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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톨비] 황금 시절 (사람의 아들 외전)

밀레시안을 만난 톨비쉬의 이야기



Louis Comfort Tiffany, Field of Lilies, Chicago.



신이 직접 빚어낸 자녀. 아튼 시미니의 가장 충실한 신자. 누구보다 아발론을 숭앙하고 사랑했던, 첫 번째 검.

그를 이르는 이름은 많았다. 그러나 언제나 빛나고 영광스런 이름만 거친 것은 아니다. 부모(아튼 시미니)의 보호 아래서 걱정을 모르고 행복하던 유년시절을 지나, 깊은 골짜기를 걸을 때는 고엽처럼 쓸쓸하고 진흙처럼 음울한 이름을 걸쳤었다. 동료를 잃고, 고향을 잃고, 삶의 소명마저 잃고서 방황하던 시절의 이야기인데, 대략 이런 이름들이다. 

홀로 남겨진 고아, 구세대의 망집, 흔들리는 신앙, 방랑하는 순례자. 그리고 바뀐 세상이 두려운 나머지 사막으로 숨어버린 은둔자. 빙하처럼 얼어붙은 사막을 걷던 그 시절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어두운 악몽이 되어 떠올릴 때마다 마음을 괴롭게 했다. 톨비쉬는 가급적 그 시절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을 피하려 했는데, 사막에서 나온 후 굳이 멀린을 찾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혹시라도 멀린의 입에서 다시 방랑 시절의 부끄러운 이름을 듣게 된다면, 그 이름과 함께 끌려올 기억들이 두려웠던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참 이기적이고 못난 어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처럼 힘들고 외로웠던 시절이 다시 파도가 되어 몰려오려고 하면, 그는 우울증에서 벗어나려는 사람들이 으레 그러하듯, 낡고 헤진 추억의 주머니를 뒤져서 애써 행복한 기억을 건져 올려보았다. 그 작은 추억들을 모아 나룻배를 짓고, 악몽이라는 파도 위를 흘러간다. 그러고 나면 잠시 후에는 거친 해일을 지나 어느 새 잔잔한 바다에 들어서 있다. 그렇게 또 한 고비를 넘는 것이다. 

암굴에 갇혀 무서움에 떨던 시절은 지나간 과거며, 지금 이 순간 자신이 서 있는 대지에는 다른 사람들이 함께 있다고. 먼 옛날 아발론의 벗들은 아니지만, 그만큼(혹은 그보다 더) 소중해진 사람들이 있노라고. 두 발을 디디고 서서 새벽과 한낮의 공기를 들이쉴 때마다 그 사실을 되새긴다. 카브 해변에서의 망중한, 함께 빵과 소금을 나누어 먹던 시간, 신뢰의 맹세를 대신하던 바닷가의 연회. 카즈윈, 아벨린, 피네, 알터, 카엘릭의 머나먼 후손, 밀레시안, 나의 별, 밀레시안. 

밀레시안. 두 음절의 그 이름을 발음할 때면 구름이 구르듯 혀가 부드럽게 이를 스친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그와 같은 공기를 마시며 같은 호흡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체감한다. 살면서 맛본 숨 중에 가장 달콤한 숨이다. 어느 한낮, 밀레시안을 기다리다가 다가오던 그를 발견하고 발이 제멋대로 움직인 순간, 처음으로 그 사실을 깨달았다. 그날 이후로 톨비쉬의 긴 이름 목록에는 또 하나가 더해졌다. 사랑에 겨운 사람, 행복한 사나이. 

밀레시안의 소소한 농담 한 마디, 멋쩍은 미소 한 점에 진심으로 크게 웃는 그를 보고서 기사들은 각양각색으로 반응했다. 깜짝 놀란 알터, 경악하는 아벨린, 흐뭇해하는 피네. 가장 무심하고 과묵한 카즈윈은 모처럼 졸린 눈을 비스듬히 뜨며 한 마디 툭 던졌다. 

“우리 중에 일기 쓰는 사람이 둘로 늘었네.” 

