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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프 오르간: 악기의 여제

그리고 던커크에 바치는 송가



파이프 오르간에 대한 열망은 기억나지 않는 어느 순간부터 내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아마 머리가 웬만큼 컸을 때쯤에는 이미 건반 하나 누를 줄 모르면서도 오르간 연주 영상을 열심히 찾아보았던 것 같다. 5,000여 개의 금관이 뿜어내는 장대한 진동, 금빛으로 빛나는 파이프들의 향연, 불 꺼진 무대 가운데서 오직 연주대(콘솔)와 연주자만을 비추는 은은한 조명. 무대 2층, 홀로 우뚝 선 왕좌 같은 그 연주석에서 오르가니스트는 광대한 콘서트홀을 가득 채운다. 청각적 경이와 시각적 경이를 하나로 합친 것. 내게 파이프 오르간은 그런 기억이었다.  

서구 중세인들은 파이프 오르간을 일컬어 '천상의 악기', '인간의 목소리 다음으로 완벽한 악기'라 하였고, 이 악기의 방대한 기량에 대한 찬양은 20세기까지 이어져서 미국의 작곡가 올브라이트는 아예 <악기의 제왕 The King of Instruments>이라 이름 붙인 헌사를 작곡하기에 이르렀다. 올브라이트의 유명세 때문일까? 파이프 오르간에 따라 붙는 일반적인 별명은 여전히 '악기의 제왕'이다. 그러나 나는 제왕 대신 '악기의 여제'라고 부르고 싶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악기의 때로는 고고하고 때로는 평온하며 결정적인 순간에는 공간을 압도하는 특성을 비유하기에 '여제'라는 단어가 더 알맞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왕보다는 여제 쪽이 훨씬 어감이 멋지다.)

최소 천 개 이상의 금관과 목관, 그에 더해 건반 양쪽에 63개의 스톱(파이프 오르간에서 각 관의 음색을 변화시키는 기계 장치)을 갖춘 파이프 오르간은 그 자체로 1인 오케스트라다. 63개의 스톱은 각각 63명의 오케트라 단원과 치환되고, 네 개의 건반과 페달 건반을 이용해서 오천 개의 관을 조율하는 오르가니스트는 그녀 자체로 교향곡을 이끄는 지휘자가 된다. 

그녀의 손가락이 네 개의 건반 위를 흐르는 순간 공간에 소리가 진동하고, 스톱을 옮길 때마다 소프라노-알토-테너-베이스가 교대로 바뀌어 등장하며, 셈여림 페달을 개방하고 화음을 쌓아 올릴 때는 하늘이 지상으로 내려온다. 63인의 오케스트라와 5000개의 관악기를  동일한 볼륨 밸런스로 이끌고 나가는 오르가니스트의 장엄한 화려함. 이것이 오르간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파이프 오르간을 위한 곡이라고 하면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몇 곡이 있다. 클래식 중에서는 바흐의 <토가타와 푸가 G단조>가 있고,  현대 영화음악 중에서는 한스 치머의 인터스텔라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이 그렇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엘가의 <니므롯Nimrod>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엘가가 길고 긴 우울증에서 헤어나온 뒤에 작곡한 <니므롯>은 그 어원처럼 신화 속의 강건한 사냥꾼을 닮아 있다. 장엄하지만 시끄럽지 않고 느리지만 지루하지 않다. 심장은 고동치되 슬프지 않다. 영국에서는 장례식에 주로 사용되는 레퍼토리이기도 한데, 인류 최초의 사냥꾼을 노래한 음악을 장례식 연주에 사용한다는 건 상당히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러나 한스 치머가 <덩케르크>의 마지막 장면에 삽입할 곡을 고르면서, 바로 이 <니므롯>에 대한 오마주를 선택했다는 점은 분명 의미심장하다. 덩케르크의 <니므롯>은 칠십 여 년 전 그때 던커크 해변에서 희생된 이들의 넋을 위로하는 애가(elegy)인 동시에 살아남은 자들의 귀환을 환영하는 송가(ode)다. 그리고 고요한 바람 소리로 시작해서 서정적인 관악으로 끝나는 오르간 편곡이야말로 그 해변을 기리기에 가장 아름다운 연주라고 느낀다. 



1. 엘가 <Nimrod> 오르간 편곡 연주.




2. 엘가 <Nimrod> 오케스트라 원곡. (당연히 원곡도 아름답다.)




3. 영화 <덩케르크>에 오마주로 삽입된 버전. 사운드트랙 Variation 15. (주선율이 엘가의 원곡과 조까지 동일함을 들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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