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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톨비 기반) 톨비쉬 인형가방 2(끝)

톨비쉬 인형가방 사고 내 인생이 달라졌다

* 초고 주의. 퇴고는 나중에... 



요즘 들어 톨비쉬 인형이 부쩍 우울해졌다. 밀레시안이 그 사실을 깨달은 것은 정말 최근이었다. 톨비쉬를 데려오느라 빚진 할부금 400만 골드를 갚는다고 정신이 없었기에, 오늘 아침에서야 겨우 주위를 둘러 볼 겨를이 생긴 탓이었다. 해바라기처럼 밝게 뛰어다니던 아이가 앓는 쥐처럼 가만히 앉아만 있는 걸 발견했을 때, 밀레시안은 심장이 찢겨나가는 것처럼 아팠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한창 태양이 빛날 지금 이 시각에도 꼬마 인형은 밀레시안 옆에 우두커니 앉아 한숨을 폭폭 내쉬고 있었다. 


“톨비쉬, 무슨 일 있니? 기분이 안 좋아? 밀레님한테 말해볼까?”

인형은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그럼 사탕과자 먹을까?”


인형은 과자 상자를 내미는 밀레시안을 빼꼼 쳐다보더니, 이내 한숨을 폭 쉬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일부러 밀레시안의 시선을 피하려는 듯 무릎에 이마를 딱 붙이고 얼굴을 감춰버렸다. 콩벌레처럼 몸을 말고서 앞뒤로 천천히 흔들거리는 모습이 너무 귀엽고 안쓰러웠다. 아이를 처음 키워보는 밀레시안은 어떻게 말을 해야 톨비쉬의 기분이 나아질지 몰라서 끙끙댈 뿐, 더 이상 대화를 이을 수 없었다. 인형의 입을 열어보려는 시도는 모두 수포로 돌아갔고, ‘난 왜 창의력이 이것밖에 안 되나’ 가슴이 답답할 따름이다. 그는 마지막으로 톨비쉬를 불러보았다.


“톨비쉬……”


밀레시안이 초조하게 제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듣자, 인형은 더더욱 심란해졌다. 분명 이때까지 아무 걱정도 고민도 없이 밀레시안 님과 즐거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는데, 처음 길을 잃었던 그 날 보고 만 것이다. 다른 인형가방들은 주인이 우수수 포워르를 때려잡는 동안, 거기서 떨어지는 금화며 아이템을 가방이 꽉 차도록 한 가득 주워서 돌아가는 것을. 원본을 닮아서 천성이 성실하고 책임감도 강한 톨비쉬 인형으로서는 그날 던바튼 평원에서 목격한 장면이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그동안 겨우 금화 한 닢씩 주우러 다니고, 밀레시안 님이 사냥을 하는 동안 뒤에서 버프도 못 거는 응원만 했던 것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래놓고선 밀레 님을 도와줬다며 으쓱해 했다니, 부끄러워서 쥐구멍에 숨고만 싶었다. 조그만 머리통이 달궈진 손난로처럼 새빨갛게 타올랐다. 톨비쉬 인형은 무릎 얼굴을 파묻은 채로 멍하니 바닥만 바라봤다. 


그날 저녁이 되고 밤이 되어도 상황이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자, 조급해진 밀레시안이 휴 사장에게 급히 편지를 보냈다. 편지의 내용은 간단했다. 


<우리 톨벼가 병에 걸린 것 같아요! 도와줘요 사장님!>


편지 석 장 가득 구구절절 늘어놓은 팔불출과 한탄을 요약하면 대략 위의 두 줄로 정리할 수 있었다. 얼마나 급했는지 당일특급 부엉이까지 급파해서 보낸 전보는 곧바로 휴 사장에게 전달되었다. 편지를 다 읽은 휴 사장은 굳이 톨비쉬를 진료하러 출장가지 않아도 문제와 원인을 알 수 있었다. 밀레시안의 진한 팔불출과 과보호가 편지 너머로까지 전해지는 걸로 봐서, 분명 보호한답시고 너무 아끼다가 인형이 세상을 경험할 기회조차 제대로 주지 못한 것이 틀림없었다. 장인은 톨비쉬 인형을 처음 만들어 낸 아버지로서 명료하고도 현명한 조언을 적어 보냈다. 


<우선 인형이 하루에 한 번씩 햇볕을 쬘 수 있도록 자주 소환해 주십시오. 그리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포옹해 주십시오. 인형에게 마음을 충분히 표현해서 세상에 혼자가 아니라고 느끼게 해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무엇보다도, 인형가방은 아이템을 주울 때 보람을 느끼는 존재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보호가 지나친 나머지 아이의 의욕보다는 주인의 욕심대로 행동하지는 않았는지 돌아봅시다. 함께 사냥과 생산 활동을 하면서 인형이 직접 참여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면, 아이가 자기 효능감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모쪼록 고객님과 톨비쉬 인형의 에린 생활이 무탈하기를 기원하며. 이멘마하 인형공방 대표, 휴.> 


답장을 받은 밀레시안은 처음엔 머리로 망치를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톨벼를 안전하게 기르기 위해 해온 행동들이 사실 톨벼의 보람을 서서히 빼앗고 있었다니? 밀레시안은 깊이 반성했다. 생식 능력이 없어서 자손을 낳을 수 없는 밀레시안이라고 해도, 한 생명을 기르기로 결정한 이상 좀 더 공부하고 좀 더 책임감 있게 보살폈어야 한다. 밀레시안의 짧지 않은 삶 속에서 톨비쉬 인형은 이미 단순한 소환물이 아니라 한 가족, 한 식구와 다름없는 존재가 되어 있던 것이다.