톨비쉬의 손에 들린 낡은 가죽 수첩을 보고 한 말이었다. 오래되어 손때가 묻은 수첩에는 한 면 가득 깨알 같은 글씨가 차 있었다. 너무 호방하지도 않고 소심하지도 않은, 시원스럽고 빠르게 흘린 필체는 드문드문 같은 단어를 반복하고 있었다. 두세 줄에 한 번 꼴로 계속 등장하는 것을 보면 드문 게 아닐지도 모른다. 지적당한 톨비쉬는 여덟 개의 철자로 이루어진 그 이름이 몇 번 등장하나 세어보았다. 한 줄 한 줄 일기를 손으로 짚어가는 동안, 스무 번이 넘도록 손가락이 멈췄다. 무안해진 톨비쉬는 입술을 꾹 다물고, 카즈윈의 시선으로부터 가죽 수첩을 숨겼다. 보물지도를 감추듯 비밀스러운 그 동작을 보고서 카즈윈은 눈을 굴렸다. 

“아르후안 네 막내처럼 관찰일지라도 쓰는 거야? 솔직히 걔가 쓴 일지 본 적 있거든. 좀 소름끼치는 거 알지?”

“당신은 평소에 동료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군요. 알터가 알면 무척 섭섭해 할 겁니다.” 

“똑같은 이름이 구두점도 없이 백 번씩 쓰여 있는 걸 봐봐. 안 무서울 수가 없지.” 

“그토록 꿈에 그리던 영웅을 만났으니 그럴 수도 있는 법이죠. 소년의 순정을 비웃지 말아요, 카즈윈. 누가 뭐래도 소중한 막내 아닙니까.” 

후후 웃으며 말하는 톨비쉬를 카즈윈이 조용히 바라보았다. 카즈윈은 무언가 망설이 듯이 코를 찡긋거리다 물었다. 

“하지만 그 순정이 연정으로 바뀌기라도 하는 날에는,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잖아?”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그는 카브 해변에서 있었던 다툼과 외나무다리에서의 싸움을 떠올리며 말했다. 

“전에 카브 해변에서, 나보고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라고 했던 적이 있지? 내 마음을 도통 읽을 수가 없다고 말이야.”

“예, 뭐. 그랬던 것도 같고.” 

“내 눈에는 당신이 더 불가사의해. 아니, 당신을 의심한다든가 불쑥불쑥 사라지는 행적 같은 걸 말하려는 게 아냐. 당신이 첩자가 아니란 건 이미 판명난 일이니까.”

속상하다는 얼굴로 뭔가 항변하려는 톨비쉬를 카즈윈이 가로막았다.  

“정말로 궁금한 건, 어제만 해도 사람이나 인연 따위엔 초연한 행자처럼 굴더니, 오늘은 옷소매 자락에까지 감정을 풀풀 흘리고 다니는 당신 태도야. 생전 안 쓰던 일기를 쓰고, 알터를 경계하고, 밀레시안 주위에 담을 두르고. 결정적으로 욕심을 내고 있잖아. 본심이 뭐야? 초연한 너랑 탐내는 너, 어느 쪽이 진짜 당신이지? 그걸 모르겠어.”

다른 조장들에 비해서 둘의 사이가 데면데면하단 점을 고려하면, 카즈윈이 던진 질문은 굉장히 사적인 내용이었다. 안 그래도 최근에 갈등이 있었던 차에, 굉장히 위험하고 민감한 질문이란 건 카즈윈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욱 조심스럽게 톨비쉬를 살폈다. 늘 여유로운 그 얼굴에 작은 균열이 어릴 거라고 예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카즈윈의 기대를, 엘베드의 조장은 가뿐한 표정으로 날려버렸다. 

“그야,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는 법이니까요? 원래 인간의 내면엔 여러 얼굴이 뒤섞여 있다고들 하지 않습니까? 전 당신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데.” 

“뭐가.”

뜻대로 톨비쉬를 당황시키지 못한 것이 심통이 났는지, 카즈윈이 불퉁하게 대꾸했다. 그런 그에게 톨비쉬는 웃으며 자신이 관찰한 바를 얘기했다. 

“나나 아벨린을 볼 때 당신 표정 말이죠. 가끔은 상처받을 만큼 무관심하고 차가운데, 피네를 볼 때는 전혀 달라져서 이렇게, 날씨가 개듯이 확 핀단 말이죠.”

