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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어콜린스] 콩깍지와 편견 D

여전히 파리어는 나오지 않습니다..

* 원래 결말까지 쓴 후에 한꺼번에 올리려고 했는데, 너무 오래 아무 것도 올리지 않은 것 같아서 나눠서 올립니다. ....... 지긋지긋한 인생..... 

* 약간의 로우든 수염 페티쉬, 오리지널캐 주의 (조연)  





10. 수염

 

요 근래 비긴 힐의 활주로는 스물 네 시간 잠들지 않는 요새나 다름없다. 하루가 멀다 하고 파도처럼 차례로 밀려드는 적기의 행렬, 밤낮을 가리지 않고 돌아가는 레이더 탐지기의 알람. 빈번한 출격만큼 낙오되는 아군도 넘쳐난다. 남은 몫은 운 좋게 목숨을 부지한 소수의 생존자들에게 돌아갔다. 항시 인력 부족 상태인 지휘부는 무리한 명령인 줄을 알면서도 한 줌 밖에 안 되는 남은 군인들을 가루가 될 만큼 갈아 넣었다. 그날 몰리 병장이 늦은 시간까지 활주로에 남아 대기를 하고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도로 곳곳에는 불과 몇 시간 전에 적군의 공습이 스치고 간 흔적이 생생히 남아있었다. 병사식당이 불타고 대기실 몇몇이 파괴되는 손실을 입었으나, 가장 중요한 활주로는 헌신적인 병사들의 노력 덕분에 금세 복구되었다. 불길이 꺼지고 그을음만 드문드문 남은 그 언덕 위에서 몰리 병장은 자신의 담당기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마지막 조종사가 돌아오기 전까지 정비병은 잠들지 못한다. 몰리는 어둑어둑해지는 하늘 어딘가에서 익숙한 유선형의 동체가 나타나기를 하염없이 기다렸다.

마지막 빛이 지평선 너머로 가라앉기 직전, 바로 그 순간에 공중에서 익숙한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 마법처럼 불현 듯 모습을 드러낸 비행기는 다리를 저는 불구처럼 비틀비틀 땅으로 내려오려 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꼬리 한쪽 끝에 실처럼 가느다란 연기가 달라붙어 있다. 그 안에 누가 타고 있는지 알고 있는 몰리 병장은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모르는 사람이 타고 있어도 아군 마크를 달고 있는 이상 무사히 착륙해야 한다.

몇 번의 아슬아슬한 착륙 시도 끝에 마침내 비행기는 비상활주로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병장은 활주로로 달려갔다. 기진맥진해 있을 승무원을 어서 끌어내야 했다. 그러나 조종석 안을 들여다 본 병장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위험한 곡예 끝에 항공기를 착륙시킨 그의 조종사는 상반신을 계기판 위에 기대고 엎어져 있었다. 순간 죽은 줄 알고 긴장했지만, 잠시 후 색색 움직이는 조종사의 등을 보고서야 그가 살아있다는 걸 깨달았다. 조종사는 단지 잠을 자고 있을 뿐이었다. 엔진이 시끄럽게 돌아가는 와중에 새근새근, 커다란 구명조끼가 삐거덕거리는 것도 모르고서.

맥이 탁 풀린 몰리 병장은 노란 뒤통수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문득 옛 일이 떠오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멈출 줄 모르는 기관차 같던 사람이었는데, 그에게도 하루에도 수차례씩 이어지는 출격은 지치는 일이었던 것이다. 농담 삼아 콜핏파이어라고 놀렸던 시절이 아득히 멀게 느껴졌다. 불과 몇 달 밖에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다. 좁은 콕핏 안에서 하루를 다 보낸 사람에게 조금 더 휴식을 주고 싶었지만, 꼬리에 가느다랗게 달라붙은 연기가 언제 큰 사고로 번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몰리는 계기판 위에 색색 엎드린 중위를 흔들어 깨웠다.

“중위님, 콜린스 중위님. 그만 일어나세요. 여기 계속 있으시면 위험합니다.”

