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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어콜린스] 39년의 크리스마스

성탄 기념 연성. RAF 사람들은 이브 축제를 준비하고, 파리어와 콜린스는 춤을 추고 반지를 교환한다.


줄거리 한 줄 요약: RAF 사람들은 크리스마스 축제를 준비하고, 파리어와 콜린스는 춤을 추며, 두 사람은 각자의 반지를 교환합니다. 1939년 12월, 성탄 전야의 이야기.



* 본문에서 (*주n)으로 표시된 부분은 포스트 마지막에 미주 처리 하였습니다.








“Jingle Bells~ Jingle Bells~ Jingle all the way~ O! what a fun it is to ride 후룰룰루~”


난로의 후끈한 열기가 머리를 가물가물하게 만드는 포티스 팀의 장교실 안. 정체를 알 수 없는 목소리가 저 멀리서부터 징글징글한 흥얼거림을 휘모리장단으로 몰아치며 다가왔다. 바닥을 두드리는 군화의 탭댄스는 드럼 대신이요, 가사를 까먹어서 콧소리로 대충 넘겨주는 흥겨움은 트럼펫 대타였다. 건조하고 따뜻한 실내 기온 탓에 졸음이 몰려오는 험악한 조건 속, 자꾸 내려가려는 눈꺼풀을 억지로 들쳐가며 보고서를 작성 중이던 포티스 팀의 리더는 약간 짜증이 났다.


“누가 라디오 켜놨냐.”
“예, 리더. 저 무책임한 후렴구 생략과 한 박자씩 밀리는 탭댄스를 고려했을 때, 라디오가 아닌 윌리엄 소위의 전적인 방종으로 판단됩니다.”


몰려오는 졸음 속에서 그나마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던 막내 콜린스가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그렇게 대답하는 바짝 마른 목소리에조차 평소의 상사-부하 관계에서 듣기 드문 짜증이 묻어있어서, 성격 좋은 콜린스조차 이 지긋지긋한 사무 업무에 지쳐가고 있는 상황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개중에서 유일하게 느긋함을 유지하고 있는 이는 파리어 대위뿐이었다. 그는 미리 당번병을 시켜서 준비해온 냉침 아이스티를 시원스레 홀짝이며 대꾸했다.


“뭘 그리 예민하게 반응합니까들. 크리스마스잖습니까, 크리스마스. 우리 기지에 배치 받고 이제 적응도 좀 됐겠다, 어린놈이 계절 분위기 내느라 노래 좀 부르는 거겠죠. 웃어른답게 너그러움을 발휘해 봐요, 리더.”


추운 겨울, 뜨끈뜨끈한 장교실―그러나 지나치게 후끈해서 건조하고 공기가 텁텁한 장교실―에 틀어박혀서 홀로 마시는 아이스티는 참으로 꿀맛이었다. 손발은 뜨시고 식도와 위장은 시원하게 트여주는 최적의 조합이랄까. 뛰어난 통찰력과 철저한 준비성 덕분에 상사나 후임과 달리 신식 난로의 부작용을 가뿐히 피할 수 있었던 파리어 대위는 심신 모두 몹시 만족스런 상태였다.


그런 파리어 대위의 얌체 짓이 아래위 양쪽에서 공분을 산 것은 필연지사였다. 왜냐면 냉침 아이스티의 위력을 빌어서 한참 전에 자기 몫의 보고서를 마쳐 놓고, 이젠 할 일이 없어 밖에서 들려오는 엉터리 캐롤에 맞춰서 타닥타닥 손가락 탭댄스까지 추기 시작한 꼴이 몹시 얄미웠기 때문이다. 콜린스는 그나마 파리어의 (비밀) 연인이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 때문에라도 참아주고 있었지만, 그런 사적인 이해관계에 얽매일 필요가 없는 리더는 기어이 폭발하고 말았다. 포티스 팀의 리더는 드물게 버럭 언성을 높이며 첫째 부하에게 명령했다.


“그래? 그렇게 크리스마스가 좋다면, 대위, 자네가 나가서 지원 요청 들어온 물건을 사오는 건 어떤가? 성탄 전야에 옆 기지 여군들과 합동 축제를 한다고 준비해야 할 물건이 산더미일세.”


“예? 그걸 왜 우리가 합니까? 포티스 팀이 조종 병과지 보급 병과입니까?”


파리어가 대담하게도 굵은 눈썹을 확 찌푸리며 대들었다. 그러나 심보가 쌓일 대로 쌓인 리더는 한 치의 물러섬 없이 또박또박 웃는 얼굴로 쐐기를 박을 뿐이었다.


“왜냐하면 바로 그 보급 병과는 지금 밀려드는 지원 요청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고, 다행히 우리 포티스 팀에는 마침 할 일이 없어 놀고 있는 인력이 있기 때문일세, 대위. 자네 말처럼 이런 때일수록 여유로운 마음으로 서로 서로 돕고 사는 거 아니겠나. 응?”


“비겁한 변명입니다, 리더.”

파리어는 눈을 네모낳게 뜨며 마지막 반항을 시도해보았다. 그러나 속이 꼬여도 단단히 꼬인 리더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던 듯하다. 그는 타 부서까지 배려하는 인자한 지도자의 가면을 쓰고서, 정확히 삼 분 전에 파리어 본인이 했던 말을 그대로 되갚아 주었다.


“크리스마스 아닌가, 크리스마스? 자네 말대로 장병들의 사기 진작에 성탄 축제만큼 좋은 것도 없지. 자, 그러니 잔말 말고 나가서 사와. 여기 리스트.”


전투시를 제외하면 가급적 격의 없는 분위기를 지향하는 포티스 팀이긴 하지만, 그래도 상관의 명령은 명령이다. 파리어는 불퉁한 얼굴로 리더가 건네는 「성탄 전야 축제 준비를 위한 지원 품목 요청서 Ⅲ」을 한 손으로 건네받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시원하게 위장을 달래주었던 냉침 아이스티가 이젠 북극해의 빙하처럼 위장 속을 싸하게 식히는 것만 같았다.


영하 12도의 날씨에 시내까지 나가서 심부름이라니! 파리어의 얼굴은 이미 이마가 잔뜩 찌푸려져서 심술보 산타 할아버지처럼 변한지 오래였다.


그리고 옆에서 두 상사가 벌이는 이 코미디 같은 입씨름을 구경하고 있던 콜린스로 말하자면, 오늘 장교실 책상에 앉은 지 세 시간 만에 처음으로 입 꼬리가 살살 올라가고 있는 중이었다. 특히 저보다 연상이라는 점을 무기 삼아 제 앞에서는 늘 어른 시늉만 하던 파리어가 리더한테 아주 톡톡히 당하는 모습을 보려니까, (비록 애인이지만) 그간의 꽁했던 아쉬움이 시원하게 풀리는 심경이었다. 남자답게 시원스럽고 멋있는 이마가 분을 못 이겨 쭈글쭈글 난쟁이 할아버지처럼 변할 때는 그야말로 올 겨울 최고의 명장면이었고, 고소하다 못해 귀여울 지경이었다.


바로 그 애정 반 고소함 반이 섞인 즐거움이 결국 콜린스마저 리더의 불호령 레이더에 걸려들게 만들었지만. 콜린스는 반쯤 졸음에 취한 머리로 씩씩대는 파리어를 구경하다가, 기어이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아, 귀여워.”


그동안 대화를 장악하고 있던 두 남자의 중후한 음색 사이에서, 아직 어린 기운이 남아 있는 콜린스의 한 마디는 새 소리처럼 휙 꽂혀들었다. 무의식중에 내뱉은 제 말의 후폭풍을 콜린스가 깨달은 것은 몇 초 후 자신에게 꽂히는 두 명 어치의 싸한 눈초리를 받고 나서였다. 졸지에 열세 살이나 어린 애인한테 ‘귀엽다’는 형용사를 듣게 된 파리어는 다소 충격 받은 표정이었고, 그보다 더 중요한 고참 리더의 반응은―파리어가 반항했을 때 보여준 표정과 한 치의 오차 없이 똑같았다.


“콜린스 소위, 자네도 하도 실내에 오래 앉아 있다 보니 살짝 정신이 빠진 모양이군? 나가서 찬바람도 쐬고 빠진 군기도 챙겨올 겸, 대위랑 같이 나가서 장이나 보고 오게.”


그때서야 사태를 파악한 콜린스가 화들짝 놀라서 변명을 시도했다.


“예? 하지만 전 아직 마쳐야 할 보고서도 있고, 심부름은 파리어 대위님 혼자서도 충분ㅎ……”


“이런 예의도 눈치도 없는 애송이들 같으니라고!”


리더는 마치 심기 불편한 노령의 퍼그처럼 한쪽 발로 바닥을 팡팡 내리치며 잔소리를 했다. 그렇게 행동하는 당신께서도 정작 마흔을 갓 넘긴 나이면서. 짐짓 뒷짐까지 지고 혼내는 모습이 적잖이 재밌었지만, 콜린스와 파리어 두 사람은 이 이상 리더의 신경질을 받아내고 싶진 않았기 때문에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그제야 건조한 장교실의 더위가 주는 짜증이 조금 누그러졌는지, 리더는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덧붙였다.


“어차피 빠진 정신 상태로는 문장도 안 써져. 둘이 나가서 바람이나 쐬고 와. 시내 가는 김에 데이트라도 하고 오라고. 보고서 마지막 장은 내가 후딱 해치우는 쪽이 더 빠르니까.”