톨비쉬가 손으로 원을 크게 그리며 말했다. 지적을 받은 카즈윈은 목덜미가 훅 붉어졌다. 톨비쉬는 동료의 약간 까무잡잡한 얼굴에 홍조가 떠오르는 것을 즐겁게 구경했다. 그리고 부러 짓궂게 쐐기를 박으며 놀렸다.

“소매자락 간수는 당신이 더 시급해 보이네요, 카즈윈.” 

말을 마친 그는 저 멀리서 손을 흔들며 달려오는 밀레시안을 보고, 이만 자리에서 일어섰다. 밀레시안은 사흘간의 사냥 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오는 참이었다. 고작 며칠 만에 보는 얼굴이지만, 밀레시안을 맞이하는 기사의 얼굴은 삼 년 만에 돌아온 가족을 보는 것처럼 환하게 빛났다. 물빛 벽안이 진실로 청안(靑眼)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카즈윈은 톨비쉬가 팔이 떨어져라 손을 흔드는 밀레시안한테 손인사로 마주 답하는 모습을 바라봤다. 반 백 야드는 더 넘게 떨어져있는 거린데도 벌써 코앞에 붙어있는 것 마냥 흔드는 꼴이 간질거리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그때 톨비쉬가 급히 일어서느라 풀밭에 떨어트린 가죽 수첩이 눈에 들어왔다. 수첩은 밀레시안의 이름이 빼곡히 적혀있던 쪽을 지나, 작은 낙서가 그려진 쪽을 내비치고 있었다. 무심결에 가까이서 살펴본 카즈윈은 낙서의 주인이 매우 익숙한 얼굴인 것을 깨닫고서 저도 모르게 ‘윽’ 소리를 냈다. 그는 달려 나가기 직전인 톨비쉬의 다리를 툭툭 쳐서 주의를 돌렸다. 그리고 수첩에 그려진 밀레시안의 초상을 가리키며 물었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나 변해? 어떻게 그렇게 사랑할 수 있지?” 

톨비쉬는 대답하지 않고서 그저 눈을 휘었다. 그리고는 밀레시안을 마중하러 떠나버렸다. 

혼자 남은 카즈윈은 풀밭에 앉아 톨비쉬의 수첩을 묵묵히 관찰하다가, 그만 장정을 덮었다. 딱히 직장동료의 사생활을 지켜주겠다는 배려는 아니었다. 글씨를 덧쓰고 덧써서 울이 진 종이에 들어 찬 내용은, 굳이 보지 않아도 뻔해서였다. 그곳에는 틀림없이 밀레시안의 이야기가 가득할 것이다.


*

귀환한 밀레시안의 손을 잡아 이끈 곳은 폐허가 된 사원의 회랑이었다. 지붕이 소실되어서 하늘을 천장으로 삼은 사원은 오래된 세월만큼 그곳을 찾는 발걸음도 적었다. 색이 벗겨진 열주가 나란히 늘어서 있는 그곳은 세상의 소요를 피할 수 있는 고요한 요람이었다. 한때는 므두셀라처럼 하늘 높이 치솟았을 기둥들이 오늘날은 비스듬히 스러지고 서로 무너지듯 기대면서 곳곳에 비밀스런 그늘막을 만들어냈다. 톨비쉬는 그 그늘 속으로 밀레시안을 숨기듯 밀어 넣었다. 

“밀레시안, 어서 이쪽으로.”

드물게 조급해 하는 톨비쉬의 행동에 밀레시안이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무슨 큰일이라도 생겨서 단둘이 나눠야 할 사정이 있는 걸까 싶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그렇게 물으려던 밀레시안을 막은 것은 입술에 닿는 따뜻한 감촉이었다.