거인이 잠에서 깨듯 콜린스 중위는 무겁고 느릿한 몸짓으로 일어났다. 그는 수마를 떨치려는 듯 천천히 눈을 깜박거렸다. 기다란 속눈썹이 피로의 무게에 짓눌려 힘없이 아래로 늘어졌다. 조종사는 거뭇거뭇해진 눈 밑을 거칠게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잠 온다……”

억양이 잔뜩 섞인 목소리가 평소보다 한참 지쳐있었다. 혹사당한 파일럿의 처지란 그런 것이다. 착륙과 귀환 사이, 짧게나마 계기판에 엎드려 잠을 청하는 것. 몰리 병장은 말없이 기체에서 내리는 콜린스를 부축했다. 돌아오는 길은 유달리 쓸쓸했다.

 

돌아온 콜린스가 달고 온 것은 눈 그늘만이 아니었다. 이틀 가까이 면도를 못 하는 바람에 턱밑에 까슬까슬한 잔디가 자랐다. 몰리 장병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그를 가리켰다.

“앗, 중위님 수염 나셨네요.”

콜린스는 졸린 눈을 아리까리하게 깜빡이더니, 턱에 꽂히는 시선을 느꼈는지 이내 어색하게 턱을 긁적였다.

“아도 아닌데 그럼 수염이 나지. 뭐 신기하다고.”

그렇게 말했지만 그 역시 까슬까슬한 턱 밑을 만져보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위생 상, 그리고 미관 상 꼬박꼬박 면도를 했기 때문에 항상 만질만질했는데 언제 이렇게 자란 걸까? 마지막으로 면도칼을 든 지 이틀은 족히 지난 것 같다. 전쟁터에서는 시간이 너무 빠르게 흘렀다.

병장은 빛을 받아서 반짝거리는 수염을 한참 구경하더니 툭 던졌다.

“중위님은 수염 안 나시는 줄 알았습니다.”

콜린스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뭐 임마. 내 털이 얼마나 복슬복슬한데. 만지면 강새이 같다. 봐라, 복실복실허지. 복실복실.”

머리털도 복슬복슬, 수염도 복슬복슬이야. 그는 보란 듯 파스스 날리는 머리털과 수염을 문지르면서 말했다. 두 손으로 동시에 부비니까 안 그래도 둥글둥글한 얼굴에 삐쭉빼쭉 난 머리털과 수염이 꼭 복숭아 솜털처럼 보였다. 병장은 결국 푸핫 웃음을 터뜨렸다.

“민숭아에서 털숭아로 별명 바꾸셔야겠습니다.”

“흐흠. 복숭아는 털 난 게 달고 맛있지.”

색도 불그스름해서 조금 더 기르면 구두 솔 같을 거라며 농담을 주고받는 사이, 콜린스의 기억은 서서히 과거를 헤맸다.

비슷한 얘기를 한 사람이 있었다.

‘넌 수염도 황금색일 줄 알았어.’

쌀쌀한 어느 날 아침에 나란히 이불을 덮고 누워있던 파리어가 문득 중얼거렸다. 한껏 체력 소모를 한 직후라 노곤하던 참이었다. 콜린스는 촉촉한 기분에 취해서 베개 속에 잔뜩 파묻혀 있다가, 생뚱맞은 파리어의 말을 듣고서 그제야 스윽 눈을 돌렸다.

‘무슨 소림니까 그기.’

파리어는 잔디가 자란 콜린스의 턱을 가리키며 말했다.

‘팔도 가슴도 빛바랜 것처럼 노란색이잖아. 여기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살살 턱밑을 간질이던 손이 가슴으로 내려갔다. 가슴의 체모가 땀에 젖어서 부드럽게 곱슬거렸다. 옅은 빛에도 모래알처럼 잘게 반짝이는 가슴팍을 딱딱한 손이 부드럽게 쓸어내린다. 다섯 개의 손가락은 실 같은 수풀만 쓸고 지나가지 않고 촉촉하게 젖은 살결도 함께 쓸고 지나갔다. 식었던 피부가 다시 뜨끈하게 달아오르려는 순간이었다. 콜린스는 목덜미를 붉히며 투덜거렸다.