이렇게 자숙의 시간을 가진 뒤, 밀레시안은 지체하지 않고 아발론 게이트의 슈안에게 연락을 넣었다. 알반 기사단 정보조 출신인 슈안은 재주가 영민하고 눈치도 빨라서 척 하면 척 알아듣는 인재였다. 아무리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슈안만 믿고서, 밀레시안은 톨비쉬 인형을 다음 아발론 임무에 데려가겠다고 일러뒀다. 톨벼가 처음 가보는 기사단 캠프와 특별조 누나, 형아들한테 겁먹지 않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춰달라는 특별요청도 겸사해서. 


졸지에 생후 삼 개월 인형가방의 직업체험과 보육 업무를 떠맡게 된 슈안은 신음하며 항의했다. ‘제가 이젠 보육원 교사로 보이시나요?!’ 그렇게 따져볼까 했지만, 그러기엔 밀레시안이 몰래 찔러 넣은 돈주머니가 너무나도 두툼했다. 할부 빚을 갚느라 가죽끈 아르바이트로 헉헉댄다는 사람이 짜투리 돈을 모으고 모아 촌지랍시고 건네는 것을 보니, 같은 적자에 시달리는 처지로서 동병상련이 느껴졌다. 이렇게 연민에 지고 만 슈안은 결국 밀레시안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배수의 진 임무에 데려가신다는 거죠? 좀비 떼라니, 애들 정서교육에 별로 좋진 않을 것 같은데요.”

“좋은 질문이야, 슈안.”


밀레시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많고 많은 아발론 임무 중에서도 특히 배수의 진 임무여야만 하는 이유를 하나씩 열거했다. 


“첫째로, 배수의 진만큼 골드를 많이 떨구는 미션이 없기 때문이야. 우리 톨벼는 골드와 무기 수집에 특화되어 있는데, 특히 뭉치로 된 골드를 주워보지 못했다는 거에 자격지심을 갖고 있는 것 같아. 그러니 골드가 뭉텅이로 떨어지는 배수의 진이 최적이지.”


“둘째로, 배수의 진 임무에 나오는 시체들은 수가 많으면서도 속도가 느리고 약해서 우리 톨벼가 위험에 처하기 전에 내가 먼저 해치울 수 있어. 이때를 위해 난 파힛과 체인스위핑을 수련해온 거야. 파힛난무를 찍어서라도 우리 애한테 손끝 하나 못 대게 할 것이야!”


인형가방은 특별한 술식을 탑재하고 있어서 몹의 인식을 피할 수 있다는 말은 이미 망각한 듯 했다. 


“게다가 특별조원들도 함께 하니까 덜 위험하지 않을까? 물론, 곱고 예쁜 것만 봐야 할 우리 톨벼한테 되살아난 시체 같은 숭악한 걸 보여줘야 한다니, 내키지 않아. 영 내키지 않는다고. 그래도 난 톨비쉬의 성장 욕구를 존중해주고 싶어. 휴 사장 말로는, 인형가방은 제 역할을 박탈당할 때 작동 의지를 잃게 된다는 거야. 그 얘길 듣고 나니 가슴이 쓰려도 결심을 내리지 않을 수 없지 뭐야.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지, 슈안?”


“그렇…… 예…… 그럼요……”

밀레시안이 이토록 열의를 보이는 것도 오랜만이라서 슈안은 차마 모질게 욕할 수도 없었다. 그는 고이 눈물을 삼킨 채 특별조원들에게 공문을 돌렸다. 


소집 당일, 아발론 게이트에 모인 특별조원들은 밀레시안이 데려온 톨비쉬 인형을 보고 경악했다. 일단 그 인형이 그들이 아는 누군가를 너무나 닮아 있었다. 워낙 다사다망한지라 견습 기사인 그들이 직접 마주칠 일은 적지만, 그래도 알반 기사단원이라면 누구나 알 법한 엘베드 조의 누구 말이다. 본판이 장롱 문짝에 필적하는 신체 건강한 성인 남성인 반면, 밀레시안의 무릎 뒤에 숨은 인형은 양처럼 작고 온순하다는 것이 차이였다. 자세히 보면 아직 때가 덜 타서 그런지 본판보다 좀 더 솔직하고 활발하기도 했다. 갑자기 새로운 사람들을 무더기로 만나자 당황했는지, 톨벼는 밀레시안의 바지자락을 꼭 잡고 눈만 때구르르 굴리는 중이었다. 밀레시안한테 껌딱지처럼 달라붙어 있는 인형을 본 특별조원들은 존경하는 조장님께 저마다 소감을 밝혔다. 


“소문으로만 듣던 조장님의 인형이로군요. 직접 보니 더 사랑스럽네요.”

“로건 씨, 솔직히 이거 너무 닮았, 커헙!”

“아하하, 디이는 참 말이 많은 것 같아. 그렇지, 엘시?”

“두 분이…… 엘베드 조장님과 우리 조장님이……”


보다 냉정한 구석이 있는 카오르와 아이르리스는 딱 잘라서 솔직하게 말했다. 

“솔직히 좀 놀랐습니다. 아무리 사상이 특이한 조장님이라지만 설마 연인관계인 사람을 모방해서 인형을 만들다니. 정말”

“파렴치해요.”


밀레시안은 모든 사태의 시작은 휴 사장의 상술이었다고 해명하고 싶었지만, 이제 와선 견습 기사들(특히 카오르)한테 입력된 자기 이미지를 수정하기도 어려울 것 같았다. 밀레시안은 그저 한숨을 푹 내쉬고서 다시 한 번 휘하 조원들에게 톨비쉬 인형을 정식으로 소개했다. 


“날 믿어. 이 톨비쉬는 그 톨비쉬보다 훨씬 인간적이고 다정한데다 솔직하다고. 농땡이 피우지 않고 열심히 할 거야. 그렇지, 톨벼?”


다리에 달라붙은 톨비쉬가 작게 끄덕이는 것을 확인한 다음, 밀레시안은 고개 숙여 부탁했다. 