중간에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로 살짝 덧붙인 말은 일종의 친절이었다. 말하자면 이른 성탄 선물이라고 할까? 평화와 사랑의 계절에 다른 평범한 연인들처럼 맘 놓고 자유롭게 애정 표현 한 번 못하는 딱딱한 부하들에게 주는 선물. 다른 일에 있어선 장애물이란 장애물은 죄다 나찌놈들 뚝배기 깨듯이 쳐부수고 나아갈 것 같은 놈들이, 사랑 앞에서만 소심해지는 꼴이 보기 속 쓰려 주는, 그런 선물.


그렇게 자기 세뇌 아닌 세뇌를 하며, 리더는 아직도 멀뚱히 앉아만 있는 두 부하를 향해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안 나가고 뭐 해? 꾸물거리다간 금방 저녁이야.”


그리고 자기가 말해놓고서도 어색했던지, 그는 붉어진 얼굴을 숨기려 등을 돌렸다. 항상 점잖기만 하던 리더의 낯선 모습을 목격하게 된 파리어와 콜린스는, 의외라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둘은 말없이 시선을 마주치며 눈으로 대화했다. ‘크리스마스라는 이 신비한 계절은 아마 꼬장꼬장한 리더의 마음에도 한 모금의 친절함을 불어넣나보다’라고.


다행히 젊은 혈기를 자랑하는 데다 사랑에 한창 눈이 멀어 있던 두 젊은이들은, 내빼는 기색 하나 없이 리더의 선물을 덥석 받아들였다. 둘은 리더의 명령 아닌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경례를 붙였다. 방금 전까지 추운 날씨에 시내까지 나가기 싫다고 서로 미루던 실랑이는 온 데 간 데 없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콜린스가 아직까지 파리어의 손 안에서 덜렁거리고 있던 「성탄 전야 축제 준비를 위한 지원 품목 (이하 생략)」을 대신 낚아채며 힘 있게 외쳤다. 가장 어린 만큼 가장 눈치도 밝고 둘만의 데이트에 대한 환상도 큰 콜린스가 이 천우의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반면 파리어는 나름 몰래 한다고 했던 연애가 실은 진즉에 들키고도 남았다는 사실 때문에 아직 얼떨떨한 상태였다. 그런 파리어를 콜린스가 손끝으로 잡고서 재촉하듯 꾹꾹 끌어당겼다.


“대위님, 어서요. 심부름 가셔야지요.”


이상의 이야기가 바로 성탄절을 앞둔 12월의 어느 겨울날 오후, 조종 병과의 파리어 대위와 콜린스 소위가 난 데 없이 시내로 심부름 겸 데이트를 나가게 된 경위다.



* * *




서두르지 않으면 금방 어둠이 내릴 거라던 리더의 재촉은 사실이었다. 2인승 자전거 페달을 열심히 밟아서 삼십 분 만에 도착한 시내에는 어느 새 검푸른 저녁 어스름이 퍼지고 있었다. 보도를 따라 늘어선 가로등에 하나 둘 씩 불이 들어오고, 늘어선 상점가의 간판들도 길게 그림자를 늘인다. 영하 12도를 웃도는 추운 날씨였지만, 청명한 하늘과 맑은 공기 때문이었을까? 평소 저녁 시간이 되면 인파가 줄기 마련이던 기지 옆 소도시의 시내인데, 어쩐 일로 사람들이 꽤 붐비고 있었다. 오히려 해 그림자가 뒤로 넘어갈수록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밖으로 쏟아져 나오는 것도 같았다. 금요일 저녁을 맞아서인지, 행인들의 옷차림도 제법 외출을 위해 차려입은 태가 났다. 누가 뭐라 해도 크리스마스는 역시 사랑과 평화의 계절, 그리고 더불어 쇼핑의 계절이다. 일 년에 한 번뿐인 대명절을 맞이하여 보온성과 멋을 겸비한 차림새로 마실 나온 시민들의 모습이 보기에도 훈훈해 보였다.


단 한 명—리더의 데이트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신나서 뛰어나오느라 정복 위에 코트 하나 달랑 걸친 콜린스를 제외하면 말이다. 파리어는 진즉에 아침부터 두툼한 양모 니트를 챙겨 입고 나온 덕분에 그보다는 추위를 피할 수 있었다. 게다가 그는 방금까지도 뒤에 콜린스를 태운 채로 열심히 2인승 자전거를 삼십 분 간 운전한 참이었다. 오히려 약간의 운동 열이 오른 덕에 손바닥에 땀이 차다 못해 축축했다. 대위는 공용 주차장의 빈자리를 포착하자마자 얼른 자전거를 주차한 다음, 으슬으슬 떨고 있는 콜린스 곁으로 후다닥 뛰어갔다.


“너, 리더가 나가라고 진짜 바로 뛰쳐나가면 어떡하냐? 옷도 코트 하나 달랑 걸치고서는.”


파리어는 걱정 섞인 목소리로 콜린스를 타박했다. 2인승 자전거를 타고 오는 내내 뒷자리에서 허리를 감아오던 콜린스의 손이 유독 차게 식어갔던 것이 떠올랐다. 윙 메이트의 손 온도가 걱정된 나머지, 그는 양모 니트에 무스탕까지 껴입느라 자기 등짝이 후끈 후끈 달아오르는 것도 모르고서, 일단 양손으로 콜린스의 손바닥을 꽉 붙잡고 봤다. (물론 그전에 땀 어린 손바닥을 얼른 바지로 훔쳐내는 매너도 잊지 않았다. 땀 찬 손으로 만지면 멋없으니까. 대위는 띠 동갑 소위와 모종의 관계가 된 이후로, 조금 더 겉멋과 센스에 관심을 갖게 된 참이었다.)


그런 선임의 깊은 마음 씀씀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콜린스는 하루 종일 사무실에 갇혀 있다 드디어 밖으로 탈출했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흥겹게 시내를 구경하는 데 정신이 팔려버렸다. 그는 훤히 열린 코트 목깃도 잊고서 시내에 울려 퍼지는 캐롤을 휘파람으로 따라 부르며 길을 앞섰다. 임관한 장교라고 해봤자 이제 겨우 스물 두셋 밖에 먹지 않은, 아직은 만사가 새롭고 즐거울 한창 때이니 당연한 반응이리라.  

 
“실버 벨~ 실버 벨~ 도시에 크리스마스가 왔어요~”

“안 춥냐, 떽떽아.”

“후후, 스코틀랜드 언덕에서 내려온 저의 튼튼한 체질을 얕보면 안 되시지 말입니다. 이래봬도 영하 20도의 혹한도 견뎌본 몸입니다. 그러는 대위님이야말로 펭귄처럼 꽁꽁 싸매셨군요!”  


그러더니 콜린스는 아까 전 다른 소위의 엉터리 캐롤을 삐딱한 태도로 비꼬았던 기억은 멀리 던져버리고, 이젠 본인이 더 신나서 열심히 멜로디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훤칠한 미남 장교가 길쭉한 다리로 성큼성큼 길을 걸어가니, 자연히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각진 코트 사이로 슬며시 모습을 드러내는 긴 다리로 적나라한 시선이 꽂히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렇지만 파리어는 경계를 느낄 새도 없었다. 앞섶을 풀어헤친 채로 활개 치고 다니는 콜린스에 온 신경이 쏠리는 바람에, 넓은 보폭으로 얼른 그 옆을 따라잡는 것만으로도 벅찼던 탓이다. 그는 콜린스의 풀어진 코트 단추를 대신 여며주고, 훤히 드러나 싸한 목덜미 주위에도 여분으로 챙겨온 목도리를 큼직큼직하게 둘러주었다.


둘의 발걸음이 번화가 중심으로 접어들기 시작하자 가게 곳곳에서 틀어놓고, 또 거리의 악단이 연주하는 캐롤 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Winter Wonderland’, ‘What Will Santa Clause Say’, ‘I’ve Got My Love to Keep Me Warm’ 등 다양한 레퍼토리가 겨울밤의 추위까지 녹여버릴 기세로 길목 곳곳으로, 그리고 행인들의 귓속으로 푸근하게 울려 퍼졌는데, 그중에서도 역시 최고의 인기곡은 ‘은빛 종(Silver Bells)’이었다.







도시의 바쁜 거리,
모두가 이 명절의 멋진 옷차림이에요
하늘에는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가득하고
아이들은 웃고 있군요
지나치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미소가!

실버 벨, 실버 벨, 도시에 크리스마스가 왔어요

줄지은 가로등의 불빛들, 거리의 신호등도 빨간색과 녹색으로 깜빡이는군요
쇼핑하는 사람들은 양 손 가득 보물을 껴안고 집으로, 안락한 집으로 달려가요
바삭바삭 눈이 내리는 소리를 들어봐요
그리고 이 모든 소란 위로 퍼지는

실버 벨, 실버 벨, 크리스마스가 오고 있어요





이 중에서도 콜린스가 가장 열심히 따라 부른 구절을 꼽자면, 바로 ‘쇼핑하는 사람들은 양 손 가득 보물을 껴안고 집으로 달려가요’—이 부분이었다.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한다는 성스러운 목적으로부턴 이미 한참 거리가 멀어진, 세속의 끝을 달리는 가사였지만, 어쩔 수 없다. 20세기를 사는 현대인의 마음이란 다 그런 것이다.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대개 크리스마스 쇼핑에 한창이었고, 이는 파리어와 콜린스 역시 마찬가지였으니 누가 누구를 탓하랴.