‘소름 돋습니더. 그만 하이소.’

그렇지만 밀어내진 않았다. 자신감을 얻었는지 파리어는 더욱 집요하게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손을 펴서 가슴 위를 훑으면 부들부들하고 하얀 털들이 닿을 듯 말 듯 손바닥을 스쳤다. 그는 홀린 듯이 한참을 그러고 놀았다.

‘음…… 생각보다 더 부드러워. 그래, 꼭 푸들을 쓰다듬는 것처럼―’

‘개털 같다고예?’

‘……’

우리 똑똑한 대이님은 왜 비유만 하면 실패하실까나. 콜린스는 조용해진 파리어를 한 번 지긋이 쳐다봐준 다음, 가슴 위에 얹혀 있던 파리어의 팔을 끌어당겼다. 팔 이곳저곳에는 큼직하고 투박한 문신이 그려져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아래쪽에 밤색 빛이 도는 체모가 나 있었다. 콜린스는 문신이 가득한 파리어의 팔과 하얀 자기 팔을 나란히 놓고서 가까이 들여다보았다. 나는 노란 팔, 노란 가슴. 대이님은 밤색 팔, 밤색 가슴.

‘지가 쪼금 더 멀겋긴 하네예. 대이님 팔은, 응, 낙서하느라 껌껌하고예.’

‘그러니까 수염도 황금색일 줄 알았다니까. 그런데 주홍빛이네.’

‘수염까지 빤딱빤딱하면 좀 비리비리~해보이지 않겠슴니꺼? 스코틀랜드 사람들 수염은 원래 울긋불긋함니더. 물론 당근이라고 놀리면 혼쭐을 내줄 것이지마는……’

콜린스가 이마를 찌그리며 말을 줄였다. 그리고 고향집 사람들도 다 이런 색이었던 것 같다고 덧붙이며, 갸름한 턱을 우물거렸다. 덩달아 자그락자그락 흔들리는 짧은 턱수염에 파리어의 시선이 꽂혀 들었다. 그는 우유처럼 흰 피부 위로 점점이 돋은 주홍빛 잔디를 넋 놓고 바라보다가, 이내 입을 맞췄다. 입술을 맞대는 평범한 키스로 시작했던 행동은 입술 아래쪽을 빨아들이고, 혀를 내밀어 핥고, 간질이다가 서서히 질척한 입맞춤으로 변해갔다. 몰캉한 혀가 수염 난 아래턱을 간질이던 순간. 콜린스는 그 순간을 회상했다.

‘좀 근지럽긴 해도 좋았는데.’

그런 날이 있었다.




11. 천직

 

개전 삼년 째 되던 해에는 훈장을 받았다. 버킹엄궁전 안으로 들어가 보기는 태어나서 처음 겪는 경험이었다. 소수의 사람들만이 입회한 알현실에서 국왕이 직접 훈장을 수여했다. 조지 6세가 손수 콜린스 앞까지 다가와서 오른쪽 가슴에 메달을 달아주었다. 그 순간 어떤 기분이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철제 브로치의 무게가 생각보다 무거웠단 정도만 떠오른다.

궁을 벗어나자마자 콜린스는 가슴팍에 달린 십자 훈장을 햇빛 아래서 이리저리 비춰보았다. 네모난 십자가에 은을 도금한 메달은 화려했다. 특히 돋을새김으로 새긴 D.F.C 세 글자가 번쩍번쩍 빛났다. <공군수훈 십자훈장>이라니, 부담스러울만치 거창한 이름이다. 최근 새로 얻은 대위 호칭도 아직 귀에 익지 않은 그에게는 모든 것이 얼떨떨하게만 느껴졌다. 지난 3년 간은 시간이 너무 빠르게 흘러서 마치 급류에 떠밀려 살아가는 기분이었다. 이젠 또 어디로 흘러가는 걸까?