“아무튼 오늘 하루는 다 함께 톨비쉬를 응원해 주길 부탁해. 자, 톨벼! 오늘 톨벼가 금화 줍기 연습을 할 수 있도록 누나 형아들이 뒤에서 함께 도와줄 거야. ‘잘 부탁합니다’ 하자~”

“쟈, 쟐 부탁햡니댜!”


그러자 작은 인형이 비로소 밀레시안의 그림자에서 나와 몸을 반으로 꾸벅 접으며 인사를 했다. 가분수 머리통 때문에 살짝 휘청거릴 뻔 했는데, 조그만 정수리의 가마를 내보이며 ‘누나 형아들’한테 꼬박꼬박 인사를 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 사랑스럽고 열의에 찬 모습을 보자 긴가민가하던 견습 기사들도 마음이 녹지 않을 수 없었다. 파렴치한 조장의 수고에 휘말렸다며 냉랭한 눈길을 보내던 카오르마저 톨비쉬 인형을 내려다 볼 때는 표정이 누그러질 정도였다. 조짐이 좋았다. 모든 것은 순조롭고 오늘은 톨비쉬 인형의 최고의 날이 될 것이라고, 밀레시안은 의욕을 얻었다. 


“가자, 톨벼!”

“웅!”





그렇게 톨비쉬는 배수의 진 필드에서 처음으로 본격적인 골드 줍기를 하게 되었다. 미리 톨비쉬에게 밀레시안이 움직일 동선과 좀비들이 적은 사각지대를 일러주기는 했으나, 걱정 많은 주인의 마음은 여전히 불안하기만 했다. 넓은 아발론 필드를 바삐 뛰어다니는 톨비쉬는 더욱 작아보여서 밀레시안은 안타까움에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푸른 들판 위로 숨바꼭질을 하듯 점점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인형의 금빛 머리통을 보고나서야 아발론이 이렇게 넓었단 걸 새삼 다시 깨닫는다. 


안절부절 못하는 밀레시안과 달리, 톨비쉬 인형은 난생 처음 제대로 밀레시안 님과 함께 ‘일’을 한단 생각에 흥분해서 필드가 넓은 줄도 몰랐다. 강시처럼 팔을 뻗고 뒤틀린 관절로 다가오는 좀비 떼도 무섭지 않았다. (사실 처음엔 조금 무서웠는데, 저 해골바가지들이 다 밀레님의 돈줄이고 자기의 능력을 보여줄 기회라고 생각하니까 더 이상 두렵지 않게 되었다. 밀레시안과 함께 다닌 지난 석 달 동안 톨비쉬 인형도 할부금을 갚기 위한 주인의 눈물 겨운 몸부림을 목격한 것이다.)


단단히 각오를 한 톨비쉬 인형은 작은 주먹을 치켜들며 기합을 넣었다. 

“내가 부쟈 만들어 쥴게요! 밀례 님, 기다려!”


그러나 창궐하는 좀비 떼 사이에서 금화 주머니를 가득 채우기란 예상 외로 벅찬 일이었다. 톨비쉬 인형은 짧은 다리를 최대로 가동해서 필드 이쪽에서 저쪽까지 있는 힘껏 질주했다. 숨이 턱밑까지 차도록 돈을 떨구는 시체를 찾아 따라다녔다. 여기서 알짱, 저기서 알짱, 필사적으로 빛나는 금화를 따라 돌아다닐 때마다 작은 발바닥이 땅을 박차고 오르며 ‘톳톳톳’ 뛰는 소리를 냈다. 산보하는 강아지처럼 아기자기한 그 소리는 인형의 필사적인 염원이 만들어낸 위대한 도약이었으나, 인간의 귀에는 여린 새끼 사슴의 파리한 달음박질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방호벽 뒤에서 시체를 쏘아 맞추며 톨비쉬의 위치를 확인하던 견습 기사들은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덩치에 버거울 정도로 속도를 내던 톨비쉬가 결국 제때 뛰어가지 못해 골드를 놓치고 말았을 때는, 대신 탄식했다. 다정한 카나가 말했다.  


“어떡해…… 다리가 짧아서 안 찢어지나봐.”

냉정한 카오르는 어쩐지 보기 괴롭다는 듯 쓰게 중얼거렸다. 

“이게 다 조장의 과한 욕심 탓이라고.”

연장자인 로간만이 좀 더 조장님과 인형을 믿고 지켜보자며 견습 기사들을 다독였다.

“우리도 저렇게 우왕좌왕 하던 때를 지나온 걸요. 좀 더 믿고 지켜봐 줍시다…… 앗! 저런!”


로간이 외친 것과 조그만 머리통이 ‘콩’ 하고 바닥에 쓰러진 건 거의 동시였다. 욕심이 앞서서 너무 빨리 달리다가 돌부리에 걸리기라도 했는지, 톨비쉬 인형이 얼굴부터 바닥에 넘어졌다. 


“톨비쉬!”


즉시 울면서 달려가려는 밀레시안을 조원들이 뜯어 말렸다. 넘어진 톨비쉬는 저 멀리서 발을 동동 굴리는 밀레 님 쪽을 한 번 봤다가, 아직 절반도 채우지 못한 돈 주머니를 바라보았다. 널널한 주머니 안을 들여다보자 정신이 번쩍 들고 오기가 생겼다. 인형은 이마에 난 혹을 무시한 채,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고통 탓에 눈물이 찔끔 샜지만, 그것도 얼른 옷소매로 닦아버렸다. 꼬마 톨벼는 밀레 님이 있는 쪽을 향해 목청껏 외쳤다. 


“오지 마요! 내가 할 수 이써!”

인형은 일부러 뒤돌아보지 않고 계속 앞으로, 앞으로 달려 나갔다.