그렇게 생각하자, 급조된 데이트에 놀라서 아직 덜 해동됐던 파리어의 심장도 콜린스를 따라서 다소 뜨끈하게 풀어졌다. 이어서 리더가 손에 어거지로 쥐어줬던 심부름 목록이 떠올랐다. 시내에 도착한지 근 한 시간만의 일이었다. 그때서야 두 사람은 마음이 시급해져 갱지 위에 정갈한 활자로 적힌 물품 목록을 찾아 이 가게 저 가게 문을 두드리기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나 충동구매와 쇼핑을 장려하는 자본주의적 캐롤의 부추김에도 불구하고, 부탁받은 축제 준비물을 사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놀랍게도 지불할 돈은 있는데, 물건이 없는 초유의 사태를 곳곳에서 맞닥뜨린 것이다.


가장 먼저 찾아간 꽃집에서부터 크리스마스 화환(wreath)을 구하기 어렵게 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이고, 어쩌나. 마지막 남았던 하나가 방금 나갔어요.”

“그럼 추가로 주문하면 이브 전까진 들어오겠습니까?”


콜린스가 한껏 난처한 표정으로 눈썹을 찌푸리며 물어보았다. 그러나 십중팔구 먹혀들기 마련이던 그의 미남계도 물자 부족이라는 현실을 해결해주긴 어려운 모양이었다.


“장교님들도 아시다시피, 요새는 화환 만드는 데 들어가는 플라스틱과 고무들이 전부 군수 공장으로 먼저 빠져서요. 올해는 더 못 들여올 것 같아요. 미안해서 어쩌나……”


그렇게 말하는 꽃집 주인의 표정이 정말로 미안해 보여서, 더 이상 사정하기도 민망했다. 콜린스의 흥정이 실패하는 것을 보고서, 파리어는 그저 조용히 심부름 목록의 ‘Wreath’ 위에 줄을 쭉 그은 다음, 메모를 추가해 넣었다.

<화환: 위장 대대에 부탁해서 녹색 모조지로 대신 만들 것.>


다음으로 찾아간 가게는 트리 장식 가게였다.


“여기 이 목록에 적힌 물건들, 개수대로 부탁합니다!”

콜린스가 힘차게 심부름 목록을 내밀며 말했다. 그러나 할아버지 사장님은 목록을 한 번 들여다보더니, 이내 코안경을 흘끗 밀어 올리며 안타깝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많이는 못 사가요. 우리도 하도 재고가 적어서 손님 당 하나씩으로 제한하고 있는 걸.”
“호랑가시나무 관까지 말입니까? 별도요? 방울도? 전구도?”
“으응, 다 떨어졌네. 미안해요, 장교님들. 내년에 봅시다.”


자상한 말투로, 그러나 단호하게 끊어내는 어르신 앞에서 콜린스는 어떻게 비벼볼 기회도 잡아보지 못하고 가게 밖으로 나와야 했다. 그 후로 두어 번 더 찾아가본 가게들마다 죄다 퇴짜를 맞고 나자, 크리스마스 축제 물품 준비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던 보급 병과의 말이 괜한 투정이 아니었음이 겨우 실감났다.


말인즉, 저렴한 비용에 크리스마스 장식을 만들 수 있는 플라스틱, 유리, 고무 따위가 모두 군수물자로 우선 보급되다 보니 값이 천정부지로 올라서 성탄 장식물까지 공급이 모자라게 되었다는, 슬프고 아이러니한 이야기였다. 영국이 독일에게 선전포고를 한 지 고작 세 달밖에 지나지 않았건만(즉 전쟁이 시작된 것이 고작 세 달 전 일이건만)(*주1), 그 전부터 감돌던 전운 앞에서 조용히, 그러나 꾸준히 재무장을 착착 준비하던 높으신 분들의 고견 덕에 이미 중요 물자가 투입될 곳은 사전에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크리스마스인데……”

콜린스는 어쩐지 허탈해져서 허망하게 중얼거렸다.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은 아니지만, 이런 소소한 일상에서마저 전쟁 발발의 영향을 느끼게 되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서글픈 소식에 휘청거리는 콜린스의 마음을 달래준 것은 파리어의 담담한 위로였다.  


“어차피 계획하면서도 다들 어느 정돈 예상했을 거다. 뭐, 없으면 직접 만들면 되는 거고.”

그러면서 그는 콜린스가 열심히 발품을 팔고 다니는 사이, 뒤에서 조용히 작성해 두었던 대안 보고서(?)를 꺼내서 보여주었다. 내용은 대략 이러했다.


<호랑가시나무 왕관(트리용 및 실내 장식용): 민가 산림에서 대여.>
<담쟁이 잎(댄스홀 내부 장식용): 기지 담장에서 직접 채집.>
<전구: 기술병과에 남는 전구와 트랜지스터 조립 후, 셀로판지 사용.>
<트리: 기지 뒷산에서 전나무 공수.>


“그리고 나머지 장식들은 털실 공으로 대체하면 되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파리어의 급조된 수정 목록을 다 읽은 뒤, 콜린스는 눈을 가늘게 뜨며 다음과 같이 평했다.

“이게…… 이게 20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크리스마스 준비 방법입니까? 우리의 영광스런 산업혁명은 어디로 간 거죠……?”

“군인 한 트럭이면 없던 산을 만들고 강물도 바꾼다. 너도 잘 알면서 그래?”

“……예, 그렇긴 하죠.”

콜린스는 RAF에 입대한 이후, 본업인 조종 이외에도 부수적으로 동참해야 했던 수많은 삽질(및 노동) 업무를 회상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파리어의 말을 듣고 보니 그렇게 서글픈 상황만도 아닌 것 같았다. 어쨌든 성탄 축제의 핵심은 전야제를 준비하고, 크리스마스를 무사히 보내는 것이지 화려한 구색에 그 성패가 달린 것은 아닐 테니까. 몸은 부대에 묶여 있어도 마음만큼은 일 년 전과 같이 이 놀라운 계절의 들뜬 분위기를 재현할 수 있다면, 무엇이 더 필요하랴.


콜린스는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였다. 점점 본격화되는 전쟁의 위기감 앞에서 잠시나마 움츠렸던 실망도 어느 새 떨쳐낼 수 있었다. 그는 한층 힘이 들어간 손으로 파리어와 손깍지를 끼고서 먼저 앞장섰다.


“자, 갑시다. 대위님 말씀대로 털실 공이라도 사 가야지요. 아무 수확도 없이 돌아가기엔 리더 볼 면목이 없잖아요?”

‘어쩌면 리더도 이런 상황을 예견하고 있었을지 모르지.’


문득 파리어의 머릿속으로 그런 생각이 스쳐갔으나,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성탄에의 기대로 소란스런 이 밤, 군중 속에 섞여 들어 맘 편히 데이트라도 하라고 내려준 선물이라고 생각하는 쪽이 마음이 편했으니.


다행히 싸구려 털실 뭉치는 당장 군수 보급품으로 우선 배정될 만큼 중요한 품목이 아니었던지(?) 잡화점 수 군데를 돌아다닌 끝에 필요한 개수를 맞출 수 있었다. 시커먼 군인 둘이서 할머니 한 분이 운영하는 소박한 뜨개질 가게에 들어가서 요란한 원색의 털실 뭉치를 한 아름 주문할 때는 퍽 어색하기도 했지만, 어쨌든 이리하여 두 사람은 일단 ‘심부름’ 나온 구색을 맞출 수 있었다.





종이봉투 한 아름, 색색의 털실 뭉치를 사이좋게 나눠 안고서 돌아가던 길이었다. 선반마다 텅텅 빈 곳이 많았던 장식 가게들과 다르게 아직 진열대에 넉넉히 재고가 남아있는 가게가 하나 있었다. 보석점이었다. 평소라면 별다른 흥정 없이 고고하게 진열만 하고 있었을 보석점도 확실히 불황이긴 한 건지 나름 유행에 발맞추어 눈에 띄는 광고판을 내놓고 있었다. 지문 자국 하나 없이 깨끗하게 닦인 진열장 위로 멋들어진 금색 글씨가 이목을 끌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그보다 작은 크기의 블루 다이아 반지도 함께 놓여 있었다.


진열장의 조명을 받아 반짝이는 다이아몬드는 평소 귀금속류에 별 관심을 두지 않던 두 군인의 시선도 붙잡아 끌만큼 아름다웠다. 어둠이 내린 밤의 거리에서 인공조명을 받아 새하얗게 빛나는 화이트 다이아는 확실히 큰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그 빛에 이끌리기라도 하듯, 젊은 장교가 먼저 홀린 듯이 진열장 앞으로 허리를 숙였다.


“예쁘네요.”

객관적인 평가 외에는 어떤 재촉이나 은근한 소망도 담기지 않은 담백한 감상이었다.

“그런데 엄청 비싸군요. 어디가 특가 판매라는 건지, 허참.”


반지 아래 작게 적힌 가격표를 보고서, 콜린스가 기가 찬 듯 ‘쯧’ 소리를 냈다. 어림잡아 계산해 봐도 소위 월급 일 년 치는 꼬박 모아야 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 그것도 할인가 주제에! ‘크리스마스의 관대한 가격 인하 물결도 보석점에까지 미치진 못했나보다’ 그렇게 생각면서, 콜린스는 괜히 바닥의 돌을 툭툭 쳤다.