톨비쉬보다 키가 작은 밀레시안은 기사의 커다란 그림자에 시야가 가리는 것을 느끼며 화들짝 놀랐다. 그러나 당황은 잠시 뿐, 곧 익숙한 포옹으로 그의 허리에 손을 얹고 입맞춤을 받아들였다. 긴장했던 어깨는 가라앉고, 아직 여행과 모험의 열기를 머금고 있던 얼굴은 부드러이 풀린다. 톨비쉬는 살짝 뜬 눈틈 사이로 그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연인의 얼굴에 떠오른 것이 당황이 아닌 익숙함이란 사실을 확인한 그는 만족스런 한숨을 쉬었다. 동시에 약간의 승리감이 차오르고, 여행의 열기가 불러일으킨 그 홍조를 사랑의 열기로 덮어버리고 싶다는 마음이 떠올랐다. 대담해진 기사는 그 욕구에 기꺼이 몸을 맡겼다. 문을 두드리듯 천천히 혀로 입술을 두드린다. 열정적이고 적극적이며 다소 집요하기까지 한 그 간청에 밀레시안도 결국 걸쇠를 풀고 만다.

타인과 혀를 얽는 것이 처음도 아닌데, 밀레시안과 나누는 입맞춤은 유난히 중독적이다. 음식을 먹고 말을 하고 숨을 쉬는 입. 그리고 그 안의 부드럽고 연약한 혀. 입술 뒤에 숨어있는 그 기관은 누군가와 대화를 하기 위해 벌리지 않는 이상, 쉽게 외부로 드러나는 법이 없다. 신이 빚어낸 인간의 신체 중에서도 한없이 사적인 그곳을 침범당하는 이 행위를, 톨비쉬는 어느 격렬한 애무보다도 좋아했다. 단, 밀레시안에 한해서. 그를 만나기 전 다른 사람들과 거쳤던 단 두 번의 키스는 가급적 잊고 싶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육체적 쾌감도, 정신적 만족도 느낄 수 없던 감흥 없는 행위. 타인과 입술을 맞대는 즐거움을 깨닫고, 체온이 느껴지도록 얇고 연약한 점막 너머로 숨결을 공유하는 기쁨을 배운 것은 밀레시안을 만난 이후부터다. 

물소리가 날만큼 짙은 키스는 혀가 녹을 만큼 입안이 질척해지고 나서야 겨우 멈췄다. 잠시나마 숨을 돌릴 수 있게 된 밀레시안은 괜히 톨비쉬의 가슴을 톡톡 치며 말했다.  

“네가 이렇게 키스를 좋아할 줄은 상상도 못했어.”

“아무하고나 그러진 않습니다. 당신이니까.” 

“넌…… 넌 너무 위험한 소리를 잘 해!” 

밀레시안이 붉어진 얼굴을 가리며 타박했다. 쑥스러운 듯 괜히 마른세수를 하는 연인의 그런 모습을 톨비쉬는 즐겁게 바라보았다. 그는 멀어지려는 밀레시안을 다시 바짝 따라붙었다. 별의 너른 어깨에 이마를 대고 그리웠던 체향을 깊이 맡아본다. 노곤한 정념이 타오른다. 그는 나른해진 눈꺼풀을 깜빡이며 중얼거렸다.   

“진심인 걸 어떡합니까. 정말로 당신뿐인데.”  

‘카즈윈이 들었다면 경을 치겠지.’ 그런 생각이 톨비쉬의 머리를 스쳤다. 그러나 후회는 없다. 살면서 절대 내뱉으리라고 생각지 못했던 고백을 하면서도, 그는 어떤 이상함이나 부조리도 느끼지 못한다. 첫사랑에 눈이 먼 소년처럼 구는 자신의 행동은 더 이상 낯선 일이 아니다. 밀레시안의 앞에 서면 주저함이나 머뭇거림 따위는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파르르 흩어졌으니까. 

누구에게나 지고의 순간이 있다. 인간이 자신의 원래 얼굴을 대면하고 자신의 원래 목소리를 듣게 되는 순간. 영원히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되는 순간. 얼마나 굽이치고 지난한 과정을 거쳤던 간에, 한 사람의 인생은 그 순간을 지표로 함축된다. 밀레시안과 키스를 하고 포옹을 하는 지금이, 톨비쉬에게는 바로 그런 순간이었다. 