높은 이상은 신체적 한계에 부딪쳐 난항을 거듭했다. 필드는 너무 넓은데, 밀레 님은 혹여 몰려드는 시체들이 인형을 해코지라도 할까봐 파힛을 켜고 날아다녔다. 축지법을 쓰는 밀레시안이 지나간 곳마다 금화가 우르르 뭉텅이로 쏟아졌다. 그걸 주우러 열심히 달려가면 이번에는 반대방향에서 골드가 또 뭉텅이로 떨어진다. 헐레벌떡 뒤늦게 달려가 보지만, 이미 골드는 증발되어 사라진 뒤다. 그럼 인형은 뽈뽈 뛰어온 무색하게 다시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밀레시안 님과 너무 멀리 떨어질 때마다 바보 같은 심장은 화들짝 놀라며 경고 신호를 보냈다. 금화를 줍다가도 밀레 님과 일정 간격 이상 떨어지는 것을 느끼면 저절로 몸이 돌아가는 것을 느끼자, 겁쟁이란 생각이 들어서 너무 서러웠다. 시간이 흐르고 전투가 격렬해지면서 커다란 몹들과 밀레 님의 파힛 무쌍이 뒤얽히자, 눈이 골뱅이처럼 뱅글뱅글 돌아가면서 끝내  길을 잃기까지 했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삼십 분이 지나고, 드디어 전투가 막을 내렸다. 방호벽 저편에서 더 이상 좀비 떼의 흔적은 느껴지지 않는다는 슈안의 연락이 들어왔다. 톨비쉬 인형은 잔해만 남은 유골들 사이를 뛰어다니며 마지막 금화 수거를 했다. 꼬마 인형가방이 한 손에 들 수 있을 정도로 가볍던 천 주머니가 처음에 비해서 조금은 무거워졌다. 톨비쉬 인형은 단 하나 남은 증발하기 직전의 금화 뭉치를 마지막으로 주머니에 쏙 집어넣었다. 그리고 지친 다리를 이끌어 밀레시안과 견습 기사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가득 찼을 거야. 이번엔 분명 가득 채웠을 거야.’


작은 인형은 오로지 그 기대 하나에 기대서 마지막 힘을 짜냈다. 인형은 낑낑거리며 소중한 금화 주머니를 밀레시안에게 마법으로 전송했다. 그리고 헐레벌떡 주인에게 달려가, 삼십 분 동안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소중히 모은 금화의 행방을 물었다. 


“밀례 님, 가방! 가방 보여줘요!”


톨비쉬가 흥분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밀레시안이 맨 짐 가방을 향해 폴짝폴짝 뛰어올랐다. 조바심을 내는 인형을 보자 밀레시안도 덩달아 기분이 고조되었다. 밀레시안은 톨비쉬 인형이 성취감으로 환호할 장면을 상상하며 자랑스레 돈주머니의 입구를 끌러서 보여주었다. 톨비쉬가 곧장 까치발을 들어 그 주둥이 안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주인은 만면에 웃음을 띠고서 격려했다.


“어때, 이번엔 많이 모았지, 톨벼?”


그러나 자루 주둥이에 쏙 들어간 조그만 정수리는, 좀처럼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환호하지도 않았다. 뿌듯하게 그날의 수확을 자랑하지도 않았다. 인형은 주머니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처럼 꼼짝 않고 있었다.   

침묵이 길어지자 밀레시안과 함께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 사이에 불안한 기운이 흘렀다.


“톨비쉬?”

밀레시안이 걱정스레 이름을 부르자, 비로소 톨비쉬 인형이 자루에서 빠져나왔다. 드러난 톨벼의 얼굴은 눈물자국으로 엉망이었다. 


“절반도 못 챼웠어……”


인형이 커다란 주머니의 허리께밖에 오지 않은 금화 더미를 가리키며 말했다. 

“옆구리가 아야 할 때까지 열심히 뛰었는데, 그랬는뎨, 반밖에 못 챼웠어……!”


인형의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울먹거렸다. 애꿎은 입술을 꾹꾹 누르며 참아보지만, 눈가가 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을 멈출 수는 없었다. 인형은 억울함인지 실망인지, 아니면 패배감인지 뚜렷이 가려낼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었다. 흙먼지 사이를 뛰어다니느라 까맣게 변한 뺨 위로 눈물이 흐르면서 덕지덕지 초라한 길을 그려냈다. 


밀레시안은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안 그래도 제 몸보다 수백 배는 큰 필드를 뛰어다니느라 꼬질꼬질해진 모습 때문에 안쓰러워 죽겠는데,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 것까지 보자 심장이 가슴으로 찔리는 것 같았다. 입양한 이후로 좀 시무룩해 한 적은 있어도 단 한 번도 울거나 떼를 쓴 적이 없던 톨비쉬 인형이 이러는 것을 보자, 밀레시안은 당황해서 일단 엉망이 된 얼굴이라도 닦아주려 손수건을 꺼냈다. 미숙한 주인은 때 묻은 뺨을 하얀 손수건을 닦아주며 되는대로 위로의 말을 내뱉었다. 


“아니야, 톨비쉬. 잘 봐봐, 엄청 많이 모았네! 반이나……는 아니지만 톨비쉬 어깨 높이만큼 모았잖아. 대단해!”


그러나 아이들은 언제나 어른의 급조된 위로를 쉽게 간파한다. 밀레시안의 과장된 칭찬을 듣자, 톨비쉬 인형은 오히려 더 서러워져서 팩 고함을 쳤다.  


“아냐! 다른 인형들은 가득 챼운단 말야!”


톨비쉬 인형의 머릿속에선 밀레시안을 놓쳤던 날, 우연히 목격한 크리스텔 인형의 터질 듯이 가득 찬 가방이 사라지지 않고 맴돌았다. 행복하게 웃던 크리스텔 인형의 표정과, 진심으로 감탄하며 인형을 칭찬해주던 그 주인의 얼굴을 떠올리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이 몰려왔다. 동시에 정말 중요한 건 아무것도 모르면서 ‘어서 얼굴을 닦자’느니,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 다음엔 이름표를 달아주겠다’느니 쓸 데 없는 말들만 늘어놓는 사람들한테 괜히 분통이 터졌다. 