그런데 그 작고 무의식적인 몸짓을 파리어의 예리한 시야는 놓치지 않았다. 그 순간 콜린스가 보인 행동은 마치 반짝이는 자갈을 보물창고로 가져가고는 싶은데 자기 부리로는 다 물 수 없어 실망한 까마귀 같았다. 심장 속 애정의 문고리를 살살 두드리는 마법 같았다고 해야 할까. 대위는 저도 모르게 슬쩍 풀어지려는 표정을 한 번 더 관리한 다음, 제법 무덤덤한 태도를 가장하여 물었다.


“왜, 하나 살까?”

“어허, 대위님 월급을 제가 다 꿰고 있는데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무리 크리스마스가 쇼핑의 계절이라지만 대위님까지 이런 소비의 마수에 걸려들면 안 되시지 말입니다. 미래를 위해서 우리 차곡차곡 적금이나 드십시다.”

“너나 나나 언제 죽을지 모르는 직업인데 미래 계획은 무슨. 갖고 싶으면 지금 사.”

“무슨 말씀을 그리 하십니까? 저는 끝까지 살아남아서 그 콧수염 파시스트 놈팡이 목도 따고, 그래서 버킹엄 궁에 가서 훈장도 받고, 그 훈장 팔아서 번 돈으로 전역하자마자 바로 사업장도 차릴 겁니다. 대위님은 적금 차곡차곡 모아 뒀다가 나중에 일시불로 돌려받아서 초기 자본금에 보태십쇼. 회계는 제가 맡을 테니까요! 상호도 생각해 놨습니다. 콜린스-파리어 주식회사. 후후.”


그렇게 말하는 콜린스의 표정은 제법 진지하고 의젓해 보였다. 대체 무슨 사업장을 차리겠다는 건지 업종을 밝히지도 않았으면서. 그래도 뭔가 그 조그마한 머리통으로 이것저것 구상해놓았다는 말만큼은 진심인 것 같았다. 파리어는 다만 콜린스가 구상한 그 미래 속에 자신도 함께 서 있다는 사실이 감사할 뿐이었다.


그렇게 크리스마스가 자아내는 희망의 분위기와 콜린스의 몸짓 하나 대사 하나로부터 전해지는 애정에 취해서, 연상의 남자는 좀처럼 하지 않던 제안을 내놓았다. 평소라면 쑥스러워서 말하지도 못했을 제안이었다.


“정 그러면 저기 작은 거, 저거는 어때?”

“파란색이요? 자고로 혼수로는 투명 다이아가 제일입니다, 대위님. 청혼하려면 그 정도 상식은 꿰고 계셔야죠. 패물로 갖고 있다가 비상시에 급전으로 바꾸기에 얼마나 유용한대요?”


손가락까지 까딱이며 그렇게 대꾸하는 콜린스 앞에서 결국 파리어는 껄껄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래, 네 마음대로 해라. 그래도 너한텐 청색이 어울려.”

“예에, 그러면 마침 제 임관반지가 사파이어니까 그거라도 열심히 끼고 다니겠습니다. 대위님도 귀찮다고 서랍에 던져두지 말고 잘 끼고 다니십쇼. 뭐, 알 사람은 이미 다 아는 것 같다만 그래도 서로 소유권 주장은 해야 지요……”


당차게 시작된 콜린스의 당부는 마지막엔 약간의 쑥스러움을 남기며 작은 소리로 줄어들었다. 용기 내서 사랑고백을 한 다음에는 주위를 흘낏 거리며 인적을 살핀다. 그리고 대담하게도, 대위의 남은 한 손을 잡아채더니 자기 코트 주머니 안으로 박력 있게 구겨 넣었다.


“다이아 반지는 없어도 됩니다. 그냥 앞으로도 내 곁에 있기만 하십쇼.”


훅 치고 들어오는 콜린스의 명령 같은 고백에 당황한 바람에, 파리어는 제때 재치 있는 말로 받아치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어리다고만 생각했는데, 후임한테 한 방 제대로 먹은 셈이었다. 그러나 분하진 않았다. 자존심이 상하지도 않았다. 다만, 자기보다 한 뼘 넓은 콜린스의 보폭을 따라 걷는 기분이 썩 나쁘진 않다는 감상을 어렴풋이 할 뿐이었다. 그렇게 파리어는 콜린스가 이끄는 대로 순순히 그 곁을 따라 걸었다.






돌아가는 길 내내, 평소 솔직한 감정 표현에 서툴던 대위의 입매 위로는 어릿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 시간 속에서, 그는 진열장으로부터 발을 돌리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콜린스 몰래 확인한 파란 다이아의 이름표를 떠올렸다.


<Regina ceoli, Stella Maris―하늘의 여왕, 바다의 별.>


그 청색 보석을 선물하고 싶다던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푸른색과 초록색이 뒤섞이고 그 뒤로 별의 환영이 어른거리는 보석은, 파리어가 보기에 진심으로 콜린스를 닮아 있었다. 프러시아의 검정 섞인 군청색도 아니고, 피비린내 나는 전장의 군복을 연상시키는 진청색도 아니다. 흐리고 회색 끼 도는 게르만 쪽색은 더욱 아니며 압생트처럼 불순한 초록이 섞인 비리디안도 아니다. 화이트 다이아의 화려함에 밀려나 그 옆에서 얌전히 주인을 기다리고 있던 작은 다이아몬드는, 선명한 아주르(Azur)와 밝은 청록 사이 어딘가의 빛깔이었다.


지중해의 옥색, 혹은 하늘과 바다의 경계를 구분하는 선명한 청색. 해양 비행을 하다가 원 그리듯 큰 회전을 시도할 때면 매번 마주치게 되는 광경이 하나 있다. 그런 대회전의 순간에는 수평선이 혼동되는 탓에 내가 지금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는지 아니면 바다를 향해 거꾸러지는지 알 수 없게 되기 십상이다. 오로지 계기판의 바늘을 보고서 위치를 가늠할 뿐이다. 그럴 때 조급한 마음으로 계기판의 고도를 확인하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저 멀리 시야를 옮기면, 서리가 껴서 흐릿해진 고글 너머로 비로소 한 색이 보인다. 변하지 않는 한 지표가 보인다. 바다의 별, 하늘과 바다 사이를 가르는 영원한 푸른 선, 하늘의 여왕. 마치 콜린스가 그러하듯이.  


‘그러니까 너한테는 푸른 다이아가 어울려.’
미처 하지 못한 말은 조용히 가슴에 품었다.


기지로 귀가하는 길에는 부쩍 차가워진 밤바람이 불었으나, 서로 딱 붙어 달리는 자전거 위에서는 서로의 체온이 추위도 녹여버렸다. 덕분에 두 사람은 세찬 겨울바람의 위협도 모르고서 오히려 나가기 전보다 따스해진 체온으로 귀가할 수 있었다. 리더 앞에 내려놓은 짐 봉투 안에는 색색의 털 뭉치가 한가득.


크리스마스가 코앞이었다.  









부족한 물자와 따라주지 않는 운에도 불구하고, F시 RAF 기지의 사람들은 제각각 재량을 발휘하여 남은 기간 동안 그럴 듯한 축제 준비를 착착 진행시켜갔다. 우선, 뒷산에 당장 침엽수림이 넘쳐나는데 천혜의 자원을 이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몇몇 사병과 장교가 톱을 들고 산을 오르더니, 금세 쓸만한 전나무 하나를 베어다 실내 강당에 떡하니 세워 놓았다. 정원용 가위로 삐져나온 가지를 잘라내고 삼각뿔 모양으로 태를 다듬으니, 나무는 제법 트리다운 티가 났다. 덩치와 크기가 조금 크다는 게 아쉽긴 했지만, 그 늠름한 자태를 보고서 트리 공수를 담당했던 장병들은 시판용보다 준엄하고 야성적인 자연의 멋이 느껴진다며 오히려 더 자랑스러워했다.


그렇게 준비된 전나무 가지 사이사이에는 포티스 팀이 사온 빨강, 초록, 금색의 털실을 공처럼 둘둘 말아 걸었고, 트리 위에 장식할 별은 파리어 대위가 직접 연병장 한 구석에 나뒹구는 나무토막을 조각해서 만들어 붙였다. 아무도 몰랐던 대위의 숨겨진 재능을 보고 모두가 놀라워했는데, 특히 별이 만들어지는 내내 옆을 기웃거리면서 구경하던 콜린스의 반응이 대단했다. 그는 뭉툭한 나무토막이 다섯 손가락을 가진 그럴 듯한 황금별로 변하는 것을 보고서 진심으로 감탄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대위의 어깨를 으쓱이게 했다.


트리와 강당 벽을 장식하는 데 필요한 호랑가시나무 관과 담쟁이 잎은 파리어가 작성한 권고를 따라, 근처 농장에서 빌려오거나 직접 기지 담장에 자라던 것을 서리해왔다. 삭막한 강당을 포근하고 화려한 댄스홀로 변신시키기 위해선 반짝이 전구와 종이 고리도 빼놓을 수 없다. 다가오는 새해부터는 군수성에서 포장이나 장식용으로 새 종이를 쓰는 것을 금지할 것이란 소식이 돌았기 때문에, 종이 고리와 선물 상자는 날짜가 지난 신문지를 모아 직접 초록, 빨강, 노랑으로 페인트칠을 해서 대신했다. 시커먼 장정들이 모여앉아 꼬물꼬물 신문지를 자르고 동그랗게 이어 붙이는 장면이 생소하긴 했지만, 그래도 썩 도란도란한 공작 시간이었다.  


