖은 손바닥 아래로 마찬가지로 흠뻑 젖은 침대보가 잡혔다. 식은땀을 얼마나 흘렸는지 열 오른 등에 내의가 찰싹 달라붙을 지경이었다.

방금 본 비극이 현실이 아니라는 사실에 미처 안도하기도 전, 톨비쉬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옮겨 급히 방을 나섰다. 객사를 벗어나 야외로 나가자 밤기운이 쌀쌀했다. 식은땀에 절은 몸에 갑자기 찬바람이 닿자 급격하게 체온이 떨어졌다. 그러나 그는 팔에 닭살이 돋는 것이나 이가 떨리는 것엔 개의치 않고 작은 불빛이 아른거리는 치료소로 달려갔다.

늘어선 병상 중 한곳에 밀레시안이 누워 있었다. 가까이 다가간 톨비쉬는 옆에 있던 촛대를 들어 침상을 비췄다. 뼈가 보이고 내장이 드러났던 흔적은 손톱만큼도 남아있지 않았다. 밀레시안은 온전한 모습 그대로, 마치 새 몸처럼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혈색이 돌아온 뺨은 핏기가 빠져나갔던 모습이 환상으로 생각될 만큼 생기로 뛰고 있었다. 수면이 필요하지 않은 밀레시안에게 이 잠깐의 정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톨비쉬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불안에 잠식당한 자신의 심장이 어서 고해를 토해내라며 성토하고 있단 사실 하나만은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밀레시안이 깰지도 모르는 위험을 감수하고 협탁 위에 촛대를 내려놓았다.

“실수를”

목소리가 볼품없이 떨렸다.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신자는 조각난 단어를 기워가듯 애써 말을 이었다.

“문은 처음부터 닫혀서는 안 되는 것이었는데. 어리석은 제가 그걸 모르고 아집을 부렸습니다. 잠금쇠를 걸고 성벽을 폐쇄하면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갈 것이라며 벗을, 사람들을 호도했습니다. 그래서 소중한 이들을 잃고 말았습니다.”

북받치는 울음을 참느라 주먹을 세게 쥐었다. 손바닥으로 손톱이 파고 들었다.

“내 손으로 시작한 일이니 내가 돌려놓겠습니다. 제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두려워 외면하고 도망 다녔으나, 더 이상은 도망치지 않겠습니다. 다시 한 번 문을 열고, 그래서 이계신에게 미끼를 던지는 한이 있어도, 세상이 당신의 이름을 찾도록 하겠습니다. 흩어진 믿음들이 되살아나고 거듭 당신께 영광을 돌리는 시대가 다시 올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돌려놓겠습니다. 돌려놓고야 말겠습니다.”

기도는 맹세가 되어 쐐기처럼 심장에 박혀들었다. 그는 마치 마술처럼 언어가 주술이 되어 자신의 삶을 결박하는 것을 느꼈다. 생명에 각인되는 것을 느꼈다. 신자는 그것이 침묵하는 신이 보낸 무언의 응답이라 믿었고, 그렇기에 제 기도를 듣고 있을 이에게 모든 염원을 담아 호소했다.

“그러니 당신의 자녀를 가엾이 여기시어 그를 돌려주소서. 저는 별이 없으면 살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

볼 위로 작은 물방울이 흘렀다. 그 물방울은 밤을 새워 밀레시안의 곁을 지키는 내내, 사라지지 않았다.



(계속) 



cocktail 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

댓글 2

SNS 계정으로 간편하게 로그인하고 댓글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