용기를 내서 밀레시안에게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은 그날 밤부터, 그의 삶은 뒤바뀌었다. 응달에 볕이 들고 마른 가지에 싹이 움트듯, 영혼이 생기로 차오른다. 흑백뿐이던 세상이 찬란한 색의 향연으로 물들어 간다. 스스로도 마법 같은 변화에 전율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이라고 못 알아차릴까. 카즈윈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진즉에 그의 변모를 알아차렸을 것이다. 다만 톨비쉬 자신은 너무 오랜만에 다시 찾은 행복에 당황한 나머지, 눈앞에 다가온 기쁨을 곧바로 인식하지 못할 뿐이었다. (그런데 도대체 행복이란 것이 그 순간에 인지할 수나 있는 걸까? 훗날 곱씹을 때가 되어서야 뒤늦게 깨닫는 것이야말로 이 황홀한 탐닉의 본질인 것은 아닐까?) 

톨비쉬는 그저 생각했다. 구원처럼 찾아온 이 사랑을, 지복(至福)의 순간을 흠뻑 누리겠노라고. 미래 어느 날엔가는 그가 숨겨온 비밀이 밀레시안 앞에 드러나고, 그리하여 그들의 길이 탄식으로 젖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만은, 온몸으로 사랑의 기쁨을 끌어안을 것이다. 봄꽃은 가을에 질 것을 염려하며 피지 않는다. 어떤 어리석은 생물이 긴 겨울 끝에 다시 만난 봄볕한테서 등을 돌릴까.   

그러므로 기사는 되묻는다.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지?’

연정에 심취한 그는 황홀경 속에서 다시 한 번 밀레시안의 입술을 깨물었다. 몰래 눈을 떠보니 코앞에 사랑하는 이의 얼굴이 있었다. 아무리 아름다운 사람도 가까이서 보면 흠이 눈에 들어온다는데, 왜 밀레시안의 얼굴은 더욱 귀하고 아름답게만 보이는 걸까? 사랑에 취한 머리는 제대로 된 답을 내놓지 못했다. 그러나 답할 수 없으면 없는 대로, 톨비쉬는 만족하기로 했다. 이미 사랑의 기쁨을 안 영혼은 지루한 철학놀음에 몰두하기보단 연인의 육체를 탐하고 싶은 욕구로 꿈틀거렸다. 

그는 밀레시안의 뺨을 애무하던 손을 내려 그의 목깃을 벗겨냈다. 어깨를 스치고 쇄골을 지나 점점 아래로 내려가는 손길에 밀레시안이 불안한 듯 미간을 찌푸리며 작게 외쳤다. 

“여기 밖이잖아!”

“버려진 지 얼마나 오래된 사원인 줄 아십니까? 아무도 찾지 않는 곳이니까, 걱정 말아요.” 

기사단의 어느 누구보다도 아발론의 비밀스런 장소들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기에 할 수 있는 발언이었다. 톨비쉬는 한때 경구를 외고 성가가 울려 퍼지던 예배당에서, 밀레시안한테 매달려 죽을 것처럼 그를 껴안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선 웃었다. 

“알고 있습니까? 정말 위험한 건 내가 아니라 밀레시안 당신입니다. 당신과 있으면 난 꿈에 취한 것처럼 현실을 잊어버리잖아요. 괴로움도 아픔도 모두 잊고, 세상마저 기억에서 지워버려요.” 

호수처럼 잔잔하던 두 눈이 열망을 담고서 말했다. 그는 벽에 기대있던 밀레시안을 일으켜 서로 자리를 바꿨다. 그리고는 기둥에 가려진 널따란 창틀에 눕듯이 기대앉으며, 밀레시안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니 당신도 나한테서 같은 기쁨을 맛보기를 바라요.”

사랑에 취한 에로스는 무서울 것이 없고, 프시케는 눈 먼 사슴처럼 질주할 뿐이다. 두 연인은 쫓고 쫓기는 새처럼 얽혀들었다. 쫓는 자는 태양이며 쫓기는 이는 별이다. 그렇지만 옹성처럼 단단하던 남자가 보이는 진심어린 구애 앞에서, 밀레시안도 끝내 정념을 불태울 것이다. 