마지막으로, 밤까지도 강당을 밝게 비추어 노래와 댄스 타임을 도와줄 전구와 전깃줄은 공병과에서 담당했다. 그들은 창고 안에 굴러다니던 하자 있는 전깃줄을 긁어모아서 다시 불을 살려내고, 그 위에 남는 셀로판지를 이어 붙여 제법 그럴 듯한 크리스마스 전구를 완성해냈다.


이렇게 여러 사람들이 입대 후에 (혹은 입대 전부터) 익힌 각자의 기술을 모아 재량껏 트리를 만들고 여타 장식을 준비하니, 그 과정을 구경하던 부대 전반의 분위기도 빠른 속도로 들뜨기 시작했다. 이브 전날―곧 축제 전날부터 F 기지의 분위기는 이미 크리스마스 축제를 제대로 즐겨줄 만반의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시내의 민간인들과 옆 기지의 여군들도 참석할지 모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모두가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리하여 이브 당일, 이른 저녁 식사를 마치고 댄스홀로 탈바꿈한 강당에 모인 장병들의 사기와 기대가 얼마나 하늘 높이 치솟았는지는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다들 짐작하리라 믿는다. 앞줄 의자에 나란히 앉아서 어서 위문 밴드의 공연이 시작되길 기다리는 파리어와 콜린스의 기분도 한껏 들떠 있었다.


“트리가 멋집니다, 파리어. 대위님 말대로 정말 어떻게든 파티를 열 수 있게 됐군요. 휴, 감회가 깊습니다.”

“음, 설마 하란다고 진짜 나무를 베어올 줄은 몰랐지. 지난 일주일은 다들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어. 연병장을 가나, 활주로를 가나, 심지어 장교 휴게실을 가도 오늘 축제와 댄스홀 얘기뿐이었다고.”

파리어의 무심한 말에 대해 콜린스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야, 크리스마스잖습니까! 크―리―스―마―스!”

“……너 정말 크리스마스를 좋아하는구나.”

지난 일 년 동안 어떻게 참은 건지 궁금해질 정도로, 콜린스는 평소와 다르게 몹시 기대에 들뜬 모습이었다.


‘입대한 이후로 온갖 어른스러운 흉내는 다 내고 다니더니, 사실은 이렇게 크리스마스를 좋아했단 말이지. 이러다가 산타도 믿는 거 아닌지 몰라.’


일 년 만에 발견한 연인의 새로운 취향이 놀랍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서, 파리어는 기분이 좋았다. 파리어 본인으로 말하자면, 크리스마스 때문에 들뜨기 보단, 들뜬 콜린스를 보는 것이 좋아서 덩달아 같이 들뜨는 느낌이었다. 그는 아직 텅 빈 밴드 무대를 열심히 주시하고 있는 콜린스의 뒷머리를 남몰래 슬슬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그런데 모두의 이 같은 기대를 배신하기라도 하듯, 초장부터 좋지 않은 소식이 들려왔다. 통신병 하나가 급히 달려오더니 사회를 맡은 병사에게 뭐라 다급히 속삭이는 것이었다. 그 얘기를 들은 사회자의 표정도 따라서 어두워졌다. 사회자는 눈을 꾹 감고서 단상 위로 올라 마이크를 잡았다. 마치 이내 자기한테 닥쳐올 전우들의 야유를 상상하기라도 하듯이.


“친애하는 전우 여러분, 오늘은 드디어 우리가 기다려온 축제의 날입니다! 다만…… 아쉬운 소식 한 가지를 먼저 전해드려야겠군요. 낮부터 쌓이기 시작한 눈 때문에 오늘 함께 이 자리를 빛내주기로 했던 F 시의 시민 여러분이 불참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그리고… WAAF(Women’s Auxiliary Air Force. 2차 대전기에 활동한 영 공군 여성 보조 부대) 민튼 기지의 여성 전우들도요……”


사회를 맡은 병사의 목소리가 개미소리만 하게 줄어드는 동시에, 강당 곳곳에서 경악과 좌절에 찬 야유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 한탄의 대부분은 F시의 민간인들에 대한 관심보다는 옆 기지 WAAF의 여성 전우들을 향해 있었다. 어디선가 다음과 같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안 돼, 춤이 없으면 무슨 재미로 이브를 보내라고!”

“우리가 뭣 때문에 이 주 동안 치약으로 복도 광을 냈는데!”

개중 좌절이 너무 깊었던 어느 병사는 거의 뭉크의 절규를 연상시키는 표정으로 울먹이며 호소했다.

“댄스를 줘! 우리에게 춤을 달라고! 우리한텐 춤이 필요해!”

“옳소, 춤과 노래가 없는 크리스마스가 무슨 크리스마스야! 가족도 애인도 없는 불쌍한 장병들에게 춤출 기회를 줘요!”


실망한 장병들―특히 아직 여자 친구나 약혼자가 없는 장병들의 호소가 강당 곳곳을 울렸다. 기껏 준비한 댄스홀의 정성스런 장식들이 빛을 잃는 듯했고, 우중충한 사내들 사이로는 과장된 울음소리가 메아리처럼 퍼졌다. 그 소동의 한 가운데 앉아 있던 파리어와 콜린스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볼 뿐이었다.


“대위님, 아무래도 병사들의 기대가 우리 예상보다 훨씬 높았던 모양입니다.”

“쯧, 꼭 능력 없는 것들이 질질 짜지.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콜린스. 신경 쓰지 말게.”

“그래도 노래가 없다는 건 확실히 아쉽습니다. 전 오늘을 대비해서 5년 치 캐롤 히트곡의 가사까지 모두 외워왔는데요……”


콜린스가 눈썹을 찌푸리며 칭얼거렸다. 급속도로 하강하기 시작하는 콜린스의 표정을 보고나서야 파리어도 사태의 심각함을 인식했다. 그는 급히 몸을 틀어 콜린스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이봐, 이게 무슨 유명 밴드 콘서트도 아니고;; 그냥 위문 공연단이 반주할 뿐인 동네 밴드야, 동네 밴드! 올라가서 일단 밴드라도 내보내라고 한 마디 하고 올까? 응? 그러면 좀 덜 아쉽겠어?”

“대위님, 제발 어디 가서 그렇게 계급 빨로 만사 해결하고 오지 좀 마십쇼…… 저 없는 새에 대위님이 무슨 일 저지르다가 영창 면회 가는 신세 될까봐 자다가도 몸을 사립니다, 제가.”

그러더니 콜린스는 기운 빠진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래도 역시 밴드라도 오면 좋을 것 같지 말입니다…… 캐롤이…… 노래가……”


이렇게 콜린스가 아닌 척 은근하게 소망을 토로하던 참이었다. 점점 거세져만 가는 장병들의 눈물의 호소 및 우왕좌왕하는 분위기 가운데, 다시 한 번 통신병이 소식을 들고 왔다. 그가 귓속말로 속삭인 메시지를 이해하자마자, 사회를 맡은 병사의 얼굴이 환하게 피었다. 그는 마치 구원 받은 신도처럼 우렁차게 웃으며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여러분, 여러분, 여러분! 너무 실망하지 마십시다. 비록 WAAF의 전우들은 없지만, 대신 오늘 이 자리를 빛내주기 위해 찾아온 런던 최고의 싱어―― 킹 브로스비 씨(*주2)를 소개합니다!”


한껏 과장된 사회자의 소개가 끝나는 것과 거의 동시에, 무대 위로 가지각색의 악기를 든 악단, 그리고 포스터나 신문 사진을 통해서 익히 보았던 인물이 강당으로 들이닥쳤다. 그들은 매우 익숙한 손놀림으로 소박한 무대 위에 뚝딱뚝딱 자리를 마련하더니, 순식간에 꽤 그럴 듯한 악기 세팅을 마쳤다. 병사들의 정신이 그 빠른 무대 세팅에 정신이 팔린 사이, 어느 새 사회자로부터 마이크를 넘겨받은 브로스비 씨는 능숙한 태도로 인사말을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자랑스러운 우리 공군 F부대 여러분. 여기 댄스홀로 들어오는데 저 멀리서부터 여러분의 슬픔에 찬 함성이 들리더군요. 비록 아름다운 여성 전우들은 없지만, 그렇다고 춤추지 말란 법은 없죠. 위로 차원에서 말하자면, 참고로 바로 어제 제가 들렀던 해군 함선에서는 근무 중이던 해군 병사 여러분이 직접 공연과, 무도회와, 댄스타임을 즐겼답니다! 무려 상병이 아름다운 아가씨로 분장한 뒤에 직접 대령님께 춤을 신청했다고요!(*주3)


상병이 대령에게 춤을 신청하다니 대체 어디까지 믿어도 될지 모를 얘기지만, 연륜 있는 가수의 근엄하고 진지한 선언을 듣고 있으려니 어쩐지 안 믿겨도 믿어야 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장병들이 의심 반 어리둥절함 반으로 주춤하는 사이, 악단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첫 번째 선곡의 전주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흥겹게 2박자로 시작되는 드럼 소리. 곧이어 고작 두어 명으로 구성된 소담한 코러스의 노랫소리가 울린다.


“Do you see what I see? A star, A star dancing in the night, with a tail as big as a kite, with a tail as big as a kite―”


그리고 곧 브로스비의 당찬 음색이 다음 가사를 이어 받는다. 사병 장교 할 것 없이 누구나 알고 있는 노래―<Do You Hear What I Hear?>이었다.