상념에 빠져있던 콜린스를 깨워낸 것은 몰리 상사였다. 그도 콜린스를 따라 부사관으로 진급한 참이었다. 그는 콜린스보다도 더 들떠서 호들갑을 떨었다.

“축하드립니다 대위님! 소감 한 마디 들려주시죠. 어릴 때부터 장래희망은 역시 조국을 위해 헌신하는 군인?”

“마. 시끄럽다.”

콜린스는 무뚝뚝한 얼굴로 대꾸했다.

“육군 가기 싫어서 자원입대한건데.”

“예?”

대위는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꾸물거렸다.

“육군으로 가면 월급도 쥐꼬리만큼 주고 밥도 맛 읎고. 퀴퀴한 참호에 갇혀서 벼룩이랑 낮잠 자야 되잖아. 그기 싫어서 끌려가기 전에 공군으로 자원한 거라고.”

말인즉 본격적으로 육군 징병이 실시되기 전에 차라리 밥 잘 주고 잠이라도 잘 재우는 공군으로 일찌감치 들어왔다는 소리였다. 막연하게 역전의 에이스라면 소년시절부터 전투기 조종사를 꿈꾸고 뼛속까지 타고난 군인일 거라고 상상했던 몰리 상사는 조금 놀랐다.

“의외네요. 대위님이랑 파리어 대위님은 태어날 때부터 군모 쓰고 나오셨을 것만 같았는데요.”

콜린스는 그 순진한 상상이 귀엽다는 듯이 허허 웃었다.

“뼛속까지 군인은 무슨. 내는 아직도 내가 새벽 같이 일어난다는 게 믿기질 않아야. 첨 들어왔을 땐 아침 점호에 머리에 둥지 하나 틀고 왔다고 선배들한테 엄청 깨졌어야. 세상에 타고나는 군인이 어디 있나? 다 만들어지는 거제. 마침 수리 좀 잘 하고 운동신경도 되고 그러니까……”

그리고 상사의 어깨를 툭 치며 궁시렁거린다.

“그리고 역전의 용사는 무신. 부정 타는 소리 마라. 기껏 붙은 운도 떨어진다.”

“그래도 켄필드 소령님이랑 파리어 대위님이 보시면 자랑스러워할 겁니다.”

“……그렇겠제.”

마지못한 단답을 끝으로 콜린스는 입을 꾹 다물었다. 순번도 모르고 상관을 둘이나 앞지르는 만용을 저질렀건만 정작 툴툴거릴 사람들이 남아있지 않았다. 문득 콜린스는 훈장을 만지작거리다 말고 불쑥 입을 열었다.

“전쟁만 끝나면 곧장 전역할끼다. 내는 말뚝 안 박아.”

에이스 칭호에 공로훈장까지 받았으니 그만 후방으로 물러나 교관으로 재직한다는 선택지도 있을 터였다. 그 진로야말로 안전과 명예를 모두 얻을 수 있는 최적의 선택이기에, 실제로 많은 에이스들이 으레 그 수순을 따르고는 했다. 그러나 콜린스는 단호하게 고집을 부렸다. 확고하게 전역을 고집하는 그런 태도를 보고서, 몰리 상사는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

“결혼이라도 하시려고요?”

“인연이 닿으면 하겠지야.”

정작 그 인연이라고 철썩 같이 믿었던 사람이 돌아올 줄 모른다는 건 혼자 간직해야 할 비밀이다. 더 이상 껄끄러운 질문이 들어오기 전에 콜린스는 다른 쪽으로 화제를 돌렸다.

“니는 어때. 제수씨는 잘 계시나?”

“사실은 돌아오는 새해에 아이랑 같이 올 겁니다. 제가 못 가는 대신 가족들이 여기로 오기로 했습니다. 신년인데 같이 지내야지요.”

어느 새 호그머네이(Hogmanay)가 돌아온 것이다. 시간관념이 무뎌졌던 콜린스는 놀라서 되물었다.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던가?”

“일 년이 참 빠르게 지나죠?”

“으응.”