무릎을 여는 몸짓은 단호하고, 그 품으로 파고드는 이의 움직임 또한 고향처럼 익숙하다. 톨비쉬는 더 이상 낯설지 않게 된 손길을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뱃속을 건드리고 심장을 두드려 끝내 향락을 이끌어내는 열기에 저절로 고개가 젖혀진다. 밀레시안의 머뭇거리는 애무가 중정이 빛에 취해 잠시 망각하고 있었던 성감을 고조시킨다. 움직임이 빨라지고 호흡은 가빠지는데, 의식은 그 격한 긴장조차 반갑게 맞아들인다. 사고와 감정이 뒤섞여 어느 것이 사실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근육이 경련하며 만들어내는 야릇한 감각 속에서 산란하는 햇살을 보았다.

멈추지 않는 키스와 농밀한 포옹. 두 줄기 나무처럼 서로 달라붙으려는 갈망하는 인력. 태초의 낙원에서 사랑은 이런 모습이었을 거라고, 톨비쉬는 확신했다. 

“예배당에서 이러다니, 부정하다고 지옥에 떨어질 거야.”  

하지를 밀착하고 움직이던 밀레시안이 말했다. 잘 다듬어진 눈썹이 곤혹스레 찡그려지는 것을 본 톨비쉬는 떨리는 손을 들어 그의 이마를 대신 쓸어주었다. 땀이 흐르는 머리카락을 쓸어주고 아직 긴장을 내려놓지 못한 그를 위해 달래듯 속삭였다. 

“괜찮아요. 그분은 사랑의 주신이신 걸요. 그분이 만든 지옥에서, 부정을 저지른 연인들은 영원한 키스로 속죄하게 될 테죠.” 

독실한 신자는 자신이 지어낸 하얀 거짓말 속에서 황홀하게 웃었다. 꽃내음 흐드러진 뜰 안으로 자오의 빛살이 드리운다.      


*

정사 후에 찾아오는 노곤한 게으름이야말로 밀레시안이 색사 중에서도 가장 선호하는 순간이었다. 나른하게 늘어진 의식에 몸을 맡기다보면 한낮의 예배당에서 정사를 벌였다는 죄책감도 무뎌진다. 졸음과 안락 사이를 오가는 나태함 속에서 뒹굴고 있자니, 먼저 유혹해준 연인에게 차라리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정숙하고 냉정한 줄로만 알았던 그의 연인이 몸을 섞는 내내 얼마나 대담하게 달라붙어왔던가. 밀레시안은 꿈처럼 달콤했던 시간을 회상하며 입을 씰룩였다. 안 쓰던 근육을 쓰느라 찌뿌둥해진 몸으로 기지개를 한 번 펴고, 천천히 현실로 내려올 준비를 한다.

창턱에 놓인 가죽 수첩을 발견한 것은 그 때였다. 급하게 푸느라 꼬였던 매듭을 정리하고 옷매무새를 정리하려는데, 흐트러진 옷처럼 비스듬히 떨어진 수첩이 보였다. 가끔씩 톨비쉬의 외투 사이로 보이던 수첩이었다. 정신없이 하의를 벗겨내는 사이에 떨어진 것 같았다. 다른 결사대원들이 최근 들어 한층 더 빽빽해진 톨비쉬의 수첩을 두고 소란을 피우던 일이 기억났다. 마침 수첩은 아랫면을 보고 떨어지는 바람에 장정이 벌어지고 속지가 엿보였다. 호기심이 솟은 밀레시안은 그 표지를 한참 만지작거리다 말했다. 

“톨비쉬, 여기 네 수첩 떨어졌어.” 

“음? 아까 정신없이 벗던 틈에 떨어졌나 봅니다. 괜히 야해지는 기분인데요?”

짓궂은 소리를 하며 웃는 톨비쉬를 보자 더욱 궁금함이 솟구쳤다. 밀레시안은 몇 초 간 고민하다가 용기를 내어 물었다. 

“읽어봐도 돼?”

부탁을 받은 톨비쉬가 곤란한 듯 얼굴을 찌푸렸다. 

“별로 남한테 보일 내용은 아닙니다. 읽어봤자 재밌지도 않을 거고요.” 