“아이고 톨벼, 진짜 괜찮다니까.”

“안 괜챦아!”


가슴이 터질 것처럼 답답하고 뭔가 꼭 전하고 싶은 서러움이 있는데, 그걸 전할 방법을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아무도 그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단 생각이 들자, 이제 톨비쉬 인형은 거의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준비된 도화선처럼 연소 직전인 그 상황에, 밀레시안이 참다 못 해 던진 한 마디가 불을 붙였다. 


“금화 좀 못 주운 게 그렇게 큰일이야? 이렇게까지 울 일은 아니잖아. 자꾸 떼 써봤자 어차피 너만 속상해져!”


투정 한 번 없던 인형이 갑자기 못 보던 모습으로 울면서 난리를 피우니까 답답한 마음에 터진 말이었다. 진심으로 톨비쉬를 비난하는 것은 아니었다. 말한 순간 밀레시안 스스로도 아차 싶었지만, 이미 인형은 제 볼을 닦아주려던 밀레시안의 손에서 수건을 뺏어서 패대기친 후였다. 


“밀례 님은 아무것도 몰라!”


얌전하고 예의 바른 인형이 누구한테 물건을 집어던진 건 처음이었다. 그러나 수건은 이미 ‘철퍽’ 소리를 내며 밀레시안의 얼굴에 부딪혀 스르르 떨어지고 있었다. 밀레시안은 물론이고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견습 기사들도 숨을 들이켰다. 톨비쉬조차 스스로 한 짓에 놀라서 석상처럼 굳어버리고 말았다. 


“톨비쉬……”


흐려지는 주인의 목소리를 들은 톨비쉬 인형은 반쯤은 당황해서, 나머지 반쯤은 너무 미안해서 미처 사과를 하지도 못했다. 눈물로 푹 젖은 인형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주먹을 꼭 쥐고 푸르르 떨기만 했다.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었다. 살얼음 같은 분위기에선 누구 하나 쉽게 중재하거나 나설 수도 없었다.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은 어색한 정적을 깨트린 것은 익숙한 기사의 목소리였다. 


“소란스럽길래 무슨 일인가 와 봤더니. 또 너로구나.”

“톨비쉬!”


엘베드의 기사는 얼어붙은 분위기는 신경 쓰지 않는 듯이 뚜벅뚜벅 인형이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인형은 자기 머리 위에 갑자기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우자 흠칫 놀라서 어깨를 움찔거렸다. 그러나 기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인형의 겨드랑이 아래로 두 손을 쑥 집어넣더니 톨벼를 달랑 들어올렸다. 답싹 들린 인형이 허공에 뜬 짧은 다리를 달랑거렸다. 기사는 아직 흥분이 가라앉지 않아 씩씩거리고 있는 인형과, 얼굴에 수건을 맞은 채 얼떨떨하게 서 있는 밀레시안을 번갈아 보았다. 다시 인형에게로 돌아온 기사의 눈빛은 심기 불편한 듯 가늘어져 있었다. 


“뜻대로 안 된다고 다른 사람들한테 패악질을 부리다니. 꼬마, 넌 나랑 얘기 좀 해봐야겠다.”

“놔, 놔죠!”


톨벼가 버둥거리며 저항했다. 그러나 장롱처럼 커다란 기사한테서 벗어나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는 행여 인형이 발버둥 치다가 제 기운에 못 이겨 떨어지지 않도록 말랑말랑한 몸통을 더욱 단단히 붙들어 맸다. 그리고 한쪽 옆구리 사이에 단단히 톨벼를 들쳐 맨 다음, 밀레시안에게 짧게 고했다. 


“이 녀석은 제가 잠시 빌리겠습니다. 밀레시안 씨는 조원들이랑 같이 뒷정리라도 하고 계시죠. 얼굴에 그 검댕도 좀 닦으시고요. 거참, 이 애가 난동을 부려도 아주 크게 부려놨군요.”


반론할 여지를 주지 않고 휙 돌아서는 (인간) 톨비쉬의 눈빛이며 태도가 유례없이 싸늘했기 때문에 슈안이나 다른 기사들은 차마 나서서 말릴 수 없었다. 본래도 속을 알기 어려운 상관이긴 하지만, 저토록 엄한 태도로 누굴 혼내는 것은 처음이었던 것이다. 더욱이 보호본능을 자극하기 마련인 인형가방을 눈앞에 두고서도 저리 단칼에 잘라낼 수 있다니. 오랜 단체 생활을 통해 눈치를 기른 벨테인 조원들은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공적으로도 사적으로도) 꿇릴 것이 없는 밀레시안만이 떠나가는 톨비쉬와 톨벼를 향해 당부를 외쳤다. 


“톨비쉬, 부드럽게! 꼭 부드럽게 대해줘야 해!”


금발의 기사는 알았다는 표시로 빈손을 들어 한 번 까딱이기만 하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척척 걸어가 버렸다. 남은 사람들이 더 할 수 있는 일은 없어보였다. 진인사대천명. 그들은 그저 엘베드 조장의 뜻을 하늘의 뜻으로 여기고 맡기기로 했다. 오직 밀레시안만이 의문의 신뢰로 그를 배웅했다. 




‘오늘은 톨벼의 최고의 하루가 될 거야!’


밀레시안님의 응원은 이뤄지지 않았다. 작은 인형의 기대는 배반당했다. 심장이 펄떡거리도록 온몸을 갈아넣은 노력은 헛수고로 돌아갔고, 자신의 돈 주머니는 여전히 턱 없이 적었다. 설상가상으로 밀레시안님한테 화를 냈다가, 커다랗고 무서운 기사님한테 붙들려서 낯선 곳으로 끌려오기까지 했다. 상황을 되짚어본 톨비쉬 인형은 생각했다. 