싱숭생숭한 바람이 가슴을 스치고 지나간다. 분명 이맘때쯤에 같이 하자고 그와 약속했던 일이 있는 것도 같은데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분명, 분명히 약속이 있었는데. 중요한 약속이……. 콜린스는 침울한 망상을 떨치려 고개를 휘휘 저었다.

“제수씨 오면 식사라도 같이 하지. 내도 이번에는 휴가 안 나갈 것 같아.”

“앗, 정말이십니까?”

“그럼 내가 거짓말하겠나. 한 턱 낼게. 몸만 와.”

“미리 감사드립니다, 대위님!”

히히 웃는 상사의 머리를 콜린스는 잔뜩 흐트러뜨렸다. 그래, 아무도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홀로 명절을 견디기에 겨울은 너무 쓸쓸하니까. 쇠약해진 자기 심지를 못 본 듯, 그는 눈을 감았다.

 


12. 아저씨와 로몬드 호수

 

그해 섣달그믐에는 정말로 몰리 가족이 기지를 방문했다. 몰리 부인은 남편을 닮아 상냥하고 밝은 사람이었고, 네 살이 됐다는 아들도 볼이 빨간 사랑스러운 소년이었다. 아이는 뭐가 그리 부끄러운지 엄마 다리를 꼭 붙잡고서 몸을 숨겼다. 부인은 낯을 가리는 아이를 채근하며 콜린스에게 웃으며 말했다.

“대위님이 너무 잘생기셔서 애가 부끄럽나봐요.”

“하 하 하 ……”

군대에서야 동료들과 내 얼굴이 잘났다며 으스대기 십상이었지만, 막상 오랜만에 여성한테서 외모에 관련된 칭찬을 들으니까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콜린스는 일부러 나서서 아이를 돌봐주겠다고 나섰다.

“모처럼 두 분이서 회포라도 푸셔야지요.”

선택적 표준어를 구사하는 콜린스에게 상사가 야유를 보냈지만, 대위는 깔끔히 무시하고 아이를 데리고 나섰다. 꼬마 신사는 탑처럼 거대한 콜린스의 덩치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는지 처음처럼 마냥 뒤로 피하진 않는 눈치였다.

어른과 아이는 기지 근처 자그마한 언덕을 올랐다. 콜린스 무릎 높이를 간신히 넘는 꼬마는 뽈뽈거리면서 잘도 뒤를 따라왔다. 푸른 잔디를 보고서 흥분한 나머지 강아지처럼 오도도 뛰어가기 시작한다. 언덕을 달려 내려가던 아이는 결국 볼록 튀어나온 배를 감당하지 못하고 바닥에 무릎방아를 찧었다. 콜린스는 재빨리 아이를 일으킨 다음 무릎을 살폈다. 다행히 심하게 까지진 않았다.

“조심해야제.”

풀어진 신발끈을 단디 묶어주는 콜린스를 아이가 빤히 내려다보았다. 수그려도 만만치 않은 덩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곧 당돌하게 그를 불렀다.

“아저씨.”

‘아, 아저씨……’

갓 스무살도 득실한 군대에서 스물일곱이면 확실히 나이든 축에 속하긴 하지만, 덕분에 갓 들어온 신병들이 대디라고 부르긴 하지만. 어느 새 자기보다 어린 사람을 만나면 Son이라고 부르는 버릇이 입에 붙긴 했지만. 그래도. 그래도 아저씨라니. 콜린스는 처음 들어보는 호칭에 어쩐지 풀이 죽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이는 파란 정복 소매를 쭉쭉 잡아당기며 제 할 말을 풀어놓았다.

“아저씨, 아저씨는 왜 말하는 게 신기해요?”

“말하는 게 신기해?”

“네에……. 막, 탓탓타, 네이 네이~ 이런 소리로 말하잖아요.”