“지금 내가 듣는 이 소리, 여러분도 들리나요? 저 나무 높이서 울려 퍼지는, 바다만큼 대양만큼 커다란 목소리로 부르는 저 노래가, 여러분에게도 들리나요?”


2박자의 행진곡 리듬은 비단 춤추기 위해 작곡된 곡이 아니더라도, 듣고 있는 이의 발이 저절로 움직이게 하는 흥겨움을 지니고 있었다. 거기에 브로스비의 부드러움을 겸비한 클래식한 목소리가 더해지자, 선율은 마치 난로의 온기처럼 강당 구석구석으로 물결을 일으키며 퍼져나갔다. 그때까지 뚱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던 병사들조차 주위의 동료들이 하나 둘씩 가수의 선창을 따라 후렴구를 부르기 시작하니, 입 시늉이라도 내지 않을 수 없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노래에는 그렇게 전염 같은 힘이 있었다.


이런 상황 가운데 포티스 팀의 두 파일럿으로 말하자면, 콜린스는 이미 코러스의 첫 소절이 시작됐을 때부터 열심히 따라 부르는 참이었고 대위는 아직 쑥스러웠던지, 옆에서 엉덩이를 씰룩씰룩 흔들며 리듬까지 타는 중인 콜린스를 신기하게 곁눈질하는 것이 최대였다.


“Pray for peace people everywhere~ Listen to what I say~ The child, the child sleeping in the night~”

“너 너무 잘 따라 부른다.”

“미리 예습 하고 왔다니까요?”

콜린스는 행여 가사를 놓칠까봐 재빨리 대답한 다음, 코러스와 브로스비 씨를 따라서 마지막 가사를 열창하기에 이르렀다.

“He will bring us goodness and light, He will bring us goodness and ligh~~~~~~~~t!”


이렇게 열정적인 관객이 비단 콜린스만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 오늘 밤 축제의 주연을 맡은 브로스비 씨가 만족스러워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일단 죽어가던 장병들의 사기에 인공호흡을 불어넣었으니, 이제 필요한 다음 수순은 본격적인 댄스 타임이었다. 브로스비 씨는 악단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


“자, 아름답게 꾸민 댄스홀 가득 우중충하던 안개가 드디어 걷혔군요. 하지만 아직 부족해요, 부족합니다. 남은 안개를 몰아내줄 용감한 자원자가 필요해요. 가장 먼저 첫 댄스의 스타트를 끊어줄 오늘의 주연 없습니까? 없어요?”


여기서 브로스비 씨가 말하는 첫 댄스의 주연이란 당연히 F 기지의 장병 자원자 둘―그러니까 남자와 남자였다. 아무리 해군과 육군에서는 같은 남성 전우들끼리 흥을 돋울 겸 춤을 추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고 해도, 어쩐지 그보다 격식 있다는 이미지를 가진 RAF의 구성원들은 쉽사리 손 들 용기를 내지 못했다. 거부감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 한 번도 남자와 춤을 춰본 적이 없으니 대체 어떻게 춰야 할지 모르겠다고 해야 할까?


그 주춤거리는 망설임을 깨트린 것은 이번에도 브로스비 씨의 예리한 매의 눈이었다. 그는 노련한 가수 겸 공연 진행자답게 첫 노래를 부를 때부터 열심히 호응을 보여주었던 장병 하나하나의 얼굴을 빠짐없이 주시하고 있었고, 그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존재는 셋째 줄에 서서 그루브를 타던 한 장신의 금발 장교였다. 그는 외모도 흥도 어디 가서 절대 뒤지지 않을 것 같은 금발 장교를 향해 정확하게 손짓했다.


“자, 세 번째 줄에서 노래하던 금발 장교님. 스텝 밟던 솜씨가 예사롭지 않으시던데 첫 타자로 한 번 끊어주시죠?”


그렇게 말하며 브로스비 씨가 지그시 눈을 마주친 사람은 콜린스였다. 깜짝 놀란 콜린스가 뒤늦게 앞뒤 좌우를 돌아보며 다른 비슷한 금발 장교를 찾아보려 허둥댔지만, 안타깝게도 두 번째 줄부터 네 번째 줄을 채운 장병들 가운데 1)열심히 후렴을 따라 부르고 2)탭 댄스까지 밟았으며 3) 금발이기까지 한 장교는 콜린스 단 한 명뿐이었다.


“예? 아니, 전, 저는― 브로스비 씨, 저는―”


그러나 군중은 한 번 잡은 목표를 놓아줄 만큼 안일하지 않았다. 일단 희생자 한 명이 지목 당하자, 주위에 있던 다른 장병들이 덩달아 박수를 치며 부추기기 시작했다. 게다가 평소 콜린스와 친분이 깊던 다른 동료들이 다음과 같은 말로 연이어 쐐기를 박았다.


“이봐 콜린스, 자네 춤 실력이 그렇게 뛰어나다며?”

“시내 댄스홀을 섭렵한지 오래지, 아마.”

“저희한테도 좀 가르쳐 주십쇼, 소위님! 원래 첫 댄스는 무조건 베테랑이 끊는 거 아닙니까~”


사방에서 몰려드는 몰이사냥에 꼼짝 없이 붙잡힌 콜린스는 이미 무대 중앙으로 끌려가기 직전이었다.


“아니, 나보고 혼자서 뭐 어떻게 하라고? 브로스비 씨가 저랑 추시려고요?”

“음, 저는 밴드를 도와서 코러스를 넣어야 합니다. 어디 여기 용기 있는 소위님과 함께 희생해주실 분 안 계십니까?”


브로스비 씨가 의뭉스레 코러스 옆으로 걸음을 물리며 대답했다. 그리고 콜린스를 둘러싼 동료들을 향해 은근히 눈짓했다. 그는 육해공을 막론하고 온갖 종류의 부대에 순회공연을 다니면서, 어느 부대든 반드시 한 커플쯤은 단순한 전우애 이상의 관계를 맺는 병사들이 있다는 것을 경험으로 깨달은 사람이었다. 그런 그의 선견지명이 전해진 것일까? 어느 새 시끌시끌한 홀 사이에 숨어 들어와 있던 포티스 리더가 파리어의 뒷무릎을 툭 치며 권유했다.


“뭐 하나, 대위. 안 도와주고.”


파리어 입장에선, 그저 콜린스가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며 댄스홀의 중앙으로 몰려가는 상황을 보며 흐뭇하게 껄껄 웃고 있다가, 순식간에 기습을 받은 격이었다. 그것도 무시무시하게 영악하고 뒤끝 있는 여우로부터. 무려 포티스 팀 리더의 권고 아닌 권고, 그리고 그에 따른 파리어 대위의 당황 가득한 태도가 결정적 도화선이었다. 이내 주위에 있던 동료 장교들이 겁을 상실하고 파리어까지 홀 중앙으로 떠밀기 시작했다.


“파리어 대위님도 이참에 한 수 배우셔서 다음 외박 때 본 떼를 보여주시죠!”

“뭔 헛소리들이야, 얌마!”

“콜린스가 저래 뵈도 춤 하나로 시내 일대 아가씨랑 부인들 마음은 다 평정했지 말입니다.”

짬이 되는 장교들이 먼저 나서서 파리어를 콜린스 곁으로 떠밀자, 눈치만 보고 있던 사병들도 슬금슬금 눈을 반짝이며 파리어를 부추기는 데 동참했다.

“그러고 보니 파리어 대위님이 술 마시는 건 본 적 있어도, 춤추시는 건 본 적이 없습니다.”

“보고 싶습니다, 대위님! 보여 주십쇼!”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한 번 춰주라고, 파리어!”


파리어와 같은 계급의 대위가 낄낄대며 크게 박수를 북돋았을 즈음에는 이미 모든 상황이 종료된 후였다. 악단과 코러스는 이 날을 위해 편곡해 놓은 섹시한 스윙 재즈를 연주할 준비가 만반이었다. 스텝을 안내하는 리듬과, 주선율을 알리는 전주가 벌써 몇 번째 같은 마디를 반복하며 첫 지원자들을 재촉하고 있었다.


이들 동료 장교들, 친한 사병들, 악단과 브로스비 씨, 그리고 리더의 의도를 먼저 알아차린 쪽은 콜린스였다. 장난스럽게 등 떠미는 권고들, 일부러 자신과 파리어 두 사람을 지목한 것, 좀처럼 춤과 노래에는 관심이 없는 리더가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참견한 것까지. 입 밖으로 내어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으나, 모두의 의도는 명확했다. 그러니까 이건―일종의 암묵적인 승인인 셈이다. 둘의 관계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크리스마스의 이 들뜨고 풀어진 분위기를 빌어 건네는 간소한 선물. 소박하지만, 어떤 연인들에게는 결코 소박하지 않은 기회.


포티스 팀의 영리한 막내는 그 보이지 않는 선물을 모르고 지나칠 만큼 멍청하지 않았기에, 자기 코앞까지 들이밀어진 파리어와 눈이 마주친 순간 곧바로 그 기회를 잡아챘다. 그는 방금 전까지의 쑥스러워하던 모습을 치워버리고 당당하고 담담한 모습으로 파리어를 향해 한쪽 손을 내밀었다.


“첫 춤을 함께 할 수 있는 영광을 허락해주시겠습니까, 대위님?”