‘나보다 더 불행한 인형은 없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까 비관적인 상황이며, 수건을 맞은 밀레시안님의 벙찐 표정, 벨테인 형아, 누나들의 침묵 같은 침울한 생각들만 줄줄이 떠올랐다. 톨비쉬 인형, 통칭 톨벼는 예전에 밀레시안 님을 따라 레네스 북쪽 끝의 바다에 간 적이 있었다. 반짝이는 해변이 예뻐서 혼자 놀고 있었는데, 거친 파도가 금세 무릎을 지나 허리까지 차올랐다. 밀레시안님이 재빠르게 건져주지 않았다면 분명 떠내려갔을 것이다. 지금 기분이 꼭 그때 같았다. 막아보려고 해도 자꾸 침울한 생각들이 밀려오는 기분. 그때 밀레시안님이 파도에서 건져주었듯이, 누군가 도와주지 않으면 이대로 슬픔이란 파도에 휩쓸려 떠밀려 갈 것만 같았다. 


상념에 빠진 인형을 깨워낸 사람은 그의 원본이 된 기사였다. 인간 톨비쉬는 톨벼를 툭툭 건드렸다.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서 잔뜩 웅크리고 있던 톨벼가 그 손길을 홱 밀쳐내며 고개를 돌렸다. 


“건드리지 먀!”


동서남북 방향도 못 잡던 꼬맹이는 어디로 가고 어느 새 되바라진 애송이만 남았는지. 톨비쉬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홱 돌아간 인형의 턱을 잡고 살살 돌려서 다시 정면을 바라보게 했다. 그리고 예의 엄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밀레시안 님한테 신경질을 냈지?” 


밀레시안보다도 커다란 어른이 눈 한 번 깜짝이지 않고 캐묻자, 톨벼는 당황해서 몸이 뻣뻣해졌다. 그러나 톨벼는 작지만 강단 있는 인형이었고, 자기의 굳센 의지를 보여주려는 듯 매몰차게 고개를 돌렸다. 


“흥!”


문제는 원본 톨비쉬는 그런 톨벼를 웃돌 정도로 고집 센 사람이라는 사실이었다. 협상가처럼 생겼지만 까보면 외곬수도 보통 외곬수가 아닌 이 남자는 톨벼의 반항을 지켜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로 말 안 할 거야?”


인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톨비쉬는 다시 생각에 빠졌다. 덕분에 오른쪽의 긁힌 눈썹이 살풋 찡그려졌고, 그걸 본 인형의 작은 심장이 참새처럼 팔딱거렸다. 어른은 뭔가 궁리를 하는 듯 하더니, 이내 전략을 바꾸려는 듯 엄한 목소리를 조금 풀어내며 말했다. 


“왜 화가 났는지, 뭐가 서러운 건지, 말로 하지 않으면 아무도 알 수 없어.”


밀레시안님한테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던 자기 심리를 정확히 꿰뚫리자, 인형은 내심 깜짝 놀랐다. 그리고 톨비쉬의 날카로운 눈은 조막만한 발이 꼼지락 움직인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갈등하느라 사정없이 흔들리는 인형의 동공을 묵묵히 기다렸다. 


십 초. 이십 초. 삼십 초. 

입술만 꾹꾹 누르던 톨벼가 마침내 속내를 털어놓았다. 


“나도 돈 주머니 이만큼 채울 슈 있을 줄 알았어!”

인형이 두 팔을 양껏 벌리며 말했다. 

“크리스톌 인형처럼 이먄큼, 산더미먄큼 모아서 가져갈 수 있을 쥴 알았어! 그래서 엄청 노력했는뎨, 옆구리가 막 아프고 가슴에서 휵휵 소리 날 때까지 막 뛰었는뎨! 반도 못 챼웠어……”


절반도 채우지 못해서 맥없이 주둥이가 흘러내리던 돈주머니를 떠올리자, 톨벼의 세계는 다시 잿빛으로 물들었다. 인형은 더 이상 성질을 낼 기운도 없어서, 미약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혼잣말했다. 누가 듣고 있든 말든, 중요하지 않았다. 당장 몰려오는 실망감에 깔려서 뭉개질 것만 같았다. 


“……연습해도 되지 않았어……”

“글쎄. 네가 가방의 반만 채웠다고 해서 밀레시안 님이 뭐라고 할 것 같진 않다만. 실제로도 그렇지 않았니? 그분은 실망하지도 아쉬워하지도 않으셨잖아.” 

“아냐, 그게 아니란 말야!”


톨벼가 눈에 눈물방울을 주렁주렁 단 채로 거세게 고개를 저었다. 아이는 스스로도 너무 답답해서 어찌 할 수 없는 이상한 기분을 어떻게 좀 해달라는 듯, 애타게 어른을 바라봤다. 자길 좀 도와달라는 듯이 외쳤다. 


“골드도 못 쥽는 인형이라니, 이게 모야…… 모쟈라고 쓸모없어……  ”


인형은 말끝을 흐리다가 눈시울이 점점 발개지더니, 결국엔 ‘흐어엉’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망개떡처럼 뽀얗고 말랑한 볼은 사과처럼 붉게 물들고, 작은 몸 어디에 저렇게 많은 물을 숨기고 있었는지 분수처럼 눈물이 퐁퐁 샘솟는다. 그동안 꾹꾹 눌러 담아온 감정이 폭발하면서 천둥소리 같은 통곡을 내었다. 작은 한숨으로 시작했던 아이의 울음은 마음의 파도에 떠밀리고 떠밀려 거대한 오열이 되어 있었다.  