‘탓탓타’, ‘네이 네이~’…… 대충 뭘 말하고 싶은 건지는 알아듣겠다. 분명 스코틀랜드 방언에선 ‘t’를 빠짐없이 발음하고 모든 모음을 ‘ae’로 바꿔버리는 특징이 있긴 하니까. 그러나 지식으로 알고 있는 것과 직접 눈앞에서 발견당하는 건 다른 경험이다.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몰라 콜린스가 입술을 우물거리는 사이, 아이는 계속해서 자기가 발견한 신기한 콜린스의 말소리를 흉내 냈다.

“또오, 또 엄청 빠르고 슈욱, 슈욱 지나가요.”

바람 시늉을 낼 때는 두 팔을 같이 흔드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전신을 사용해서 어떻게든 하고픈 말을 전하려고 하는 아이의 시늉은 퍽 귀여웠다. 그렇기에 콜린스는 살짝 푸쉬쉬 하려던 것도 잊고 아이의 머리를 귀엽게 흐트러트리며 말했다.

“아저씨가 온 동네에서는 다들 그렇게 말해.”

“아저씨 고향이요?”

“응. 언덕도 많고 양도 많고 앞머리가 이렇~게 복슬복슬한 송아지도 많은 곳이야.”

“송아지!”

송아지라는 말에 아이는 벌서 눈을 전등만 하게 뜨고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아이는 손을 꼬물거리며 질문 세례를 시작했다.

“엄마랑 아빠랑 본 송아지는 털이 짧았는데…… 송아지도 앞머리가 있어요?”

“그럼, 있지. 그것도 보통 앞머리가 아니라서 애기 송아지가 어른 송아지가 되면 커튼처럼 눈을 다 덮어버린다. 이렇~게 말야.”

콜린스는 얼마 남지 않은 짤막한 앞머리를 그러모아서 눈 위로 쓸어내리며 시범을 보였다. 그렇게 앞머리가 긴 소는 눈이 털에 가려서 뒤뚱거린다고 설명하면서 두 손을 똥그랗게 만들어 눈앞에 대고 시늉도 내었다. 무서워보이던 군인 아저씨가 송아지 흉내를 내는 것을 보고 아이는 자지러질 듯 웃었다. 미약하게나마 흐르던 긴장과 어색함은 한참 전에 날아가 버렸다.

“직접 송아지 만져본 적도 있어요?”

“있다마다. 여물 주기가 내 심부름이었는걸. 한 번은 송아지가 맛있게 먹는 동안 이렇게 가까이 가서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있었는데, 송아지가 아저씨를 너무 좋아한 거야. 그래서 혀로 아저씨 머리를 쑤욱! 고맙게도 하루 종일 뾰족 머리로 지내야 했지.”

콜린스가 과장스런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소의 침 때문에 머리카락이 뾰족뾰족 뻗친 시늉도 잊지 않았다. 침착, 냉정, 근엄한 포티스 2는 어디로 간 건지…… 회의가 몰려오긴 하지만 그래도 진심으로 재밌어 하는 아이의 모습이 가슴을 훈훈하게 데웠다.

이제 완전히 경계가 풀린 아이는 까르륵 웃으면서 원하는 것을 다 털어놓기 시작했다.

“아저씨, 아저씨 노래 불러주세요.”

“노래?”

아저씨란 호칭은 이미 익숙해졌다. 콜린스는 토 달지 않고 되물었다.

“무슨 노래가 듣고 싶은데?”

“우음…… 설날 노래요!”

설날 노래…… 난해한 신청곡을 받은 콜린스는 열심히 머리를 굴려보았다. 역시 새해(호그머나이)에 부를 노래라면 민요지. 조금 촌스럽긴 하지만 명절 분위기를 살리기엔 더없이 좋은 선곡이니까. 게다가 어린 소년한테 고향의 자랑스러운 전통을 전달해줘야 한다는 기묘한 의무감에 휩싸인 콜린스는 수많은 민요 중에서 적당한 것을 골라냈다.

그러느라 잠깐 멈칫한 사이, 아이가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아저씨, 노래 못해서 그러면 솔직하게 말해도 괜찮아요.”

당연히 콜린스는 즉시 발끈했다.