아름다운 얼굴에 곤혹스런 빛이 어린다. 그 표정을 보자 밀레시안은 어쩐지 더욱 톨비쉬의 수첩이 간절해졌다. 그 안이 자신의 이야기로 가득하다는 얘기는 이미 다른 기사들한테 전해들어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소문으로 들어 아는 것과 별개로,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다. ‘나와 함께하는 시간 동안 그는 무엇을 느끼고 어떤 생각들을 하고 있을까?’ 좋아하는 사람의 말, 생각, 이야기라면 한 점이라도 더 알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에 이끌려 그는 한 번 더 부탁했다.

“보여주면 안 돼? 읽고 싶어. 정말로. 진짜로.” 

말을 하는 순간 이미 밀레시안의 손은 수첩을 열고 있었다. 톨비쉬도 틀림없이 그 행동을 보았을 텐데, 그는 말리지도 수첩을 빼앗아 가지도 않았다. 어떤 순간에라도 그는 진심으로 밀레시안을 거절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수첩은 실랑이다운 실랑이를 거치지도 못하고 밀레시안의 시야 아래 드러나게 되었다. 

미색으로 그을린 종이에는 예상대로 밀레시안에 관한 이야기가 한 가득이었다. 의외였던 사실은 그것이 단 하루도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으며, 그 날 그 날의 밀레시안이 기뻐한 순간, 즐거워한 순간, 환히 웃었던 순간, 톨비쉬에게 했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적혀있던 점이었다. 개중에는 본인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대화나 행동들도 꼼꼼히 기록되어 있었다. 꼭 날짜를 지켜서 하루에 하나씩 쓴 것도 아니었다. 때로는 하루에 네댓 개의 문단이 들어가 있기도 했는데, 그날은 아마 적어두고 싶은 이야기가 더 많은 날이었음이 틀림없다. 밀레시안은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어떤 찰나, 그 짧은 순간의 인상을 잊고 싶지 않아서 톨비쉬는 그날 몇 번이나 수첩을 꺼내 지면이 모자라도록 생각과 느낌들을 적어나갔을 것이다. 

집요하다시피 한 그 나날의 기록들을 마주하게 된 밀레시안은 숨을 삼키고 물었다. 

“이렇게 매일 매일 적는 이유가 있어? 난 너하고 있을 땐 너만 보느라 일기로 써놓겠다는 생각도 못 떠올렸는데.” 

“일종의 대비책입니다.” 

“대비책?”

근면하고 철저한 성격인 건 알았지만 설마 연애를 할 때도 일 하듯이 응한 것일까? ‘대비책’이라는 단어가 엄중하고 근엄한 느낌을 자아냈다. 

“연애할 때도 준비를 한단 말이야? 전투처럼?” 

“하하, 저희 기사단의 계율이 엄격하다지만, 그래도 전 그 정도로 융통성 없는 사람은 아닙니다. 제 말은, 그러니까 조금 더 개인적인 차원에서…… 미래의 제가 볼 수 있도록 안전망을 만들어둔다는 뜻이었습니다.” 

밀레시안은 조금 더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달라는 의미로 눈을 깜빡였다. 드물게 얼굴을 붉힌 톨비쉬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속마음을 꺼내보였다. 

“기록이 기억을 지배하니까요. 인간의 기억은 불완전하고, 살면서 너무 큰 슬픔에 맞닥뜨리면 쉽게 좋았던 시절을 잊고 말아요. 좌절이 심해지면 자신이 행복을 느낄 수 있단 사실조차 흐려지고 말지요. 그럴 때 기록을 펼쳐보는 겁니다. 우연히 들춘 수첩에서 행복했던 시절의 내가 남겨놓은 일기를 읽으면 흐릿하게나마 떠올리게 되거든요. 분명 나한테도 이렇게 즐거운 시절이 있었고, 그러니 나도 기쁨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란 점을요.”

“그래서 전 지금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이 있으면 기록해놓아야 마음이 놓입니다. 그럼 나중에 다시 폭풍이 몰려올 때 그 기록을 보고 좀 더 살아볼 수 있으니까. 밀레시안 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래요, ‘미약하지만 거대한 한 발짝’라고 할까요?”