그럴듯하게 무릎까지 살짝 굽히는 콜린스의 정석적인 댄스 신청에, 주위에 있던 사병들이 환호를 보냈다. 그 중에서 두 사람의 관계를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나, 적어도 콜린스의 댄스 신청이 있자마자 얼른 자리를 비워 댄스홀 중앙에 넓게 빈 공간을 만들어준 사람들만은 비밀을 알고 있었으리라.


부대의 장교며 사병이 죄다 보는 앞에서 이렇게 대놓고 댄스 신청을 받아버린―그것도 콜린스한테서―파리어는 식은땀이 나는 손으로 지끈거리는 이마를 매만졌다. 그는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결국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난 남자랑 추는 재즈는 처음이라서 발 밟아도 모른다.”

파리어의 체념 섞인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콜린스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제가 여성 파트를 맡겠습니다! 대위님은 편하게 리드만 하십쇼!”


콜린스 소위의 우렁찬 외침이 주위에 몰려있던 장병들의 환호를 불러일으켰다. 곧 파리어와 콜린스를 둘러싸고 있던 인파가 널찍이 뒤로 물러나고, 순식간에 강당에는 두 사람이 휘젓고 다니기에 충분할만큼 널따란 공간이 마련되었다. 그때까지 계속해서 전주만 반복하고 있던 악단도 이제 본격적으로 흥을 타며 손수 편곡한 캐롤 곡 <God Rest Ye Merry Gentlemen>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물론 전통적인 마르카토의 정 박자 합창곡이 아닌, 끈적하고 농밀하게 편곡된 버전이었다. 그 색정적인 선율을 듣고서 파리어가 뒤늦게 허망한 표정을 지었으나, 열차는 이미 떠난 뒤다. 이렇게 된 이상 몇 번 안 춰본 스윙재즈의 스텝을 기억 속에서 쥐어짜내는 수밖에 없다. 나머지는 콜린스를 믿고서.


‘그런데 콜린스는 어디서 여성 파트를 배워서 그토록 자신 있게 나서는 거야?’


그 의문에 대한 답은 춤이 시작되자마자 곧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콜린스는 한 번도, 어머니 뱃속에서 나온 이후로 단 한 번도 여성 파트를 맡아서 춤을 춰본 적이 없었고, 그가 밟는 모든 스텝은 한 박자씩 느리거나, 비틀거리거나, 그도 아니면 파리어의 발을 밟기 일쑤였다. 안 그래도 재즈 댄스는 경험이 적어서 허둥지둥 거리는 파리어와 합쳐지니 우스꽝스러운 광경이 연출되었다. 옆에서 친한 동료들의 장난 섞인 훈수가 들려왔다.


“어이, 콜린스. 거기 동작이 너무 뻣뻣하잖아.”

“그러다 대위님 담 걸리시겠다. 작작해, 키다리!”

“아, 너희가 해보던가!!”

스윙 재즈에서 빠뜨릴 수 없는 여성 파트너의 점프 동작을 시도하다 발이 삐끗해서 미끄러진 콜린스가 억울한 듯이 소리쳤다. 춤과 노래 앞에서는 술 앞에서 만큼이나 뻔뻔해지는 콜린스도 이번엔 확실히 쪽이 팔렸는지, 겨우 제때 자기를 받아낸 파리어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서 몹시 민망해 했다.  




그래도 재밌었다. 땀이 흐르고, 경직됐던 근육이 풀리고, 맞잡은 두 손 너머로 체온을 느끼고. 회전하고, 스텝을 밟고, 점프했다가(이 부분은 여성 파트를 맡은 콜린스가 전적으로 담당했다) 내려와서, 다시 멀어짐과 당김을 반복하는 춤의 향연. 각 동작들의 열기가 차갑던 손끝을 녹이고 심장을 데워, 마침내 머리까지 도달하여 빙빙 도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파리어 또한 비로소 이 춤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네 번째 후렴구가 흐르는 동안, 그는 마지막 스텝을 밟으며 콜린스를 꽉 끌어안았다. 모두가 눈감아주는 상황이기에 벌일 수 있는 짓이었다. 대위는 가까워진 콜린스의 목덜미에 대고 속삭였다.


“크리스마스가 좋긴 좋네. 이런 선물도 받고.”

콜린스는 별처럼 환한 미소와, 남몰래 한 볼 키스로 대답을 대신했다.


댄스홀의 분위기는 어느 새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어 악단의 연주는 한결 더 구성지게 흐르고 리듬도 따라갈 수 없을 만큼 빨라진다. RAF 최초 남성 리딩 댄서들의 솜씨를 구경하던 사람들도 이젠 제각기 흥에 취해 노래를 제창하거나 혼자서, 둘이서, 혹은 세넷이서 각자의 춤을 즐긴다. 삭막한 강당이었던 댄스홀은 이제 아기별이 태어나던 첫날―그 최초의 밤으로 돌아가고, 곳곳에서 이 밤을 축복하는 합창이 울려 퍼진다. 위안과 기쁨의 송가가 움츠렸던 심장들을 녹여내며 사랑과 평화의 계절을 노래한다.  






O, tidings of comfort and joy, comfort and joy
O, tidings of comfort and joy
Let nothing you dismay
Let nothing you affright
O, tidings of comfort and joy


오, 안락과 기쁨의 소식, 안락과 기쁨의 소식이 들려요
오, 위안과 기쁨의 소식 있으니
어느 것에도 실망하지 말고
어느 것에도 두려워 떨지 말아요
오, 기쁘고 평안한 소식이 있을 테니!




그렇게 모두가 파티의 마지막 잔열에 취한 사이, 한 쌍의 연인이 인파를 헤치고 아직 찬바람이 부는 바깥으로 몰래 사라졌다.



* * * 





“하아, 숨차서 죽는 줄 알았네. 마지막엔 진짜 너무 빠르지 않았어요? 저 다리 부러지는 줄.”

“그런 것 치고는 네가 먼저 흥분해서 열심히 추던 걸.”

“모처럼 기회를 잡았는데 놓치면 포티스 팀의 명성에 흠 가잖습니까. 자, 우리는 자축해야 해요, 파리어. 오늘밤 우리는 RAF의 누구보다도 멋지고 훌륭한 춤을 췄다고요. 이전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우릴 뛰어넘을 리딩 댄서는 없을 겁니다.”

“그래, 그래…… 덕분에 간만에 팔 운동 하느라 근육이 푹푹 쑤신다. 너 받아내느라 담 걸렸어.”

아까 콜린스의 동료가 했던 말을 그대로 되돌려주자, 콜린스가 웃으면서 장난스레 파리어의 팔을 퍽퍽 쳤다.

“진짜 담 걸리면 제가 마사지 해드릴 테니까 걱정 마십쇼.”


그렇게 말한 뒤, 콜린스는 천막이 덧씌워진 볏짚 위로 털썩 드러누웠다. 두 사람이 타인의 시선을 피해 몰래 만나야 할 때면 늘 찾는, 버려진 판잣집 (혹은 막사)였다. 기지 본부에서는 약 500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낡은 건물이었는데, 지난 대전쟁 때 막사로 사용됐던 것이 아직까지 철거되지 않고 남아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힌 곳이었다. 밀회 장소로는 제격이었다.


이젠 몇 번이나 찾아와서 익숙해진 그 밀회 장소에서, 콜린스는 모처럼 긴장을 풀고 푸근하게 이브의 마지막 밤을 즐기고 있었다. 동료들로부터의 암묵적인 인정, 그 고마운 선물. 혹시 공습이라든지 바빠지는 작전 투입 때문에 앞으로 일 년 치 댄스가 전부 금지된다고 해도, 오늘 밤 파리어와의 댄스를 추억 삼아 버틸 수 있을 만큼 만족스러운 밤이었다.


그렇게 콜린스가 아직 채 가라앉지 않은 열기를 삭히고 있는 사이, 옆에 앉아 있던 파리어는 외투 안쪽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안쪽 주머니 중에서도 가장 깊은 곳에 넣어놨는지, 좀처럼 나오질 않는 물건을 찾아 그는 무스탕 안쪽을 탈탈 털듯이 뒤졌다.


“뭐 하십니까?”

“음, 잠깐만.”


나중에는 아예 입고 있던 무스탕을 훅 벗어서 천막 위에 대고 손바닥으로 탁탁 두드리기를 서슴지 않았다.


“뭘 찾는데요?”

“아니, 내가 분명 여기에 잘 넣어뒀는데. 혹시 떨어트릴까봐 지퍼로 잠가서 확실히 넣어뒀는데. 춤을 너무 격렬하게 추느라 안에서 지가 알아서 움직였나봐.”

“뭘 넣어놨길래 그렇게 깊이 숨겨놨어요? 어디 이리 한 번 줘보세요.”


살짝 답답해진 콜린스가 손을 뻗어 무스탕을 건네받으려고 할 때였다. 내민 손끝이 닿기 전에, 파리어의 혼잣말이 먼저 터져 나왔다.


“찾았다.”

그 중후한 비음에는 안도감이 감돌고 있었다.  


주머니 안을 뒤지고 뒤져 마침내 파리어가 찾아낸 것은 작은 검은색 상자였다. 그리고 벨벳으로 마감한 그 작은 상자를 본 순간부터, 콜린스는 마법처럼 입이 다물리는 것을 느꼈다.  