“뭐? 아가야, 아저씨가 왕년에 전군 노래자랑에서 우승도 했던 사람이라. 어린이 백파이프 대회에서 상도 탔거든?”

곧바로 입을 동그랗게 벌리며 ‘오와’ 하는 아이의 반응은 그의 자존심을 치켜세워주기에 충분했다. 으쓱해진 콜린스는 과장스럽게 큼큼, 목을 풀었다. 쓸쓸한 섣달그믐 날, 고향과 떠나간 이가 사무칠 때 부를 노래는 하나뿐이었다.

“아저씨, 빨리요!”

“아이 아이(Aye Aye)”

By yon bonnie banks by yon bonnie braes

Where the sun shines bright on Loch Lomond

Where me and my true love will ne’er meet again

On the bonnie, bonnie banks o’ Loch Lomond

 

Oh, ye’ll tak the high road and I’ll tak the low road

and I’ll be in Scotland afore ye;

But me and my true love will ne’er meet again

 

The broken heart it kens nae second spring again

Tho’ the waefu’ may cease frae their greetin’

행진곡처럼 씩씩한 듯, 그러나 어딘가 구슬픈 가사의 노래가 마지막 소절을 마쳤을 때 아이는 알았다는 듯이 박수를 짝짝짝 쳤다.

“아이, 알았다! 아저씨네 동네에서는 기침소리를 내는구나!”

“응?”

이해를 못한 콜린스에게 시범을 보여주려는 듯, 아이가 작은 두 손으로 자기 목을 꼭 움켜쥐고 흉내를 냈다.

“로흨! 로흐으으읔! 이렇게요.”

“그런 가래 소리 아니다! 가볍고 우아하게 ‘ㅎ’ 하는 기라.”

콜린스는 살짝 목을 긁듯이 내는 자랑스런 고향의 억양을 들려주었다. 그러나 아이의 주의는 이미 또 다른 발견으로 넘어간 참이었따.

“그리구 또…… 또오…… 네이 네이! 프레이 프레이! 막, 애기들처럼 귀엽게 말해요!”

그것 또한 거칠고 황량한 골짜기에서 태어난 소박하면서도 강인한 억양……이라고 항변하고 싶었지만 아이가 너무 좋아하는 것 같아 보여서 그만뒀다. 어쨌든 노래가 마음에 들었다면 된 거다. 씩씩한 행진곡 풍의 멜로디 안에 사실은 로몬드 호수의 눈이 녹고 봄이 와도 내 사랑은 만나지 못할 거라는 씁쓸한 가사가 흐른다는 것까지 알려줄 필요는 없겠지. 때로는 감추는 편이 나은 경우도 있는 법이다.

콜린스는 아이의 손을 꼭 잡고 다독여주었다.

“아저씨네 고향에 멋지고 재밌는 거 많다. 나중에 부모님이랑 같이 놀러 와. 맛있는 거 해줄게.”

“송아지 고기……”

“그래, 송아지 고기 해줄게.”

“호수도 가고 싶어요.”

“그래, 호수도 가자. 가서 내는 낮은 길 걷고, 꼬마는 높은 길 걷고. 걷고 걷다 보면 봄도 와있을 끼라.”

로몬드 호수에 봄이 오면 그때는 당신도 돌아올까.


(계속)


+) 전쟁이 임박하면서 상당수의 젊은이들이 육군으로 징병되는 대신 공군으로 자원입대했다는 부분은 자료 조사에 기반해 있다. 1차 대전 때의 참혹한 참호전을 기억했던 젊은이들은 육군으로 끌려가느니 봉급이 높고 명예로운 직업으로 선전된 공군에 이끌렸다고 한다.

++) 18~19세기에 작곡된 스코틀랜드 민요 Loch Lomond는 유투브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진취적인 다른 민요에 비해서 서정적인 가사가 특징적이다. bonnie(예쁜), yon(beyond), kens(know), nae(not), frae(from), loch(lake), glen(평야) 등 스코틀랜드 방언이 다수 사용되었다. 

+++) 구상한 데까지 잘 마무리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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