그래서 그는 밀레시안과 함께 한 순간들을 차곡차곡 적기 시작했다. 그것은 밀레시안을 만나기 전의 삭막한 업무일지나 쓰라린 성찰의 일기도 아니고, 알터의 관찰일지처럼 앞날에 대한 희망과 기대의 다짐과도 다르다. 톨비쉬의 일기는 차라리 다가올 불행할 시절을 기다리며 자기를 지켜내기 위한 준비 작업에 가깝다. 세한을 앞둔 추수꾼이 가을에 거둔 수확을 저장하고, 아직 볕이 있을 때 굴을 쌓아 두듯. 그 소박하고 작은 피난처에 숨어서 세찬 북풍이 지나가기를 기다릴 것이다. 살을 가르는 죽음의 계절에 다시 내던져지더라도, 봄과 여름에 만들어 놓은 압화를 지니고 있으면 그것을 보며 하루 더 견디겠지. 그렇게 하면 언젠가는 분명히 다시 찾아들 겨울 속에서도 조금은 더, 살아갈 수 있다. 

이 모든 이야기를 톨비쉬는 신중하게 가려서 아주 조금씩, 밀레시안이 걱정하지 않을 정도로 조금씩만 들려주었다. 다가올 고통을 상정하다니, 용감하고 담대한 밀레시안의 눈에는 너무 아픈 방식으로 비칠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그를 걱정하게 만들고 싶진 않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을 비관이라 할 수 있을까? 불행한 미래를 상상하며 밀레시안과의 추억을 차곡차곡 쌓아두는 이 불확실한 순간조차, 사랑에 겨워 몸부림치는데. 

톨비쉬는 그렇게 생각하며 말했다. 

“예전에, 아주 예전에, 밤마다 읊조리던 기도가 있었습니다.” 

방랑 시절의 이야기였다. 자책과 불신, 고립으로 눌려 혼까지 메마를 것만 같던 사막 시절이다. 

“기도문은 늘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그땐 다른 소망은 떠올릴 여력이 없었던 거죠.”

“무슨 기도였는데?”

“평안을 주소서.”

사실은 그보다 조금 더 비관적이고 우울한 내용이었다. ‘너무 나쁘지도, 너무 좋지도 않은 날들이 계속 이어지게 해주소서. 그리하여 기쁨 뒤에 불행이 찾아오더라도 너무 큰 슬픔으로 아파하지 않도록 해주소서.’ 해일처럼 요동치는 마음의 파고가 가라앉고 고요한 바다에 평온이 내려앉는 것. 그때는 그것이 기원할 수 있는 유일한 소망이었다. 늪 아래서 유일하게 올려다볼 수 있는 동아줄이었다. 

아픈 기억을 상기해내자 잠잠하던 순례자의 가슴 한편이 욱신거렸다. 그는 그렇게 알싸한 아픔이 몰려올 때면 습관처럼 읊는 말을 되새겼다. 

‘괜찮아.’ 

상처는 흉터를 남길지언정 반드시 옅어지고, 사람도 다른 사람으로 잊힌다. 새살이 돋은 자리는 두터워진 만큼 더욱 단단해질 것이다. 그러면 두 번째 겨울도 조금 더 담담히 넘어갈 수 있겠지. 그 확고한 믿음 위에 서서 말한다.  

“하지만 보세요. 요즘은 더 이상 그 기도문을 외지 않습니다. 내용이 바뀌었지요. 당신을 만나고, 당신에게 사랑받고, 당신을 사랑하게 되어 감사하다고. 정말입니다. 두 번째 삶을 사는 기분인 걸요. 당신과 함께 있을 때 단 한 번이라도 내가 운 적이 있던가요?”

톨비쉬는 자신의 몫을 대신해 울고 있는 밀레시안을 끌어안았다. 너무 죄스러운 나머지 차마 흘리지 못했던 눈물까지 대신 흘려주고 있는 연인을 껴안았다. 진실로, 진실로, 다정한 사람. 그 체온을 품에 안으면 회한도 비탄도 얼음이 녹듯 사라진다. 

“울지 말아요, 내 사랑하는 밀레시안. 나의 황금 시절은 지금입니다.” 

그러므로 되묻는다.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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