덩치는 작아도 품고 있는 감정의 깊이와 농도는 어른과 다를 바 없다. 어쩌면 갓 세상을 알아가기 시작한 생명이기에 행복한 감정도, 슬픈 감정도 더욱 섬세하고 강렬하게 느끼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자 예전의 저를 닮아 못나게만 보이던 인형이 문득 안쓰러워 보인다고, 톨비쉬는 떠올렸다. 동시에 이전에 자신이 인형에게 했던 말이 너무 무심하고 가혹한 것은 아니었나 하는 후회가 들었다. 한없이 미숙하고, 조급히 달릴 줄밖에 모르던 과거의 자신이 떠올라서 부쩍 냉정하게 다그친 건 아니었는지. 거울에 비친 자화상처럼, 내면 깊은 곳의 불안까지 자신을 똑 닮아있는 어린 생명 앞에서 동족혐오를 느낀 건 아니었는지. 일단 깨닫고 나자 심장 안에 불쾌함이 꽈리를 틀고 있던 자리가 뻥 뚫리고, 대신 죄책감이 빠르게 그 빈자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톨비쉬는 난처한 표정으로 한참 마른세수를 하다가, 마침내 마음을 정했다. 인형은 하도 격렬하게 우느라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신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조금만 더 있다간 토마토 인형으로 오해받을 듯싶었다. 그는 그런 인형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얘야. 아무래도 내가 오해하게 말을 한 것 같구나. ‘너도 하면 된다’는 말은, ‘그러니 너도 그렇게 해’라는 말은 아니었어.” 


말을 마친 톨비쉬는 자기 뜻이 제대로 전달되었는지 인형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인형은 영 생뚱맞은 얼굴로 코를 훌쩍일 뿐이었다. 수도꼭지처럼 줄줄 흐르던 눈물은 일단 멈췄지만, 그게 얼마나 갈지는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어른 톨비쉬는 차라리 직접 보여주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하고서, 히끅거리는 톨벼를 번쩍 안아서 근처의 벤치로 데려갔다. 다리가 짧아 바닥에 발이 닿지 않는 인형을 위해 널찍이 자리를 양보한 다음, 자신은 남은 공간에 대충 걸터앉았다. 무서웠던 기사님이 갑자기 자길 안아주고, 또 자리를 양보하기까지 하자 인형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끄러미 그를 쳐다봤다. 톨비쉬는 꼬마의 궁금증에 대답해주는 대신, 겉옷 안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수첩과 펜을 꺼냈다. 빼곡히 필기된 종이가 휙휙 넘어가고 빈 면에 다다르자, 그는 인형에게 그것을 보여주며 조곤조곤 설명했다. 


“내가 지금부터 여기에 동그라미를 서른 개 그려보마.”


인형은 톨비쉬의 손에 들린 펜과 수첩을 번갈아 보더니, 코를 훌쩍이며 핀잔을 줬다.   

“난 둉그라미 시러.” 

“그럼 뭐가 더 좋겠니?”


톨벼는 입술을 오물거리며 고심한 끝에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밀례 님! 밀례 님이 조아. 밀례 님으로 그려조!”


순식간에 난이도가 올라가는 바람에 톨비쉬는 당황했다. 그러나 초롱초롱 빛나는 눈으로 자길 올려다보는 인형의 눈빛은 절대 타협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마지못해 승낙했다. 

“……시도는 해보마.”


톨비쉬는 온 기억력과 (얼마 되지 않는) 회화실력을 동원해서 밀레시안의 얼굴을 그리기 시작했다. 펜으로 전술 보고서를 작성하고 고문서를 해석하는 데는 능숙해도, 그림을 그리는 데는 익숙하지 않은 손은 번번이 삐져나가거나 흔들렸다. 본판과 많이 다른 이유는 데포르메라서 그렇다고 변명해 봐도, 역시 어설픈 면이 많았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톨벼도 당연히 그 삐치고 부들부들 떨리는 선을 보고 훈수를 놓기 시작했다. 


“밀례 님 얼굴은 더 똥그래.”

“밀례 님 코 돼지코 아냐……”

“밀례 님 머리 위에 더듬이! 더 뾰족뾰족!”

“모야. 밀례 님은 일케 실없이 웃지 않는뎨.”

“……헉! 표정이 너무너무 무셥다.” 


톨벼의 의견을 참고해서 겨우 서른 번의 밀레시안 데포르메를 성공할 수 있었다. 땀을 뻘뻘 흘린 끝에 완성한 밀레시안 얼굴x30은 어설펐지만, 그래도 대충 알아볼 만은 했다. 기사는 완성된 그림을 인형에게 보여주었다. 


“어때?” 

삐쭉빼쭉한 동글뱅이를 열심히 관찰한 인형이 단칼에 대답했다. 


“못생겼써.”

“!”


너무 적나라하게 평가당한 충격 때문에 톨비쉬는 하마터면 기껏 준비한 위로를 까먹을 뻔 했다. 그러나 다행히 주인과 깊은 애착 관계를 형성한 인형은 찌그러진 서른 개의 동글뱅이 중에서도 사랑하는 보호자의 얼굴을 발견해냈다. 톨벼의 조막만한 검지가 그럭저럭 밀레시안을 닮은 얼굴 두 개를 짚었다. 


“그래두 요거랑 요건 닮은 거 가타.”

인형은 멋진 미소를 짓고 있는 동글뱅이 밀레시안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더니, 배시시 웃었다. 

“희희. 밀례님이다.”   


톨비쉬는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 기사는 정신없이 코를 박고 그림을 보고 있는 인형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밀레시안 님을 서른 번 그렸는데, 그 중에 정말 닮은 건 두 개 정도네. 그럼 나머지 스물여덟 개는 밀레 님이 아니게 되는 걸까?”