대위는 짚 위에서 무스탕과 한 바탕 씨름을 하느라 흐트러졌던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다음, 구부렸던 몸을 곧게 폈다. 그리고 흐트러진 자세로 앉아 있던 콜린스 앞에 정중하게 무릎을 꿇으며 시선을 맞췄다. 그가 왼손으로는 조심스레 상자를 받쳐 들고 오른손으로는 그 뚜껑을 살며시 열었을 때, 설원처럼 하얗게 짜인 공단 위로 반짝이며 모습을 드러낸 것은 푸른 다이아몬드였다. 포근한 재질의 공단 위에서 지중해의 온화한 청색을 닮은 반지가 살포시 반짝이고 있었다.


“대위님, 이거―”


섬세하게 세공된 바다의 별은 헛간 사이로 스며드는 달빛을 받아 사방으로 깊고 부드러운 빛을 반사했다. 중지에 끼우면 손가락 위로 깊고 짙은 한 가닥 수평선이 떠오른 것처럼 보일 것이 분명한 그 반지는, 둥근 곡선 형태로 주조 된 백금 위에 밝은 청색의 다이아몬드가 별무리처럼 세공된 생김새였다. 단아한 디자인이지만 결코 적지 않은 정성이 깃들었을 그 반지를 눈앞에 두고, 콜린스는 쉽사리 손을 움직이거나 입을 열 수 없었다. 입술만 달싹이고 있는 콜린스를 대신해서 왼손 중지에 그 고리를 끼워준 사람은 파리어였다.


그는 행여 길고 곧게 뻗은 연인의 손가락에 상처가 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 조심스럽게 고리를 밀어 넣었다. 그렇게 선사한 반지는 처음부터 한 사람을 위해 만들어지기라도 한 마냥 콜린스에게 딱 맞았다. 오랜 기간 조종간을 잡은 탓에, 또 거친 훈련을 반복하는 직업 탓에 관절이 불거지고 거칠어지기도 한 사내의 손가락인데, 어쩐 일인지 백금의 곡선 테두리는 걸리적거리는 일 하나 없이 어린 장교의 손가락 위로 미끄러지듯 매끄럽게 들어맞았다.


“너한테는 푸른 다이아가 어울려.”


말을 잇지 못하는 연인을 대신해서 파리어가 말했다. 그는 콜린스의 거칠지만 하얀 손가락 위에 끼워진 푸른 보석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구름을 헤치고 날아가다가 마주치게 되는 수평선, 파랗게 주름진 벨벳 같은 파도―하늘 위에서만 볼 수 있었던 그 푸른빛깔이 이제 지상으로 내려와 빛을 발하고 있었다. 눈앞에서, 콜린스의 손 안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직접 끼워준 반지를 닿을 듯 말 듯, 조심스럽고 긴장된 손길로 스치듯 어루만졌다.


“정말로 너한테는 푸른 다이아가 어울려. 그거 아나? 이 다이아 이름이 ‘바다의 별’이라더군. 그 이름표를 보았을 때부터 계속, 계속 네 생각을 했어. 잊히지가 않더라고.”


고해처럼 읊조리는 파리어의 고백이 끝났을 때, 콜린스는 어느 새 맞닿은 그의 손을 힘주어 잡고 있었다. 세차게 잡아오는 손길에 파리어가 깜짝 놀라서 손을 뒤로 물리려고 했을 때는, 오히려 오른손까지 합세해서 도망치지 못하도록 양손으로 꼭 잡아버렸다.


“파리어, 정말…… 이렇게 사람 심장을 들었다 놨다 하시면 어쩝니까. 나한테 어울린다고 이렇게 비싼 거 덥석 사 버리고.”

“적금 들 만큼은 남겨뒀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파리어가 싱글거리는 얼굴로 대답했다. 콜린스는 그 웃음이 사랑스럽기도 하고 기가 차기도 해서 한 번 더 툴툴거렸다.


“지금 저한테 청혼하시는 겁니까?”

“정확해.”

“그렇담 결혼반지는 둘이어야 하지 않습니까? 대위님이랑 저랑 하나씩 나눠 껴야 맞는 거 아닙니까.”


그러자 파리어의 안색이 미처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다는 듯 하얗게 질렸다. ‘콜린스에게 어울리는 푸른 다이아를 준비해서 이브 날 멋지게 청혼한다.’ 타고난 파일럿답게 한 가지 목표를 설정한 다음에는 그것을 실현하는 데 정신이 팔려서, 그는 미처 자기 몫의 반지도 있어야 한다는 점을 잊고 말았던 것이다.


“으음, 그, 그럼 나머지 하나는 내 연금을 당겨 받으면 그때 사는 걸로……”

눈알을 굴리며 그렇게 말하는 파리어를 향해, 콜린스는 단호하게 끊어냈다.

“안 됩니다. 연금은 일시불로 받아서 콜린스-파리어 주식회사를 세우는 데 사용하기로 했잖습니까. 대위님은 일단……이 반지를 끼고 다니십쇼.”


그러면서 콜린스가 파리어의 손 안에 쥐어준 것은 자기 몫의 사파이어 임관반지였다. 블루 다이아만은 못해도 청색에 있어서만큼은 비견할 데 없는 임관반지는, 체인을 달아 목에 걸고 다니면 제법 근사한 서약의 증표가 될 법 했다. 밴드 부분의 지름이 파리어의 손가락보다 약간 작아서 당장 끼워줄 수 없다는 것이 아쉽긴 하지만, 조만간 보석점에 맡겨서 새로 밴드를 맞추면 될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콜린스는 자신의 왼손에 끼워진 블루 다이아몬드와 파리어의 손바닥 위에 놓인 사파이어 반지―자신의 옛 임관반지―를 애틋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대위님 몫의 제대로 된 반지는 제가 전역하면 꼭 성공해서 귀한 걸로 모셔올 테니까, 그때까진 아쉬워도 이걸로 만족하셔야 해요. 그러니까―”

한참 말을 고르던 콜린스가 결국 내뱉은 말은, 늘 하던 그 말이었다.


“그러니까 그때까지… 아니, 앞으로도 내 곁에 있기만 하십쇼.”

그 진심 어린 당부 앞에서, 파리어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쑥스러워하는 얼굴로 옅게 미소지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콜린스.”



사랑과 평화의 계절이니까. 그러니
메리 크리스마스, 콜린스. 메리 크리스마스, 파리어.





1939년 12월, 성탄 전야의 일이었다.








<끝>


†본문에 삽입된 캐롤 세 곡은 시대 고증을 날린 제가 좋아하는 캐롤들입니다(...)

<Silver Bells>는 1950년에 레코딩 한 Bing Crosby와 Carol Richards의 듀엣 버전. 

<Do You Hear What I Hear?>는 1965년에 리메이크된 Andy Williams 버전. 

<God Rest Ye Merry Gentlemen>은 2016년에 안드라 데이(Andra Day)가 재즈로 리메이크한 버전입니다. 

기타 본문에 언급된 캐롤들은 다음 사이트에서 1930년대 영국에서 유행한 캐롤 열 가지를 참고했습니다.  참고로 이때도 징글벨과 We Wish You a Merry Christmas가 제일 인기있었더라구요 :) 





주1)  히틀러가 기존의 단치히 자유시 협정을 무시하고 무단으로 폴란드―슬로바키아를 침공함에 따라, 영국과 프랑스는 사전에 맺은 對독일 협약에 따라서 1939년 9월 3일, 공식적으로 독일에 대한 전쟁을 선포한다. 이 글은 전쟁 발발로부터 약 삼 개월 후인 1939년 12월의 크리스마스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주2)  2차 대전기 전후로 활발하게 활동한 미국의 대중가수 빙 크로스비(Bing Crosby)의 패러디. 그의 클래식하면서 부드러운 목소리, 재즈를 접목한 캐롤 곡은 전쟁 기간은 물론 그 후를 아울러 큰 인기를 끌었다. 빙 크로스비가 39년 한창 전쟁 중인 영국에 위문 공연을 왔을 리가 없으니, 킹 브로스비는 당연히 가상의 인물이다.

주3) 육군 수송선 위에서 벌어진 축제 중에, 여장한 상병이 벌레스크 댄스를 멋지게 소화해서 모두의 환호를 받고, 그 공연을 구경하던 대령에게까지 장난의 키스를 날렸다는 일화는 다음의 책을 참고 했다. 2차대전기 북아프리카 전선으로 파견된 미군(GI)을 따라 참전했던 종군기자 어니 파일(Ernie Pyle)의 저서 <Here Is Your War> 1장, 8쪽~9쪽에 나오는 이야기다. 

"(전략) (수송선 위에서의 쇼는) 끝내주게 진행됐다. (...) 그렇지만 그 날 저녁의 영웅은 역시 스트립 벌레스크 배우 집시 로즈 리로 분장한, 브루클린 출신의 털투성이 상병 조 코미타였다. 코미타 상병의 동작은 그야말로 천재적이었다. 실제 집시 로즈 리가 왔다고 하더라도 그보다 더 농염하게 추진 못했을 것이다. 조는 몸을 배배 꼬다가 살짝 벗고, 또 한 번 배배 꼬다가 살짝 더 벗기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기다란 군복 바지 하나밖에 남지 않게 되었을 때, 무대 전면으로 나가 베일을 걷어내고, 첫째 줄에 앉아있던 대머리 대령의 이마 위에 쪽 입맞춤을 날렸다!"


+) 2차대전기 영국군 내에서의 동성애 묵인 사례, 종전 후 영국 사회의 반 동성애 정서 악화 현상, 2차 대전기 영국인들의 크리스마스 준비 등과 관련된 이야기는 나중에 따로 후기로 모아 작성해보려고 합니다. 


불안과 좌절 속에서 쓰고, 완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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