질문을 받은 인형은 다시 다른 원들을 둘러보았다. 다른 얼굴들을 둘러보았다. 삐뚤빼뚤하고 모났지만, 분명 조금씩 밀레시안님을 닮아있었다. 그러자 스물여덟 개의 얼굴들을 버릴 수 없게 되었다. 서른 번의 밀레시안 모두가 소중해졌다. 인형은 마치 누가 뺏어 갈까봐 걱정하듯, 스케치를 품에 꼭 안고 지켰다. 그리고 작은 입을 꾹꾹 오물거린 끝에 어른의 질문에 대답했다. 


“……젼부 밀례님이야. 삐뚤빼뚤해도, 쪼끔 못생겨써도 다 밀례님이야.”

“그래. 찌그러졌다고 해서 그걸 네모라고 부를까? 세모라고 부를까? 여전히 원이고 여전히 밀레시안 님이지. 금화를 줍는 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 꽉 찬 금화주머니, 반만 찬 주머니, 사 분의 일까지 찬 주머니, 어느 것이나 금화주머니란 사실은 같아. 그러니 주머니의 높이를 비교하는 게 무슨 소용이겠니? 몇 자를 쌓든, 몇 닢을 모았든 여전히 같은 금화인데.”


기사는 그림이 그려진 면을 조심스럽게 뜯어 인형에게 주며 말했다. 

“너는 분명히 골드를 주웠어.”


찌그러지고 엇나간, 서른 명의 밀레시안을 선물 받은 인형은 더 이상 울지 않았다.





저녁이 되기 전에 두 톨비쉬는 친구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돌아왔다. 우는 애를 혼자 보냈다는 생각에 좀처럼 걱정을 내려놓지 못하던 밀레시안은, 멀리서 나란히 걸어오는 두 그림자를 발견하자마자 버선발로 뛰어왔다. 그는 개구리처럼 눈이 퉁퉁 부은 톨벼를 보고 기겁해서 외쳤다. 


“톨비쉬! 아이고, 얼굴 좀 봐. 얼마나 울었으면 눈이 퉁퉁 부었어, 우리 톨벼 예쁜 얼굴이! 안 되겠다, 얼음찜질하러 가자!”


그러나 인형은 부은 눈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듯, 두 팔을 벌리며 밀레시안의 품 안으로 달려들었다. 그리고 하도 울어서 쉬어버린 목소리로 사과를 건넸다.   


“밀례님, 아까 미아냿어요! 내가 나뺬어. 이젠 쨔증 안 부릴께!”


수건을 던져서 미안하다며 몸을 날려 폴짝 뛰어오르는 인형을, 밀레시안이 얼떨결에 받아들었다. 그는 재회의 감격에 겨워 온몸으로 자기 품에 부딪혀오는 인형을 어르는 한편, 그 옆에 서 있던 톨비쉬에게 대신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둘이서 무슨 얘길 한 거야?”


기사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마냥 맹한 인형인 줄 알았는데, 완벽에 대한 강박이 있더군요. 무엇이든지 잘 해야 한다는 자기압박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뭐? 진짜? 난 톨벼한테 그런 부담 준 적 없는데!”


충격으로 굳은 밀레시안을 톨비쉬가 안심시켰다. 

“누구한테 배운 건 아닐 겁니다. 그저 타고난 천성이겠지요. 아무래도 이 애를 만들어낸 인형사는 특별히 솜씨가 뛰어난 모양입니다. 원본의 외양을 모방한 인형이야 많지만, 이렇게 속까지 찍어낸 것처럼 똑같은 경우는 저도 처음 봅니다.”

“무슨 뜻이야?”

어리둥절해 하는 밀레시안을 향해 톨비쉬는 가만히 웃어보였다. 


어쩌면 작은 인형에게 자신의 과거를 투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고, 기사는 생각했다. 나를 너무 닮아서, 어렸던 옛 시절의 내 못난 모습이 자꾸 눈에 밟혀서 신경이 쓰이는. 가능하면 잊어버리고 싶을 만큼 싫고, 동시에 그렇게 괴로워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다독여주고 싶은 양가감정. 인형이 제멋대로 짜증을 부리고 울 때까지만 해도 이중적이었던 그 감정의 추가, 언제부터 한 쪽으로 기울어졌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 인형의 어리지만 솔직한 속내를 듣고 나서였을지도 모른다. 시끄럽고, 제멋대로에, 오해로 가득 찬 그 토로의 어떤 점이 그리도 마음에 밟혔을까. 그건 아마도—


“글쎄요. 우리가 하는 모든 말은 결국 우리 자신이 듣고 싶었던 말이란 뜻이겠지요.”


톨비쉬는 담백하게 대답했다. 작은 인형에게 건넨 위로는 유년 시절의 그를 보듬고, 기나긴 시간의 강을 건너, 이제는 어른이 된 그에게로 돌아오고 있었다.   



<끝>





+) 동그라미 서른 개의 일화는 가수 김창완 씨의 일화에서 따왔습니다. 

++) 오직 그 장면을 쓰기 위해 달렸습니다. 

+++) 쓰는 동안 프리다 보카라의 "어느 날 한 아이가 Un Jour Un Enfant"을 자주 들었습니다. 직접 내용에 인용하지는 않았지만, 아마 가사의 영향도 받았겠지요? 고마우니까 첨부합니다. u_u 


세 그루의 라일락 나무 가지 위로 

어느 하루가 밝아 오고

한 아이가 그림책을 읽듯이 

그 날을 맞이할 것입니다


아이를 둘러싼 세상은 텅 비어있어서

그 빈 종이들을 보며 삶을 상상해 나가겠지요


아이는 오렌지의 모양을 따라 그리며 

하늘에게 첫 태양을 주고

새를 그리면서 

꽃을 배우고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면서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듣게 될 겁니다


별들의 뾰족한 가지를 그리면서

어른들의 길을 발견할 겁니다

하루하루 맺힌 사랑의 열매와 장미꽃을 보며 감탄하는 마음을 간직한

그런 어른들의 길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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